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를 말씀하실 때 하늘들의 왕국은 한 사람이 자신의 밭에 뿌린 겨자종자의 알곡 같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종자들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자랐을 때 채소 중에서 가장 큰 것이요, 나무가 된다. 그래서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둥지를 튼다(마 13:31-32). 겨자종자의 비유는 앞에 있는 알곡과 가라지들 비유에서 말한 것과 같은 중심 생각으로 계속 이어진다. 열매 맺는 것이 여전히 앞에 나온다(마 13:31). 게다가 계속되는 사탄의 움직임은 그리스도인들이 열매 맺는 것을 멈추게 하려는 것이다. 앞의 비유에서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의 열매 맺는 것을 멈추게 하려고 사용하는 방법은 밀알곡 가운데 가라지들을 뿌리는 것을 계시했다.
그런 후 겨자종자의 비유는 사탄의 이 움직임 때문에 일어날 것을 계시한다. 이러한 면에서 겨자종자의 비유는 단순히 앞의 비유를 추가적으로 설명을 돕기 위해 제공하는 해석이다. 비유에 대한 정의의 참된 의미에서 이미 계시된 진리들과 관련된 추가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겨자종자의 비유는 이미 주어진 밀알곡과 가라지들의 비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같은 것은 주님께서 밀알곡과 가라지들의 비유를 주신 이유와 관련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종자를 뿌리시는 그리스도의 기간 동안에 주어진 비유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졌다. 그런 다음 겨자종자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 앞에 보여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비유는 겨자종자의 비유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위해 주어졌다.
그것은 마태복음 13장 처음 네 비유들 사이에 존재하는 신성하게 디자인된 연관성을 증명한다. 집 밖 바닷가에서 말씀이 전달된 종자를 뿌리는 이의 비유는 문제를 도입하고, 이어지는 다음 세 비유는 처음 비유에서 도입된 성공적인 방식에 따라 단순히 건축된다.
정상적인 성장과 비정상적인 성장
밀알곡과 가라지들의 비유에서 사탄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열매 맺는 것을 멈추게 하려고 반대 생각을 가진 자들을 뿌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문제들이 기독교에 하늘들 왕국으로 보이는 열매 맺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겨자종자의 비유에 이런 면에서 문제들이 계속 나타난다. 이 비유 처음에 겨자종자가 싹을 틔우고 한 동안 정상적인 성장하는 것을 그린다. 모든 종자 중에 가장 작은 이 특별한 종자의 정상적인 성장은 자랐을 때 채소 중에 가장 큰 채소를 생산했을 것이다. 그것을 넘어 이 채소의 정상적인 성장은 앞의 두 비유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열매 맺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마 13:32).
그러므로 열매 맺는 것을 멈추게 하는 데 사탄의 성공은 겨자종자의 정상적인 성장을 막는 데 성공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하나를 성공하면 다른 것도 연결되어 성공시킬 것이다. 겨자종자는 각 개인들 자체가 아니고, 각 개인들로 구성된 독립체요, 좋은 종자요, 앞에서 말한 왕국의 아들들을 대표한다. 겨자종자의 정상적인 성장과 비정상적인 성장은 좋은 종자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정상적인 성장과 비정상적인 성장을 각각 대표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겨자종자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정상적인 성장을 막으려는 사탄은 실패해야 한다. 정상적인 성장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낳을 것이요, 정상적으로 열매 맺는 것은 성도들의 성장과 발전으로 이어져 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반대 상황이 벌어진다면 비정상적인 성장은 결국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산출할 것이고, 정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이어질 것이다.
이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나중이 더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성장에 이어서 겨자종자는 비정상적인 성장이 되고 나무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비정상적인 성장이 이어진 것뿐만 아니라 겨자종자는 아주 이 비정상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무로 자랐을 뿐만 아니라 이 나무의 본질 안에 사탄의 일을 하는 공중의 새가 그 가지에 둥지를 틀 곳을 찾으려고 깃들이게 되었다(마 13:32, 4, 19). 세 번째 비유는 두 번째 비유의 연속되는 생각이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가라지들이 영향력이 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비본질적인 영적 성장을 초래하는 가라지들은 극도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을 막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라지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열매 맺지 못하게 하고, 메마르게 한다. 문제는 그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막은 이들 가운데 환영을 받고, 그들이 산출한 것에 단순하게 누워 쉴 수 있다.
거짓교사들
비정상적인 성장을 산출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사탄의 이 일은 한 가지 수단을 통해서만 이뤄낼 수 있었다. 그의 일은 거짓 교리를 선포하는 것으로만 이뤄낼 수 있었다. 사탄이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거짓교사들을 둠으로 이뤄낼 수 있었다. 그는 성경의 진리에서 떠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이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지하는 것에서 떠나도록 그들을 이끈다.
그들은 왕국 말씀 즉 특별히 믿음과 관련해 삐뚤어진 진 것을 가르치고, 일어날 거짓교사를 성경 곳곳에 경고를 증가시켰다. 이 거짓교사들은 일어날 것이고, 세상에서가 아니고 기독교 그 자체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 거짓교사들은 그리스도인들 대열에서, 교회들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행 20:29-32, 딤전 4:1-3, 딤후 2:8, 18, 3:7-8, 4:1-4, 벧후 2:1-22, 유1:3-25).
그리스도의 초림을 둘러싸고 이스라엘에게 하늘들의 왕국을 제안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둘러싸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들의 왕국을 제안하신다. 유대종교지도자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 권해진 왕국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에 책임이 있었고, 그리스도인 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권해진 왕국을 둘러싸고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에 책임이 있다.
이스라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며 매번 보고, 들었던 것이 자신들과 반대되는 말을 찾았다. 그리스도의 일은 초자연적인 치료, 공급과 같은 초자연적인 표적에 중점을 두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민족이 회개했다면 이러한 초자연적인 표적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그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을 오도했다. 그래서 권해진 왕국에 대한 민족적 거절이 일어났고, 그런 다음 민족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오늘날 왕국말씀 선포와 관련된 것은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2,000년 가까이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에 의해서도 오도되고 있다. 성경은 아주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하다.
1) 초대교회 당시의 메시지
기독교 초기 선포했던 메시지는 믿음, 혼의 구원, 왕국말씀에 집중했다. 이것은 바울이 “나의 복음”(롬 16:25), “우리의 복음”(고후 4:3),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고후 4:4)으로 말한 그 메시지다. 이것은 바울이 이방세계에 선포하도록 한 메시지였다(행 9:15, 갈 1:11-12, 16, 2:7). 이것은 교회가 건축되는 초기 몇 십 년 동안 바울과 다른 동역자들이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이들(창조물들)에게 전파한 메시지였다(골 1:5-6, 23).
골로새서 1:23절에 있는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창조물들은 문맥적으로 구원받지 않은 이들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들만을 말한다. 이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구원, 왕국말씀에 이어 듣는 메시지를 말한다. 이것이 혼의 구원이다. 구원받지 않은 이들은 이 구절에서 볼 수 없다. 구원받지 않은 이들이 듣는 메시지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위해 죽으신 복음뿐이다. 그들이 이 메시지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만 구원을 위한 목적과 관계가 있고 그들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골로새서의 이 구절에서 언급한 그 메시지를 들을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건축된 1세기 동안 권해진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는 기독교 도처에 우주적으로 선포된 어떤 것이었다. 이 메시지는 잘 알려졌을 뿐 모든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기독교가 천연적인 방식으로 발전하여 이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상응하는 열매 맺고, 분열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것은 사탄이 본질적인 종자의 성장을 멈추게 하려고 밀알곡에 가라지를 뿌리고, 시간이 지나 궁극적으로 식물의 열매 맺지 못하는 조건을 가져와 성장과 증산을 멈추게 하는데 성공한다.
이제 교회초기에 사탄은 직면한 문제가 있었다. 그는 기독교회 곳곳에서 선포되고 받아들였던 메시지와 교전하는 문제와 맞부딪혔다. 그 메시지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합당한 방식,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성장하고 발전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열매를 맺었다. 메시지와 교전하는 사탄은 단순하게 참된 메시지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 중심에 거짓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두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짓 메시지는 점차적으로 뿌리를 내고, 훼손하는 일을 했고, 그 목적을 이뤄갔다.
한번 받아들인 이 거짓 메시지는 기독교에 합당치 않은 합당치 않은 발전을 가져왔다. 합당치 않은 방식을 따른 발전은 그에 맞게 열매 맺지 못함이 뒤따랐다. 사탄의 일은 열매 맺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계시한다. 그는 왕국을 위해 열매 맺는 이들 가운데 왕국과 관계된 거짓 메시지를 각각 둔다. 거짓 메시지는 뿌리를 내리고 계속적으로 비본질적으로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것이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런 후 거짓 메시지는 비본질적으로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해서 붙잡는다. 그가 얼마나 끈질긴가!
a) 거짓 설교자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근육을 다 쓰도록 그들을 권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벧후 1:2-11, 유 1:3). 두 서신에서 이 권고가 그들 중심에 거짓교사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벧후 2:1-22, 유 1:4-25).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3장을 통해 말씀하신 것과 같은 거짓교사들이 있다. 그들은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비정상적인 성장을 하게 하는 자들이다. 또 바울은 이들을 진리를 비틀고, 왜곡하고, 구부리려고, 왕국말씀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어난 자들이라고 말했다(행 20:30-31). 이들은 성경에서 광범위하게 다뤄진 배교자들이다. 영어단어 배교는 헬라어 아포스타시아apostasia인데 단순히 영어식 표현이다. 이 단어는 아포apo(~로부터)와 스타시스stasis(서다)로 구성된 합성어이다. 그 단어는 “~에서 떠나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 단어는 차지하고 있던 그 장소에서 떠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배교는 믿음과 관계가 있다(딤후 2:18, 3:8, 유 1:3). 믿음과 관련된 배교는 믿음에 관한 메시지를 영접한 각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서 이 메시지를 지키는 것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처음에 진리를 듣고, 이해하고, 영접했던 이들이 나중엔 배교했다. 그들은 진리로부터 멀리 떠났다. 그들은 진리로부터 돌아섰고, 진리에 반대하기 시작했고, 비진리의 것을 가르쳤다. 베드로와 유다가 그들의 서신에서 경고한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사도행전과 그의 서신서에서 같은 경고를 했다. 그들 각자가 아주 유사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진리를 반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사탄은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을 안다. 사탄은 가장 손해를 끼칠 자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탄은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의 본성의 어떤 것들을 두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따르게 하려고 제자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행 20:30). 그들은 자신들의 종류대로 사악한 열매를 재생산하기 시작했다(창 1:11, 마 7:15-20, 13-14, 21-23). 사도행전 20:30절에 있는 이들에 대한 바울의 인식 외에도 베드로후서 2:18-20절에 그들에 대한 베드로의 인식 또한 기록되었다.
“또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
“그들은 헛된 것을 크게 부풀려 말하면서 잘못하며 사는 자들로부터 빠져나와 깨끗하게 된 자들을 육체의 정욕과 심한 방종을 통해 꾀어내느니라. 그들이 저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나 자신들은 부패의 종이 되었으니 사람이 누구에게 정복되면 바로 그 사람에게 속박되느니라. 만일 그들이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 세상의 오염에서 벗어난 뒤에 다시 그 안에 말려들어 정복되면 마지막 끝이 처음보다 그들에게 더 나쁘니”
베드로후서 2:20절에 지식(아는 것)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즉 성숙한 지식, 에피그노시스epignosis를 통해 세상의 오염에서 나왔다. 그들은 왕국말씀을 둘러싸고 있는 일들, 성숙한 지식 안으로 들어왔다. 왕국말씀의 일들에 대한 성숙한 지식 안으로 들어오는 그들은 이 일에서 돌아섰고, 그 일에 반한 왜곡된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왕국말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구원받은 이들이 분명했다(고전 2:14). 이 기초적인 지식은 그노시스gnosis다. 베드로후서 2:20절에서는 성숙한 지식, 에피그노시스epignosis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그 당시 중심적인 메시지로부터 돌아선 구원받은 이들과 관계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거짓교리를 가르침으로 진리를 왜곡시키고, 또 구부리고, 꼬는 자들이었다.
사탄은 그런 방식으로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열매를 맺는 것을 멈추게 하고, 자신들을 따르게 하려고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사용해 왔다.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했고, 그들은 사탄의 일을 하고 있었고, 그들은 사탄과 함께 발견되었으며, 가라지들로, 사악한 자의 아들들로 표현되었다.
b) 거짓 설교자들의 메시지
배교자들의 가르침은 파괴적이고, 파멸로 이끌고, 지독하고 지긋지긋한 이단들로 말해왔다(벧후 2:1). 이단들의 가르침은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 받는 것,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영원한 생명의 선물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심지어 영원한 생명은 그들 관념 속에 없다. 이단의 가르침은 오로지 가까이에 있는 문제 곧 왕국말씀과 관계가 있다. 배교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권해진 왕국과 관련 있는 멸망의 끝으로 인도하는 본질적인 이단이론을 가르쳤다. 수많은 말들이 배교자들의 가르침과 행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벧후 2:1-3, 10-22, 유 1:4, 8-25). 하지만 베드로후서에서 한 가지의 일이 무엇보다도 눈에 띈다. 베드로후서는 일곱구조로 되어있다. 이 일곱구조 중에 아주 특별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고 있다(벧후 1:16-18, 3:4-8). 배교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산다. 욕망은 혼적인 갈망을 말한다. 그것은 주님을 갈망하는 영적인 갈망이 아니다(벧후 3:3, 2:18). 이런 유형의 삶 속에 있는 배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메시야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성경적인 가르침인 것 같은 모든 것으로 마음을 찌르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부터 있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벧후 3:4)
그러면서 다음 구절은 창세기 처음 부분의 사건을 말함으로 배교자들에게 답한다. 거짓메시지가 배교자들의 메시지요, 그 메시지가 6,000년 끝 무렵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한다(벧후 3:5-9). 그들의 메시지는 한 면으로는 파멸을 가져오고, 다른 한 면으로는 축복을 가져오는 양면성이 있다. 그들은 기꺼이 그들의 관심이 눈에 띄지 않도록 이 모든 가르침의 전경(全景)을 둘러싸고 있는 일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교리를 전하려고 어디서나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의 대열에 침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배교자들에 의해 선포된 호도하고, 파괴적인 교리는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거짓가르침이 놓인 모든 기초는 한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의 거짓 가르침은 전체적으로 창세기 1:1-2:3절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된 기초에 대한 왜곡된 형태 위에 놓여 있다. 그들의 거짓가르침은 창세기 1:1-2:3절에 세우신 성경의 일곱구조를 폐지하려고 하는 다양한 형태로 전달되었다. 또 이 일곱구조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둘러싸고 있는 가르침을 부인하게 하려고 다양한 형태를 드러낸다. 성경진리에 대한 왜곡된 기초를 세우는 배교자들은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왕국말씀과 관련이 있는 다양한 측면에 이단적인 모든 것을 덧뿌리려고 했고, 또 덧뿌리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겨자종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은 정말 성공을 거두었다.
겨자종자는 잠시 동안 정상적으로 싹이 트고, 성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생각하지 못한 어떤 것이 되었다. 그것은 나무가 되었다. 나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짓교사들은 그 안에서 파괴하는 일을 계속하려고 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었다. 정상적인 성장은 타락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 것에서만 올 수 있다(벧전 2:1-2). 그 반대의 것도 사실이긴 마찬가지다. 부패, 타락이 일어났을 때 비정상적인 성장만을 가져올 수 있다. 비정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거짓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사람으로 살고, 양육 받도록 하신 유일한 것을 부패되고 타락한 형태로 선포했다. 그렇게 하서라도 그들은 창세기 2장에 있는 문제의 핵심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겨자종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배교자들의 일이었다. 영적인 음식에 대한 타락된 식단, 비정상적인 식단은 타락된 성장, 비정상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성장은 궁극적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거짓교사들은 타락한 상태가 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상태로 그리스도인들이 살도록 그 안에 둥지를 튼 것이다.
2) 교회시대의 끝
교회시대의 끝 무렵(즉, 오늘날) 왕국말씀과 관련이 있으며, 기독교 전역에 드러나는 상태들은 교회가 처음 건축되었던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의 2,000년이 지나 초대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이해해 왔던 왕국말씀은 그리스도인 무리 가운데서 좀처럼 듣기가 힘들어졌다.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지 않음으로 교회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만큼 다가오고 있는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오늘날 사탄은 그리스도인들 대열에 배교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침투하여 잠식하려고 한다.
기독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전체적으로 회복하고, 변화시키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그것을 넘어서 배교자들의 작은 침투일지라도 오늘날 사탄의 부분이 교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오늘날 아주 많은 배교자들을 찾아내기란 힘들 것이다. 그들은 배교한 자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배교하기 전에 왕국말씀을 이해하러 와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이 메시지에 정통한 지식을 갖고, 배교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드물게 있다.
오늘날 기독교에 존재하는 것은 알곡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겨자종자의 비정상적으로 자라게 하는 사탄의 여파요, 결과다. 일반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왕국말씀에 관한 부패한 기독교는 오늘날 존재한다. 설교단에 서는 이들은 왕국말씀과 왕국말씀의 부패된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 따라서 메시지를 듣는 이들은 왕국말씀과 왕국말씀의 부패된 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설교단에 서는 이들이 보통 부패한 왕국말씀에 대한 메시지를 서둘러 차단한다. 그러나 왕국말씀은 더 드러내야 한다. 이 메시지는 신학교에서 받은 훈련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메시지들은 오류의 방식에 따른 것임을 보여준다. 이런 면은 교회시대 초기에 거짓교사들의 효력이 교회시대 끝 무렵 두 가지의 일에 의해 증명된다. 하나는 특별하게 그리스도인 지도자의 상태와 다른 하나는 일반적으로 교회의 상태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시대에 존재했던 것과 오늘날 기독교에 존재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왕국말씀을 믿고 열매 맺는 이들이 어떤 이는 여기에, 어떤 이는 저기에 있어 배교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배교의 일들은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배교하게 하는 사탄은 거의 2,000 전에 시작한 것을 완전히 이루려는 자신의 노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탄은 전적으로 계속해서 타락하게 하려는 현 상황을 유지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집밖 바닷가에서 주어진 비유는 교회시대가 완결되는 끝에서 전적타락을 가져오는 데 증거가 되고, 또 이 비유들이 오늘날 기독교에 정확하게 존재하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한 나무
배교자들의 거짓메시지의 결과로 가져오는 특정한 형태의 비정상적인 영적 성장은 교회시대 과정의 교회역사와 교회시대 끝 무렵 오늘날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일들이다. 역사 가운데 겨자종자의 비정상적인 성장은 한 나무의 결과가 되었다. 비정상적인 성장을 가져온 자들로 교회가 끝날 무렵 그 나무의 가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나무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고, 심지어 땅 속에 더 깊이 뿌리를 뻗고 있으며, 사탄이 부리는 노예들이 그 가지에 머물고 있다.
1) 한 나무의 상징성
성경에서 나무의 상징성을 기록하고 있는 데 완전하게 알고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한 나무는 성경에서 민족적인 힘,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사사기 9:8-15절에 세상에서 가장 오래 알려진 비유가 있다. 나무들은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들은 자신들을 통치할 왕을 선택하려고 했다. 다니엘예언서는 하늘에 이른 땅 중앙에 있는 한 나무에 대한 환상을 말한다. 이 나무는 바벨론왕국을 상징한다(단 4:10-12, 20-22). 이스라엘은 무화과나무로 요엘서에서 말해졌다(욜 1:7). 그리스도는 땅에 속한 그분의 사역 동안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또한 모든 나무들을 이방민족들로 말씀하셨다(마 21:18-19, 24:32, 눅 21:29). 국가적인 힘을 나타내기 위해 상징적인 의미로 나무들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과 관련되어 있음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경이 주는 상징의 범위 안에 남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겨자종자가 발아하고, 결국 나무가 될 여지가 여전히 있다.
상징으로 보여준 가르침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 시대에 전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장차 미래의 교회시대에 미뤄놨던 겨자종자가 발아해서 결국 민족적인 힘이 된 것을 대표한다. 한 나무는 사탄이 하늘들의 왕국에서 통치한 그 때에 민족적인 힘이 되었고, 오늘날 사탄왕국에서 민족적인 힘이 되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발휘하는 힘에 대한 어떤 성경적인 생각은 사탄이 잡고 있던 홀(笏)을 내려놓은 후 그리스도께서 그 홀(笏)을 붙잡은 미래의 날을 위해 따로 떼어 둔 것이었다. 이 본질의 힘은 장차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오로지 발휘된다.
요약하자면 겨자종자 비유에서 볼 수 있는 사탄은 자신의 통제와 지배에 두려고 민족적인 힘으로 자라서 기독교, 교회의 형태가 되었다. 사람을 타락시키는 사탄은 민족들을 통해 땅을 지배해 왔다. 사탄의 지배행위는 이스라엘이 민족들 가운데 속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배제하지 않았다(민 23:9). 사탄에 의한 이런 유형의 지배는 다니엘 10:12-21절에 계시되었다.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민족들을 통치하지만 이스라엘은 민족들과 사탄의 통치에서 구별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한 나무로 상징된 기독교에서 비정상적인 성장을 산출하는 것이 사탄의 노력이지만 그의 졸개들로 나뭇가지에 공중의 새들의 둥지를 틀게 함으로 이 민족적인 힘을 수용하도록 해 그는 그가 민족적인 힘을 통해 통치할 동안 민족적인 힘을 기독교가 만들어 내도록 했다. 사탄은 그와 그의 천사들이 통치자의 지위를 갖고, 통제할 수 있었음으로 민족들로 민족적인 힘을 기독교에서 만들어 내었다.
2) 역사가운데..... 오늘날
처음 1세기 배교자들이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침투되었을 때 기독교가 로마에서는 불법종교로 간주되었다.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그리스도인들은 반역죄를 지은 것으로 여겼다. 로마는 황제를 숭배했다. 이 실행으로 종교와 국가는 하나가 되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외의 한 왕국과 카이사르외 한 왕을 신앙했었고, 그분과 그분의 왕국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사람들이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을 반역적이고, 불법적이라고 간주했던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수세기를 지나면서 로마사람들의 핍박을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 다른 일이 일어났다. 배교자들은 로마제국과 기독교를 구별하는 장애물들을 점차적으로 없애버렸다. 4세기 끝 무렵까지 이러한 실행이 계속된 이러한 장애물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합병으로 이어졌다. 4세기 초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 자신이 기독교를 껴안았다. 이 모든 것들은 뒤에 이어졌던 것의 기초가 되었다. A.D.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변형된 기독교 즉 로마카톨릭을 배타적국교가 되도록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A.D. 395년에 로마카톨릭은 로마제국의 공식적이고 유일한 종교로 인정되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국가적인 권위의 영역에 있는 세상 권세에 완전히 휘말렸다. 이 세상 권세는 사탄이 통제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서 이탈하게 하는 어떤 힘이 되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이 상태는 이전의 로마사람들의 핍박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전의 핍박은 그리스도인 성장에서 나온 것뿐이다. 로마사람들의 핍박 이전에 살던 그리스도인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의 피가 교회의 종자”라고 말했다.
기독교에서 궁극적으로 일어난 것은 배교자들의 원인이었다. 그들의 공격은 그 자체가 독립체 즉 교회의 중심이 아니었고, 열매를 맺는 단계의 독립체, 즉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교회 즉 독립체가 부패와 하락함을 소개하고, 그것들을 먹고, 양육 받도록 했다. 그 결과의 끝은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것과 똑같이 되었다. 겨자종자는 발아해 한 동안 정상적으로 자랐고, 그런 후 비정상적으로 자라서 결국 한 나무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 비정상적인 성장은 궁극적으로 열매 맺지 못하게 되었다. 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교회시대에 차지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오늘날 사탄왕국에 있는 이방세계의 권세와 관계있음을 알았다. 이것은 기독교가 결코 회복하지 못했던 그런 위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로마가 오랫동안 그 현장에서 떠났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마태복음 13:22절의 한 나무와 관련이 되어 있음을 그들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은 오늘날 사탄왕국에서 어떤 형태의 세력을 행사하려고 하고, 모든 형태의 풍조에 따르는 오늘날 정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세계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때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왕국과 그리스도인들을 취하신 후 권세와 권위의 위치를 차지하신 미래에도 일어날 일이다.
오늘날 모든 시스템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으로 인해 비참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시스템과 관계있는 일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날 그 시스템들이 고통을 받는 것과 같은 운명이 되어 그들의 일도 고통을 받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멸해질 것이요, 심판대에서 불로 태워질 것이요, 그리고 심지어 이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게 될지라도 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고전 3:11-15).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과의 관계가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제왕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에 거절될 것이다.
하지만 유사 기독교가 오늘날 세상 시스템을 다스림 가운데 휘말려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 일들이 다르고, 열매가 다르고, 또 결과 또한 다를 것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일들은 세상 시스템과 관계없는 일들이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운명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불에 견딜 일을 갖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왕국과 관련이 있는 것을 맡을 것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제왕적 권세와 권위를 발휘할 것을 기다리는 이들이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공동상속자들로서 다스릴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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