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왕국의 비밀

왕국에 대한 가르침

Hernhut 2017. 7. 7. 12:53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하늘의 왕국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은 서기관마다 마치 자기 보고에서 새 것과 옛 것을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하시니라.”(13:52).

 

하늘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 즉 왕국말씀(13:11, 19, 24)은 신약성경의 중심 메시지다.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를 연구하든,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든 그리스도인 각인은 왕국과 관련된 메시지를 다루는 것을 중심으로 성경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이 메시지를 이해하는 이들은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을 연구할 때 합당한 기초를 건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건축되는 데 합당치 않은 기초를 소유할 것이고, 따라서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 대한 연구는 악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왕국말씀으로 훈련받은 각인은 원문에 있는 집주인에 비유될 수 있다. 그가 성경으로 가서 옛 것을 가져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옛 것에서 새 것을 보고, 내올 수 있을 것이다. 원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하늘왕국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열쇠를 소유하고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해에 의해 그 열쇠로 지금까지 닫혀있던 수많은 성경구절을 열 것이다.

 

왕국말씀에 관한 새로운 것들을 연구하고, 배움으로서 그들은 옛 것을 얻고, 새 것을 이해함으로 더 더욱 할 수 있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스스로를 알 것이다. 사람이 왕국말씀을 이해하면 할수록 더 더욱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열리는 볼 것이다. 이런 방면에서 새 것은 옛 것과 연결이 되고 떼어놓지 못한다. 새 것을 옛 것과 연결시켜 연구하려는 것은 각자 왕국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지식을 더 더욱 추구할 것이다. 새 것을 옛 것과 연결시켜 연구하려는 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과 증거이었지만 단순하게 그 문제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 것을 옛 것과 연결시켜 연구하려는 것은 그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왕국말씀을 훈련받은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고, 제한이 없는 새 것과 옛 것보물을 보고(寶庫)에서 가지고 나온다고 분명하게 계시한다. 마찬가지로 왕국말씀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이들이 어떤 진리들을 보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마태복음 13:52절에 언급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가르침에 대한 모든 범위가 오늘날 제도에서 말씀을 대항하는 사탄의 공격이 그 중심에 놓여있다는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왕국말씀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들과 관계가 있음으로 성경에 대한 합당한 이해의 열쇠다. 사탄은 이것을 안다. 사탄은 그가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많은 성경을 합당하게 이해하고, 문을 열 것을 멸하고, 파괴할 수 있다면 그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신의 일을 하게 하게 하는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끝을 향한 사탄의 노력은 마태복음 13장의 처음 네 비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어떤 것들이다. 이 네 비유는 사탄이 왕국말씀을 뒤엎으려는 사탄의 일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이 사탄의 일의 순서는 모든 제도에서 이런 방면의 그의 일에 대한 점진적인 결과를 다룬다.

 

종자뿌리는 이의 비유에서 사탄의 공격(13:3-8, 18-23)은 왕국말씀을 듣는 이들에 반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메시지를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막고, 후에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결국 멈추게 했다. 그리스도인들의 네 타입은 메시지에 대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네 그리스도인들 중에 셋에 대해 그의 공격이 성공한다. 네 카테고리 중 처음 세 카테고리에서 볼 수 있는 이들은 열매 맺지 못했다. 하지만 네 번째 카테고리에 대한 사탄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말씀을 들었고, 말씀을 이해했고, 사탄의 공격을 이겼고, 열매를 맺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13:24-30, 36-43)는 종자 뿌리는 이의 비유에서 열매 맺는 이들에 대해 사탄이 공격하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사탄은 열매를 맺는 이들 가운데 거짓 메시지를 가진 이들을(거짓 교사들) 둔다. 그는 메시지를 파괴하려고 하고, 전개되고 있던 것을 멈추게 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그가 거짓 메시지를 주입함으로 참된 메시지를 타락하게 하려고 했다. 이것은 참된 메시지의 선포로 얻어진 것을 멈추게 하려고 행해졌다. 이것은 열매 맺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멈추게 하려고 행해졌다.

 

겨자씨비유(13:31-32)는 거짓 메시지 때문에 제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여준다. 겨자씨가 발아했고, 얼마간 정상적으로 자랐다. 그런데, 겨자씨의 자람에 있어서 어떤 일이 벌어졌다. 비정상적으로 자랐고, 결국 나무가 되었다. 이 비정상적이 성장, 겨자씨가 나무가 됨에 따라 생각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 되었다. 공중의 새들이 그 아래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는 그 새들은 종자를 뿌리는 이의 비유에서 했던 것과 같은 사탄의 일을 했다.

 

누룩비유(13:33)에서 그 그림이 완성된다. 거짓 메시지는 제도가 시작할 무렵 가루 서 말 안에 놓아둔 누룩을 연결해 주입했다. “3”은 신성한 완전의 수이다. 가루는 빵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부패시키는 물질 누룩을 가루 안에 넣어 두었다. 결국 빵을 부패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 이 누룩은 모든 빵이 누룩화가 될 때까지 누룩의 일을 할 것이다. 이 거짓 메시지는 참된 메시지에 침투하기를 계속할 것이고, 부패시킬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누룩을 주입되고, 왕국말씀을 주입한 후에 왕국말씀과 관련해 참된 메시지로 이동하도록 방향을 계시한 것이다.

 

이 네 비유는 모두 오늘날 왕국말씀에 관한 기독교 역사를 보여준다. 이 신약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1세기 교회에 선포되었고, 우주적으로 가르쳐졌다. 그러나 거짓 메시지의 주입은 변질을 산출했다. 기독교 그 자체가 비정상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 비정상적인 성장은 결국 거짓교사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통해 그들이 부패시켰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패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누룩의 일은 계속되었다. 누룩의 일은 거짓메시지가 모든 기독교에 침투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원문을 따르면 이 부패과정은 모두 누룩화 될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관점에서 교회가 누룩화 되는 것을 끝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도가 끝이 가까워지면서 오늘날 교회가 교회 본질을 어디서 알아야 하는가? 그 답은 확인하기 쉽다. 모든 사람들이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말을 듣고, 어떠한 교회에 가서 왕국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고, 행해야 한다. 사람은 공허함 가운데 들을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 있는 부패과정의 일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과 다가오고 있는 왕국과 관련된 성경적인 참된 메시지가 오늘날 기독교에 사실상 실재하지 않는다.

 

누룩이 부패시키는 것처럼 교회의 부패 과정은 경계나 장벽이 없다. 왕국말씀과 관계하여 자유주의 기독교가 행하는 것처럼 근본적인 기독교 자체도 누룩으로 속속히 스며들어 있음을 알고 있다. 신학교에서 이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는 설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가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처음 네 비유가 관련되어 있는 한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부패과정에 대한 참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스스로 이 부패를 벗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왕국말씀의 어떤 이해와 선포가 관련되어 있는 한 근본주의 무리들은 자유주의 무리들과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도 똑같이 부패시키는 누룩이 스며들었다는 것을 자신들이 알고 있다. 이런 방면에서 두 무리들 모두 전혀 다르지 않다. 둘 다 왕국말씀을 이해하지도, 선포하지도 않는 것이다.

 

근본주의 신학교든, 자유주의 신학교든 모두 모든 것을 학생들에게 훈련시키고 있지만 성경을 이해시키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이 같은 신학교들은 왕국말씀이 전혀 없는 메시지를 가지고 교회 설교를 채우는 졸업생들을 배출한다. 이 신학교 졸업생들은 왕국말씀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결국 그들의 모든 사역들은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주님께서 그들의 케어에 맡기신 여러 무리들은 합당하게 먹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들의 사역 아래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왕국말씀을 듣지 않고 있고, 오롯이 그들이 들어야할 다른 메시지만을 듣고 있다. 이 이유가 마태복음 13장의 처음 네 비유에 주어졌다. 거의 2,00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누룩의 일은 왕국말씀에 대한 메시지를 모두 멸하려고 기독교를 부패시키는 것이다. 이 부패의 결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고 있다.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신학교에서 훈련받은 사람들보다 더 성경을 붙잡는 사람들도 있는 이유다. 왕국말씀을 이해하는 이들은 이 메시지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소유하지 않는 성경에 대한 열쇠를 소유한다. 이들은 성경을 이해하고, 새것과 옛것을 산출한다. 하지만 이 왕국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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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왕국말씀으로 하는 가르침이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을 이해하도록 할 것인가? 올바르고, 합당한 성경에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왕국말씀에 대한 이해가 왜 그렇게 활력적인 것인가? 그 답은 두 가지 방면이 될 수 있다.

 

첫 번째로, 왕국말씀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목적으로 하는 참된 성경적 그림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산출하셨을까? 왜 하나님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일을 하도록 모든 제도에서 말씀하고 계실까?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수행하도록 성령께서 세상에 계시는가?

 

두 번째로 왕국말씀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방향으로 참된 성경적 그림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와 관련되어 움직이는가? 그 목표는 무엇인가? 영적전쟁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믿음의 경주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영적전쟁과 믿음의 경주와 관련해 승리나 패배의 결과는 무엇이 될 것인가? 왕국말씀의 이해는 하나님의 어떤 다른 말씀과 다르게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대한 질문을 답할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방식으로 완전한 성경적 그림을 표현할 것이다. 왕국말씀만이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한 모든 문제가 합당하게 다뤄질 수 있고, 거룩한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한 참된 동기부여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왕국말씀이 참된 것이라면 이 메시지가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 무리들을 대항해 그렇게 싸우고 있는가? 그것은 거절보다 오히려 받아들임이 표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은 모든 경우는 아니다. 오히려 보기 드물게 거절이 변함없는 표준이 되기도 한다. 그 이유를 마태복음 13:33절에 있는 누룩의 일에서 볼 수 있다. 왕국말씀을 향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거의 2,000년이 넘게 계속되어 온 사탄의 일의 결말이다.

 

1) 왕국말씀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적임

 

신약성경에 있는 왕국말씀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은 복음서에서 하늘왕국에 대해 이스라엘에게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이 제안을 일축했고, 그 제안은 이스라엘에게서 떠났으며, 완전히 새로운 독립체가 이스라엘이 거절한 것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21:33-43, 벧전 2:9-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인 한 새사람(고후 5:17, 2:15)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을 열매 맺는 존재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제안을 일축했을 때부터 이 한 새사람에 관해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돌이키셨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새 창조를 통해 일을 수행하고, 완료하실 때까지 2,000년을 따로 떼어 놓으셨다. 믿는 유대인들을 포함하겠지만 이방인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옮기심으로 이 제안이 이뤄질 것이다(15:14, 11:5).

 

이 새 창조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실 목적으로 그분은 세상에 성령을 보내셨다. 오늘날 제도 곳곳에 하나님의 성령은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는 일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계시다.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의 신부를 찾기 위해 먼 나라로 자신의 종을 보낸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신부를 얻기 위해 세상에 성령을 보내셨다. 예표처럼 실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음은 가족에게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그 영은 이 한 새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고 신부가 몸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한 새사람 가운데서 찾으시고 계신다(2:21-25, 24:2-4, 9, 22:14).

 

또한 예표와 같이 찾음이 완료가 되고 난 후 신부는 옮겨질 것이다. 르브가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옮겨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부 역시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러 나아간 것처럼 아들 역시도 자신의 신부를 만나러 나아갈 것이다. 리브가가 이삭과 함께 집으로 간 것처럼 신부 역시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집으로 갈 것이다(24:61-67, 살전 4:16-17, 19:7-9).

 

2) 왕국말씀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방향임

 

그리스도 안에서 움직이는 새 창조와 관련된 모든 목표는 창세기 2장 첫 부부분에 정해진 목표와 똑같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 목표는 회복의 6(1:2b-25) 이후 창세기 2:1-3절에서 안식일로 전조된 다가오는 땅의 안식일이다. 한 새사람의 존재, 오늘날 제도 때문으로 여기든, 하나님의 그 영께서 세상으로 보내어진 이유로 여기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움직이는 방향의 목표는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시작으로 정해지고 세워진 방법이기 때문에 같아야 한다(1:1-2:3).

 

영적전쟁과 오늘날 믿음의 경주를 합당하게 이해하는 것은 앞에 놓인 목표에 대한 것을 합당하게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 새사람을 산출하시고, 이 한 새사람을 다루시기 위해 모든 제도 가운데 따로 떼어 놓으시고, 일을 수행하시려고 세상으로 그분의 영을 보내신 이유를 합당하게 이해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있는 강한 영에 맞서 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믿음의 경주가 핵심부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전쟁과 믿음의 경주에 관해 모든 것을 이해를 하는지, 못하는지를 사탄은 모두 알고 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전쟁에서 패배하고, 믿음의 경주에서 곁길로 가도록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그 결말은 승리하느냐, 아니면 패배하느냐가 될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전쟁과 믿음의 경주에서 이길 것이요, 아니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승리냐, 아니면 패배냐의 성패가 달려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사람을 위해 계획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그 영은 그리스도인들의 이해와 중심적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여시려고 오늘날 세상에 계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들과 함께 공동 상속자로 통치할 신부,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에서 공통 통치자로서 위치를 제안 받고 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다. 제도가 시작될 때 이것을 아는 사탄이 마태복음 13장 처음 네 비유에 요약된 것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이 의심스러운가? 그리스도인들과 다가오는 왕국에 대한 참된 메시지를 부패시키고, 파멸시키려고 사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행해왔고, 계속해서 행한다는 것이 의심스러운가?

 

창세기부터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까지

 

마태복음 13장을 연구할 때 여러 일들이 마음 안에 유지되어야 한다. 처음 네 비유는 집 밖 바닷가에서 주어졌고, 나중 세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집 안으로 다시 들어오신 후 주어졌다. 이 사실을 종종 간과해 버렸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합당하게 이해한다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는 연대순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 연대순으로 주어진 비유는 오늘날 제도 처음부터 메시아왕국까지를 다룬다. 앞에서 본 것처럼 집밖, 곧 바닷가에서 주신 처음 네 비유는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것으로 기독교의 역사를 나타낸다. 또 이 역사는 모든 제도를 다룬다. 기독교 상태가 오늘날과 같은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으로 되돌아 가야하고, 오늘날 존재하는 상황으로 이끌려져 사건의 과정을 따라 가야한다. 이런 방식을 따라 역사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한 가지 방법으로만 수행할 수 있다. 역사 속으로 되돌아가는 한 가지 방법은 사람이 써 밝히는 여러 교회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으로 가는 것을 포함할 수 있다. 사람이 쓰는 모든 교회사는 세속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사람이 쓴 교회사는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된 십자가의 주제로 하는 교회사를 다루지 않는다.

 

초대 신약교회는 사도행전에서 다뤘다. 그 때가 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기간은 왕국이 이스라엘에게 재제안이 있었던 때(A.D. 33-62)를 다룬다. 따라서 사도행전 메시지는 제안된 왕국에 중점을 둔다. 서신서들은 왕국과 관계가 있는 사도행전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서신서들은 왕국과 관계있는 메시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지침들에 대한 다른 방면을 전달한다. 사도행전과 같이 이 서신서들은 신약교회사의 지침들을 전달한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1세기의 교회를 다룬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 둘 다 제도 안에서의 교회사를 다룬다. 하나는 교회가 산출되기 전 마태복음 13장 비유에 있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제도를 지나 하늘에 있는 심판대에서 다뤄지는 요한계시록 2-3장에 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교회들도 교회가 산출되던 때 나타난 교회들이고, 제도에서 움직였던 교회사들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한 교회역사는 교회가 산출되기 이전에 성경을 통해 볼 수 있고(13), 다른 하나의 교회역사는 교회사 산출된 이후 성경에서 볼 수 있다(2-3).

 

교회가 시작하기 전 왕국말씀과 관계가 있는 교회역사는 마태복음 13장 처음 네 비유에서 볼 수 있다. 교회가 시작된 이후 교회역사는 요한계시록 2-3장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일곱 편지에서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3장은 비유를 사용하는 주님의 시각에서 나오는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교회의 역사를 나타내고, 요한계시록 2-3장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쓰는 편지를 사용하는 주님의 시각에서 나오는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교회사를 나타낸다. 둘 다 같은 것을 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해 수고하는 독립체요, 겨자다. 이런 한 가지 방법으로 시작해 교회는 등장했다(13:32, 2:2-3). 하지만 교회는 또 다른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 교회의 끝은 나무가 된 겨자요, 완전히 부패된 독립체요,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며,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13:32-33, 3:15-17). 이 모든 것들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본적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서신은 창세기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시를 하신 방법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후자가 전자에 달려 있고, 전자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다. 성경은 6일 간의 회복의 일로 시작한다. 본래 하락한 창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6일간의 일로 이 땅을 창조하셨다. 결과적으로 이 일로 여섯 번째 날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이 일이 끝난 후 하나님은 일곱 번째 날 안식일로 쉬신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곧 이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창조 이후 사람이 타락했다. 이 타락을 통해 사람은 하락한 창조가 되었고, 그 자신을 하락으로 빠졌을 뿐만 아니라 회복된 창조물을 다시 한 번 파멸하도록 했다. 이 하락 후 하나님은 다시 사람과 창조물들과 관계가 있는 때에 6일간 회복시키는 사역을 수행하기 시작하셨다. 이 나중 회복사역은 처음에 정해진 패턴에 따라서 메시아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안식일, 즉 안식의 일곱 번째 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4:4-9). 전자의 회복되는 각 날의 길이는 안식일을 포함해 24시간이었다. 그리고 후자의 회복되는 각 날의 길이는 안식일을 포함해 1,000년이 될 것이다(16:28-17:5, 벧후 1:16-18, 3:1-8).

 

창세기 2장의 처음 부분에 있는 기본적인 틀에 나머지 부분이 덧붙여졌다. 처음 부분의 틀을 다루든 나중부분을 다루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회복적 사역이 다가오고 있는 휴식의 안식일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창세기 처음 부분에 나타나 있는 일곱 구조가 요한복음 2장에서도 볼 수 있다. 두 책 모두 일곱 번째 날을 향해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세기에서 일곱 구조는 예표로 주로 이뤄졌고, 요한복음에서는 주로 표적으로 이뤄졌다. 창세기는 하락한 창조의 회복이 6일간 일어나고, 일곱째 날에 쉬는 것과 관계가 있고, 요한복음은 하락한 또 다른 창조 즉 하락한 사람의 회복과 관계가 있다. 회복의 일이 6일간 일어났고, 또 일곱 번째 날에 쉼이 있었다.

 

마태복음 13장에 비유들이 주어졌다. 처음 네 비유의 사건들은 안식일 직전 이틀 동안 일어난다. 이 일은 오늘날 교회에서 시끄럽게 논쟁을 한다. 오늘날 교회시대를 지나고, 메시야시대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나머지 세 비유의 사건들은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알기 쉽다. 세 비유는 목표가 성경 처음부분에 정해진 것이고, 그 목표는 다가오는 안식일이다. 모든 것이 이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이 같은 일은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서신에서 볼 수 있다. 이 서신의 배열은 안식일 직전 이틀 동안 일어나는 것에 대한 해석상의 또 다른 방면의 형태다. 요한계시록 1, 4장에서 계시된 것에 따라 이기는 이들에 대한 약속 모두가 왕국말씀과 다가오는 안식과 연결된 교회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모든 것이 이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교회와 관계있는 신약성경의 어떤 일은 다가오는 왕국과 관계있는 일들에 중점을 둔다. 사람은 이 메시지와 무관하게 자서전을 쓸 수도 있지만 성경은 완전히 이 메시지에 관련해 계시된 교회사에 중점을 둔다.

 

1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왕국말씀이 우주적으로 이 땅에 있는 교회들에게 가르쳐졌기 때문에 성경에 맞춰 교회사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 되었다. 누룩의 일이 거의 2,000년 넘게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왕국말씀의 메시지는 정말 부패되었다. 두 가지 일이 그 증거다.

 

첫째로 교회 역사가들은 우선 자신의 말 속에 포함시키기까지 왕국말씀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말을 중심으로 이 메시지를 전개해 갔을 것이다.

 

둘째로 심지어 교회 역사가들은 그 문제에 관해 써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쓴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누룩의 일이 거의 2,000년 넘게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왕국말씀에 대한 진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전적으로 부패되었다.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기 직전 우리가 살고 있다. 교회사에 존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경을 연구하고, 추구하기 좋은 때에 살고 있다. 하지만 누룩이 완전하게 일을 해 뿌리가 땅에 깊게 뻗어, 공중의 새들이 자유롭게 나뭇가지에 둥지를 트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경고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은 긍정적으로 행해지는 것보다도 훨씬 더 넓게 부정적으로 다뤄진다. 첫 비유에서 넷 중 세부분은 열매를 맺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 주어진 것이다. 두 번째부터 네 번째와 일곱 번째 비유의 강조점은 마찬가지로 사탄의 이 같은 일에 대한 다른 방면으로 다뤄진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만이 예외적으로 땅과 그리스도의 신부와 연결시키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의 중심적 취지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면이 훨씬 더 많다. 이 비유들은 왕국말씀이 전달되는 교회제도에서 사탄의 일을 폭로되는 것과 관계가 깊다.

 

교회제도가 끝이 가까워지고, 부패하는 사탄의 일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에서 거의 모든 문제를 완전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누룩화 된 상태는 누룩으로 악영향을 받은 이들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방면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계에서 걷고 있으면서 그분을 인식하지 못했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다. 구약성경의 그리스도, 육신이 되신 말씀, 인격으로 나타나신 구약성경을 인식하지 못함은 이 같은 성경을 합당하게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됐다. 이 성경이 이해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떡을 떼신 후 그들의 눈이 열렸다.

 

누룩화 된 기독교, 그 참된 상태를 보지 못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성경적 시각으로 문제를 보기 어렵다. 교회의 참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함은 성경이 계시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함에서 기인한다. 그들의 눈이 진리에 열려 있다면 교회의 참된 상태를 인식은 그들에게 나타나고, 그들에 의해 받아들인 말씀의 진리를 통해서만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제도 가운데서 이런 것이 일어날까? 다가오는 왕국에 관한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리스도인들의 눈이 열리게 선포될까? 한번은 여기서, 한번은 저기서 메시지를 듣고,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교회에서는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이미 말해졌고, 패턴이 정해졌다. 여자가 가루 서 말에 누룩을 넣어 두었다. 이런 상황은 다 누룩화 될 때까지 계속 악화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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