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왕국의 비밀

내가 돌아올 것이다.

Hernhut 2016. 2. 8. 21:48

 

부정한 영이 사람에게서 나와 마른 곳들로 다니며 쉴 곳을 구하나 전혀 찾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내 집 곧 내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리라, 하고는 가서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꾸며져 있으므로 이에 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영 일곱을 데려와 그들이 들어가서 거기 거하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되니라. 이 사악한 세대도 참으로 그와 같이 되리라, 하시니라.”(12:43-45)

 

그리스도께서 집에서 나가 바닷가에 앉으셔서 비유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시기 전(13:1-3)에 성령을 모독하는 일을 벌였다고 비판을 받게 되었다.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라는 비난을 받은 일은 표적과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12:24-32). 그 후에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신 기록된 말씀을 끝맺고 계신다. 일곱 비유의 사건들이 가려져 있는 동안 이스라엘 집은 비고, 청소되고, 정돈돼 꾸며져 있었다(12:44, 23:38). 그 집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고, 텅 빈 상태로 소제가 되고, 정리되어 있었다. 거기엔 사람들, 성전, 예루살렘 도시, 그리고 그 땅 등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뿐이었는데 그것은 회개였다. 하지만 그들은 유대인들의 불순종, 그들의 주장, 그들에게 닥친 상황이 되게 했던 이유를 무시했고,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을 무시하여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의 형편은 더 악화되었다.

 

처음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계시하셨다. 이스라엘은 그 계시를 불순종으로 무한정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민족은 궁극적으로 회개의 장소로 가게 되었다.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이스라엘의 형벌은 일곱 배나 강화되었다(26:18-31).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외에 의지할 것이 전혀 없는 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2:23-25, 3:7-22, 2:2-10).

 

그로부터 1,500년 후 그리스도는 그분께서 집을 떠나 바닷가에 앉으셔서 비유로 말씀하시기 직전 이 같은 근본적인 믿음에 대해 꺼내셨다(12:43-45, 13:1-58). 마태복음 12:43-45절은 그 집에 거하는 부정한 영이 떠나 있는 동안 비고, 소제되고 정리되었다고 계시한다. 이어서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것을 거절하고, 천연적인 수단을 통해 기존 상황을 바꾸려는 노력은 처음보다 더 사악한 다른 일곱 영들이 그 집을 거주지로 정했고, 그러므로 그 민족의 나중 상태가 이전 상태보다 더 나빠졌다.

 

일곱은 완전함을 보여주는 완전 숫자다. 다른 일곱 영들은 일곱 배로 강화(强化)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완전함을 말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두 견해가 아주 유사하다. 완전함이라는 관점에서 강화(强化)가 포함되었을 것이고, 가끔 이 강화(强化)는 일곱 배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죄와 불순종으로부터 앓게 된 병이 있었다(1:4-6). 이스라엘의 집 곧 그 집이 황량해질 무렵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떤 법령이 내려지기까지 계속해서 이런 유행을 따랐을 것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어 더 나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아버지 하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 강제로 부르짖게 되었다(2:23-25). 그에 반하여 그 당시 신성한 능력을 통해 그 민족은 곤경에 빠져들었다. 유대인들은 기꺼워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열심 있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복이 있도다.”라는 말을 했었다(23:37-39, 53:1-12).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달랐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신성한 기원이었다. 민족의 치료 또한 신성한 기원이 되어야 한다(5:13-6:2). 신성한 목적은 오늘날 신성하게 선포된 민족의 법령 뒤에 위치해 있다. 신성한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고, 다만 하나님께로 가게 되는 민족의 끝과 관계가 있다.

 

이런 유사하고 신성한 사역은 스가랴 1:14-15절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훈계하시기 시작하셨지만 이런 경우에 이방민족들은 고통에 빠지고, 고통을 더욱 촉진시켰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로 그분은 교정하게 하려고 그분의 아들(이스라엘)을 훈계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훈계를 받는 이스라엘을 보는 이방민족들은 민족의 고통에 빠져 더 강화되게 했다. 하나님은 이런 행동에 동의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결과에 조금 불쾌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방민족이 고통에 빠지고 촉진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방인들로 몹시 화가 나 불쾌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방면에서 이방민족들은 오늘날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시금 같은 목적을 위해 훈계하시는 같은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보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위한 그분의 계획과 목적에 개입하시는 것이 더 못마땅해 하실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이방민족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개입이 시도되어야 했다면 하나님은 몹시 불쾌하실 것이다. 창세기 12:3절에서 시작된 그 원칙이 지금까지도 적용되고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오늘날의 상황

 

계속해서 불순종한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을 훈계하시는 그분과 관련된 흥미로운 상황은 오늘날에도 발전되어 왔다. 오늘날 발전된 하나님의 훈계는 이스라엘에만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이방민족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오려고 했던 반면 여전히 불순종 가운데 있었다. 이런 방식을 따라 돌아오려고 하는 것은 정해진 시간 이전에 돌아오려고 시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질병과 메마름 등이 있겠다고 선언하신 것을 되돌리려는 시도다. 이런 시도는 이스라엘 집 곧 비고, 소제되고, 정리된 집을 변하게 하는 인본주의적 수단을 통한 것이다. 이런 천연적인 시도는 다른 일곱 영만을 낳게 할 수 있다. 이 일곱 영들은 그 집으로 들어가 처음보다 더 사악해진다. 그 원칙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고 세워졌고, 그리스도에 의해 반복되었고, 영원히 깨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중동에 유대민족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이 시도했던 것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왔고, 하나님께서 전에 선포하신 것을 바꾸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중동에 존재할지라도 문제가 꽤 다른 시각으로 보인다. 성경에 의하면 비고, 소제되고, 정리된 집을 바꾸려고 하는 최고의 노력으로 이스라엘에 의해 제시된 모든 것은 오직 한 가지의 끝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더 악화될 수 있을 뿐이다.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성경에 비추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멸해가는 중동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다. 격렬해지는 분쟁이 중동 곳곳에 존재한다. 중동 전 지역이 폭발을 기다리는 도화선이 달린 화약고 같다. 이스라엘, 미국을 포함한 이방민족들은 헛된 것이지만 상황을 진정시키려는데 필사적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나 모든 이방민족도 그곳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록 그들이 존재하는 문제로 인해 파생되는 모든 일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어떻게 해결할지도 모른다. 하나님 한분만이 그것을 해결하실 수 있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보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보더니 에브라임은 아시리아 사람에게로 갔고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고 너희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리라.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같이 되고 유다의 집에게는 젊은 사자같이 되어 나 곧 내가 찢고 떠나가리라. 내가 제거하리니 아무도 그를 구출하지 못하리라.”(5:13-14)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문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 역시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문제다.

 

그들이 자기들의 범죄를 인정하고 내 얼굴을 구할 때까지 내가 가서 내 처소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자기들의 고난 중에서 나를 일찍 찾으리라. 오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우리를 낫게 하시리라. 그분께서 우리를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 주시리라. 이틀 뒤에 그분께서 우리를 되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분의 눈앞에서 살리로다.”(5:15-6:2)

 

오늘날 세계의 사람들과 마주대하고 있는 일로 중동평화를 이루어 낼 수 없다. 중동 평화는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문제다. 이방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여 받아들였다면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해결책은 다가오는 이스라엘에 대한 응징으로 다른 일곱 영들, 일곱 배의 법령선포가 채워질 때까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을 이해도 못하고 그런 문제들과 상황의 막바지를 기다리는 그 민족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짐작도 못한다. 연구가 되고, 받아들여진 여러 계획은 짧은 시간일 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열심히 하는 사람의 노력도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통제하고, 다룰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 가지 답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두 정점을 향하고 있다. 그것들은 유대인들이 불순종으로 비고, 소제되고, 꾸며진 집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고 보존하지 않는 파멸의 끝, 예전보다도 더 악한 일곱 배의 끝을 향하고 있다.

 

사람이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까운 장래에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자신에게 해결책이 있는 것처럼 중동에 나타날 것이다. 그는 세상에 의해 큰 팔을 벌려 환영을 받을 것이다. 왜냐면 그가 이 난제(難題)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중동 평화에 대한 그의 해결책이 잠시 동안 해결하는 것 같겠지만 그 결과는 마태복음 12:43-45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말씀되어진 것과 똑같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집에 사악한 한 영이 있었지만 그 후에는 처음에 사악한 한 영보다 더 사악한 일곱 영들이 그 집에 들어와 거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사람 곧 죄의 사람, 적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질병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질병을 일으키셨고, 주님만이 그 민족의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으시다(5:13-14).

 

오늘날 그 땅에 남아 있는 유대민족의 문제는 주님의 뜻을 저버리는 요나와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바다로 나가는 배 선창에서 잠을 자고 있다. 주님의 뜻을 버리고 오늘날 그 땅에 남아 있는 이 사람들은 민족들 가운데로 더 이상 흩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 있으면서 그들의 상태와 부르심의 본질을 잠재우고 있고, 점점 바다에서 완전히 멀어져 있다. “바다는 성경에서 이방민족과 죽음을 언급할 때 사용된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지지 않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 어떤 의미로 바다에서 멀어졌지만 그들은 또 다른 바다에서는 멀어지지 않았다.

 

요나의 경우 계속 고집을 피우고 바다로 나가 배에 올라 잠을 잤을 때 바다가 격렬하게 파도를 쳐댔다. 하지만 바다로 요나가 던져졌을 때 그 바다는 잠잠해 졌다(1:3-15). 요나는 죽음의 장소인 바다에서 이틀 즉 3일째 되는 날까지 있어야 했다. 그런 후에야 요나가 바다에서 건져졌고, 그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1:17-2:10). 주님의 뜻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의 위치는 주님의 뜻을 거절하는 요나가 차지한 곳(바다 속, 즉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지고, 죽음 가운데 있는 곳)과 정확하게 같다. 이곳은 예표적으로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루신 곳이다. 또 이곳은 실제에 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실 곳이요,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장소이다.

 

요나처럼 이스라엘은 바다 속 죽음의 장소에서 민족들 가운데 흩어진 상태로 삼일이 되는 날까지 이 장소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이나 다른 사람들이 민족의 상황과 상태의 변화를 꽤하려는 어떤 시도들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이미 존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상황이 된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중동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유일한 미래의 계시일 것이다. 인간적인 의미이긴 하지만 한 가지 도전은 그 때 이전에 바다에서 이스라엘이 옮겨지게 되었다. 시온주의의 노력이긴 하지만 한 가지 도전은 비어 있고, 소제되고, 꾸며진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요나서에 따르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바다는 격렬해지고 있고 이방민족들은 혼란에 빠져가고 있다. 요나서에서의 이 장면은 오늘날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 관계있는 세상 모든 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요나서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상황은 이스라엘에게만 더 나빠질 것이고, 이런 방면에 있어 이스라엘과 밀접하게 연결된 이방민족들은 더 이상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그런 일들이 세상 곳곳에 산재해 있다. 모든 것이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있음을 바꿀 수 없다. 성경은 이스라엘에 대해 계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곤고함에 빠질 것을 알고 있고,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방민족들은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으며, 이뤄질 수 없는 중동평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필사적으로 이루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고, 상황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악화될 것이다. 짧게 나타나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죄의 사람은 실패할 것이고, 문제들이 훨씬 더 악화될 것이다. 사실 사람의 모든 노력은 의의 해(아들)”자신의 날개 안에서 치료하는 능력을 가지고서오르기 전(4:1- 2) 유대 역사상 가장 어두운 곳에서 끝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과 비교되는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은 뿌리 채 뽑히고, 모든 민족들에게로 사로잡힐 뿐만 아니라(21:20-24) 적어도 세계 2차 대전에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죽임을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유대인들이 죽을 것이다(13:8). 이 모든 것은 성경의 분명한 계시에 따른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유대인에게는 발표되었던 과정을 바꿀 아무런 힘조차도 없게 된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분명하게 계시한다. 이스라엘이 가장 어두운 시간으로 다가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때에 유대인들이 그들의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라는 계시다. 골칫거리가 더 심각해질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모든 문제들이 뒤바뀌게 될 것이다. 그 때서야 비로소 중동과 세계에 평화가 존재할 것이다.

 

이 예언된 모든 재앙은 집에서 그리스도의 떠남을 준비하는 것이요, 바닷가로 가시는 것이요,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비유로 하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절정의 거절(12:1-50)과 그리스도의 후속조치(13:1-58)는 이스라엘에게서 왕국을 옮길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다(21:33-43). 그 결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비판과 집이 황량하게 된다는 그리스도의 선포가 있게 된다(23:1-39). 이 모든 것은 교회창조, 오늘날의 모든 제도(정부)와 다가오는 환란을 예견한다. 이 때 교회는 이스라엘이 거절했던 것을 받게 되고, 오늘날의 제도는 황량함에 놓이는 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해 신부들을 부르시고, 또 이스라엘의 황량함은 절정에 이를 것이고, 그 민족이 가장 어두운 시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눈물을 흘리게 하셨으며, 고통을 당하게 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상처를 싸매어 주실 분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예표한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눈 안에서 살도록 하시려고 그들을 치료하실 것이다(6:1- 2, 1:4-2:5).

 

이런 유사함을 유대 역사에서 볼 수 있다.

 

모세 시대와 그리스도의 초림 때를 이스라엘 관점을 통해 볼 수 있는 많은 비유들이 있다. 두 경우 모두 신권정치였고, 왕국을 위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을 볼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절정의 거절이 있었으며, 모두 같은 결과가 뒤 따랐다.

 

1) 모세 시대

 

모세 당시 세상에 속한 땅에서 첫 태생의 권리를 알게 하고, 이집트로부터 분리하기 위해서 첫 태생을 죽였고, 그 이후에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구원받았다.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구출된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신권정치로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계명, 율법, 규례, 법규 등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군을 했던 곳은 거주민들을 정복하고, 신권정치로 민족을 다스리려고 들어가던 입구에 위치하고 있던 가데스바네아였다. 가데스바네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과 그 거주민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12부족에서 각각 한명씩 선택된 12명의 지도자들이었던 곳이다(13:1-16). 12명의 지도자들은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40일 밤낮 동안 정보를 얻으려고 탐지했다. 그들은 정보를 가지고 왔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나안 땅의 과실들을 가지고서 다시 가데스바네아에 돌아왔다(13:21-25).

 

12명의 지도자 모두 그 땅의 과실들을 전람하며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들 모두에게 그들이 가지고 온 그 땅의 정보를 보고했다. 그들의 정보는 정반대인 두 가지로 결론 났다. 두 명은 긍정적인 말을 했고, 나머지 10명은 부정적인 말을 했다. 두 지도자는 선한 보고를 했고, 나머지 10명은 사악한 보고를 했다(13:26-33). 두 지도자 갈렙과 여호수아는 우리가 당장 올라가서 그 땅을 소유하자. 우리가 능히 그것을 이기리라.”(13:30, 14:6)고 말했다. 하지만 나머지 10명은 우리가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니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13:31)고 말을 했다. 백성들은 두 명의 선한 보고보다 오히려 10명의 사악한 보고를 듣고, 주의를 기울였다.

 

이 보고에서 이스라엘이 만든 불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앙이 되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이집트에서 그분의 백성들을 구출해 내셨고, 그들을 위해 그때까지 공급하셨다(14:13-31, 16:1-17:16). 이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이미 언약하신 땅을 초자연적으로 소유케 하셨다(1:30, 4:38, 7:1-2, 16, 22-24, 28:7). 불신앙을 가졌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건지시는 손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 불신앙 때문에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이런 풍조를 따라 사라졌고, 이전 나라로 돌아가는 것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그들은 희생물이 없었기 때문에 선을 넘었고, 죄를 저질렀다(15:30-36, 10:26-27). 이 때문에 20살 이상 불신앙의 모든 세대들은 광야에서 쓰러졌고, 갈렙과 여호수아와 20살 미만의 새 세대들만이 구원받았다(14:29-30). 광야에 남아 쓰러진 구세대들은 피에 대해 의로운 면에서 쓰러진 것이었지만 그들의 부르심의 목표에 대해 의롭지 못한 면에서도 쓰러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 면으로는 이집트에서 초태생의 죽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다른 한 면으로는 초태생의 권리를 깨닫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상실했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사악한 보고를 전달한 10명의 지도자들을 다루신 후(14:37)에 믿지 않는 모든 세대는 다음 38년 반 동안 점차적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 세대로 구성된 사람들은 약속된 땅에서 쫓겨나 바닷가로 내려가서 에서와 롯의 광야 땅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믿지 않는 모든 세대는 이 광야 땅에서 죽었다(2:1-14). 그들 중 누구도 죽음에서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변화를 가져오는 데 완전하고, 전체적으로 무기력해졌다. 그들은 이전의 나라로 돌아가기에도 불가능하게 되었고, 풍조에 따라 가데스바네아에서 사라졌다.

 

2) 그리스도의 시대

 

다른 시각이지만 그리스도 시대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볼 수 있다. 초태생의 죽음은 과거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의 어린양을 살해했어도 그리스도께서 재림의 때에 절정에 이르게 될 사건의 다른 계열의 시작을 제시해 주었으나 여전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유월절의 어린양을 희생물을 드렸다. 하지만 모세 시대처럼 또 다른 땅에 속한 땅에서 건져지기보다 오히려 땅에서 하늘에 속한 땅으로의 구원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하늘에 속한 땅으로 들어갈 목적으로 한 신권의 대헌장(마그나 카르타-다시 구성된 법, 새 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것이었다. 신권의 대헌장은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5-7장에서 전달하신 산상수훈의 메시지다. 이스라엘에게 이미 선포된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이기는 하지만(3:1-4:25) 왕국을 위한 마그나 카르타가 전달된 후(5:1-7:29)에만 그 제안에 대한 완전한 효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8:1-34). 하지만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모세시대에 백성들에게 행하도록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불신앙인들에게 행하도록 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왕국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동원했다(23:13).

 

그들은 보고를 요한, 예수님, 그리고 12제자들에게 들었고, 그 땅의 열매를 맺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한다면 그들이 볼 수 있었고, 여러 표적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일과 상관없기를 원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모세 당시 행했던 것과 똑같이 사악한 보고를 했고,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는 것에 거절됐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민수기 13-14장과 마태복음 12장은 이런 방면에서 서로 비교된다. 두 부분 다 신권치리를 보여주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절정의 시점과 관계가 깊다. 둘 다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그런 리더쉽 때문에 이스라엘의 민족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이 이곳으로 이끌려진 후 단 한 가지가 두 세대를 위해 준비되었다. 피에 대해서는 오른 것이었지만 그들의 부르심의 목표에 대해서는 잘못된 면이었기 때문에 끝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 유사성이 기독교에서도 보인다.

 

기독교의 일들은 다가오고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약간 다른 메시지다. 메시지를 거절하게 된 것뿐만 아니라 모세시대와 그리스도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종착 지점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5가지의 주된 경고 중 세 번째의 것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시대)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6:4-6)

 

이 부분은 이와 같은 풍조에 따라 배교하는 것을 의미하고, 한번 배교했을 때 그가 회개의 장소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다. 문맥적으로 이 경고는 모세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미 경고 되었던 것에서 나온 것이다(3:1-4:16).

 

모세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10명의 보고를 듣고, 약속의 땅의 과실들을 보고서도 가데스바네아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사라짐은 그들 앞에 놓인 것에 대한 거절과 관계가 깊다. 한번 그들이 사라진 다음에는 회개할 곳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회개는 단순히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 생각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과 관계가 없다. 이것은 그들이 바로 그 다음 날 돌이켰지만 소용이 없었던 어떤 것이다(14:39-45). 그들이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의 이전 명령에 따라 거주민들을 정복하고 그들 앞에 놓인 그 땅으로 들어가기를 추구했다. 하지만 10명의 보고를 듣고, 가나안 땅의 과실들을 보는 것에 대한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시도하고 있었던 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이미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대신 모든 불신앙의 세대는 광야에서 소멸되는 운명이 되었다.

 

예표에서 보는 회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입장에 달려 있었다. 일어났던 결과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생각을 바꾸시지 않으실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 일어났던 상황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이런 문제는 이삭이 야곱에게 맏아들의 축복을 준 이후 일어났던 것과 유사하고, 장자권이 에서에게서 박탈되는 것과 유사하다. 일어났던 일의 중대함을 깨닫고, 장자권의 가치를 깨달은 에서는 자신의 아버지 이삭에게 야곱에게 했던 축복을 자신에게도 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이삭은 야곱에게 했던 것과 같은 축복을 이제 에서에게 할 수가 없었다. 이삭은 이미 야곱에게 맏아들에 대한 축복을 부여했다. 그 문제는 더 이상 바꿀 수가 없었다.

 

에서의 맏아들에 대한 생득권(生得權)은 히브리서에서 마지막 다섯 가지의 주요 경고와 다섯 번째 경고에 나온다. 또 이 경고는 에서가 눈물을 흘리고 염려하며 뜻을 돌릴 곳(회개의 장소)을 구하였으나 그것을 찾지 못하였다.”(12:16-17)고 결론을 내린다. 에서는 회개를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에서는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바꿀 수가 없었다. 여기서 회개란 돌이켜 향하는 것을 말하는데 10°, 45°, 90°를 돌이키더라도 영어 리펜트(repent)는 회개라 할 수 있다. 170°여도 리펜트(repent). 그러나 그런 회개는 방향과 시간을 잘못 설정한 회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맞는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는 180°의 리펜트(repent). 이삭은 그의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너무 늦었다. 그는 이미 장자권을 야곱에게 넘겨주고, 축복했다. 상황의 중대성과 이삭의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인 사안임을 깨닫고 에서가 목소리를 높여서 슬피 울었다”(27:34-38)고 기록되었다.

 

히브리서의 다섯 번째 경고와 마찬가지로 생득권 몰수가 세 번째 경고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세 번째 경고는 모세 아래에서 가데스바네아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체험이 그려져 있다. 이 경고를 합당하게 이해한다면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는 부분이 성경의 이 부분이다. 배교, 변절은 개인이 처음에 메시지를 들은 것뿐만 아니라 그가 그 주제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갖는지를 요구한다. 그것은 가나안 땅의 열매를 보고 그 땅의 보고를 들었던 모세 아래의 이스라엘의 사람들처럼 똑같은 위치에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6:4-5절에 기록된 말씀은 오는 세상, 오는 시대, 그리스도 왕국 시대의 권능과 관계가 있는 생각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구절에서 성도들 각자가 깨달음이 있었고, 하늘에 속한 은사를 맛보았으며, 오늘날 세상에서의 성령사역의 최고의 기능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는 것(24:1-67)인데 그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고, 그분과 동행을 했었으며,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 이 모든 것들은 예표에서 보는 것과 관계가 깊다. 이 모든 것은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 맏아들의 권리를 깨닫는 것과 관계가 깊다.

 

사람들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라진 모세 아래에 있던 불신앙의 세대들과 똑같은 위치에 있는 자신들을 찾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불신앙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시 새롭게 됨과 회개하기가 불가능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 당시의 불신앙의 세대와 관계된 그분의 생각을 바꾸시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 초림 하셨을 때 불신앙의 사람들과 관계된 그분의 생각 또한 바꾸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신앙의 그리스도인들과 관계가 있는 그분의 생각 또한 바꾸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때에도 회개의 장소를 찾지 못했고, 오늘날과 미래에도 회개의 장소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신실함을 존중하신다.

 

모세 때에 갈렙과 여호수아는 불신앙의 세대와 구별되었다. 그들은 주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존중하셨다. 그들은 이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거주민들을 정복하는 것을 허락을 받았고, 그들의 부르심의 목표를 깨달았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예표한다.

 

하나님은 모세 당시에 신실한 그들을 존중하신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 신실한 성도들을 존중하실 것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갈렙과 여호수아를 다루셨던 것과 아주 유사한 방법으로 다뤄질 것이다. 요르단 강을 건넌 다음 갈렙은 여리고를 정복하고 수많은 전쟁을 치루는 것이 자신의 상속임을 알았다. 자신의 상속을 아는 갈렙은 주의 종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그 땅을 정탐하게 하였을 때에 내가 사십 세였고 내가 내 마음속에 있는 대로 그에게 말을 다시 전하였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올라간 내 형제들은 백성의 마음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온전히 주 내 하나님을 따랐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주 내 하나님을 따랐은즉 네 발로 밟은 땅은 반드시 영원토록 너와 네 자손의 상속 재산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신 때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살아남게 하셨나이다. 이제, 보소서, 이 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낸 날과 마찬가지로 이 날 내가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여 내가 싸우기 위해 나가고 들어올 수 있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날 주께서 말씀하신 이 산을 내게 주소서. 거기에 아낙 족속이 있었으며 그 도시들이 크고 성벽으로 둘린 것을 당신도 그 날 들으셨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능히 그들을 쫓아(띄어쓰기) 내리이다,”(14:7-12)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여호수아는 갈렙을 축복하고 상속으로 헤브론을 그에게 주었다(14:13-14).

 

가나안 땅에 있는 여호수아의 상속은 그 땅이 분할되고, 정리가 된 이후에 맨 나중에 주어졌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지경대로 상속 재산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가운데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상속 재산을 주되 주의 말씀에 따라 그가 요구한 도시 곧 에브라임 산에 있는 딤낫세라를 그에게 주매 그가 도시를 짓고 그 안에 거하였더라.”(19:49-50, 19:15-18)

 

그 안에는 모세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 다름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 사이에 불신앙과 신앙의 차이가 있다. 어떤 성도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상속을 깨닫는 것을 허락받기도 하지만 어떤 성도들은 에서와 롯의 땅에서 멸망당하기도 한다. 한 가지만이 결정의 요소로 보인다. 이 한 가지 것은 갈렙이 자신의 상속을 깨닫기 전에 그에 의해 언급되었다. 그것은 갈렙이 상속에 대해 주장하는 그의 모든 근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올라간 내 형제들은 백성의 마음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온전히 주 내 하나님을 따랐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주 내 하나님을 따랐은즉 네 발로 밟은 땅은 반드시 영원토록 너와 네 자손의 상속 재산이 되리라, 하였나이다.”(14:8-9)

 

다른 한 가지는 갈렙이 자신의 상속을 깨달은 이후에 다시 언급했다. 이것은 상속에 대한 보상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헤브론이 그나스 족속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상속 재산이 되어 이 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온전히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랐기 때문이더라.”(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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