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선과 두 영역
성경은 가인과 아벨이 아담과 이브의 유일한 후손이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아담이 셋을 낳은 뒤의 생애는 팔백 년이었으며 그가 아들딸들을 낳았더라.”(창 5:4)
그 후에 아담은 아들들과 딸들을 더 낳았다고 말한다. 가인과 아벨은 생명의 두 방식을 대표하기 때문에 다른 후손 중에 두드러진다. 생명의 한 방식은 “얻음”으로 시작하고, 다른 한 방식은 “헛됨”으로 시작한다. 이 땅의 두 노선은 가인과 아벨로부터 발전했다. 또 두 다른 영역도 이들로부터 산출되었다. 가인의 노선에서 나온 첫 번째 영역은 사탄에게 속한 왕국이다. 아벨의 노선에게서 나온 두 번째 영역은 우리가 신성하고, 신비한 영역으로 부른다. 이 두 영역은 항상 서로에게 대항하여 싸우고, 다툰다.
가인과 아벨은 자기 부모에게서 사람 타락에 대한 이야기를 배웠지만 그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부모의 말에 가인은 땅을 의지해서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들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부모 즉 아담과 이브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 의복인 것처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비전을 보았다. 가인은 자기가 들은 것을 따라 산 반면 아벨은 자기가 본 것을 따라 살았다.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는 우리는 많은 것을 들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우리 영 안에서 볼 때까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은 아직 우리의 비전이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은 아직 우리의 계시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단순히 우리가 들은 것으로만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하고, 우리 영 안에서 보는 것으로 영향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 영 안에서 보는 것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생명의 노선 안에서 사는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떠났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은 그에게 오셔서 물으셨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가인이 대답했다.
“전 모르겠습니다. 제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창 4:9)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모든 것을 하려고 했던 가인은 잔인하고 사악해졌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동생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부르짖느니라. 땅이 자기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동생의 피를 받았은즉 이제 네가 땅에게 저주를 받았나니”(창 4:10-11)
땅까지도 아벨을 위로했다. 하나님은 강하게 땅을 저주하시고, 가인이 그분의 임재에서 떠나 분리하심으로 심판하셨다.
“네가 땅을 갈아도 이후로는 땅이 자기 효력을 네게 내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땅에서 도망하는 자가 되고 방랑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
가인은 하나님께 반응했다.
“내 형벌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니이다. 보소서, 주께서 이 날 지면으로부터 나를 쫓아내셨사온즉 내가 주의 얼굴을 떠나 숨으리이다. 내가 땅에서 도망하는 자가 되고 방랑하는 자가 되리니 나를 찾는 모든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3-14)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은 하나님을 여전히 볼 수 있었지만, 가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가인은 도망자와 방랑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가인이 자기 삶을 두려워했던 이유였다. 가인은 모든 인간이 복잡했던 것처럼 전형적인 인간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아주 많은 동정을 가지고 계셨던 이유다. 예를 들어 우리 마음 한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우리 마음 또 다른 한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없다. 가인은 이런 방식이었다. 가인의 일부는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그의 일부는 살인자가 되었다. 가인의 태어남부터 그의 아버지에게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듣기까지 가인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의 이해도에 따라 모든 것을 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방랑자와 도망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반응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볼까요? 제게 당신이 없다면 저는 생존할 수 없어요. 당신 없이, 당신 임재 없이 당신 보호 없이 전 죽임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기도가 아닐까? 이것은 인간 존재가 아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가인은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잃었기 때문에 자기를 만나는 누구든지 자기를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은 들었고, 가인의 기도를 응답했다. 하나님은 그의 보호하는 표를 그에게 주셨다.
“이런 까닭에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배로 보복을 받으리라, 하시고 주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아무도 그를 찾아 죽이지 못하게 하시니라.”(창 4:15).
그런 후 가인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떠났다.
놋 땅에서 이어지는 가인의 방랑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고 그가 떠나간 후 가인은 방랑의 생활을 시작했다.
“가인이 주 앞을 떠나 나가서 에덴의 동쪽에 있는 놋 땅에 거하더라.”(창 4:16).
“놋”이라는 이름은 “방랑하다, 유랑하다, 떠돈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떠난 후 가인은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그는 방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서 벗어날 때마다 우리는 방랑하는 존재가 된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 살 때 우리는 방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갖지 못하고, “내가 내 학위로, 권력으로, 명예로, 능력으로, 재능으로, 은사로, 목사로 일하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너는 방랑하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나는 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돈을 벌고, 보험을 든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너 역시도 떠돌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난 바쁘다. 난 막 결혼을 했어.”라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유랑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유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인의 노선이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떠났고, 방랑하는 땅 곧 놋의 땅에서 끝났다.
지식의 노선으로 배우는 것이 빠르고 생산적이다.
가인의 노선은 그의 후손으로 계속되었다. 가인은 에녹을 낳았다. 에녹의 이름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노선으로 영적인 것을 배우는 것은 몹시 어렵다. 지식의 노선으로 비영적인 것을 배우기가 훨씬 더 쉽다. 가인의 이름은 “나는 얻었다.”는의 의미를 내포하고, 에녹의 이름은 “나는 배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지식의 노선에 있는 어떤 것은 아주 빨리 얻고,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노선에 있는 어떤 것은 배우기 위해서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에 속한 것을 배우는 것은 빠르지만 영적인 것을 배우는 것은 오랜 시간을 통해 이뤄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얼마나 성경을 잘 알고 있는가? 얼마나 복음을 잘 전하고 성도들을 목양하는가? 우리가 얼마나 교회 건축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가인의 노선에서 배우고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많은 학위를 가진 이들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것을 배우고 있을 때 40년 후까지도 학위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것이 아주 빨리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우리가 즉시 어떤 것에 관해 투명성을 가질 때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급하게 결정할 때마다 가인의 노선에 있다. 지식의 노선으로 배우는 것은 빠르게 배운다.
지식의 노선으로 배우는 것은 아주 생산적이다. 가인은 도시를 건축했고, 그 이름을 자기 아들 에녹의 이름을 붙였다(창 4:17). 이것은 도시가 에녹에게서 나왔고, 지식의 노선에서 배웠음을 의미한다. 도시는 실제로 하나님의 갈망이다. 도시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을 가지시려는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첫 번째 도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건축하지 않았다. 첫 번째 도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임재에서 내쫓으신 사람, 가인에 의해 건축되었다. 가인의 노선은 아주 생산적이고, 가인의 노선에 있는 모든 것은 빠르게 움직였다.
에녹이 아들을 낳았다. 에녹의 아들은 이랏이다. 이랏이라는 이름은 “빠른, 급속히”라는 의미다. 가인은 “얻다”요, 에녹의 이름은 “배웠다”요, 이랏의 이름은 “빠른”을 의미한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 지식의 노선으로 얻고, 배운 모든 것은 빠르다.
므후야엘 : “하나님이 싸우고 계시다.”
가인의 노선에 있는 다음 사람은 이랏의 아들 므후야엘이다. 므후야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싸우고 계시다.”를 의미한다. 므후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노선에 있는 사람들과 다투고 계셨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너무 빠르지 않게 나아가기를 상기시키기를 원하셨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 안으로 가셨고, 그들과 다투셨다. 하나님은 가인의 노선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너희가 이것을 계속해서 하려고 한다면 너희는 상처를 받게 될 거야. 너희 스스로가 망가져. 너무 빨리 나아가지 말라. 천천히 나아가라.”
가인의 노선에까지 하나님께서 가셔서 싸우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다. 오랜 시간 우리는 종교적인 것에 붙잡혔을 수 있다. 우리는 극히 열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열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좋은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가인의 원칙, 가인의 노선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너무 빠르게 나아가고, 너무 빨리 배우고, 우리가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어떤 일을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잘못된 노선에 있는 것이다.
생명의 노선에 머무는 것은 쉽지 않고, 빠르게 나아가지도 못한다. 우리가 너무 빨리 나아갈 때 하나님은 싸우러 오신다. 하나님의 싸움은 우리가 지식의 노선에 남아있지 않고, 생명의 노선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므두사엘: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과 싸움하는 중에 가인의 노선에서 또 다른 아들이 태어났다. 므후야엘은 므두사엘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므두사엘의 의미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어떤 까닭인지 하나님과 싸움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람은 태어났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 가인의 노선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태어날 수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싸움은 잘못된 노선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산출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인의 후손이 절대 사탄의 영역에 속해 있는 지식의 노선에서 떠나지 못했음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대적 사탄은 하나님의 사람 므두사엘까지도 여전히 이 노선의 통치자가 되었다. 우리는 살인을 떠벌리는 라멕을 므두사엘이 낳았으므로 사탄의 영역에 통치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을 산출하는 하나님과 싸움 중에도 가인의 노선은 여전히 사탄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라멕 : “힘 있는, 전복시킴”
우리가 가인의 노선을 잇는다면 우리는 결국 라멕에게 이르게 된다. 라멕은 “힘 있는, 전복시킴”을 의미한다. 가인의 노선에 관한 결과를 대표한다. 그는 사악하고 거친 사람이었다. 라멕은 사람을 살해하고서 자기 아내들에게 자랑하고 떠벌렸다.
“아다와 실라여, 내 음성을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너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내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죽였고 나를 다치게 한 청년을 죽였느니라. 가인을 위해 일곱 배로 복수할진대 참으로 라멕을 위해서는 일흔일곱 배로 복수하리라”(창 4:23-24).
이는 가인에게 속한 결과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갈망하는 누군가에게 어떤 누구에게 이렇게 최악의 부분까지 타락할 수 있었다니 충격적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강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
가인과 아벨은 같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는 지식의 노선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노선에 있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그의 후손은 훨씬 악화하였다. 라멕은 살인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랑삼아 뽐내고 떠벌이는 자가 되었다. 그는 살인을 뽐냈다. 이것은 지식의 노선에 있는 사악함의 궁극적인 징후다.
지식의 노선에서 사악함이 되는 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는 가인의 근본적 갈망은 선한 것이었다. 우리는 선과 악이 필연적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식의 노선에서 나오는 어떤 선은 사악한 것이 되어 끝날 수 있다. 옳은 것으로 시작하는 많은 것이 아주 옳지 못한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교회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사람들 대부분은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하지만 생명은 없다. 그들은 박해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고, 생명의 노선에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죽일 수도 있다. 종교적인 사람들의 근본적 갈망은 선한 것이 될 수 있지만, 결과는 아주 사악해질 수 있다. 지식 노선에 있는 선한 것은 쉽게 사악함에 넘어갈 수 있다. 이것이 가인과 그의 후손에게 일어난 것이다. 결국, 라멕은 지식의 노선에서 나오는 사악함의 최종적 드러남이었다.
가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를 원했지만 결국 그는 살인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임재에서 분리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보호하셨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인을 죽이는 누구든지 7배의 복수를 당하리라.”
그런 후 가인의 후손 라멕 역시 살인자가 되었다. 그런데 라멕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반응은 회개가 없었다. 그는 주님께 긍휼을 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라멕은 부르짖었다.
“가인을 죽이는 누구든지 7번의 복수를 당하겠지만 나를 죽이는 누구든지 77번의 복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시작한 가인의 노선은 어떤 누군가가 아주 사악한 이를 산출했다. 가인의 노선은 어떠한 일을 합당함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살인을 뽐내는 라멕으로 끝났다. 지식의 노선에서 어떤 선한 것은 쉽게 사악해질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주님, 긍휼을 제게 베푸소서. 무엇이 선하든, 무엇이 악하든 저의 지식으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제 논리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합리적인 것이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든 그렇게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당신 외에 어떤 선한 것이 사악해질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생명의 노선에서 저를 지켜주소서.”
인간 문화와 사회를 산출하는 라멕의 아들들
창세기 4장에 있는 가인의 노선은 라멕과 그의 세 아들로 끝난다. 인간의 문명 전체가 라멕의 후손에게서 발달했다. 라멕의 첫 번째 아들은 야발이었는데 그 의미는 “움직이는, 이동하는”이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가축을 소유하는 조상이 되었다(창 4:20). 야발의 삶은 생활의 방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라멕의 둘째 아들은 유발이었는데 그 의미는 “노는, 흥미를 채우는, 즐기는”이다. 야발은 하프와 오르간을 연주하는 이들이 조상이 되었다(창 4:21). 그는 음악가였고, 그의 삶은 유흥을 즐기는 이였다. 라멕의 셋째 아들은 두발가인으로 그의 이름은 동세공인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발가인은 놋과 쇠로 된 것을 만드는 모든 장인(匠人)을 가르치는 이가 되었다(창 4:22). 그는 자시 방어를 위해 무기를 만들었다. 이들이 라멕의 세 아들이다.
가인의 노선은 라멕에까지 이르렀고, 라멕에게서 인류의 문명이 나왔다. 라멕의 아들들로 우리는 인종을 장악하는 세 가지를 본다. 유발은 세상살이를 상징하고, 유발은 우리의 삶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을 상징하고, 두발가인은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세상에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가인 노선의 결과는 인간 세상의 분리하는 세 노선이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 세 노선 중 하나에 속해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공부하고, 얻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결국 라멕의 세 아들들 중 하나에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생활의 편리를 만들고, 오락을 만들고, 자기방어를 하도록 무기를 만드는 것은 인간을 통제하는 요소이다.
다양하지만 모든 인간의 문화와 사회는 라멕의 아들들에게서 왔다. 이것은 라멕이 살인자였기 때문에 중요하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을 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인류사는 죽이는 역사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다. 대학, 직장, 가정, 심지어 교회 안에도 경쟁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생각한다.
“내가 살기 위해 넌 죽어야 한다.”
그들은 앞서고, 성공을 자랑하기 위해 서로를 죽인다. 이것은 인류 문화가 가인 노선의 생산품이기 때문이다.
가인의 노선을 통해 인간 사회를 통제하는 사탄
우리는 인간 문화와 사회가 사탄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생활의 편리를 만들건, 즐김과 오락을 추구하든, 자기를 방어하고, 남을 공격하든 이 셋 중의 하나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사탄은 우리를 이 셋 중 하나에 몰아넣는다. 우리는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이들은 알고 있다.
“"내가 편리를 추구하고, 오락이 필요하고, 나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어”
모든 이들은 궁지에 몰렸다. 인간 문화를 가진 온 세상은 사탄의 손아래에 놓여 있다. 사탄이 모든 것을 통제하기 때문에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가인의 노선과 라멕의 세 아들을 통해 사악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모두를 통제하고 있다.
라멕의 후손, 세 아들의 노선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가 사탄의 지배에서 떠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 인간 존재로 사는 한 우리는 사탄의 통제 속에 있다. 사탄은 우리가 살아가고, 오락의 즐김, 남을 공경하고 자기를 방어하도록 몸부림치게 해 인종을 통제한다. 이것이 가인 노선의 현상이다.
하나님은 지식의 노선도 쓰신다.
지식의 노선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인간 문명의 긍정적인 방면에서만 사람이 어떤 것을 발명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실 수 있으시다. 간혹 하나님은 가인의 노선에 의해 산출된 것일지라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노선이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규모 지식을 사용하시기도 하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인류의 발명을 사용하신다. 사탄의 통제를 받는 사람은 많은 것을 발명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의사소통의 새로운 방식, 새로운 기술 등을 발명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위해 이런 발명품들을 사용하실 수 있으시다. 생명의 노선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더 나아가도록 지식의 오선에서 나오는 발명품들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원칙은 더 큰 규모다.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도시는 에녹이다. 에녹은 가인에 의해 건축되었다. 하지만 성경의 마지막 도시는 새 예루살렘이다. 첫 번째 도시는 타락한 사람이 건축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 도시 정말 좋다. 그런데 이제 내가 진짜 도시를 너에게 보여주마.”
심지어 오늘날 하나님은 사람이 건축하고, 사탄이 통제하는 아주 많은 도시에서 전파되고 있다. 사탄의 도시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다. 결국, 이 교회들은 한 도시 즉 새 예루살렘은 건축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해야 한다. 사탄은 항상 사람을 궁지에 몰지만, 하나님은 늘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사탄은 가인의 노선을 통해 인간 사회를 통제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생명의 노선, 또 다른 인류의 노선을 가지고 계신다. 이 생명의 노선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지식 노선에 의해 산출된 항목을 사용할 수 있다.
생명의 노선으로 돌아감
사탄이 인종을 통제하고, 그의 왕국이 아주 우세해 보일지라도 같은 시간에 하나님은 생명의 노선에 숨겨두신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신다. 지식의 노선을 통해 사탄이 하는 모든 것은 분명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생명의 노선을 통해서 하시는 것은 겉으로 볼 수 없다. 생명 노선에 있는 모든 것은 숨겨져 있어 하나님의 눈에 귀한 것이다. 창세기 4장 끝에 가인의 후손에 대해 기록된 후 성경은 생명의 노선을 기록한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를 알매 그녀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하나님께서 내게 다른 씨를 정해 주셨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셋에게도 아들이 태어나매 그가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창 4:25-26).
창세기 4장 다음 장은 생명의 노선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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