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집 밖으로 나가셔서 해변가에 앉으셨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그분은 배에 오르셔서, 앉아 계셨고, 많은 군중들은 해변에 모여 서 있거나 앉아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분은 많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마 13:1-3a). 마태복음 13장은 그 비유들과 관련된 일곱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땅에 속한 사역에서 그들을 부르시고 특별한 시간에 주신 메시지가 바로 이 메시지다. 그 메시지는 “하늘들 왕국의 비밀(신비)”에 관한 내용이다(마 13:11). 이 비유들은 신약성경에 있는 수많은 비밀들 중의 첫 번째를 이루고 있다. 이 비유들은 신약성경에 있는 다른 어떤 비밀과 관계가 있다. 이 비유들은 처음부터 구약성경에 있었던 비밀들을 그리스도께서 여신 것이다.
구약성경에 한 곳 이상 그 뿌리가 있지 않고는 신약성경의 비밀은 아무것도 없다. “비밀, 신비”는 바울에게 계시되었다(엡 3:1-21). 이런 계시는 구약성경에 그 근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바울의 개인적인 지식에서부터 나온 것이다(행 9:20-22). 그의 계시의 문자는 지나가 버리지만 영으로는 오늘날까지 움직여 온 것이다(고후 3:6-18). 이 계시는 바울이 이미 알고 있었고, 이 성경의 빛으로 더 공급 받은 것이었다. 그의 계시는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왕국비밀과 관계가 있다. 이 비밀들은 구약성경에 그 뿌리가 있다. 그 비밀들은 계시를 받은 자들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여긴 지식에서 이끌어 내어졌다.
왕국비밀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비유로 사용되었고, 가르침의 형식으로 열렸고, 계시되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사역에서 이 관점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는 이 때 이전에 간간히 비유들을 사용하셨지만(눅 5:36-39) 이 순간부터 특별하게 계시된 이유 때문에 이 비유들은 그분의 사역에서 주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비유”는 헬라어 “파라보레parabole”의 영어식 표현이다. 이 표현은 “직유, 곁에 놓다”를 의미하는 합성어다. 비유는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 곁에 어떠한 것을 내려놓은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미 계시된 진리 곁에 오늘날의 진리만이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추가적인 진리는 이미 계시된 진리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이 이 비유들이 훈련으로 이해될 수 있었던 이유지만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마 13:10-17).
오늘날 계시된 진리들, 비유들을 이해하는 것은 이전에 계시된 진리든 아니든 받아들이는 것에 달려있다. 제자들은 이전에 계시된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유로 다뤄진 것들은 이전에 받아들였던 것으로 비유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메시지를 거절하는 자들은 이미 계시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유로 다뤄졌던 것을 거절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리형태의 이 비유들은 구약성경에서 계시된 것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메시지를 거절하는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계시하신 형태의 진리들이었다. 이러한 비유들은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들이고, 구약성경의 계시와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들이다. 이런 방면에서 그 비유들이 구약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특히 바로 직전 집을 떠나는 것과 해변에서 이 비유로 말씀을 시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계시된 것이 그 비유를 통해 뿜어져 나온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3장은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하늘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비밀들에 대해 여시고 밝히시는 것과 관계가 있다.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하늘왕국은 구약성경이나 마태복음에서 이미 볼 수 있었던 형태의 하늘왕국과 똑같은 왕국이다. 마태복음 13장은 문자적으로 다루어졌고, 이전의 성경부터 존재하는 왕국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 하늘왕국의 형태는 인자의 시대와 장차 주의 시대, 곧 일곱 번째 1,000년의 시대 모두 차이가 없는 왕국이다. 이 말은 하늘에 속한 왕국영역이 이 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땅 위에 나타나는 하늘의 통치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서 사탄과 그의 천사들(자격을 상실했지만)은 이 하늘에 속한 영역에서 땅을 통치했고 통치한다. 하지만 다가오고 있는 주의 시대에는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더 이상 이 영역에서 통치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 상속자라고 불리는 사람(교회)이 홀을 붙잡을 것이고 하늘에 속한 영역에서 통치할 것이다(히 2:5-10, 4:4-9, 5:6, 10, 시 110:1-4).
이스라엘에게든, 그리스도인에게든 하늘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는 하늘에 속한 영역으로 들어가 이 영역을 차지하고, 홀을 붙잡는 사람과 관계가 있다.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일곱 비유는 하늘왕국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 천주교, 개신교에는 잘못된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천주교, 개신교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일곱 비유를 말한 하늘왕국을 오늘날 땅에 존재하는 세상왕국과 연결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오늘날의 왕국 형태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고, 오늘날 존재하지 않고, 또 미래에도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왕국에 대한 잘못된 이런 생각과 마찬가지로 왕국과 관련된 오해가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아들왕국에 대해 존재하는 오늘날 형태는 미래에 실제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왕국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소위 오늘날 왕국의 비밀 형태로 불린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사탄과 그가 부리는 천사들이 홀을 붙잡고 있는 왕국을 통치하기보다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아계시고, 그분의 적들이 그분의 발아래에 있게 될 때, 바로 그날, 그분께서 왕국을 취하실 그 때를 기다리신다(시 110:1). 더욱이 예수님은 오늘날 왕의 직분이 아니고, 대제사장의 직분을 차지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은 오늘날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데려가시려고 하늘에 속한 거룩한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유익을 위해 사역하고 계시다(히 2:5-10, 10:19-22).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은 그분과 그분의 공동 상속자들이 함께 보좌에 오를 때에 있게 된다(히 1:9, 3:14, 4:4-9). 이와 같이 골로새서 1:13절에 대한 오해는 그리스도의 미래 왕국에 대한 현대성을 오류적인 관점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어 오고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이나 다른 어떤 구절도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골로새서 1:13절에서 왕국은 지금 사탄이 사로잡고 있고, 미래에는 그리스도 아래에 있을 것임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왕국에서 미래에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왕국으로 옮겨질 것을 다루고 있다.
이 구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사탄 아래에 있던 왕국과 관계가 있는 어둠의 세력에서 구출되었고, 그리스도의 왕국과 관련이 있는 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오늘날 제도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지는 것이 없다. 왜냐면 이와 같은 왕국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왕국이 두 가지 형태 즉 현재의 형태에서 미래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서신서에 기록된 말씀이다(골 1:13.)
문맥을 무시하고 또 주제를 벗어나는 어떤 유행을 따라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의 바다에서 헤매고 다니게 할 것이다. 성도들이 성경을 깊이 깨닫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이 비유들은 정말 이해하기가 쉽다. 하지만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문제는 예수께서 이 비유들을 계시하셨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 희망을 걸기도 어렵다.
마태복음 13장으로 이끄는 사건들
침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초림하시는 것이 메시야로서 오시는 것이라고 선포하는 예비자(전조자)로서 나타났다. 마치 엘리야가 예수님의 재림 때 그분께서 메시야이심을 선포하는 전조자로서 나타날 것과 같은 것이다. 엘리야와 관계된 예언은 침례자 요한에 적용되었다(사 40:3, 마 3:3). 그리고 요한은 엘리야라고 예수님에 의해 말씀되었다(마 11:13-14). 침례자 요한으로 적용된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민족이 치료되었을 때 메시야의 오심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이 문맥에 기록되어 있다(사 40:1-5). 물론 그 예언이 요한에 적용되었지만 이것은 요한의 나타남이 있었던 동안이나 그 이후에 일어나지 않았다. 이 예언의 이뤄짐은 메시야의 전조자로서 장차 엘리야의 나타남 이후에만 일어날 것이다(말 4:1-6).
엘리야가 되는 요한과 관련한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영접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다시 말해서 민족이 요한보다 오히려 엘리야로 그 메시지를 받아들였다면 메시야의 전조자로서 그 때에 나타났을 것이라는 말이다. 후자는 전자의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전지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행함을 아셨고, 그리스도의 초림에 앞서 전조자로 엘리야 대신 요한을 보내셨다.
침례자 요한은 그의 시대에 엘리야가 되었고, 또 엘리야는 그의 시대에 침례자 요한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이사야 40:3절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엘리야에 적용되는 예언이 마태복음 3:3절의 그리스도의 초림 때 요한에게 적용될 수 있었던 것과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1) 요한, 예수 그리고 그분의 12사도들의 사역
침례자 요한은 혼자서 유대 광야에 나타났다. 그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회개하라. 하늘들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이 메시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었다. 민족적으로 죄와 불순종을 회개하도록 하는 메시지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는 왕국의 하늘에 속한 영역에서 유대 사람들이 메시야와 함께 홀을 붙잡도록 할 목적이었다.
왕국은 가까이에 있었다. 왕국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근접해 오고 있었다. 왜냐면 메시야께서 계셨기 때문이었다. 이 땅 위에서 통치자로서 사탄을 대체할 예정이었던 왕국의 왕께서 나타나셨고, 이스라엘의 회개가 있었다면 홀은 그 때에 인자의 손으로 사탄과 그가 부리는 천사들에게서 빼앗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늘에 속한 영역에서 민족의 메시야와 함께 통치하는 입장(위치)을 제안 받았었지만 조건이 있었다. 민족이 회개를 해야 했다. 민족은 그 마음이 변화 되어야 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늘과 땅에 속한 통치 약속을 받았다(창 13:16, 14:18-22, 15:5, 22:17-18, 26:3-4, 28:14, 32:12, 출 32:13, 히 11:12-16).
이스라엘 민족은 구약성경 신권 안에서 땅에 속한 통치 약속과 축복을 깨달았다. 또 그들은 다시 이 같은 약속과 축복을 깨달을 것이지만 보다 더 넓은 의미로 하나님께서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회복시켜 주실 때 깨달을 것이다(행 1:6, 3:19-21, 사 2:1-5, 겔 36:24-38, 37:21-28, 39:25-29).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왕국에 대한 측면은 땅에 속한 영역이 아닌 하늘에 속한 영역이었다. 왕국의 하늘에 속한 영역은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소유로 왕국의 다른 부분이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마 21:33-46)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새사람(one new man)에게 주어진 부분이다. 이 모든 것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그리스도를 거절로 예견되었다. 이것은 또 같은 날 그리스도는 자신을 거절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마태복음 13장에 일곱 비유를 말씀하셨다.
요한에 의해 선포된 전체적인 메시지는 왕국의 하늘에 속한 영역에서 유대인들이 통치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사탄과 그가 부리는 천사들은 끌어내려짐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회개하는 민족은 이주했을 것이고, 왕국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한은 결국 감옥에 갇혔다. 그 후 예수님께서 같은 메시지를 전파하셨다. 대개 그분의 사역은 기적과 표적으로 나타났고, 그 기적과 표적들이 대개 육신적인 치유에 집중해 일어났는데 그것들은 왕국과 관계가 있었다.
예수님은 집중적으로 두 가지 일을 하시러 갈릴리 전역으로 다니셨다. 하나는 왕국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온갖 질병과 고통과 질환을 치유하시러 다니셨다(마 4:12, 17-25).
예수님의 메시지는 제안하신 왕국과 관련이 있었고, 치유는 기적과 표적이 선포된 왕국복음의 메시지와 밀접하고 불가분한 관계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과거 죄, 불순종의 결과로 얻은 질병을 앓고 있었다.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그 안에 성한 곳이 없이 상처와 멍과 곪은 종기뿐이거늘 그것들을 꿰매고 싸매고 향유를 발라 아픔을 달래지 못하였도다.”(사 1:6) 그런 질병을 앓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치료 받을 기회가 목전에 있었는데 이 민족의 질병 치료는 민족 회개의 조건을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회개한 후에 일어날 수 있었고, 일어날 이스라엘의 조건이 수없이 구약성경에 자세히 예언되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예언 중 한 부분은 이사야에 예언되었고 그 부분이면 예증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사야서를 열자마자 그의 예언이 시작된다. 그는 당시의 이스라엘 상태를 설명함으로 시작한다. “아, 죄 많은 민족이요, 불법을 짊어진 백성이요, 악을 행하는 자들의 씨요, 부패시키는 자식들이로다. 그들이 {주}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분노를 일으키며 뒤로 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그 안에 성한 곳이 없이 상처와 멍과 곪은 종기뿐이거늘 그것들을 꿰매고 싸매고 향유를 발라 아픔을 달래지 못하였도다.”(사 1:4-6) 이스라엘 민족은 온통 성한 곳이 없었다. 아마도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의 도시들처럼 불법과 음란과 속임과 수많은 죄들로 가득했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치료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의 예언을 계속 이어갔다. 이사야는 그 민족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기를 계속했다. “너희를 씻고 너희를 깨끗하게 하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위들을 버리고 악을 행하기를 그치며 *잘 행하기를 배우고 판단의 공의를 추구하며 학대받는 자들을 구제하고 아버지 없는 자들을 위해 재판하며 과부를 위해 변호하라. *{주}가 말하노라.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거이 순종하면 땅의 좋은 것을 먹을 것이로되 *너희가 거절하고 거역하면 칼에 삼키리라.”(사 1:16-20a)
그런 다음 바로 뒤에 이사야는 민족회개와 치료의 때에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설명함으로 그의 예언을 결론지었다. “또 내가 내 손을 네게로 돌려 네 찌꺼기를 정결하게 제거하며 네 모든 주석을 치워 버리고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조언자들을 처음 시작하던 때와 같이 회복하리라. 그리한 뒤에야 네가, 의의 도시 신실한 도시, 라 불리리라.....마지막 날들에 {주}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세워지며 작은 산들 위로 높여지리니 모든 민족들이 그곳으로 흘러들리라. *많은 백성들이 가며 이르기를,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이르자. 그분께서 자신의 길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터인즉 우리가 그분의 행로들로 걸으리라, 하리니 이는 법이 시온에서 나아가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라. *그가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며 많은 백성들을 꾸짖으리니 그들이 자기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자기들의 창을 쳐서 가지 치는 낫을 만들리라. 민족이 민족을 치려고 칼을 들지 아니하고 그들이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사 1:25-26, 2:2-4a)
이사야의 예언과 완전히 일치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 즉 그분께서 12제자들을 선택하신 메시지(마 10:1-8)는 민족이 회개하도록 하고, 치료되어 왕국 안에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그들의 위치가 세워지도록 할 목적으로 부르신 것이었다(출 19:5-6). 개인의 치료는 유대인들이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하는 전조(前兆)로 여겨졌다. 요한, 예수님, 그리고 12제자들에 의해 그 민족에게 선포된 메시지로 단 한사람이 회개하는 개인적인 치료는 이스라엘 온 민족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회개하라. 하늘들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그런 다음에 민족적 회개와 치료가 일어났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향한 그들의 기존태도에 관한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사 1:19, 레 26:3-46, 신 28:1-68).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에 이미 불순종했다. 이 불순종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그들의 위치를 완전하게 차지하는 것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끝에서 이 신권이 소멸되는 그날이 왔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이방민족들의 포로가 되고, 그들에게 흩어지게 됨을 알았다. 북 이스라엘 10부족은 약 B.C. 722년경에 앗시리아에 의해 포로가 되었고, 남 이스라엘 2부족은 약 B.C. 605년경에 바빌론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이방시대가 시작되었다. 몇 년 후 셰키나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지성소에서 떠났다. 이는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말하고, 구약성경 신권이 끝남을 표시한다.
그리스도 시대에도 땅 위에 있었다. 남은 자들이 땅으로 돌아왔지만 민족은 여전히 이방민족의 통치 아래에 놓여 있었다. 느브갓네살(네브카드네자르) 시대에 시작된 이방민족의 통치시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침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권해진 왕국과 관련해 포문을 열었다. 그리스도께서 감옥에 들어가게 된 요한에 이어서 이 메시지를 계속 전하셨고, 12제자들 또한 이스라엘에게 같은 메시지를 전파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귀를 기울이고 회개했지만 전체적인 민족은 그것을 거절했다. 전체적인 민족은 수세기에 걸쳐 그들의 역사에 나타난 불순종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바꾸기를 거절했다.
2) 이스라엘의 절정에 이른 거절
이스라엘에게 제안한 하늘들 왕국은 요한이 시작하고, 예수님과 12제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 하늘들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들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도달된 그 정점은 동의가 아닌 민족 일부의 거절이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한 사람을 치료하셨다(마 12:9-13). 안식일에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 즉 일곱 번째 1,000년, 주님의 날, 6,000년에 이어서 오는 인자의 날에 이스라엘을 치료하시러 오시는 것을 의미한다(민 19:11-12, 호 5:15-6:2, 마 17:1-5).
이 놀라운 표적에 이어서 바리새인들은 그 현장을 나가서 그분을 대적해서 어떻게 그분을 죽일 것인지를 토론을 했다(마 12:14). 근본적이고, 율법적인 종교 지도자 서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단연코 가장 큰 당이었다. 이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그들은 민족의 종교생활을 통제하는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마 23:2). 이런 통제를 하는 종교 지도자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그분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표적을 반박하려고 언제나 어디에나 그분을 따라다녔다. 마태복음 12장에서 그들은 한 사람에게 나타내신 표적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어떻게 표적을 나타내시는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지를 회의함으로 그들의 거절의 절정에 이르렀다(마 12:10-14).
이 장 후반부에서 그리스도는 마귀의 소유가 되어 말을 못하고, 눈이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치료하셨다(마 12:22). 표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부정적인 태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에 대한 거절의 종착역에 도달했다. 그들은 이 놀라운 표적을 나타냄이 사탄의 능력을 배경으로 된 것으로 여겼다(마 12:24). 이 일을 행함으로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이 이스라엘과 관련 있는 표적이라는 것을 거절한 이후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일의 결정타가 되었다.
이 표적들은 그영의 능력을 통해 수행되고 있었다(창 1:2b). 사탄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바리새인들에게 성령을 반대하는 신성 모독으로 불려졌다(마 12:31). 이미 바리새인들은 그 같은 일을 행했지만(마 9:34) 여기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여기에서의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안식일의 표적을 거절하는 것이요, 이 표적을 행하신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 표적을 반대하고,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했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온갖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은 사람들이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신성 모독하는 것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말로 사람의 [아들]을 대적하면 그는 용서받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님]을 대적하면 이 세상(시대)에서나 오는 세상(시대)에서나 그는 용서받지 못하리라.”(마 12:31-32)
실제로 하늘들 왕국은 이 시점부터 이스라엘이 배제되었다(마 21:43). 그리스도의 사역이 주된 변화가 일어난 시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직후에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광범위한 죄를 범했고, 추가적인 표적을 행하기를 그리스도께 요구하곤 했다(마 12:38).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표적들 모두를 거절했고, 심지어 그런 표적이 사탄의 지지를 받는 능력으로 보았으며, 그들이 번번이 거절했던 어떤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찾아보기 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러한 표적을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불명예로 몰고 가려고 개인적으로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들은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을 이미 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어졌던 표적으로 답하셨다. 그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다. 요나의 표적은 왕국보다 오히려 그분의 초림으로 오셔서 죽으시고, 매장되고, 다시 부활하심을 가리키는 것이다(마 12:39-40). 그런 후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를 그들이 알도록 설명하셨다. 그들의 상태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오도하는 행동에서 산출된 것이다(마 12:14-23).
니느웨(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전파로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심판에서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고, 또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이 민족의 회개를 위해 이스라엘의 중심에 서 계셨지만 소용이 없었다(마 12:41). 마찬가지로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땅 끝에서 왔기 때문에 심판에서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고, 또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 이스라엘 중심에 서 계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분의 말을 듣지 않았다(마 12:42).
민족은 막막한 상태에서 떠나야 했다. 어떤 점에서 유대인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안식을 찾아 메마른 곳에서 헤매고 다녀야 했다. 이 민족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불순종을 계속해서 저질러야 했으며, 이스라엘은 그들의 상태를 그들 스스로가 변화를 꾀하지만 조건만 악화 되었다. 그들의 최후는 처음보다도 못하게 되었다(마 12:44-45, 레 26:18-3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집에서 떠나 바닷가로 내려가시고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를 말씀하실 채비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행하심은 계속해서 거절되었다.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거래)에 대한 날카로운 변화가 존재한다. 제시된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종전 사건들은 유대인에게 현실적으로 엄격하고 냉정했지만 이제 이 왕국이 소개되는 것에 관해서는 완전히 새롭고 다른 것이었다. 이 비유들은 하늘들의 왕국과 관계가 있다. 하늘들의 왕국은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구별되고, 그 민족과 완전히 다른 개인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는 비유로 말씀하시기 전에 그분은 집에서 나오셔서 바닷가에 앉으셨다(마 13:1). 처음 네 비유들은 집 밖에 나오셔서 바닷가에 앉으셔서 말씀하신 것이다(마 13:3-9, 18-33). 그런 후 그리스도께서 다시 돌아가셔서(마 13:36) 나머지 세 비유를 주셨다(마 13:44-50). 집과 바닷가에서 말씀하심은 의미심장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집, 나중에 되돌아가신 집은 이스라엘의 집을 말한다(마 10:6, 23:38). 또 그리스도께서 가신 바닷가는 이방을 말한다(욘 1:12, 2:10, 계 13:1). 그러므로 상징적으로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이 집을 나섰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것이고, 바닷가에 않으셨다가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이방으로 가셨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네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런 후 예수님은 집 안으로 돌아오셔서 세 비유를 추가적으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하늘들 왕국은 집 밖에서 말씀하신 처음 네 비유로 계시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그 때의 기간(미래의 때)에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을 것이다. 집 안으로 돌아오셔서 말씀하신 마지막 세 비유는 그 자체로는 이스라엘과 관련이 없을 수 있다. 이미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주제 문제인 하늘들의 왕국 때문에 이 비유들은 바닷가와 관계가 있고, 집밖의 사람들을 중심적으로 연관시켜야 한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집으로 다시 들어가셨을 때 바닷가를 떠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런 방면에서 처음 네 비유는 이스라엘 이외의 사람들, 이방인들과 관계된 주의 다루심과 관련이 있다. 또 이 다루심은 하늘들 왕국에 관한 특별한 영역에 속한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 또 주제 문제, 하늘들의 왕국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세 비유는 처음 네 비유와 다른 하늘들의 왕국에 대한 것을 계속해서 이어가셔야 했다. 더욱이 집 안으로 들어가셔서 하신 말씀이긴 하지만 이 비유들은 현실적으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일리가 없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늘들 왕국, 왕국 영역 일부분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일곱 비유 모두 귀족이 왕국을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 후 시간이 지나 일어나는 사건들과 왕국을 받은 후 돌아오는 것을 둘러싸고 사건과 관계가 있다(눅 19:12-27). 땅에 속한 그리스도의 사역, 갈보리 사건 때에 이스라엘을 그리스도께서 다루시러 돌아오시는 것을 암시하는 것 외에 이 비유에는 올리브산에서 그리스도의 떠나시기 전에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행 1:9). 이 비유에서 묘사된 사건들은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으실 때 전체적으로 일어나고(시 110:1), 또 그리스도의 재림 직후에 완결될 것이다(계 19:11-21).
하늘들의 왕국과 관련이 있는 메시지로 중심으로 하는 이 비유들은 이스라엘에게서 왕국을 빼앗은 후에 이방 사람들에게 그 왕국을 제안하는 것과 관계가 깊다(마 21:33-43, 벧전 2:9-10). 이 비유들은 현 제도동안과 현 제도 이후에 이어지는 하늘들의 왕국과 관련되어 있는 메시지와 관계가 있고, 또 그리스도의 재림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들로 결론을 맺는다(눅 19:12, 단 7:13-14, 계 11:15, 19:11-21). 제도가 진행되는 과정은 처음 네 비유에서 묘사되었고, 나중 세 비유는 끝의 시대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다음 시대(메시야시대)가 도래할 사건들로 결론을 맺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집으로 돌아오신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려는 그곳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다루시려는 움직임은 처음 네 비유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돌아가실 때 그리스도께서 바닷가를 떠나신다는 어떤 말도 없다(마 13:36). 이 장면은 아주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처음 네 비유에 이어 이방인들을 계속해서 다루신다. 이스라엘이 마지막 세 비유에서 다뤄진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유대인을 다루시는 것을 빼놓고서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재도입하신 것이었다. 이 세 비유의 강조점은 처음 네 비유에서 볼 수 있었던 같은 장소에서 계속된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모든 일곱 비유는 이스라엘을 외의 사람들에게 제안된 하늘들 왕국과 관계있는 이야기로 계속 이뤄진다. 이스라엘 민족은 제안된 왕국을 거절했고, 왕국은 이스라엘에게서 빼앗겼으며, 이스라엘이 거절했던 것을 새롭게 받을 존재인 독립체요, 분리체인 교회가 주인공이 될 것이다(마 21:33-43).
처음 네 비유에는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다. 이 비유는 새로운 이 독립체를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스라엘은 따로 모아져서 따로 분리된다. 하지만 마지막 세 비유에는 이스라엘이 돌아왔다. 이 때 하나님은 두 가지 목적으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다루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것을 결론 맺으신다. 이 비유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성경과 관계된 수많은 곳에서는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거절했던 것을 새로운 독립체가 받게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교회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끝맺으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는 마지막 세 비유를 전달하시기 전에 집 안으로 되돌아 가셨다. 처음 네 비유는 오늘날 제도 가운데 있는 기독교의 과정과 관계가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한 백성 곧 이스라엘을 따로 떼어 놓음으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시는 과정에 있다(행 15:14). 또 나중 세 비유는 하나님께서 땅에서 교회를 이끌어 내신 후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이스라엘을 다시 다루심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 나중 세 비유에 있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땅에서 사라지는 교회는 이 비유들 곳곳에 중심인물임을 볼 수 있다.
나중 세 비유는 다가오고 있는 대환란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들이다. 대환란이 있는 동안 교회는 이 땅에 없겠지만 이 기간은 이스라엘만큼이나 교회와 관계가 있다.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와 마찬가지로 대환란은 상속의 구원(과거가 아니고 미래) 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들이 일어날 때가 될 것이다. 상속과 관계가 있는 이 미래의 구원은 이미 과거에 구속된 신부를 포함할 것이다. 이 미래의 구속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구속된 신부는 그리스도의 아내가 될 것이다. 메시야 왕국 도래와 관련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들의 전체적인 순서는 나중 세 비유에 묘사되었다.
이런 방면에서 나중 세 비유는 처음 네 비유에서 묘사된 사건들을 결론을 내리고, 시대 순으로 잇고 있다. 일곱 비유는 A.D. 33년 오순절날에 교회사 시작된 때로부터 메시야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가 존재하는 미래의 때로 확장되는 왕국말씀과 관련된 기독교사와 같다.
'컨퍼런스 > 왕국의 비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자종자의 비유 (0) | 2016.09.26 |
---|---|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0) | 2016.08.11 |
씨 뿌리는 자의 비유 (0) | 2016.07.05 |
내가 돌아올 것이다. (0) | 2016.02.08 |
왕국의 비밀-서론 (0) | 2015.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