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왕국의 비밀

어떤 이들은 떠날 것이다.

Hernhut 2016. 12. 24. 20:54


 

디모데전서 4:1-3

 

간극

하나님의 물질적 우주창조와 그분의 우주적인 다스림의 창설은 적어도 한 시대가 사람창조를 앞섰다. 아마 수많은 시대를 앞섰을지도 모른다. 이 시간의 길이는 성경에서 완전하게 계시되지 않았다. 이 기간에 일어나는 사건들로만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계시하도록 맞추신 것은 사람이 땅 위에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건들이다.

성경은 땅 다스림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의 창설(28:14), 첫 번째로 땅을 다스리는 자의 타락과 자격박탈(14:12-14, 28:15), 이 다스리는 자의 타락과 자격박탈의 결과 즉각적이고 멀리 쫓겨나는 것을 계시한다(1:2a, 14:15-17, 4:23-28, 28:16-19). 즉각적인 결과는 형태도 없고, 텅 비고,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를 덮고 있는 황폐한 왕국이었다. 어두워지고, 황폐화된 왕국을 덮고 있는 성난 파도였다(1:2a). 이것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한 맨 나중에 도달할 결과는 타락한 자는 임명된 힘, 권세 그리고 궁극적 위탁에서부터 빼앗기게 되고, 재임 중인 통치자가 제거되어 준비된 불 못에 이르게 될 것이다(25:41, 20:10).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사탄과 땅에 관해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물질적인 우주창조, 우주적인 다스림에 대한 그분의 창설, 창설된 이 다스림 안에서의 한 지방적 통치자의 차후 반란(사탄과 그의 일부분의 천사들과 함께 하는 반란), 그리고 사탄 왕국에 일어나는 황폐함() 모두는 사람 창조에 앞에서 예언되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또 일의 끝을 계시하셨다. 그분은 또 사람이 홀()을 잡은 후 사탄과 그의 왕국에 일어날 일을 계시하셨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람은 황폐함에 놓인 왕국을 다스리지 않았다. 본래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통치자가 그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을 때(1:2a) 형체가 없고, 빈 땅은 사람창조 전 즉시 회복되었다(1:2b-25). 하나님은 홀()을 붙잡는 새로운 지방 통치자 사람을 위해 황폐한 물질적인 창조를 회복하셨다. 이것은 땅의 회복 직후에 계시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1:26- 2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황폐화된 물질 창조의 회복에 대한 그분의 이유를 분명하게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람창조에 대한 이유를 계시하셨다. 물질적인 창조는 사람을 위해 창조되었고, 사람은 재임 중인 통치자 즉 사탄과 그의 통치자들을 대체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이런 취지의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과 연관 된 변할 수 없는 사실은 사람 창조 직전에 계시되었다.

1) 남자는 땅을 통치하도록 창조되었다.

2) 이 통치는 하나님의 창조 후 사람의 일부에서 건축될 여자에 의해 알게 될 것이다(1:27-28).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1:26-28)

그러고 나서 창세기 2장은 사람창조에 대한 수많은 상세함을 공급한다(2:7). 하나님은 이브를 건축하시기 위해 아담으로부터 갈비뼈를 취해 사용하셨고(2:21-22), 남자에게 여자를 데려가 주셨다(2:23-24).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세우신 방법이다. 처음에 세우신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성경을 통해 움직이는 것처럼 변할 수 없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시고, 창세기 2장에서 계시하신 후 남자와 여자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 제왕의 관계, 그리고 땅을 다스리는 것과 관계있는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타락한 상태에 있는 남편과 아내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 이 세워진 관계를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 자신이 이 관계를 세우셨기 때문에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함께 생명의 은혜의 상속자들이 되고, 인자의 시대에 존재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관계 안에서 예시되고, 장차 주의 시대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내 곧 교회에 존재할 관계다(5:21-33, 벧전 3:7).

하나님은 구약성경 신권정치 안에서 그분의 아내로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분 자신이 일을 세우신 방식이기 때문에 신권정치 안에서 통치하시기 위해 아내를 소유하셔야 했다. 나중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매춘행위 때문에 이혼하셨다. 하지만 미래에 신권정치를 회복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재혼하실 것이다(1:21-2:5, 3:1-25, 2:2-3, 14:1-9, 19:1-6). 동일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어느 날 아내를 얻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님은 아내를 얻지 않고는 통치하실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찾으시기 위해 오늘날 이 세상에 계신다. 또 이것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이요, 바뀔 수 없는 문제이다(24:1-67, 5:21-33, 19:7-9). 이 창설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사탄의 최초의 행위와 창세기 3장에 있는 아담의 행위를 설명할 것이다. 사탄은 사람이 창조된 이유를 잘 알았다. 여자를 남자에게서 떼어내어 건축하신 것 역시도 그는 알았다. 사탄은 또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또한 잘 알았다. 그는 아담이 이브를 제외하고는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아는 그는 여자가 통치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도록 여자를 향해 자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을 반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과실을 먹도록 이브를 속였다. 이브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후 그녀는 더 이상 아담과 통치할 위치에 없었다. 이것은 아담이 통치할 수 없었음을 의미했다. 아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요, 그의 뼈 중의 뼈요, 육신 중의 육신인(2:23) 그녀는 더 이상 다스리는 위치에 없었고, 아담이 다스리는 것을 맡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이상태의 불완전한 존재인 아담은 한 가지 선택만 남아 있었다. 이브는 구속받아야 했다. 구속받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길 뿐이었다.

한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는 아담은 이브와 마찬가지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에 참여했다. 아담은 이브의 수준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브가 자신의 방식으로 아담의 수준으로 올라올 수는 없었다. 아담은 구속을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먹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위치, 남자와 여자가 함께 완전한 존재로서 그의 존재가 차지할 수 있다. 예표와 실제를 비교해 보면 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두 번째 사람, 마지막 아담은 타락한 상태에 놓인 그분의 신부를 찾았다. 그리고 그분은 유일한 방법만을 가지셨다. 죄를 알지 못하신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죄를 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첫 사람, 첫 아담이 타락한 상태에 있는 사람, 그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통치할 수 없었던 것처럼, 두 번째 사람 마지막 아담도 타락한 상태의 사람들을 통치할 수 없으셨다. 궁극적으로 사람이 처음에 자신의 창조 목적을 깨달은 후부터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 둘 다 사람의 존재에 대한 이유와 죄 문제를 적용하는 유일한 방법을 가지게 되었다. 에덴의 아담이나 갈보리의 그리스도의 행동을 합당하게 이해하는 것은 예표와 실제를 비교하여 연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갈보리 마지막 사역을 통해 일어난 사람의 구속은 사람 창조, 사탄의 미혹 때문에 이브의 타락, 그리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아담의 행위를 둘러싼 창세기에서 계시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성경에서의 구원은 사람이 종종 드러내는 문제가 아닌 왕권과 관계가 있고, 불 못으로부터 구출하고 구조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불 못이 그리스도의 갈보리에서 마지막 사역을 거절하는 개인들을 기다리지만 불 못에서 구출하기 위한 구원은 올바른 성경적 적용이 아니다.

불 못은 사람이 아니고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이미 준비되어 있다(25:41). 불 못은 본래 하나님의 최고 왕권과 그분의 권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땅을 통치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 되었다. 이런 면에서 볼 못이 땅과 관계가 있고, 동시에 사람 구원의 목적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불 못은 왕권과 연결된다. 왕권과 땅과 연결되는 이 불 못은 죄를 해결하시려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 때문에 있고, 그들은 이곳에 갈 것이다.

타락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왕권과 땅과 관계있는 것을 거절할 것이다. 그는 사람창조와 타락에서의 구원을 거절할 것이다. 이 본질의 구원을 거절하는 사람은 비록 다른 방식을 따르는 것이지만 그의 천사들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최고 왕권과 그분의 권세를 거절하는 것과 같다. 불 못이 하나님의 최고 왕권과 그분의 권세를 거절하는 사탄과 그의 천사를 위해 준비된 것이긴 하지만 왕권과 땅과 관계있는 방식을 거절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거기로 던져질 것이다.

 

 

 

마귀들의 교리

 

디모데전서 4:1-3절에 있는 마귀들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진리를 모방하는 말을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깊은 일들을 가지고 계시고 사탄은 그의 깊은 일들을 가지고 있다(고전 2:10, 2:24). 성경에서 나타난 것처럼 후자는 단순히 전자의 부패다. 전자와 같은 뼈대에 남아 있는 것을 취하고, 모방과 타락한 말을 산출한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 펼쳐 놓으신 모든 변할 수 없는 본(2:4-25)을 제공하는 근본적인 뼈대(1:1-2:3)로 시작한다. 또 사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 펴신 것을 부패한 말씀을 갖게 하려고 같은 부분에서 시작한다(벧후 3:3-8). 사탄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 받는 것과 관련한 그의 부패한 말(1:2b-5)뿐만 아니라, 구원, 혼의 구원에 대한 현재와 미래와 관련된 자신의 부패한 말을 가지고 있다(1:6-31). 구원의 현재와 미래측면에 대해 강조하시는 하나님 말씀처럼 사탄 역시도 자신의 모방의 말을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 안에서 사람의 구원에 대해 구체적인 목표를 계시하시는 것처럼 사탄 역시도 모방하는 말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부패하게 한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곳에 자신의 강조를 두었다. 그리고 사탄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펼치신 같은 부분에 모방을 펼치려고 한다(14:13-14). 사탄은 대중들을 호도하려고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취하고, 오류를 도입했다. 좋은 모방은 최대한으로 원본과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좋은 모방과 마찬가지로 모방은 대중을 호도하기 더 쉽다(고후 11:13-15).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들에게 하신 것이다. 구원받지 않은 이들은 불법들과 죄들로 죽었고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2:1, 고전 2:14).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과 그의 모방자들과 유사하다. 이 모방의 가르침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을 위해 디자인 되었다(5:24). 불법들과 죄들로 죽은 이들은 사탄에서 나오는 타락한 자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타락하지 않았든지 영적인 문제를 이해할 위치가 아니다. 둘 다 완전히 본질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이들에 의해 받아들여 진 이와 같은 진리의 부패는 바울이 경고의 메시지를 하는 디모데전서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유혹하는 영들을 주의하기 시작한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믿음으로부터 떠날 것을 예언했다. 또 그는 이 유혹하는 영들이 악한 것들의 교리로 특별하게 말한 허위를 가르칠 것이라는 것을 예언했다. 이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식은 믿음에서부터 떠나 그슬려졌을 것이다. 그슬리다는 지지다. 뜸질하다. 철을 담금질하다. 마비시키다의 의미로 헬라어 카우스테리아조kausteriazo라고 말한다. 믿음을 떠난 그들은 사악한 교리들과 이어진 거짓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 거짓 선포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디모데전서 4:1-3에서 말하는 2가지의 것과 반대된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결혼이요, 다른 하나는 음식물에 관한 것이다.

결혼은 사람창조 이전과 그 시대에 세워진 진리요, 인류시대에 일어나는 일을 가리킨다. 장차 주의 날에 열매를 맺게 되고, 알게 될 것이다. 또 음식물은 이 전반적인 주제에 중점을 두는 성경적인 교리의 일부와 관계가 있다(딤전 4:6, 13, 16). 디모데전서 4:1-3절에서 오도(誤導)하는 자들이 있었다. 나중에 유혹하는 영들에 의해 흔히 가르쳐졌고 그 결과로 마귀들의 교리가 선포되었다. 마귀들의 교리는 혼인을 훼방했다. 그리고 그들은 배교자들로 불렸다. 이 풍조를 따르는 각 개인의 오도(誤導)는 성경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흔하지 않게 나타났다. 그것은 믿음에서 떠난 흔하지 않은 배교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표현했다.

 

 

1) 믿음으로부터의 배교

 

배교는 이미 잡고 있던 것에서 떠나 가까이하지 않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왕국말씀의 특정부분 모두를 망라하는 표현이다.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침을 받았던 중심적인 메시지인 하나님의 성령이고, 장차 기독교에서 이 중심적인 메시지와 관련되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요컨대 이 중심 메시지에서 이탈될 것이고, 그런 이탈은 가르침을 받았던 것을 대신해 마귀들의 교리들과 연관 지었다.

 

 

a) 배교

 

디모데전서 4:1절에 있는 떠나다라는 단어는 명사 아포스타시아apostasia동사형 아피스테미aphistemi. “아포스타시아apostasia는 영어 어파스떠시apostasy에서 유래된 단어다. 영어 어파스떠시apostasy는 단순히 헬라어 아포스타시아apostasia의 영어형이다. 따라서 어파스떠시apostasy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헬라어를 참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포스타시아apostasia아포apo스타시스stasis로 이뤄진 합성어다. “아포apo“~로부터를 의미하고, “스타시스stasis나서다, 서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으로부터 일어서다, 나서다, 떠나다이다. 배교자, 변절자의 의미는 단순히 이미 붙잡고 있던 위치에서 떠나고, 일어서서 나온 자를 말한다.

디모데전서 4:1절에 있는 이미 붙잡고 있던 위치를 떠남은 믿음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말했다. 마귀들의 교리를 선포하고, 유혹하는 영들은 믿음을 지키는 이들을 그 위치에서 떠나도록 이끄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요, 구원받지 않은 자들이 아니다(고전 2:14).

 

 

b) 믿음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문제의 진리를 둘러싸고 있는 중심취지는 그 믿음과 관계가 있다. 또 마귀들의 교리에서 비롯된 거짓을 둘러싸고 있는 중심취지 역시 그 믿음과 관계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것에서 나오고, 다른 사람은 사탄의 깊음에서 나온다(고전 2:10, 2:24). 전자는 진리요, 후자는 진리를 부패시키고 모방한 말이다.

믿음은 왕국말씀의 총체적인 범위에 대한 표현이요, 바울에게 계시된 비밀에 대한 표현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에 대한 표현이요, 혼의 구원에 대한 표현이요, 특히 성경과 관련된 표현이다. 믿음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등에서 나타나는 표현방식이다.

그리스도의 초림, 그분의 땅에 속한 사역을 하시는 그 때에 그분은 재림하시기 2,000년 전에 보여 주셨다. 그리고 질문을 통해 신약성경의 중심 메시지와 관련 있는 사실을 혼자 호소하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8)

 

그런 질문 방식은 헬라 원문에서 부정적인 대답을 지적하는 말이다. 인자(사람의 아들)는 그분의 재림 때에 기독교에서 가르친 믿음을 찾지 않을 것이다. 마귀들의 교리들과 관계있는 마태복음 13:33절의 여자가 가루 서 말에 넣어 둔 누룩은 믿음을 소중히 품었을 것이다. 믿음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가르쳐진 것처럼 오늘날 근본적인 기독교에서 쓰는 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존재한다.

근본주의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믿음은 기독교의 큰 부분에 선포되고, 많은 이들이 그 근본주의를 잡고 있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인정된 자들이 붙잡은 것처럼 그 믿음이 성경적인 교리들의 몸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기독교의 상태는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재림하실 수 없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종류의 근본주의는 오늘날 기독교에 존재하고 있다. 사실상 근본주의는 수많은 방면에서 실제로 자라고 있는 힘이다. 이 나라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주의의 주류에 포함될 것이고, 성경적인 교리의 몸을 고수한다.

하지만 근본주의는 사람이 믿음에 대한 그 자체의 정의를 위해 성경을 볼 때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보기 때문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다. 성경은 좁은 의미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들의 완전한 몸과 관계가 아니고,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문맥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다. 앞에서 말한 믿음의 교리들은 사실 사람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그가 성경에서 본 것으로 분류하려고 한 것을 대표한다. 믿음을 성경적인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과 사람의 교리분류를 확인하는 것은 성경적인 해석상 더할 나위 없는 어리석음이다. 성경은 항상 성경의 빛으로 해석되는 것이다(고전 2:9-13).

또 이것은 믿음이 이해됐어야 한다는 표현과 똑같은 방법이다. 성경은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서 거듭거듭 사용된 표현이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많은 경우에 이 표현된 것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배교자들에 대해 경고를 하며 말을 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그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고백하였도다.”(딤전 6:12)

 

다시 말해 믿음의 선한 시합에서 분투하라. 그 시대를 위해 생명을 붙들라는 뜻이다. 디모데 후서에서도 그와 같은 내용을 다시 볼 수 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내가 선한 시합을 했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전 4:7-8)

 

유다가 일반적인 구원 즉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에 관한 복음, 다른 서신서들에서 초점을 맞추지 않는 주제의 서신을 쓰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은 완전히 다른 주제를 쓰도록 그를 이끄셨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는 서신을 쓰도록 유다를 이끄셨다. 그가 쓴 주제는 믿음을 위한 신실한 경주(열심히 하는 다툼)로 성도들을 건지게 되는 복음이요,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구원과 관련이 있는 복음이다(1:3). 싸우다(1:3), 다투다(딤전 6:12), 경주했다(딤후 4:7)라는 단어는 같은 헬라어에서 나왔다. 헬라어 아고니조마이agonizomai는 고민하다, 고뇌하다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유다서에서는 아고니조마이agonizomai앞에 전치사 에피epi를 붙여 에파고니조마이epagonizomai로 강화되었다. 러므로 올바른 번역은 열심히 경주하는 것이다. 앞의 세 구절에서 아고니조마이agonizomai가 사용된다는 것은 믿음에 있어 모든 근육을 강화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디모데전후서의 그림은 운동경기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열심을 내고 있는 믿음의 경주에서 모든 근육을 압박하고 있다. 믿음에 관한 배교자들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말씀을 강화해 여전히 운동경기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배교자들 때문에 유다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마귀들의 교리를 가르치고, 유혹하는 영들을 주의를 시키고 있다. 마귀들의 교리들은 예수님, 바울, 베드로에 의해 말해진 것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오용하거나 남용하고 또 변개시켜서 만든 사람들의 이론들이다. 유다의 권고는 분투에 대한 생각을 강화시켰다. 본질에 있어 유다는 믿음의 경주를 하는 동안 배교자들 때문에 아주 특별히 믿음을 지키도록 그리스도인들을 권고했다.

배교의 분명한 본성, 믿음에 관해 그리스도인들을 오해케 하려고 하고, 성경의 중심적인 가르침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멀리 떼어 놓으려고 배교자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집중했던 영역 때문에 유다가 배교자들을 위해 이 말을 강조했음이 분명하다.

배교자들에 의해 선포된 마귀들의 교리들은 가장 위험하고 이미 예전에 선포되었거나 그리스도인 무리들 속에서 선포될 치명적인 가르침이다. 이것 때문에 유다는 믿음의 경주에서 자신들의 모든 근육을 쓰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했다.

앞에서 말한 것은 믿음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되었다는 몇 가지 예이다. 다른 예들은 왕국에 대한 재 제안 때 이스라엘에 있는 제사장들의 변화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그 믿음에 순종했었다(6:7). 제자들은 계속해서 왕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믿음 안에 있기를 권고했다(14:22). 바울은 자신이 멸하려고 했던 그 믿음을 선포하고 있었다(1:23, 6:16, 1:27, 1:23, 2:7, 살전 5:8, 살후 1:4, 11, 딤전 1:2, 19b, 5:8, 6:10, 21, 딤후 2:18, 3:8, 4:7). 그 믿음은 서신서의 일반적인 표현이었다(12:2, 1:3, 2:14, 17, 18, 20, 22, 26, 벧전 1:7, 9). 믿음은 각 서신서에서 관절과도 같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곳곳에 그 믿음이라는 표현이 균일하게 사용된다. 성경적인 가르침의 몸이 근본적인 기독교를 형성하는 이들을 따른 것과는 관계가 없고, 성경적인 가르침의 몸과 관계가 있다. 성경적인 가르침의 몸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거절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성경적인 가르침의 몸은 성경 즉 왕국의 말씀, 비밀, 바울의 복음,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에서 여러 방법으로 언급한 것과 관계가 있다.

 

 

2) 혼인과 음식물

 

혼인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근본주의의 원리와 성경적인 교리는 창세기의 처음부분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언제나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찾는다. 오늘날이나 장차 다가오는 주의 날에도 이 현상은 일어난다. 언제나 사람은 창세기 처음부분에 나타나 있는 통치권을 보게 되고, 또 남편-아내 역시 그분에서 보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구약성경 신권정치에서의 여호와의 아내로 여겨지는 이유다. 이 이스라엘은 간통하는 아내로 여겨지고, 결국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구약성경 신권정치 끝에서 이스라엘과 이혼하게 된다(3:1-14, 9:3, 10:4, 18, 11:22-23). 이것은 신권정치가 장차 땅 위에 세워질 수 있기 전 여호와의 아내로서 이스라엘이 정결하게 되어야 하고, 전에 있던 곳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다.

남편-아내 관계는 오늘날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아내를 가지셔야 하는 이유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 둘째 사람으로서 땅 위를 통치하시는 것이라면 그분은 그분과 함께 통치하실 배우자 왕비를 가지셔야 한다. 이것은 결혼이 그분께서 통치하시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남편-아내 관계는 오늘날 존재해야 한다. 게다가 이것은 오늘날 남편-아내 관계는 상속지위와 관련되어 성경에서 다뤄진 이유다(벧전 3:7). 오늘날 통치는 결혼관계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서 5:21-33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를 큰 비밀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남편-아내관계가 나오는 구약성경은 두 책이다. 하나는 룻기요, 다른 하나는 에스더다. 흥미롭게도 그 책을 쓴 사람을 알지 못한다. 룻기는 남편-아내관계의 한 방면을 나타내고, 에스더는 다른 방면을 나타내고 있다.

룻기는 한 유대인과 결혼하는 이방인과 관계가 있다. 그녀는 구속을 받은 상속이다. 보아스와 결혼을 하는 룻은 장차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내를 둘러싸고 있는 진리를 피력한다. 룻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의 전체적인 것을 제시한다. 룻기는 남편-아내관계가 끝에서 나타났다.

에스더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유대인이 아님) 왕이 술잔치에 성장(盛裝)하여 나오라는 명령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폐위 된 전 왕비 와스디에 이어서 그의 아내로 택한 유대인이었다(1:9-22). 그런데 에스더 나머지 부분은 이방세계 권력 끝 무렵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간 시대의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아내로서 민족의 의로운 곳으로 회복된 것을 중심으로 기록된다(2:17-23).

그러므로 창세기 1:26-28절 이후 결혼관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창세기에 있는 이 기본적인 구절들을 기초로 한다. 오늘날 남편-아내관계는 과거가 기초가 되며(1:26-28), 또 미래를 가리킨다(19:7-21). 이스라엘이 땅 위에 있든 교회가 하늘에 있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존재하는 결혼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결혼관계를 떼고서 장차 땅을 다스릴 수 없다.

 

 

성령의 오늘날 사역

 

앞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22-25장에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관해 계시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이들이 인정할 것이다. 이 네 장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여호와의 아내와 그리스도의 아내에 관한 것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창세기 처음 세 장에 계시된 것으로 기초되었지만 장차 주의 날의 중요한 목표가 된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이스라엘이나 교회를 건축하시기 오래 전에 이 모든 것을 세우셨다(46:9-10).

오늘날 제도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1,500년 전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다. 이 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의 신부를 얻기 위해 자신의 종을 먼 나라로 보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신부를 얻기 위해 세상으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을 예표한다. 이 일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고(22:1-24), 사라가 죽은(23:1-20) 이후에 일어났고, 아브라함의 재혼 이전에 일어났다(25:1-4).

다시 말해 오늘날 제도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갈보리의 사건과 이스라엘의 따로 떼어놓음 이후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내로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기 이전에 일어난다. 더욱이 오늘날 세상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창세기 24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신부를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계시한다. 앞의 계시에 따라 그분의 일하시는 동안의 성령의 사역의 어떤 부분은 구원받지 않았든지, 구원을 받았든지 창세기 24장에서 몰 수 있는 것처럼 그분의 계시된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수행하도록 세상으로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남편-아내관계를 둘러싼 일을 마음에 담아둔다면 알고, 이해하기 쉽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려면 그 아들은 아내를 가지셔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들의 통치를 기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남편-아내관계를 떠나서는 통치할 수 없다. 다가오는 아들의 천년 통치는 신권통치가 될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땅 위에서 아내를 가지실 것이고(25:1-34), 아들은 땅 위의 하늘에서 아내를 가지실 것이다. 이 아들의 아내는 오늘날 성령의 사역을 통해 산출된다(24:1-67). 다가오는 그날에 다스리고 통치할 어떤 사람은 땅 위의 여호와의 아내나 하늘에서 아들의 아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남편-아내관계를 제외하고는 사람을 사람이나 하나님의 아들은 다스리거나 통치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결혼과 음식물이 디모데전서 4:3절에 기록된 이유다. 오늘날 혼인관계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에 기초했고, 그 반사에 따라 궁극적으로 미래시대에 완전한 성과를 거둘 것이다. 이 구절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인 의미나 영적인 의미가 중요하지 않고, 그 같은 일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남편-아내관계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세우신 것을 기초로 하고, 그분께서 장차 직접 반사하여 성과를 가져오실 것이다.

앞에서 말한 사람에 의한 결혼관계의 어떤 타락(간음, 동성애)가 성경에서 아주 심각하게 이어졌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어떤 탈선은 타락이요, 광범위한 파문을 일으킨다.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결혼은 왕권과 관계가 있고, 이 왕권은 다가오는 메시아 시대에 그 궁극적 의미로 깨달아야 한다. 사람의 모든 타락은 결혼관계에 관계된 성경적 교리(음식물)의 모든 파노라마(조망)를 둘러싼 사탄이 시도하고, 다면적 부패에 대한 단순한 파생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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