하나님의 내적세계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나님은 아주 흥미로우신 분이시다. 어느 날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그분께 물었다. 하나님은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고 대답하셨다. 우리 중 아무도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먼저 나는 아기였다. 그리고 소년에서 몇 년 후 젊은이가 되었다. 젊은 청년이 된 후 장가를 간 젊은 성년이 되고 중년이 된 다음 몇 년이 지나면 노인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고대인이 된다. 모든 젊은이들은 사랑스럽고, 잘 생겼지만 어느 날 그들 역시 나처럼 늙어 보일 것이다. 우리는 “나는 ~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우리는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영원히 똑같으시다. 그분만이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나는 학생이다, 나는 사장이다, 나는 교수이다, 나는 대통령이다, 나는 회장.......”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어느 날 우리는 “나는 ~이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내 삶을 위해 큰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계획들은 빈번히 변하고, 어느 날 그것들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역시 계획과 목적이 있으시지만 그분의 목적은 절대 변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절대 포기하실 수 없는 이유이다. 그분께서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심을 찬양하라.
하나님의 목적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자존(自存)하시고, 영존(永存)하시고, 풍성하시기 때문에 더 추가하실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내적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 과거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은 확대하시고, 연결하시기를 갈망하신다. 수학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큰 숫자라고 하더라도 그 숫자는 그 숫자에 추가할 수 있고, 더 큰 숫자가 되게 할 수 있다. 무한대조차도 확대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숫자들과 같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께서 부르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님께서 절대 그들 안에서 움직이시고, 말씀하고, 그들을 회복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시작조차도 못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단순히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셨다고 보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의 모든 체험은 우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영원을 위한 것이다. 모든 것은 영원과거에서부터 그분 안에 숨겨지고, 변치 않는 비밀스런 그분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사탄과 제도적 확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가장 먼저 밀쳐낸 자는 사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확대를 원하신다고 보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오해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확장하시기 원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선한 목사와 같았고, 그의 무리들의 확장을 쫓고 있었다. 아마 사탄은 “하나님께서 확장을 원하시면 나는 그것을 해야 한다. 나는 최고의 천사장이다. 그건 내게 달려있어. 난 거물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제도적 확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사람을 따르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은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더 높이)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천사)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사 14:13-14)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제도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려고 했다. 결국 그는 “너는 끌려가 지옥(스올)으로 곧 그 구덩이의 옆면들로 내려가게 되었다.”(사 14:15)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함께하는 유기체다.
성도들과 유기적 확장
얼마나 쉽게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신 것을 그렇게 오해를 하는지! 우리는 빠르게 “회중의 산”에 앉으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랑하고, 뽐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도바울은 “또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을 따라 걸었느니라.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 안에서 생활하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엡 2:1-3)라고 기록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사탄의 왕국에 있었다.
바울은 계속해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 속에 담긴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시대들 속에서 보여 주려 하심이라.”(엡 2:4-7)고 말한다.
이 구절은 이사야 14장에 있는 그 자들과 비교해야 한다. 사탄은 “내가 오를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내가 내려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탄은 그가 가장 높은 곳에 앉을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내가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 세상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탄이 “내가 구름들의 가장 높은 곳 위로 오를 것이다. 나는 가장 높은 자 같이 내 자신을 높이리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그분께서 사람들을 가장 아래로 내려가게 하는 대신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고, 그분과 함께 그들을 부활케 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곳에 그분과 함께 앉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이 갖고자 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갈망을 따르는 것 같았지만 사탄은 위치적인 것을 갖고자 한 반면 하나님은 유기적인 것을 갈망하셨다. 사탄이 행정적으로 자신을 높이기를 원한 반면 하나님은 유기적으로 사람을 높이시려고 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다름을 안다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위치적인 것들은 아주 심각해 질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곳에 그분과 함께 앉을 수 있도록 유기적인 과정을 통해 우리를 얻기를 갈망하신다.
유기적인 것과 행정적인 것
행정적인 것은 일하는 것이 아니다. 유기작인 것만 일을 한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부모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 말은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유기적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기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교회 모임에 가고, 조용히 뒷줄에 앉는 것만으로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지체들을 고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방문하고, 성숙한 유익을 위해 함께 그리스도를 추구함으로 우리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첫 번째는 행정적이요, 그 다음은 유기적이다.
루시퍼가 사탄이 된 것은 그가 너무 많이 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추구하셨던 것을 밀쳐내고 얕잡아 봤지만 그는 그것을 위해 잘못 기도했다. “그는 주님께서 그것을 내게 주었다. 나는 그것을 할 거야!”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그에게 그것을 주지 않으셨고, 사탄이 바랐던 것처럼 별들 위에 있게 하지 않으시고 하늘 아래로 그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형상, 모양, 그리고 목적
대신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시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양을 따라 그분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창 1:26). 형상은 내적으로 하나님과 같게 되었다. 모양은 외적으로 그분과 같게 되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같다는 것을 알기 원하는가? 여러분 서로를 바라보라. 내적으로 우리는 영을 가지고 있다. 외적으로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과 일치한다. 더욱이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창 1:26)
네가 어디 있느냐?
하지만 사람은 타락했다. 이 때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물으셨다. 그분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이것을 묻고 계신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그분은 거친 방법, 부드러운 방법, 아니면 필사적인 방법으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물으실 수 있으시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를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많다. 나는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나도 모른다. 내가 엉망이었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크게 부르시는 것을 듣는다. 내가 그분을 필사적으로 찾을 때 그분은 아주 부드러움으로 부르신다. 가끔 하나님은 충고하심으로 부르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더 높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시려고 부르신다.
내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영화 보러 가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인가 나는 영화 보러 다니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것이 아님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나를 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교회생활 가운데 선하고 멋지게 보이길 원했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 정말 형편없고, 엉망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님, 저를 구원하소서. 이런 것을 끊고, 멈추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20절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하지만 나는 그 후에도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이후 어느 날 나는 버스를 타고서 영화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뜩 “내가 어딜 가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 “주님, 제가 이런 일을 얼마나 오래 지속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얕은 즐거움을 위해 살다니 너무나 슬픕니다. 그런데 내 자신을 멈출 수 없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고 있어요. 영화를 끊을 수가 없어요. 주님, 저를 구원하소서. 구원하소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난 버스에서 내리게 되었다. 그 때 “네가 어디 있니? 뭐하고 있어?”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나서 반대 방향의 버스를 다시 타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후 영화를 보려고 하는 나의 불안함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났다. 나는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니?”라는 말씀 때문에 구원받았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분의 말씀하심을 통해 유기적으로 온다. 우리가 잘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조용하게 “너 어디 있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엉망일 때 하나님은 강하게 “너 어디 있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세상에서 쭈뼛거리고 돌아다닐 때 하나님은 시시콜콜하게 “너 있는 곳이 어디야?”라고 물을 것이다. 하나님은 “제가 주님을 섬기고 있어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어요. 전 당신 안에 있습니다. 나의 삶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대합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오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내적 느낌
하나님께서 이 질문을 처음 하신 사람은 동산에 있던 아담이었다. 아담은 그의 죄 가운데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기묘한 것을 행하셨다. “{주} [하나님]께서 또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니라.”(창 3:21) 마치 양의 가죽과 같은 옷은 주님의 죽으심을 예표했다. 가죽은 우리를 의로 덮으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하나님의 내적 세계는 느낌으로 풍성하시다. 하나님은 기쁨, 슬픔, 동정, 관용의 느낌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시는 것처럼 모든 느낌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옷을 지어 주시기 위해 양을 죽게 하신 것처럼 풍성한 느낌이 있으셨다.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분은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의 피를 흘리시러 오셨다. 가죽이 그들을 덮었던 것처럼 그분은 그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것을 아셨다. 그분은 그분의 죽으심이 그분의 생명을 해방하실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생명은 아담의 노선과 유기적으로 연합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때에 그분께서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많은 느낌을 가지고 계셨다. 사람은 그분의 목적이요, 목표요, 만족이다. 사람은 그분께서 하나님 되시려는 이유였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그분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이르시되,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나이다.”(히 10:5)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몸은 그분 자신이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으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유기적인 분이 되셨다. 그분은 그분께서 부활생명 안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하늘에 속한 곳에 그분과 함께 앉도록 일으키실 수 있으셨다는 것이 큰 기쁨이 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 세계를 생각하기 시작하도록 우리의 삶을 안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 안에는 우리와 우리의 유기적 구원을 위한 여러 느낌이 있으시다. 그분은 그분의 목적이 충만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주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제게 오셔서 ‘너 어디에 있니?’라고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항상 저를 당신께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저의 구속으로 당신 자신을 준비하셨습니다. 제가 주의 사람들과 함께 있도록 유기적으로 구원하셨고, 당신의 임재 안으로 이끄셨습니다. 주님의 부활 안에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곳에서 당신과 함께 앉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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