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왕국의 비밀

(룻기 3-4장) 그리스도와 교회

Hernhut 2017. 1. 30. 21:56

  

룻기 4:5a, 9, 10a, 13a

 

그리스도께서 집으로 다시 들어가신 후(13:36) 주신 마태복음 13:44-46절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비유를 이해하는 중요하고, 필요한 열쇠는 성경에 있는 예표와 실제 속에서 일어나는 결혼을 이해하는데서 볼 수 있다.

보아스와 룻, 아하수에로와 에스더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로서 일어날 것이고, 또 하나님과 그분의 아내로서 이스라엘을 취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룻기와 에스더의 전형, 특히 상속구속과 결혼과 관련이 있는 룻기를 이해하는 것은 마태복음 13장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비유를 합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필수적인 것이다.

다섯 번째 비유는 룻기 4장에 있는 사건들로 전조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엘리멜렉의 가족의 박탈된 상속에 대한 룻을 아내로 삼은 보아스의 구속으로 시작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아내가 되는 교회와 함께 이스라엘의 박탈된 상속에 대해 구속하시는 것을 말한다. 예표로 이 일들은 룻이 가족의 일원이 되고, 밀과 콩 추수 때 처음부터 끝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아스의 들에서 이삭을 주었고, 한 밤중에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나오기 위해 자신을 단장한 후에만 일어났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다. 구속행위를 선행하는 이 모든 일은 룻기 4장에서 볼 수 있다.

 

 

 

룻의 가족관계

 

룻기는 유대 땅의 기근 때문에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에 거주하려고 엘리멜렉, 나오미 그리고 그들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라는 한 유대 가족으로 시작한다. 그 가족은 얼마간 모압에서 거주했고, 그 가족의 가장 엘리멜렉이 죽었다. 이제 어머니 나오미와 그녀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만 남았다. 그 후 두 아들들은 모압의 여인들을 아내로 취했다. 말론은 룻과 결혼을 했고, 기룐은 오르바와 결혼을 해서 약 10년 동안 그 땅에서 살았다. 그런데 나오미의 아들들이 죽었고, 나오미와 그녀의 두 며느리만 남았다. 이후 나오미는 자신의 땅에 기근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녀는 룻과 오르바와 함께 베들레헴을 향해 여행을 했다. 하지만 도중에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베들레헴에 함께 들어가기보다 남아서 식구들에게 돌아가도록 설득했다. 오르바는 여행도중 돌아가기로 했고, 룻은 계속해서 여행하기로 했다. 룻은 나오미에게 여행을 계속 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

 

나보고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리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니이다. 만일 죽는 일 외에 어떤 다른 것이 나와 어머니를 갈라놓으면 주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16-17)

 

며느리가 함께 계속해서 여행하기로 결정한 것을 보고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말하는 것을 그쳤다. 그리고는 둘은 계속 여행을 했다(1:18-22). 그러므로 그 가족관계는 이 룻기의 맨 처음에 세워졌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서 이 관계에 대한 상세한 것을 말한다. 이 룻기의 첫 장에서는 세 부분의 가족관계를 제시한다.

 

1) 가족의 일부가 되는 룻과 오르바는 이방인들 중에서 택했다.

2) 룻과 오르바는 이방인의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3) 나중에 이 가족관계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룻은 나오미와 함께 떠났고, 오르바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일어날 사건의 예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이방인들로부터 나오게 하신다(15:14, 11:25).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신부를 얻으시는 동안인 오늘날 따로 떼어 놓으셨다. 그리고 룻처럼 이 이방 신부는 유대인 관계를 소유해야 했다. 유대인에 속하지 않고서는 떡집인 베들레헴으로 여행할 수 없다.

4천 년 전 하나님은 다른 인종에게 축복이 된 한 사람을 불러 내셨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도록 아브라함을 불러 내셨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언약으로 땅을 그에게 주셨다. 약속된 그 땅은 이 한 사람과 그의 씨를 통해 그 땅의 모든 이방 민족들이 축복을 받게 되었다(12:1-3, 13:14-18, 15:18-21, 22:17-18).

성경에서 이 부분을 넘어서 인류에게 오는 모든 영적인 축복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이삭과 야곱의 노선을 통해서만 올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주 일찍이 그분의 계시로 사람에게 세우신 방법이다. 이것은 시간 속에서 그 일들이 항상 존재하는 방법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셈, 그의 후손 아브라함으로 시작해(9:25-27) 한 사람으로 4,000년 후 선택을 받는 것을 이미 세우셨다.

오늘날 이방인(유대인)들을 위한 구원은 신성한 능력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통해서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의 구절들이 있다.

 

구원은 주께 속하나이다”(2:9b)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4:22b).

 

두 구절 다 참된 것이어야 한다. 구원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불법과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2:1) 주에 속한 것이어야 한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영적인 영역에서 완전히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영적으로 죽었고, 또 다른 이(그리스도)가 생명이 없는 곳에 효과적인 생명을 위해 대신해 움직여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마치신 사역에 기초하여 회복할 수 없는 사람 안으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생명을 호흡하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므로 구원은 주님께 속한 것이요, 유대인에게 속한 것이다. 오늘날 제도 가운데 성령의 사역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된 개인들(5:24, 2:1, 5)은 위치적으로 아브라함의 씨,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씨인 고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위치에 있는 그들 역시 아브라함의 씨이다(3:16, 29). 이스라엘 코먼웰스-연방에서 온 이방인이었던 거의 아브라함의 씨와 가까운 과거의 사람들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닌 하늘에 속한 상속자들이다.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그들은 어느 날 주 예수그리스도, 아브라함의 맏아들과 하늘에서 통치행위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3:26-29, 2:12- 13).

그런데 예표 속으로 돌아가서 룻과 오르바 사이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둘은 한 가족의 식구가 되었고, 빵집인 베들레헴으로 여행하는 중이었다. 룻은 여행을 끝까지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오르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늘날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고, 다른 편의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빵집을 향해 여행을 시작하는 입장에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여행을 시작하거나 완료하는 것은 아니다.

룻과 같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부름을 받은 곳에서 그 나라를 떠나고 길을 간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르바와 같이 여행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 오르바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여행을 시작한 후에 되돌아간다. 창세기 24:57, 58절에 있는 리브가처럼 룻은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는 물음에 나는 가겠다.”라고 대답했다. 룻은 빵집을 향해 나오미와 함께 갔다. 하지만 오르바는 이런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되돌아갔다. 여행 중 룻과 오르바는 죽음을 통한 나오미와 관계가 있다. 그들의 남편들의 죽음직후 결혼관계 자체가 끝났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죽음을 통한 식구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아브라함의 씨다. 오르바는 되돌아갔고, 룻은 식구로 남았다. 창세기 19:26절에서 롯의 아내가 뒤돌아 본 후의 일이 언급되지 않은 것처럼 룻기에서 오르바가 되돌아간 이후의 일들이 언급되지 않았다. 누가복음 9:62, 17:32절에 있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책망과 경고가 분명하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9:62)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17:32)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줍기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후 두 가지에 집중된다.

 

1) 그들은 보리 추수가 시작할 때 돌아왔다.

2) 나오미는 죽은 남편의 친척이 있었다.

 

그 친척 보아스의 밭에서 룻은 이삭을 주을 수 있었다.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어야 함을 스스로 알았다(1:22-2:3). 부자였던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룻에 대해 몰랐고 그녀에게 물었고, 다른 밭에서 이삭을 줍지 말도록 했으며, 그녀가 이삭을 줍도록 일꾼들에게 이삭을 밭에 떨어뜨리도록 했다. 룻은 추수 시작부터 끝까지 하루 종일 이런 방식으로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었다(2:4-23).

이 모든 것은 믿음의 경주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그림이다. 그들은 보아스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다. 밭은 세상을 상징하여 성경에서 사용되었다(13:38, 37:15). 밭에서 이삭 줍는 것은 세상에 있는 동안 열매를 산출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삭을 줍는 기간과 시간은 현 제도 도처에 확대되어 결코 끝나지 않는 일과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앞에 자신의 목표를 정해 놓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주인의 밭에서 오늘날 바쁘게 지낸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일로 자신을 연결한다. 그는 다른 사람이 이삭 줍게 하지 않고 자신이 이삭을 줍게 하는 것이다.

보아스는 룻이 이삭을 줍도록 자신의 일꾼들 뒤에 한줌의 곡식을 떨어뜨려 놓도록 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을 위해 특별하게 한줌씩 곡식을 떨어뜨리도록 일꾼들에게 말함으로 그녀가 이삭을 줍게 했다. 그녀가 해야 했던 모든 것은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말한 대로 곡식을 떨어뜨리면 그 이삭을 줍는 것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열매를 산출하고 있다. 주님은 추수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 준비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이삭을 줍도록 주님의 가르침으로 준비시키신 바대로 단순히 이삭을 줍는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이미 준비하신 바대로 단순히 일을 함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들이 주인의 밭에서 이 같은 방식에 따라 바쁘게 일하는 시간은 단순하게 언급되었다.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2:17)

“.......보리 수확과 밀 수확을 끝마칠 때까지 이삭을 줍고......”(2:23)

 

일을 절대 그만두지 않는다. 이 일은 오늘날 교회시대 끝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추수와 관계있는 또 다른 하나의 일은 가장 중요성과 상징성의 어떤 것이 원문에 두드러진다. 밭에서 온종일 이삭을 주운 후 룻이 그녀가 이삭 주운 것을 떠니 보리 약 한 에바를 얻는다(2:17). 한 에바는 약 22L이므로 22Kg이다. , 그녀를 위해 떨어뜨려 놓은 곡식을 모으는 일에 대해 한 부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곡식을 모은 후 그녀는 이삭을 줍는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삭을 떨어 알곡을 다시 모았다. 이삭 하나가 남을 때까지 그녀는 이삭줍기를 일을 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일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구원을 선포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구원받은 후 그들은 밭에서 얻은 것으로 그들의 일을 계속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이유에 관해 가르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다가오는 영광의 메시지의 여러 방면을 선포한다. 또 그들은 계시된 특정한 시간까지 이 가르침을 계속한다. 그들은 집요하게 밭에서 곡식의 이삭을 거둔다. 그들은 수확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밭에서 이삭 줍는 일을 계속한다. 그들은 쓸모가 없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에서 떨어질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한다. 그들은 각 개인이 미성숙에서 성숙에 이를 때까지, 그노시스gnosis에서 에피그노시스epignosis까지, 그들이 믿음 안에 근거를 둘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한다(4:11-15). 바울은 이 노선을 따라 그의 사역을 했다(20:20-32, 1:1-29).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서 깨어 있고 고난을 견디며 복음 전도자의 일을 행하고 네 사역을 온전히 입증하라.”(딤후 4:5).

 

복음전파자는 헬라어 유앙겔리스테스euaggelistes로 복음에 대해 선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협의(狹義)에 있어 성경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종종 사용되어 왔다. 복음전파자는 영원한 진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을 선포하는 자를 말한다. 성경은 훨씬 더 넓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복음전파자의 일을 하라는 말을 하는 디모데는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디모데가 선포하고 있었던 복음은 무엇인가? 그 문맥 자체는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과 관계가 있다(딤후 3:15, 4:1, 7-8). 그러므로 문맥적으로 복음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복음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디모데의 명령은 문맥이 다른 단어를 다루고 있지만 복음의 이런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가 구원받지 않은 이들을 상대하고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구원받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불법과 죄에 죽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른 어떤 것을 선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영적인 안목이 없었다(고전 2:14).

그렇지만 그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 간 후 디모데는 더 이상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다. 은혜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그들이 이 메시지를 들었고, 영접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 다음 디모데는 그들이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다(고전 2:9-13).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든 그는 복음전파자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그는 은혜의 복음이든, 영광의 복음이든 구원과 관계있는 복음을 선포했을 것이다.

룻기 2장에 있는 중심 내용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영접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밀알(보리알곡)이 쭉정이에서 분리되기까지 계속 선포한다. 추수의 주님은 그분 스스로 심판대에서 이러한 분리를 해야 하실 것이다.

에베소서 4:11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음전파자들과 목사-교사들 사이에 비성경적인 차이가 있다. 실제로 그들의 메시지는 같은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 둘 다 포함한다. 그들 사역의 차이점은 목사-교사에게 위임된 무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복음전파자보다도 목사-교사 사역을 강조하고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복음전파자와 목사-교사는 그들이 처해 있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복음의 모든 것을 선포한다.

 

 

 

보아스를 만나기 위한 준비

 

룻기 3장은 두 가지 중요한 일을 담고 있다. 이 장은 장차 보아스를 만나기 위해 룻 자신을 준비하는 것과 그 만남을 위한 필요한 세부사항이 나온다. 장차 보아스 타작마당에서 만나기 위해서 룻이 자신을 준비해야 하는 모든 일을 나오미가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이방인 룻은 유대인인 나오미로부터 보아스와 만나기 위한 그녀 자신을 준비하는 방법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웠다.

오늘날 실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타작마당에서 그분을 만나기 위한 준비에 관한 어떤 것을 안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와 그들을 통해 주신 것으로 이러한 일들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 구세주의 이야기와 관련된 유대인 책에서 이러한 일들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자신의 법규들과 판단들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분께서 어느 민족(이방인)도 이렇게 대우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분의 판단들로 말하건대 그들이 그것들을 알지 못하였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147:19-20)

 

 

1) 그를 만날 그녀의 준비

 

룻에게 말하는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를 만나러 가기 전에 준비해야 할 세 가지 일을 말했다. 나오미는 룻에게 말을 했다.

 

그런즉 너는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되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할 때까지 그에게 네 자신을 알리지 말며”(3:3a)

 

룻은 이 세 가지 방식에 따라 자신을 준비했다. 그런 후에야 그녀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그를 만났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룻기의 4장에 이르게 되도록 하는 사건의 순서가 되었다.

 

 

a) 자신을 씻음

 

씻음은 깨끗해지는 것과 관계가 있다. 룻기 3:3절에 있는 전체적인 생각은 보아스를 만나러 가기 전 룻이 자신을 깨끗하게 될 필요성과 관계가 있다. 실제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자신들을 깨끗하게 할 필요성이 있다. 룻기에 나타난 것처럼 예표적인 의미에서의 깨끗해지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약 제사장들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기 전 완전히 목욕을 했다. 이것은 한 번의 사건이요, 반복적으로 씻지 않았다(29:4, 40:12-15). 그런 다음에는 그들의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더럽혀져 제사장들의 손과 발을 반복적으로 씻었다(30:19-21).

후자의 씻음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언급하셨다(13:8-10). 몸의 완전한 씻음은 이미 이뤄졌다. 그러므로 이제 몸의 일부분의 씻음만이 필요하다. 룻기 3:3절에 언급된 씻음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던 그 때의 씻음으로 묘사되었다. 룻은 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씻었다.

성경 다른 부분에서 이 여러 씻는 것으로 사용된 물은 절대 죄를 수 없다. 표현된 방식에 따라 온 몸과 몸 일부를 씻는 것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구약성경에서의 희생, 흘린 피는 죄를 덮었다. 죄 그 자체는 사실상 여전히 남아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보시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분은 죄를 덮은 피만을 보셨다. 구역성경 희생이 가리킨 그리스도의 흘린 피는 더 나아간다. 그리스도의 흘린 피는 죄를 없앤다. 죄를 덮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흘린 피는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도록 완전하게 죄를 제거한다. 그리스도의 피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은 완전하게 씻음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반복적으로 씻는 것이 아니고 단 번에 완전하게 씻었다. 이것은 영원한 구원이요, 영의 구원을 말한다.

그런데 구약성경 예표에서 볼 수 있는 더러움은 밭에서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인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이 더러움은 몸의 일부를 반복적으로 깨끗해짐이 필요하다. 이 더러움을 씻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혼의 구원과 관계있다. 그리고 그 씻음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은 은혜의 심판대 위에서 그분의 흘리신 보혈을 근거로 하여 하늘에 속한 안식 안에서 수행되고 있고, 그분께서 정하신 제사장들의 왕국을 위해 오늘날 씻으시고 계신다. 씻는 일은 그리스도의 타작마당에서 만나고, 필연적으로 장차 만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수행되고 있다. 씻는 일은 깨끗한 방식으로 장차 그날에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수행되고 있다(요일 1:7-2:2).

 

 

b) 기름을 바름

 

기름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을 기름 붓는데 사용되었다. 그들이 이 방식을 따라 기름 사용과 구별된 일을 하도록 그들에게 강화하기 위해 성령께서 오시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사울과 다윗의 기름부음은 이와 같은 두 예다(삼상 10:1, 6, 16:13). 성령은 기름부음 받음에 따라 각 사람에게 오셔서 그들이 제왕적 일들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강화하셨다.

열 처녀비유는 기름이 오늘날 제도에서의 성령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임을 알려준다. 모든 열 처녀는 그들의 그릇에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섯 처녀만 여분의 기름을 소유하고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름 사용을 말하고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여분의 기름을 소유하지는 않는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 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다. 룻이 기름부음이 없이 보아스를 만나기 위해 합당하게 준비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 없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합당하게 준비할 수 없다. 이것은 합당한 준비와 관련해 나오미의 명령의 세 번째 부분을 보면 더 분명해 질 것이다.

 

 

c) 옷을 입으라.

 

룻은 신랑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그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실제에서 그와 같다. 신랑을 만나러 가는 각 그리스도인들은 물로 씻고, 기름 바름을 통해 합당하게 준비되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의복을 입어야 한다. 본문과 다른 성경이 이 문제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룻에게 하는 나오미의 명령은 그리스도인들과 관계가 있다. 혼인 예복만이 신랑을 만나러 갈 수 있다.

요한계시록 19:7-8절에 따르면 이 옷은 성도의 의로움, 의로운 행위로 만들어졌다. 이 옷은 그리스도인들이 밭에서 이삭을 줍고, 알곡을 타작함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자신들을 위해 엮어 짜는 것이다. 합당한 방식으로 이 일을 하는 것, 점차적으로 엮어 짠 혼인 예복을 입고, 여분의 기름을 갖는 것이 필수적이다. 머지않아 일을 위해 성령을 채우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령을 충만한 것만으로 실질적으로 이룬 영적인 영역 안에서 일할 수 있다. 혼인 예복 없이 그리스도이 임재의 그날에 나타남은 혼인잔치의 비유에서의 중심적인 이슈요(22:1-14), 라오디게아교회에게 하시는 중심적인 이슈다(3:14-21).

마태복음 22:1-14절에서 혼인 예복 없이 혼인잔치에 나타나는 사람은 연회장 밖 어두운 곳으로 던져졌다. 요한계시록 3:14-21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벌거벗고 나타나는 온 교회는 그분의 보좌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런 사람을 내가 나의 입에서 너희를 토해낼 것이라”(3:14)고 말씀하셨다.

준비 필요성과 관련이 있는 분명한 지시가 주어졌고, 지시가 무시된다면 일어날 것과 관련이 있는 분명한 경고가 뚜렷하다. 어느 날 방식에 따라 준비되지 않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서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또 이 계시와 경고를 무시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어떤 그리스도인이나 이 지시와 경고를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2) 타작마당에서

타작마당은 알곡이 모아지고 겉껍질을 분리해 내는 곳이었다. 이곳은 쓸모없었던 것에서 분리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침례자 요한은 타작마당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과 연결시켰다(3:12). 타작마당은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했던 겉껍질이 끌 수 없는 불로 태워질 곳이다(고전 3:12-15).

룻은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방식으로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나타났다. 그녀는 준비를 하고서 한밤중에 나타났다. 성경에서 한밤중은 항상 심판과 관련해 사용했다. 한반중은 출애굽기 11:4절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다. 그것은 절대 변할 수 없다. 이 방식으로 쓰인 용어는 계속해서 사용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한밤중은 성경에서 심판을 의미한다(34:20, 119:62, 25:6). 한밤중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에서 두 단어로 번역된다. 또한 가끔 헬라어에서는 합성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보아스가 있는 곳에 룻의 나타남에 대한 시간과 장소는 심판을 말한다. 하지만 심판을 통과하는 룻 그녀 자신은 축복을 받았다(3:10). 그 이유는 분명하다. 룻은 그곳에 나타나기 위해 합당하게 준비되었다. 룻은 보아스 앞에 가기 위해 합당하게 준비되었다.

룻이 자신을 물로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보아스가 오기 전에 밭에서 이삭을 주워 타작마당에 갔다. 보아스 밭에서 이삭을 주워 타작마당으로 간 그녀는 알곡을 가졌고, 이미 이삭을 타작했기 때문에 보아스가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치가 없는 껍데기는 이미 제거되었다.

고린도전서 11:31-32절을 비추어 보면 룻은 타작마당의 사건으로 밭에서 이삭을 주운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통과했거나 고린도전서 3:11-15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녀의 이삭에서 타작된 나무, , 검불이 아닌 것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이것들은 이미 제거 되었다.

룻은 타작마당에서 보아스를 만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으로 준비되었다. 그래서 축복도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었다.

 

 

상속에 대한 구속

 

룻기 4장에서 볼 수 있는 구속은 연대순으로 1-3장에서 묘사된 모든 사건들이 일어난 후 발생했다. 구속은 타작마당에서의 사건 이후 일어난 일과 관계가 있고, 이 일은 두 가지 일과 관계가 있다.

 

1.엘리멜렉의 죽음 이후 나오미에게와 엘리멜렉의 가족에게 속한 박탈된 상속에 대한 보아스의 구속(4:3, 5)

 

2) 구속적인 일을 통한 룻이 그의 아내가 됨(4:5, 9-10).

 

상속이 구속된 후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그 상속은 그들에게 속했다. 물론 이것은 실제에서 심판대 사건이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그리스도에 의해 수행되는 구속적인 일과 관계가 있다. 박탈된 상속이 구속된 후 룻으로 예표 된 이들은 보아스로 예표 된 분의 하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박탈된 상속은 그들에게 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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