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가 되는 것에 대한 위험성
창세기 생명 노선에 있는 이름들은 교리적이지 말아야 한다. 이 이름들은 우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다. 생명 노선과 관련이 있는 이 모든 이름은 아주 많은 진리를 담고 있지만, 우리에게 있어 그 이름들은 교리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에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계 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슨 잘못이 있었는가? 라오디게아는 높은 진리의 위치를 차지한 교회였지만 실제가 없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진리가 있었지만 진리에 대한 체험이 없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들을 꾸짖은 이유다.
“네가 부자라고 말하지만 너는 네가 정말로 얼마나 가난한지를 모른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너무 많은 것을 말한다면 아주 조금 누리고 체험하게 되는 라오디게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엇이든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 우리의 체험을 위한 것임을 아는가? 진리에 관해 우리는 아주 많이 알고, 아주 많이 듣고, 아주 많이 훈련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진리가 돼야만 하는 진리는 없다. 진리가 단지 지식이라고 알 때 그것은 교만한 것이다(고전 8:1).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진리뿐인데 진리를 아는 것 역시 체험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듣는 모든 것,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결론적으로 우리의 체험, 우리의 실제가 돼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두 생명의 방식과 관련된 것을 배우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셋에 대한 체험 : 신성하고도 신비스러운 영역
우리의 이해력은 우리의 체험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가 아벨의 죽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임명되고, 지명된 셋과 하나다. 우리의 입장은 부활하시고 높여지신 그리스도와 하나다.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신성하고도 신비한 영역 안으로 임명되었다. 이 영역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단계를 통과할 필요가 있는 생명공급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셋은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첫 번째 단계를 대표하지 않는다. 셋은 에노스에서 노아에 이르기까지 생명 노선의 모든 단계를 체험하게 하는 신성하고, 신비한 영역을 대표한다.
에노스와 게난에 대한 동시적인 체험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첫 번째 단계는 에노스다. 에노스는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에노스는 실제로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 회복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약하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께 돌아와 또 다른 생명을 얻는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본질에서 하찮고, 가치가 없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회복된 생명으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이후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온다.
우리가 에노스라는 것을 안 후 게난이 되기 위해 대가를 치를 필요가 있다. 게난이 되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함과 제한을 받음을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약함과 그리스도에 대해 얻음을 깨닫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한 발자국 앞에 있을 뿐이다. 더욱이 이것은 우리가 다 자라지 않고, 자라는 과정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우리가 에노스가 되는 것만으로 자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에노스라는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게난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가 “난 패배했어.”라고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은 “넌 자라고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난 너무 약해.”라고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은 “이제 넌 너무 달라.”라고 말할 것이다. 에노스에 대한 체험과 게난에 대한 체험은 함께 온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성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단계적으로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나는 셋의 단계에서 성장하고, 그다음 에노스 단계에서 성장하고, 그리고 게난의 단계에서 성장한다.”
실제로 우리가 먼저 주님을 믿었을 때 우리는 신성하고, 신비한 셋의 영역 안에서 임명되었다. 이 영역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체험을 포함한다. 에노스, 게난, 그리고 우리가 연구하는 생명 노선에 나오는 모든 이름을 포함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영역 안에서 생명으로 자란다. 우리가 우리의 약함과 관련해 폭로될 때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에노스라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키실 때 동시에 그분은 우리가 게난이 될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성장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진리는 우리의 인격이 되어야 한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는 그들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알지 못하고 풍성하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꾸짖음을 받았다. 진리만으로 우리를 풍성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를 아는 것이 우리를 영적이도록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진리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격으로도 오셨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칙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으로 구성된 진리를 가져야 한다. 진리는 그들의 인격으로 구성된 이들을 통해 신성한 사역을 하게 한다. 신약성경의 원칙은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이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요 1:1)
말씀이 영원 안에 계셨지만, 말씀이 육체가 되셔야 했다. 말씀이 육체가 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구세주가 되실 수 없으셨다. 어느 날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 주 예수님 자신이 사람으로 오셨고, 사역하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셨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아는 진리 또한 육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인격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진리가 육체 됨 없이 움직이거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가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합당하게 구성된 인격이 필요하다. 우리가 진리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인격은 그 진리와 어긋나 진리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진리는 육체(체질)를 요구한다. 문제는 우리가 아는 진리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개 우리의 인격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에게 질문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내 안으로 얼마나 많이 구성되었는가?”
생명 노선에 있는 모든 이름은 우리에게 실제가 되어야 한다. 이 이름들 뒤에 있는 진리는 우리의 인격이 될 때까지 우리 안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만 진리가 움직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에 있는 이름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께 말해야 한다.
“주님, 저는 자라길 갈망합니다. 저는 대가를 치르길 갈망합니다. 전 생명 노선에 있는 이 이름들 모두의 실제를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전은 진리로 구성되는 것에서 온다.
주님은 빌라델비아교회에게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다시는 나가지 아니하리라. 또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고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우리는 “다시는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구문에 주목해야 한다. 이 구문은 교회의 성도들이 안과 밖에 있다는 것을 추측케 한다. 그들이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주님을 사랑한다. 그들은 심지어 주님을 위해 불태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자기 그들은 나타나지 않고, 밖에 있다. 왜 그들은 안과 밖에 있는가? 그들은 신성한 구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합당한 성장이 부족하다. 우리가 합당한 성장과 구성이 부족할 때 우리는 안전 또한 부족할 것이다.
“주님, 전 에노스일 뿐입니다. 전 당신을 벗어날 용기가 없는 아주 완벽히 부서지기 쉬운 자입니다. 전 당신을 떠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부주의하다면 저의 약함과 영원히 살 수 없음이 저를 그릇된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건강한 깨달음은 우리가 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제한을 받고,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주님께 말할 수 있다.
“주님, 당신께 저를 드립니다. 전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시는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그분께 정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이 진리가 우리 안으로 구성되었을 때 우리의 안전이 된다. 생명 노선에 있는 이 모든 이름은 우리의 구성이 돼야 한다.
생명 노선에 있는 우리의 체험에 대한 요약
에노스에 대한 진리와 실제는 게난에 대한 진리와 실제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그분 자신을 더하실 것이다. 한 면에서 우리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고, 심지어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다른 면에서 우리 안으로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건축하고 계신다. 이것은 유기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마할랄렐에 대한 실제를 가질 것이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많은 것을 얻는 것임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 완전히 잊을 것이고, 하나님만 영광이심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그분 자신을 건축하실 때 우리는 알 것이다.
“하나님, 당신은 영광이십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력은 너무도 다르다. 우리의 하나님은 영광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다. 그분은 모든 것보다 위에 계시다. 그분은 모든 것보다 존귀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우리에게 이러하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하나님이 여전히 아주 작은가? 우리가 마할랄렐에 대한 실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광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한다.
첫 번째 요약에서 우리가 에노스를 체험한다.
“나는 무섭고, 무능하다. 나는 내 삶은 다스리거나 통제할 수 없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두 번째 요약에서 우리는 게난을 체험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 의해 얻어지게 된다. 결국, 우리는 말해야 한다.
“오 하나님, 당신은 영광이십니다. 당신은 모든 것 위에 계십니다. 당신은 최고 중의 최고이십니다.”
우리 모든 삶은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야렛이 되고, 내려가는 것을 배운다. 또 이 요점은 우리의 체험이 돼야 한다. 이 이름들은 교리가 아니라 체험적이다. 이 진리들은 우리의 실제와 구성이 돼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영적인 모든 풍성의 실제를 우리가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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