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왕국의 비밀

누룩비유

Hernhut 2016. 10. 21. 01:30


 

마태복음 13:33

 

누룩의 비유는 네 번째 마지막 비유다. 이 마지막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집밖 바닷가 아래로 내려가셔서 말씀해 주셨다. 이 누룩의 비유는 처음 세 비유로 덮여 있는 사건을 둘러싼 문제들의 결과를 계시 한다. 이 결론은 그리스도께서 집 안으로 들어오시기 전 그분께서 세 추가적인 비유를 주신 곳에서 계시하셨다. 이 비유들은 교회의 시작에서 메시야 왕국의 시작까지 확장되는 모든 사건을 순서대로 계시한다.

이 비유는 신약성경에서 누룩에 대한 첫 번째 언급에 해당한다. 그리스도는 한 가지 방법만으로 이해할 수 있고, 다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징적인 의미로 말씀을 사용하셨다.

누룩에 대해 구약성경은 상징적이고, 신약성경은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하기 전 세 비유 속에 한 흐름을 두고서 그 단어를 비유로 말해졌다. 이 비유들을 듣는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게 하는 반죽에 더해진 이물질이었다. 상징적 의미로 누룩을 사용하는 구약성경은 항상 한 가지 방법만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은 항상 타락과 하락을 일으킨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누룩을 사용했다. 모세율법은 이스라엘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진 제물에 누룩 사용을 금했다(2:11). 이런 면에서 누룩이 없음은 성경에서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처럼 순수를 가리켰다(19:3). 누룩은 이처럼 성경에서 소개되고 사용되었다.

하지만 레위기 2:11절에서 말한 제물에 누룩 사용을 금하는 모세의 경륜 안에 두 가지 예외가 있었다. 레위기 7:13, 23:17절은 누룩이 들어간 제물을 언급한다. 수세기 후 아모스 역시 누룩이 들어간 제물을 언급했다(4:5). 누룩이 들어간 이 세 경우 모두에서 다른 제물들도 언급되었다. 레위기 7:13, 23:17절에서 가른 제물들은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피 희생을 특별하게 말해졌다. 아모스 4:5절의 제물에는 피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피가 언급된 다른 제물에서 피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7:1-14, 23:5, 27 12:1-51, 16:1-34, 4:4).

성경과 관련된 다른 곳과 문맥을 비추어보면 누룩은 사람의 죄를 보여주기 위해 이 제물에 들어갔었을 뿐이다. 누룩이 없는 제물이 순수함을 보여주는 데 사용되었던 것처럼 누룩은 부패를 보여주기 위해 들어간 것이었다. 이것은 레위기 23장에 있는 무교절을 둘러싸고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여실히 드러낼 수 있다. 첫 태생의 죽음과 피의 적용 이후 그날 즉시 시작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7일 동안 누룩이 들어간 어떤 것을 먹지 말도록 명령을 받았다(23:5-6).

이것은 피를 적용 받은 사람들이 일정 기간 동안 그들 스스로 순수함을 지켰다는 사실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킨다. 이 일정 기간은 이후 계속되는 그들의 삶 동안 하나님의 진리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작했고, 수세기에 걸쳐 지켰던 것은 사실이었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남아 있다. 그것은 또 전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지켜졌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전 5:6-8).

 

이 절기들로 보여준 계속되는 상징성 안에 하나님은 속죄의 날을 정하셨다. 속죄의 날은 일곱 절기 중 여섯 번째 날이었다. 누룩이 섞인 것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나님의 명령이 있은 직후 이미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적용받았던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피를 흘려야 했다. 속죄의 날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적을 이미 받았던 이들을 위해 죄에서 계속 구별되도록 하는 실패에 대해 덮는 준비를 해야 했다. 이 절기는 누룩으로 상징된 것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자신을 구별하는 데 실패하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정확한 것은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말과 하늘에 속한 곳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재 대제사장적 사역을 통해서 오늘날에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월절의 어린양(예수님)의 피를 적용 받았고, 순수함을 지키도록 명령 받았다. 하지만 과거시대의 이스라엘사람들처럼 죽음의 몸을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실패를 체험한다. 이스라엘 장막에서처럼 공급이 중단된다. 그리스도는 은혜의 보좌 위에 있는 그분 자신의 피를 기초로 하여 하늘에 속한 곳에서 오늘날 사역하고 계신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죄 지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신해 정결케 하신다. 하지만 정결은 반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결은 조건적이다. 정결은 자기 죄를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달려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9, 4:13-16, 9:23-28, 10:19-39, 요일 2:1-2).

 

누룩이 항상 구약성경에 사용되었던 방식에 비추어 그리스도는 그분께서 마태복음 13:33, 16:6, 11절에서 하신 것처럼 상징적인 의미로 단어를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했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16:12). 아니면 또한 이런 점에 있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5:6-8, 갈라디아서 5:9절에서 했던 것처럼 그의 서신에서 이 같은 상징적인 의미로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또 이 서신을 수신하는 이들은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룩이 마태복음 13:33절에서 사용된 것에 추가된 특징은 문맥에서 이 단어 사용이 시작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구절 자체의 문맥은 이 단어가 이해되었다는 것을 계시한다. 이것은 누룩이 신약성경 다른 어디에 사용되었고,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모든 곳에 누룩이 나타난다. 그 문맥은 그 단어가 항상 분명하게 구약성경 용례를 따르는 한 가지 방법으로만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룩사용을 시작하는 마태복음 13:33절 문맥은 열매 맺는 것과 사탄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열매 맺는 것을 멈추게 데 사용하는 방법과 관계가 있다. 앞의 두 비유는 사탄이 점진적으로 타락하게 하고 그 후 하락하게 하는 거짓교리를 도입하는 것을 나타낸다. 누룩의 비유는 단순히 문제의 결론을 드러낸다. 누룩의 비유에 따라 오늘날 교회시대에 제안된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는 교회시대의 끝 무렵이 될 것이고, 그 땐 완전히 부패되었을 것이다. 교회 초기에 도입된 부패는 제안된 왕국이 완전히 타락되는 것과 관계될 때까지 점진적으로 모든 기독교에 침투할 것이다. 이 비유에 따르면 이것은 교회 시대가 끝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루 서 말

 

 

“3”은 신격의 완성을 의미하는 수다. 이 수는 신격의 완성을 보여준다. 가루 서 말은 제분된 곡식을 빵을 만드는데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언급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 것이다(4:4, 15:1-2).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언급은 문맥적으로 특별한 의미에서의 말씀이요, 말씀의 특별한 부분이요, 말씀 안에서의 특별한 가르침이다. 그 주제는 가까이에 있는 왕국말씀과 관계가 있다.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가 기독교에 선포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것과 이 메시지가 메시지 안에 어떤 것이 있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변질되었다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13:19-24, 31, 33). 이미 보았던 것처럼 가루 서 말에 누룩을 넣어 두었다는 말은 앞 두 비유에서 시작한 단순한 말이다. 신성의 완성 안에 누룩을 넣어두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호흡하신 말씀 즉 신성의 완결 안에 두고서 교회를 부패시키는 말이다.

또 그것은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신성에 속한 완벽한 계시의 일부분이다. 사탄은 단순히 왕국을 위해 열매 맺는 이들 가운데 왕국에 관한 거짓 메시지를 선포하는 이들에게 누룩을 두기 시작했다. 이 거짓 메시지는 뿌리를 내렸고, 부패와 하락시키도록 퍼지기 시작했다. 이 거짓교리 때문에 세 번째 비유에서 계속되는 것처럼 기독교의 비본질적인 영적성장이 이어졌다. 이 비유에서 겨자종자가 발아하기 시작했다. 한 동안 정상적으로 자라고, 비정상적으로 자라 결국 한 나무가 되었다. 겨자종자가 그렇게 되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겨자종자는 세상 풍조에 따라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 성장의 결과는 너무 비정상적이었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성장을 한 집에 둔 누룩은 부패를 일으켰다.

문맥적으로 앞에서부터 계속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에 의해 누룩을 가지고서 가루 서 말에 숨겨두는 한 여자에 대한 말씀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비유의 정의에 따라 그리스도는 앞의 진리를 설명하시기 위해 앞의 진리와 나란히 배열하셔서 추가적인 진리를 공급하신다. 누룩 비유를 이해하는 것은 간단한 것이다. 이 비유는 앞의 비유, 겨자종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었던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하락과 관계있고, 앞의 비유, 밀알과 가라지의 비유는 사탄이 열매 맺는 것을 멈추게 하려고 온 것과 관계가 있다. 누룩비유는 왕국말씀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신성하신 완벽한 계시 가운데 넣어둔 부패시키는 물질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누룩은 온 교회(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가 부패되기까지 일을 하는 타락시키는 물질과 관계가 있다.

 

 

온 교회에 퍼지기까지

 

오늘날 기독교가 처해있는 상태의 원인은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처음 네 비유에서 모두 보여 졌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비유, 즉 누룩비유로 문제의 끝을 그리고 있다. 이 비유는 완전한 부패의 정점에 이르기까지 점진적 하락을 보여준다. 교회시대 끝 무렵 왕국말씀이 완전히 부패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말씀하셨던 것을 이루실 것이다. 그날 그때에 그리스도의 다가오는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참된 메시지는 없을 것이요, 온 땅의 교회들에게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볼 수 있는 에베소교회로 묘사된 상태부터 라오디게아교회로 묘사된 상태에까지 기독교의 움직임은 완료될 것이다. 교회가 처음사랑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2:4) 궁극적으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설명한 말로 이끌어질 것이다(3:17b). 오늘날 기독교 내에 이와 같은 상태가 되어가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왕국말씀에 관해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발효시켰다. 둘 다 똑같은 것이 존재한다. 왕국메시지가 선포되지 않고, 왕국메시지와 아무 관계도 없다. 이것은 기독교에 퍼져있는 일반적인 사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듣는 메시지는 왕국말씀이 선포되지 않거나 그 중심적인 메시지와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셨을 때 그 당시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인 이스라엘의 주된 유대인 무리들이 있었다. 이 두 무리는 그들의 이론이 극과 극이었지만 제안된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를 향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였다. 왕국메시지와는 둘 다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 같은 태도가 예수님의 재림 직전인 오늘날 기독교 내에 똑같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주로 두 교파가 있다. 이 두 종교 무리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극과 극이다. 하지만 제안 받은 왕국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다. 두 무리 다 왕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1) 에베소교회에서부터

 

요한계시록 2-3장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에게 쓰는 일곱 종류의 편지를 기록한다. 이 서신에는 에베소교회에서 시작해 라오디게아교회까지 어떤 명령이 주어졌다.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신약성경에 언급된 초대교회 에베소교회에게 긴 서신을 썼다. 라오디게아교회와 관련해서는 골로새서 4:16절에 언급한다. 하지만 이것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쓴 서신이라는 언급은 없다. 설령 그 교회에게 쓴 편지라할지라도 그것은 보존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은 비규범적인 편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아마 바울이 이 위치에서 쓴 단순히 정체불명의 편지다. 라오디게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이 편지는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얻은 것이었다.

바울은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역하느라 3년을 보냈다(20:31). 그가 에베소에 처음 갔을 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지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이 훈련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알려지지 않는 기간 동안 그곳에 남아 시나고그에서 유대인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설득했다. 그런 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에베소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헤어졌다(18:18-21).

바울이 3년 대부분을 보낸 곳이 에베소에 2번째 방문이었다고 사도행전 20:31절에서 말한다(19:10-41). 두 번째 방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독립체를 부르셨다는 사실과 익숙하지 않았던 제자들을 알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건축되는 한 새사람이었다. 이 제자들은 아볼로에게서 분명하게 배운 요한의 침례만을 알았습니다. 아볼로는 그 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서 요한의 침례를 더 훈련받았습니다(18:24-26, 19:1-7). 그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아볼로에게 훈련했던 것처럼 이 때 바울은 각 사람들에게 더 훈련하려고 에베소에서 사역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바울은 집에서 집으로 옮겨 다니며 에베소에서 계속 사역을 했다. 그는 유익하지 않은 어떤 것도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20:20). 이런 면에서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사역은 이방세계에서의 그의 모든 사역은 본처럼 보인다.

바울은 일찍 개종했다. 그런 다음 아라비아에 있는 사막으로 갔다. 그곳에서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시고 개인적으로 비밀 이른바 성경을 계시하셨다(1:11-12, 16-17, 3:1-11). 그 비밀은 새 독립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 교회와 관계가 있었다. 그 비밀은 한 몸 안에서 함께하는 공공 상속자들이 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 관계가 있었다. 그 비밀은 이스라엘이 거절한 하늘들의 왕국을 받게 되는 이 새 독립체를 구성하는 이들과 관계가 있었다(21:33-43, 벧전 2:9-10). 이 비밀은 바울이 주님에 의해 가르쳐진 메시지요, 그가 이방세계 곳곳에 전달했던 메시지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받지 않은 이들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메시지였다. 바울이 이방세계로 이 메시지를 가지고 갔을 때 거기에는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중 메시지를 선포해야 했다. 구원받지 않은 이들 가운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둘러싼 복음을 선포해야 했다. 각 사람이 구원받은 다음에 바울은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 전자보다 후자가 바울사역의 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이 바울사역을 나타내는 이유다. 이것은 사도행전 후반부와 그의 서신서에 꽉 차있다. 이것이 신약성경을 바울의 사역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사도행전 후반부부터 서신서 대부분이 그의 사역에 관한 기록이다. 그의 사역에 있는 기록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둘러싸고 있는 일들보다 비밀을 둘러싸고 있는 일들로 훨씬 더 광범위하게 다뤄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들어간 모든 도시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그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전파 아래서 구원받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러 갔다(20:24-25). 그리고 에베소에서 3년을 보낸 바울은 구체적으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훈련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고, 또 그들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거짓교사들에 관해 그들에게 경고하면서 보냈다고 말을 했다(20:28-32). 바울의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도 내게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내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 보라, 내가 너희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다녔으나 이제는 너희가 다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 날 너희를 데려다가 증언하게 하거니와 내가 모든 사람의 피로부터 깨끗하니 이는 내가 지금까지 회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너희에게 밝히 말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온 양 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의 교회 곧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먹이게 하셨느니라. 내가 이것을 아노니 곧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 그러므로 깨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 유업을 주리라.”(20:24-32)

 

 

그런 후 그가 나중에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서신은 그 도시에서 이미 그리스도인들을 훈련한 깊이까지 보여준다. 이 서신은 근본적인 가르침, 시작의 가르침을 제외하고 양자됨, 구속, 그리고 상속을 깨닫는 것을 말함으로 시작한다(1:3-14). 그러므로 이 서신은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안에서 터를 굳게 했던 것을 계속하도록 한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인들의 분명한 영적성숙 때문에 이 방법을 시작하고 계속할 수 있었다. 그의 사역은 에베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이전 그의 기나 긴 사역에서 산출 된 것이었다. 그가 쓴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그의 끊임없는 기도인 이 서신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풍부한 지식(에피그노시스epignosis)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었다. 그는 그가 전에 이미 그들에게 가르쳤던 이 일들과 관련해 쓰고 있었다.

 

기도할 때에 너희에 관하여 말하며 너희로 인해 감사드리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그분을 알게 하시고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6-19)

 

그런 후 바울은 그들의 구원의 이유를 보여주려고 2장에서 계속 이어간다. 그는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한다(2:1-10). 구원받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대한 생각은 에베소 2장에서 한 몸 안에서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2:15-16). 3장에서는 비밀에 대한 내용으로 합병된다(3:1-11). 비밀에 대해 말하는 바울은 미래에 있을 상속이 비밀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인 상속에 대한 생각을 계속한다. 그 비밀은 복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약속에 참여하는 이들과 같은 몸에 속하고 유대인들과 동료 상속자가 되는 이방인들과 관계가 있다(3:6). 바울은 또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과 하나님의 많은 지혜로 비밀을 둘러싼 모든 메시지를 말한다(3:8, 10).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아주 큰 구원을 깨달았다는 것으로 표현했다(2:3). 또 베드로는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라고 말했고, 그리스도의 지극히 큰 위엄과 연결했다(벧후 1:4, 16). 4장 첫 부분에서 바울은 교회에서의 은사가 있는 지도자들과 교사들을 다뤘다. 단순하게 말해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에 은사가 있는 지도자들과 교사들을 세우셨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여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이끌고, 장차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양자됨, 구속, 그리고 상속을 위한 것이었다(4:11-14, 30). 그 후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미성숙에서 성숙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에베소 4장 이후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중무장하도록 경고한다. 왜냐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탄과 그가 부리는 졸개들과 대항하여 영적 전쟁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6:10-18).

에베소교회는 왕국말씀에 정통한 그리스도인으로 가득했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며 집에서 집으로 다니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바울에게 자신들에게 편지를 쓰도록 했고, 순수하게 시작부터 근본적인 가르침까지도 하나님의 더 깊은 것을 알기 시작했다(고전 2:10). 그것은 주님께서 교회시대 처음에 기독교에 대한 말씀을 보여주시려고 요한계시록의 그리스도의 계시를 사용하도록 선택하신 곳이 이 교회였다. 이것은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둘러싼 참된 메시지가 기독교 내내 선포되고, 교회들 곳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영접되고, 이해되었던 때였다(1:5-6, 23).

초창기에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만났을 때 한 시간의 메시지였다. 중심적인 메시지는 바울과 그 날의 다른 사역자들에 의해 선포되었고, 모든 편지의 중심 메시지는 그 당시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보내졌다. 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관계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 앞에 놓인 소망과 관련해 서로격려하고 권하고, 분발시키기 위해 모였다(10:23-25).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다! 이물질 하나가 가루 서 말속에 넣어졌다. 머지않아 그것들은 에베소교회처럼 틀어지기 시작했다. 성경은 이런 면을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함을 아노니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나 사도가 아닌 자들을 네가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하는 자들임을 알아내었으며 또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해 수고하고 낙심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조금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2:2-4)

 

사탄이 도입한 부패는 하락이 시작되고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2-3장에 있는 일곱 교회 중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교회로 묘사된 방식으로 시작했다. 그 부패는 일곱 교회 마지막 라오디게아교회로 묘사된 것처럼 기독교에 하락의 끝을 볼 대까지 계속될 것이다.

 

 

2) 라오디게아교회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기준에서 기독교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분명하다. 이 한 가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교회시대의 끝 무렵 기독교는 세상에 완전히 부패된 상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건축되기 전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건축되고 난 후 요한에게 다시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것이다. 교회사는 교회가 시작하기 전에 주어졌고, 또 교회시대 초기에 다시 한 번 또 주어졌다. 교회시대가 끝나갈 무렵에 사는 오늘날의 사람은 이 교회사 둘을 다 보게 되고, 기독교의 현재의 상태를 보게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기독교가 오늘날의 상태로 존재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시대 끝 무렵 왕국말씀에 대한 어떤 선포와 관계있는 모든 기독교는 거짓과 누룩으로 완전하게 부패된 상태가 될 것이다. 교회시대 끝 무렵 이 메시지가 선포되는 모든 기독교는 완전하게 부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다. 부패는 절대 안 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바뀔 수 없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땅에 계실 때 기독교의 마지막 말씀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주제에 무게를 두는 믿는 이들 때문에 이것은 문제를 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토론을 하거나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확립된 문제요, 기독교교회사가 나오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경에 두 부분에 계시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교회사가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다른 방식으로 두 번 기록되어 계시되었다. 이미 보았던 것처럼 이 두 번의 기록 중 두 번째 즉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의 상태를 말함으로 기독교의 마지막 상태를 계시하셨다. 라오디게아교회는 1세기 말이 되기도 전에 완전히 부패했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의 교회를 연구하기를 갈망한다면 요한계시록 3:14-21절로만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주어진 설명이다. 이 설명은 마태복음 13:33절에 있는 누룩비유에서부터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14-21절에서 교회시대의 끝 무렵 교회의 참된 본질을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었다고 생생하게 말한다.

하지만 한 가지를 매음에 새기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교회시대 끝 무렵의 기독교의 그림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뭔가 특별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성경적인 교리의 특정한 측면에 대한 교회시대의 끝 무렵 기독교를 표현이라고 본다. 많은 사람들 중 소수만이 이 모습을 교회 도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요, 누룩의 공격으로 왕국말씀의 중심에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 부분에서 공격을 중심으로 하는 누룩의 전반적인 생각은 요한계시록 2-3장 전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각 서신은 똑같은 구조다. 각 서신은 이기는 일에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이런 방면에 있어 각 교회에게 하는 말은 두 가지 항목이다.

1) “내가 너희의 일을 아노니” (2:2, 9, 13, 19, 3:1, 8, 15).

2) “이기는 이들에게” (2:7, 11, 17, 26-28, 3:5, 12, 21).

여기에는 왕국말씀이 일과 이기는 목적을 중심이라는 것과 갈라놓을 수 없고, 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일 두 가지가 있다. 이기는 자들에 대한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었다고 라오디게아교회를 지적하셨을 때 예수님은 일과 이길 목적으로 하는 교회시대의 끝의 교회의 그림을 보여주고 계셨다. 이런 상황에 놓인 교회에게 아주 분명하게 주님은 권고를 하셨다.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너는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또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또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볼지니라.”(3:18).

 

그러므로 교회시대 끝 무렵 교회는 왕국말씀을 둘러싸고 있는 가르침에 관해 라오디게아교회로 그려진 상태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교회시대 끝의 교회는 완전히 부패될 것입니다. 그 문제의 진리를 볼 필요가 있는 모든 이들은 특별하게 오늘날 근본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어떤 교회에 들어가서 마찬가지로 왕국말씀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가르침을 들어본다. 그 메시지가 가르침 받기에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헛된 것을 들을 것이다. 누룩은 왕국말씀을 손상시키는 일을 끝냈다.

 

 

 

어떤 누구든지…‧

 

그러므로 왕국말씀을 이해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본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주제에 관해 조금 알거나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자신을 찾는다. 또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이나 왕국말씀을 가벼이 여기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는다. 거의 2,000년 동안 일하는 누룩 때문에 정말 떠나거나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는 그는 기독교를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했다. 그가 행하는 것과 관련된 답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쓴 짧은 서신 끝에 주어졌다. 주님은 부패케 하는 과정의 끝에 존재할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아셨다. 이런 관점으로 라오디게아교회에 있는 이들은 이 교회에서 특별한 과정의 행동을 하도록 권고를 받았다. 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친근한 말씀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이기는 자에게는 나 역시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게 된 것 같이 나와 함께 내 왕좌에 앉는 것을 내가 허락하리라.” (3:19-21).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시대에 듣는 중심 메시지에 관해 교회시대 끝에서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곳으로 들어가시려고 노크하시는 그림을 그리셨다. 이때에 그리스도께서 확장하시는 초대는 온 교회에게 한다기보다 각 개인에게 하시는 초대다. 왜냐면 교회가 하락하게 하는 일들이 계속되어와 누룩으로 속속들이 스며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있는 초대는 교회에서 어떤 개인으로 확장한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교회를 떠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가 갈 장소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모든 교회들이 부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은 주님의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가 있는 곳에 남아 있다. 그런 후 주님께서 말씀 안에서 교제하러 교회(각 개인에게) 안으로 들어오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각 그리스도인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으로 교제가 있을 것이다. 각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교제가 있을 것이다(3:20b, 요일 1:3).

하지만 교회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초대가 계속 이어지겠지만 그리스도는 문밖에 여전히 계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세상에 있는 기독교를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처음 네 비유나 요한계시록 2-3장에 있는 일곱 교회에서 묘사된 결과로 나온 상태가 된 교회를 보게 된다. 왕국말씀을 선포하는 것에 관해 오늘날 교회는 완전히 부패한 상태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밖에 계신 그리스도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권고하시고, 사탄은 이 관계를 파괴하려고 그토록 열심히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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