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왕국의 비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Hernhut 2016. 7. 5. 08:56

 

성경: 마태복음 13:3-9

 

그리스도께서 집에서 나가셔서 해안가에서 주신 네 비유 중 첫 번째 비유인 씨 뿌리는 자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분은 이스라엘과 다른 사람들에게 제안된 왕국, 하늘왕국, 열매 맺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 비유는 미래의 시간에 적용된 것이요, 장차 그리스도 안에 있을 새 창조에게 적용되는 비유다. 집에서 나가셔서 바닷가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제안하셨던 하늘들 왕국은 마태복음에 서 메마른 무화과나무로 나타낸다(21:18-19, 1:7). 무화과나무는 잎이 있었지만 열매가 없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무에 저주를 선포하셨다. 이것은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에게서 하늘들 왕국을 빼앗으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무화과나무가 마르도록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다음 날에 곧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다(21:19-20, 11:13-14, 20-21).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났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스라엘에게서 열매 맺게 되는 새 민족에게로 왕국을 옮기는데 이어서 제도를 완전하게 분리하시는 동안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앞서 내다보는 것이다(21:33-43). 민족의 메마른 상태였던 이스라엘은 따로 떼어졌고, 그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열매 맺는 것과 하늘들의 왕국을 위해서 다른 민족을 다루시고 계신다. 베드로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민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긍휼을 얻은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요, 선택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벧전 2:9-10)이라고 말한다. 이전 두 창조(유대인과 이방인)에서 분리되었고, 두 창조가 아닌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는 새 사람이다(2:12-15).

이전 두 창조(유대인과 이방인)에서 볼 수 있었던 차별과 차이를 보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는 단순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3:26-2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는 새 사람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인종이다(고후 5:17). 이것이 성경이 인종을 시간을 따라 세 부분으로 구별하고 분리하여 나누는 이유다(고전 10:32).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존재하고 세워지는 것뿐만 아니라 왕국을 위해 열매 맺을 기회를 확장하게 되는 이 새 창조를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왕국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 왕국의 열매를 산출할 민족에게 주어진 그 때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21:43). 하지만 비유의 처음 세 부분의 한 새사람들은 열매 맺는 것을 실패한다. 이들은 이스라엘에게 속해 있으면서 제안한 왕국에 관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율법적 그리스도인들). 이기는 것과 열매 맺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은 여러 수단을 통해 이기려고 했기에 열매 맺지 못했다. 하지만 비유의 마지막 부분은 오늘날 제도 동안 신실한 한 새사람을 말한다(신약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열매가 열리지 않는 이스라엘과 다르게 이기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처음 세 부분에 계시된 하나님 앞에서 실존했던 이 새 창조, 한 새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이다. 열매 맺는 것은 비유의 마지막 한 부분에서만 볼 수 있다. 처음 세 부분의 각 사람들은 여러 수단을 통해서 이기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결과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 모든 것들은 비유 그자체가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무리들에게 말씀을 하시고 계셨던 이유에 관해 제자들에게 답하신 후(13:10-17) 그리스도는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를 더 설명하시고, 해석적인 도움을 그들에게 주셨다(13:18-23). 그리스도는 각 부분을 간략하게 설명하시고, 네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추가적인 해석을 공급하신 이유는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를 돕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다른 여섯 비유에 대한 기초다. 이어지는 여섯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비유 서두에 나와 있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 적절하게 놓인 토대는 그 토대 위에 합당하게 건축될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 해석상의 도움을 주신 후 그리스도는 두 번째 비유부터 네 번째 비유를 주셨는데 그에 대한 설명은 빼놓으셨다(13:24-33). 그런데 집으로 들어가신 후 그리스도는 두 번째 비유에 관한 질문을 제자들에게서 받으셨다. 그리스도는 이 비유에 대한 해석상의 추가적인 도움을 주셨다(13:36-43). 그리스도는 집에서 다섯 번째 비유부터 일곱 번째 비유까지 주셨다(13:44-48). 이 비유들은 친밀한 비유요, 여러 가지 것들과 관련이 있는 아주 짧은 설명으로 말씀해 주셨다(13:49-50). 이 일곱 비유는 왕국에 대한 말씀이요(13:19-23),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한 것이요(13:8, 23), 하늘들의 왕국의 비밀(13:11)로 이스라엘 외의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13:1). 따라서 일곱 비유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왕국을 거절하여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 오늘날 제도에서 왕국을 제안 받고 있는 자들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일곱 비유는 이스라엘에 의해 왕국이 거절되고, 그들로부터 왕국이 옮겨지는 시간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거절한 것에 대해 받아들일 사람들, 새로운 독립체, 새 창조와 관계가 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세 비유를 주시기 전 집으로 다시 돌아 오셨지만 비유를 듣는 사람들과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달라진 게 없다. 교회는 계속해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세 비유는 두 가지의 것에 관한 하나님의 그림을 그리신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분의 거래요, 다루심이다. 다른 하나는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인들의 구분과 그분의 구속 이야기다. 이것은 심판대에서 추려지고, 측량된 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인도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분과 결혼을 하고 상속을 구속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신부는 이미 심판대에서 선발되었고, 계시되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다른 어떤 비유는 단순히 믿음을 통한 은혜로 인한 구원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왕국에 관한 열매를 맺는 것이 전달되고 있다. 이 비유들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열매를 맺는 곳에서 따로 부르심을 받은 새 창조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다루시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 경우에는 구원받지 않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과 관계있는 비유가 하나도 없다. 모든 비유는 오로지 구원 받은 성도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에 있는 그분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공동상속자들이 그분과 함께 권세를 발휘할 그리스도의 시대와 관계가 있다.

첫 번째 비유에서 네 부분으로, 두 번째 비유에서 두 부분으로 나누고, 세 번째 비유에서 비정상적으로 자라고, 네 번째 비유에서 누룩이 전체에 퍼지게 되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비유에서의 상속구속과 결혼, 그리고 일곱 번째 비유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 모두 구원 받은 자들에게만 관계가 있다.

 

 

씨 뿌리는 방식

 

씨 뿌리는 자는 사람의 아들로서 두 번째 비유에서 밝혀졌다(13:37, 8:4-6, 7:13-14, 16:13-16). 헬라 원문에는 씨 뿌리는 자 앞에 씨 뿌리는 특정한 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설명에서 씨 뿌리는 곳은 밭이요, 세상에 뿌려진다고 계시되었다(13:38). 이 비유에서 이 씨 뿌리는 곳은 다른 밭이요, 세상의 다양한 곳에서 일어난다. 세상에 씨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리스도이신 씨 뿌리는 자는 씨앗 전체를 뿌리지 않으시고 각각의 밭에 사람들을 뿌리셨다. 이탤릭체로 된 씨앗들이라는 단어는 헬라 원문에는 없는 단어로 번역자들에 의해 삽입된 단어임을 가리킨다(13:4).

하지만 두 번째 비유에서 씨앗이 뿌려지고 있다. “좋은 씨를 밭에 그리스도께서 뿌리신 것이다(13:24, 27). 첫 번째 비유에서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좋은 씨앗은 각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왕국의 자손들로 말해졌다(13:38). 그러므로 이 씨앗들이 각 성도들을 대표한다고 이해하는 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영어원문에 있는 씨앗들이라는 단어를 유지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두 번째 비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첫 번째 비유의 네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하는 다른 네 구절과 꼭 맞게 연결된다. 처음 씨 뿌리는 비유의 네 부분을 설명하는 마태복음 13:19절 하반부는 이 사람은 길가에 뿌려졌던 그니라.”고 읽어야 한다. 비유의 네 부분에서 두 번째 씨앗을 뿌리는 것을 설명하는 20절 처음 부분은 그 사람은 돌처럼 차가운 곳에 뿌려졌다.”고 읽어야 한다. 22절은 또 가시가 있는 곳에 뿌려진 그니라고 읽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23절은 하지만 좋은 땅에 뿌려진 그는으로 읽어야 한다. 씨를 뿌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열매를 맺을 목적으로 각각 다른 세상 밭에 각 그리스도인들을 뿌리셨다. 이 열매 맺는 것은 하늘들의 왕국과만 관계가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씨를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온다(4:13-20, 8:4-15). 두 복음서에서도 왕국말씀이 열매 맺게 하려고 세상 밖에 있는 다른 장소에 뿌려졌다. 물론 말씀이 구원 받은 성도들 외에 뿌려질 수 없었기 때문에 뿌려진 말씀과 뿌려진 성도라는 것에는 갈등이 없다. 씨가 뿌려졌다(8:5). 하지만 이 씨는 말씀으로 알려졌다(8:11). 말씀은 사실상 씨가 뿌려진 성도 안에 뿌려졌다. 성도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다(13:19-23, 4:14-20, 8:11-15). 세 곳 다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었다. 이 비유들은 오늘날 기독교에서 차지하고 있는 완벽한 그림으로 그려지고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합당하게 이해한다면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세상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의 모든 행동에 중심적인 초점이 되어야 한다. 또 이 씨 뿌리는 비유가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는 성령의 사역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활동에 중심적인 초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23:1-25:34).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의 행동과 성령의 사역은 이런 면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두 항목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들에 씨를 뿌린 그리스도와 오늘날 성령의 사역이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다. 각 성도는 자신이 기회를 확장해가고, 위치를 정하고, 또 왕국의 열매를 맺기 전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통과해야 한다. 성도는 상속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로서 그 그리스도의 상속을 소유하기 전에 주인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5:24, 8:17, 2:1-5).  

그러므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먼저 밭에 씨 뿌린 자들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 성령의 일은 이 부분에서 시작한다(1:2b-5).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앞에 놓인 상속에 관해 생각하기 전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다른 무엇보다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일을 하시려고 오늘날 세상에 계신다. 그분은 생명 없는 자들 안으로 생명을 호흡하시고, 각 사람 안에 영적인 생명을 주시려고 세상에 계신다(2:7, 37:1-10, 5:24, 2:1, 5, 8). 성령께서 종자를 뿌리는 비유나 또 다른 여섯 비유에서 사람을 다루심을 볼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신부를 찾으시고, 옮기시기 위해 오늘날 세상에서 그분의 임재에 대한 중심목적을 완료하실 수 있다(24:33, 36, 58-67).

 

 

종자 뿌리는 곳

 

종자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은 누군가 왕국말씀을 들을 때라는 말로 시작한다(13:19a). 그런데 이 4부분의 표현은 이미 언급된 왕국말씀이라고 하신다(13:20-23). 이 왕국말씀은 이스라엘에게 제안되고 있었던 바로 그 왕국에 대한 메시지다(3:1-12:50). 또 이 말은 이스라엘 외의 사람들에게도 제안되고 있다. 이 왕국에 대한 메시지라는 말이 문맥 안에 있다. 이 종자를 뿌리는 자의 비유는 왕국말씀으로 불렸다. 본문에서 말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세상에 대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는 것과 반대로 이 메시지는 믿음을 통한 은혜의 구원과 관계가 없다. 이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관계가 있다. 이 비유에 나타나는 각각의 다른 반응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영원한 진리와 관계가 없다. 이 반응들은 그리스도의 왕국과 관계가 있다.

종자를 뿌리는 자의 모든 비유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왕국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이 메시지를 들었을 때 열매를 맺거나 아니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들을 믿음을 통한 은혜의 구원으로 받아들이면 부패하게 되고 파멸되게 하는 것이다. 이 메시지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메시지를 오용한다. 이 복음을 오해하고 있다. 이 메시지를 은혜의 복음으로 이해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부패시키고, 파멸시키는 것이다.

 

 

1) 길가에 뿌려진 자들

 

비유와 해설을 비교해 보면 길가에 뿌려진 자들은 왕국의 말씀을 듣는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지만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을 실패한다. 메시지를 이해 못하는 말씀은 사악한 자를 대표하는 날짐승 즉 사탄에게 빼앗긴다. 그는 메시지를 이해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따라와 메시지를 없애버리고, 그리스도인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13:4, 19, 벧전 5:6-9). 왕국말씀에 관해 이런 유형의 체험을 하는 길가에 뿌려진 자들은 오늘날 왕국말씀을 듣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할 것이다. 그들은 메시지를 이해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들의 영적인 생활에서 메시지에 흥미가 적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탄은 그들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멸망시키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땅에 계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은 호도(糊塗)했다(12:9-32, 15:1-39, 16:1-28, 23:13, 15). 결국 이사야 대언자가 말한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위가 이루어졌다. 이사야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밀랍으로 봉해졌고, 그들의 귀는 듣는 것에 둔하고, 눈은 닫혔다고 말했다(13:15a, 6:9-10). 유대사람들은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통찰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있는 종교지도자 즉 근본주의적인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호도(糊塗)했다.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이 왕국메시지를 들었을 때 그들의 반응은 종자뿌리는 자의 비유 처음 부분에 설명된 자들의 반응과 다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었던 모든 문제가 오늘날 기독교에서 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때의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을 호도(糊塗)했고, 오늘날 종교지도자들도 사람들을 호도(糊塗)한다. 이것은 주로 소위 근본적인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것들이다. 마태복음 13장의 처음 네 비유의 연대순과 요한계시록 2, 3장에서 볼 때 마지막 시대의 기독교 상태는 왕국말씀에 관한 완전한 부패와 거절에 머물 것이다. 즉 이 메시지가 관련하고 있는 한 모든 기독교는 이 제도가 끝나는 시대에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이 될 것이고, 완벽하게 부패되고 발효될 것이다(13:33, 3:14-20).

그리스도의 초림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교회의 성도들은 이사야 대언자가 설명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똑같은 상태였다(3:17). 눈이 먼 상태의 이스라엘이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라오디게아교회도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수많은 각 사람은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였고, 눈도 뜨고 있었다(13:15b-16, 24:16, 31). 기독교 역시 수많은 각 성도들은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또 눈도 뜨고 있다(고후 3:14-18, 3:18).

 

 

2) 돌이 많은 곳에 뿌려진 자들

 

돌이 많은 곳에 뿌려진 자들은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이해하고, 기쁘게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한다(13:5-6, 20-21).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에 관해 즐거워하는 자들이다. 왕국말씀 때문에 그들의 생활이 즐겁고 새로운 기쁨을 찾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 말씀에 충분히 뿌리를 내리기 전에 환란과 핍박이 오게 되어 땅에 뿌리를 뻗을 수 없다. 그들은 잠깐 견디지만 태양 즉 환란과 핍박이 강하게 올 때에 뿌리가 뻗지 못해 그들은 시들어 버린다(13:5-6, 21). 결국 믿음의 성숙이 없다는 말이다. 환란과 핍박은 왕국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탄이 그리스도의 다가오는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를 대항하려고 자신의 힘을 모으지는 못한다. 이 메시지는 땅의 다스림을 바꾸는 것과 관계가 있다. 사탄과 그가 부리는 천사들은 오늘날 하늘왕국에서부터 땅 위를 다스린다. 하지만 새로운 통치자들 즉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 상속자들이 곧 다가온다. 사탄과 그가 부리는 천사들이 내려오고, 또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 상속자들도 왕국을 취하러 내려온다.

왕국의 말씀은 이 제도 끝에 주어질 메시지다. 다가오는 그날에 사탄을 대신하여 땅을 통치하실 그리스도와 관계있는 메시지다. 오늘날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통치하는 것을 대신해 그날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상속자들이 차지할 그리스도인들의 위치와 관계있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사탄이 그의 힘을 다해 행사할 모든 것을 막게 될 어떤 것이다.

에베소서 3:1-11절에서 왕국말씀은 오늘날 하늘에 속한 곳에 있는 정사와 권세 즉 사탄과 그가 부리는 천사들에게 교회를 통해 어떤 것을 보여준다(3:10). 알려진 그 메시지는 사탄과 그가 부리는 천사들이 대체된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고, 다가오는 그날 그리스도와 그분의 행정에 함께하도록 초대할 때 긍정적인 반응을 그리스도인들과 관계가 있다(24:36, 58).

에베소서 6:10-24절에 있는 영적전쟁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 사탄과 그가 부리는 천사들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에 몹시 격렬할 수 있다. 우선 사탄은 이 메시지를 들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을 막으려고 그의 힘으로 온 힘을 다할 것이다. 사탄은 이 메시지를 제거하고, 멸하려고 모든 힘을 다할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삼킬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메시지를 듣고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환란이나 핍박을 가져온다. 환란과 핍박은 왕국말씀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일어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사탄은 이 환란과 핍박이 예외 없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오게 한다. 세상에 있는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은 이 모든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영역에서 완전히 움직일 수 없도록 불법과 죄 가운데서 죽게 한다. 이 환란과 핍박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오게 할 뿐만 아니라 많은 때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서 특별하게 더 찾아오게 한다(9:22). 이 환란과 핍박으로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 헬라어에서는 이를 스칸달리조skandalizo라고 하고 올무를 놓아 걸려 넘어지게 하다, 길 가운데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다, 걸림돌이 되게 하다.”라는 말이다. 사탄은 오류와 컬트(광신적이고 이단적인 것)과 관계있는 것을 듣게 하고, 이해하게 하고, 받아들이도록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성숙이 부족하기 때문에 걸려 넘어진다. 그들은 쉽게 포기하고, 그만두고, 신앙을 버린다. 결국 사탄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승리를 거둔다.

 

 

3) 가시나무 사이에 뿌려진 자들

 

가시나무 사이에 뿌려진 자들은 말씀을 듣는 자들을 대표하지만 세상에 속한 것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13:7, 22).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분명히 잠깐 동안 견디지만 대적에 의해 열매를 맺지 못한다(8:14). 그들의 실패를 가져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관심, 재물의 유혹 등에 의해 드러난다. 그런 다음 누가는 삶의 쾌락을 추가하여 말하고 있다(8:14). 각 그리스도인들은 미성숙함, 부정적인 것, 느슨한 경계, 그리고 수많은 다른 것들을 막론하고 사탄 아래에 있는 세상 시스템에 있는 다양한 일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실패를 가져오게 한다(2:15-17). 사탄은 영적전쟁에서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사용한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경고를 주의하는 것을 실패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관심을 고정해 왔고, 고정해야 할 곳은 주님의 가르침이요, 그분의 경고이지만 사탄이 수많은 것들로 시선고정을 방해해 오고 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게까지 바라보아야 한다(12:1-2).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시스템의 일들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아보아야 한다. 그들은 이 세상 시스템의 것들을 돌아보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지 말고, , 그리스도께로 시선을 곧게 하여 고정해야 한다. 그분은 믿음의 근원이시고 완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시선을 고정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고통과 수치를 참으신 것처럼 그분으로 인한 고통과 수치를 견뎌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분 앞에 놓여 있던 기쁨에 그분 자신의 시선을 고정하셨다. 그리스도는 수치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참으셨다(12:2, 25:21, 23, 벧전 2:21). 그분의 십자가는 다가오는 그분의 영광과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수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시스템인 초원에 남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왕국인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초원에 있는 것처럼 불타버릴 것이다(19:17, 19:26, 9:62, 17:32-33). 그리스도인들은 왕과 그분의 왕국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환란이나 핍박으로 고통을 주는 것으로 뒤를 돌아보거나 주위를 보지 말고 산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이러한 환란과 핍박은 앞에 놓인 영광과 기쁨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도록 그의 끊임없는 노력을 다할 것이다.

 

 

4) 좋은 땅에 뿌려진 자들

 

이 네 번째 씨 뿌리는 비유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문제를 대표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자들은 말씀을 들은 이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으로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그들을 단념케 하는 환란과 핍박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고, 오늘날 세상 시스템의 것들보다 오히려 앞에 있는 목표에 고정시키는 이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또 성장한다(20:32, 1:21, 벧전 2:2). 그들은 환란과 핍박이 멈추지 않고, 이 시대에 대한 관심, 맘몬에 대한 욕심, 삶에 대한 자랑으로 탈선하지 않는다. 이 삶의 일로 얽히는 것을 거절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분투하는 자들 앞에 왕관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안다(딤후 2:4-5). 그러므로 이들은 이기는 이들이요, 열매 맺는 이들이다. 이들은 세상(요일 5:4), 육체(8:13, 3:5), 마귀(4:7, 벧전 5:9)를 이기는 이들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열매를 맺는다. 그들은 언급된 네 무리 중 유일하게 열매 맺는 이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양을 열매 맺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100,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60,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30배의 결실을 맺는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 동안 목적을 이루는 유일한 이들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곳, 그 열매를 맺는다. 그들은 다가오는 하늘들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위치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다가오는 그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게 될 자들이요, 그들의 맺은 열매로 정확하게 비례하여 위치를 차지할 이들이다.

 

 

종자를 뿌린 결과

 

그리스도의 다가오는 왕국의 위치는 무분별한 어떤 방식으로 취해지는 것이 아니고, 합당한 방식으로 얻어야 한다(20:21-23). 그날에 그리스도 앞에 그리스도인 각자가 나타난다. 그 때 각 그리스도는 열매 맺은 것을 통해 정확하게 그 위치를 받을 것이다. 각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수고에 따라 자신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고전 3:8).

보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미스도스misthos로 히브리어 미스다포도시아misthapodosia와 같은 단어다. 이 단어는 봉사를 받은 것에 대해 봉사료를 지불하다, 혹은 임금을 주다와 관계가 있다. 그 일은 정확할 것이다. 지불되는 보상은 열매 맺은 것과 정확하게 비례할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열매 맺는 수고도 없을 것이요, 임금도 주어지지 못할 것이다. 단지 그들은 손해를 입을 것이다(고전 3:15). 반면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고전 3:14). 열매 맺는 수고로 임금이 지불될 것이다.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은 보상에 보상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당한 보상이다. 정당하게 임금을 받게 된다(2:2, 11:26). 종자를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다양한 양의 열매 맺는 이들의 언급은 100, 60, 30배로 구분되어 있다(13:8, 23).

또 다른 비유에서 다양한 양의 보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열매 맺음과 정확하게 비례할 것을 말한다(19:11-27). 므나비유에서 10명의 종들 각각에게 1므나씩 주어졌다.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주님의 사업에 사용할 몫의 사업자금이었다. 그들은 기회를 찾아 이문을 남기기 위해 적절한 곳에 투자해야 했다. 한 종은 10배의 이문을 남겼다. 그런 후 주님께서 재림하셨을 때 10도시를 다스리는 권세를 그에게 주셨다. 또 다른 종은 5배의 이문을 남겼다. 그 때에 주님은 그에게 5도시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세 번째 종은 그에게 맡겨진 것을 사용하는데 실패했고, 다스리는 권세를 부인됐을 뿐만 아니라 주님에 의해 격렬하게 꾸짖음을 받았다. 이것은 분명하게 일어날 일이다. 이 일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다.

다른 방식으로 이런 문제들이 일어났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신 것이다. 인간의 방식으로 안다고 10도시를 다스리게 하고, 모른다고 해서 다스릴 권세를 빼앗는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장차 섬김의 대가로 그분의 종들을 대하심은 그분께서 세우신 추수에 대한 바뀔 수 없는 법칙과 완전하게 일치할 것이다.

1.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뿌리는 것을 거둔다. 자신의 육체에 뿌리는 사람은 육체의 부패를 거둘 것이요, 성령을 위해 뿌리는 사람은 성령의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이다(6:7-8, 1:11). 다가오는 시대의 생명은 영존하는 생명이요, 헬라어 아이오니오스aionios.

2.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뿌리는 것보다 더 거둔다.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은 회오리바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지만(8:7) 작은 일에 신실한 이들은 많은 일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25:21, 23).

3. 씨 뿌리는 시기와 거두는 시기의 간격이 있다. 사람은 현 제도가운데 씨를 뿌리지만 좋건 나쁘건 전적으로 파종에 달려있고, 다가오는 제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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