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 안에서 은혜를 누림

Hernhut 2016. 6. 8. 16:45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서 1:7

 

 

너희가 너희 마음에 나를 가졌다.

 

빌립보서 1:7절에 관해 케네스 위스트“‘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여, 혹은 내가 나의 마음에 너희를 가졌기 때문에라는 표현은 너희가 너희 마음에 나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헬라어 성경의 문맥상 더 자연스럽고, 문법적으로도 맞다.

당신의 마음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에 주의 종인 자신을 가졌다는 것에 격려를 받았고,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다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것은 또 다른 곳에 있었던 빌립보 성도들과 사도가 한 곳에 있었다는 것이 다르지 않게 되었다.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에 바울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이 누렸던 같은 은혜를 그들도 누렸다. 마음에 바울을 가졌던 빌립보 성도들은 그리스도부터 바울에게 온 모든 은혜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었다.

이 구절이 설명하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심리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혼자서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가졌고, 교회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우리 자신에게 효율적일 수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우리의 성장과 발전이 우리 마음에 가지고 있는 누구를 의지하는 것을 깨닫는 것을 실패한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아주 많은 교리들을 알지만 왜 주님에 대한 아주 적은 표현을 가지고 있는지에 궁금해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절에서 우리가 셀 수 없는 교사들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아버지들은 없다고 썼다. 교사들은 잠시 동안 우리를 훈련시킨다. 하지만 그들의 일이 끝났을 때 그들은 우리 마음에 없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우리의 성장을 돌보고, 우리가 충분히 자랄 때까지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필요를 위해 우리와 함께 수고한다. 이것은 달콤한 생명관계를 산출한다. 아버지는 우리 마음에 있다. 그들은 우리가 건강한 방식으로 자라게 할 보장(保障)이다.

왜 은혜가 부족한가? 그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의 문제다. 사도바울이 설명한 것은 생명연합니다. 사도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은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고, 그들 마음 안에 서로가 있었다.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과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기에 그들에게는 큰 축복이 되었다.

 

 

나와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

 

빌립보교회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자신들과 수고하고, 물을 주고, 가르치고, 생명을 공급했던 바울을 기억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체험한 은혜에 참여하고, 그들의 마음에 사도바울을 가졌기 때문에 건강했다.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바울은 은혜를 체험했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그는 복음의 목적을 위해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러 자신에게 왔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와 함께 일어섰을 때 사람들은 그를 공격하고 손해를 끼쳤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바울은 은혜를 체험했다. 바울이 복음을 변호하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보좌로부터 오는 많은 은혜를 받았다.

주님은 그의 풍성한 누림, 만족, 그리고 축복의 원천이 되셨다. 진정한 은혜는 값을 지불하는 것에서만 온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정말 많은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그들이 영적으로 자란다면 그것은 분명 은혜다. 소망이 없을 때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것 또한 은혜다. 바울은 이 은혜의 종류를 알았다.

좋은 때와 나쁜 때, 격려와 오해, 인정과 중상모략 모두 그에게 은혜를 가져왔다. 그가 전한 생명과 그가 흘린 눈물 또한 은혜를 가져왔다. 묶임 안에서도, 복음에 대한 확신과 변호 안에서도 그는 은혜 안에 있었다.

겉보기에는 이 은혜가 빌립보 성도들과 멀리 떨어져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독특하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에 대한 놀라운 그림이다.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사이에 어떤 매뉴얼이 있었다. 바울이 체험한 것은 빌립보 성도들도 체험하게 되었다. 바울이 받은 은혜는 빌립보 성도들의 은혜가 되었다. 그가 받은 축복 역시도 빌립보 성도들의 축복이 되었다. 이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사도바울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실행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많은 먼저 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사역한다. 그들이 우리 마음에 있는가? 교회 지도자들이 우리 마음에 있는가? 우리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이 우리 마음에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은혜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된다. 우리를 섬기는 성도들이 우리 마음에 있을 때 그들의 은혜는 우리의 은혜가 된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우리의 누림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은혜에 참여한다.

과거를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우리를 섬기는 성도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기억했는가? 우리 마음에 우리 자신으로 채워지고, 우리의 기도가 우리 자신의 필요에만 제한했다면 우리는 은혜의 누림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섬기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채운다면 우리는 그들이 누리는 은혜로 공급받게 될 것이다.

 

 

복음에 대한 변호

 

바울은 복음을 변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알았고, 믿었기 때문에 복음을 변호할 수 있었다. 그는 복음으로 구성되고, 장비되었다. 그는 그의 삶에 의미가 되고, 그가 가졌던 것, 그에게 직면하고 있었던 일들을 변호했다. 바울은 복음을 가진 성도였기 때문에 복음을 변호할 수 있었다. 변호, 방어라는 헬라어는 아폴로기아apologia. 그 의미를 추가하자면 변증, 말씀으로부터를 의미한다. 복음을 변호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으로 이뤄져 있고, 장비되었음을 요구한다. 복음을 변호하는 것은 우리의 의견, 개인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할 수 없다.

우리는 복음을 방어하고 변호하도록 적절하게 장비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강하게 변호하려고 반응할 것이다. 이 반응은 감정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둔 것이다. 누군가 주님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반응하는 방법을 알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말씀으로 장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의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복음을 위해 살 것이다.

 

 

복음에 대한 확신

 

바울은 복음을 방어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확신했다. 복음은 바울의 신앙뿐만 아니라 그의 삶, 발걸음이었다. 그의 삶은 복음과 일치했고, 복음을 확신했고, 확립했다.

복음을 확신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발걸음과 관련이 있다. 많은 시간 우리는 논쟁과 주장으로 복음을 확신하려고 하지만 참된 확신은 우리의 삶이다.

바울은 이 확신이 있었다. 주님은 그와 함께 계셨다. 그는 복음만을 전파하지 않았다. 그의 삶이 복음이었다. 왜냐면 그의 삶은 그가 말한 것과 일치했고, 그의 복음 전파는 효과적이었다. 그의 복음에 대한 방어는 그의 삶의 의미와 관련이 있었다. 그의 복음에 대한 확신은 그가 삶을 살았던 방식과 관련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바울 안에서 본 것으로 영향을 받았다.

 

 

은혜를 누리는 비밀

 

바울은 감옥에서까지도 복음을 변호하고, 확신하고, 은혜를 누렸다.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에 바울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의 은혜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었다.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간에는 이런 달콤한 교제가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돌보는 그리스도인들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가? 그들의 은혜가 우리의 은혜가 되는가? 아마 마음에 직업이 있고, 물질적인 부()가 있고,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움직임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우리를 돌보는 성도를 가지고 있다면 날마다 그들의 은혜의 누림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것이 아름답고, 영적인 생활이다.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 안에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누린 은혜는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우리 마음은 직업과 성공,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는 것으로 채워졌을지 모르지만 빌립보 성도들은 그들의 마음에 바울을 채웠다. 바울을 채우는 그들의 마음 때문에 빌립보 성도들은 사도를 돌보는 데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마음이라는 단어가 단수로 되어 있는 이유다. 바울과 그의 모든 수고가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을 소유했다. 이것이 은혜를 누리는 놀라운 비밀이다.

우리를 섬기는 성도들이 우리 마음에 있다면 그들의 은혜는 우리에게 속해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공급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 안에 있는 은혜를 누리는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