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왕국의 비밀

그물 비유

Hernhut 2017. 6. 29. 12:48


 

또 하늘의 왕국은 마치 바다에 던져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으니라. 그물이 가득 차매 그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모아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버렸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가운데서 사악한 자들을 갈라내어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시니라.”(13:47-50).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비유는 그물비유입니다. 이 그물비유는 현제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짧게 언급하는 것(13:47)으로 시작한다. 그런 후 이에 이어지는 구절들이 세 구절을 말씀하셨다(13:48-50). 이 말씀에는 세상 끝에서 일어날 사건이 중심이 되고, 제도가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상속이 구속되고 또 신부가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는 것이 전개가 된다.

 

바다에 던져진 그물은 현제도에서 이방인들 가운데의 하나님 사역을 말한다. 바다는 이방인을 말하고, 바다에 던지는 그물은 그분의 사람들을 이방인들로부터 이끌어내고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을 말한다(15:14).

 

이스라엘이 제안 받은 하늘왕국을 거절한 후 이스라엘과 구별된 또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이 거절한 것을 제안 받게 되었다(21:33-43, 벧전 2:9-11).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한 민족이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을 산출할 기회를 부여 받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로 구성되는 이 새 민족은 주로 이방인이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에게서 분리되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의 은혜의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분의 이름을 위해 이방인들로부터 새 민족 안으로 이끌 동안 지속되는 두 날(2,000)의 모든 제도를 따로 떼어 놓으셨다. 물론 유대인들도 그 새 민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11:5). 그물비유에 따라 이 사람들의 옮겨짐은 하늘왕국과 관계가 있었다. 이 옮겨짐은 이방인들에게 던져진 그물과 같다. 그물에 걸려 이방인들로부터 옮겨지는 이들(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일부가 되는 이)은 목적으로 옮겨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옮겨짐은 하늘왕국과 관계가 있다. 그들의 옮겨짐은 이스라엘이 거절하고, 그들에게서 빼앗아 다시 제안한 왕국에서 차지할 그들의 위치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옮겨짐 그 자체는 비유의 중심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바다에서 옮겨지는 그들의 목적, 중심적 과제를 알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집에 다시 들어가신 후 그분께서 주신 세 모든 비유는 앞에서 주어진 사건들(현제도 동안이나 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들 비유들은 제도 후에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한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것을 완료하시는 그 때와 그 직후인 시대의 맨 끝이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이 비유들의 사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후 환란의 때에 일어난다. 이런 면에서 이 비유들은 인자의 마지막 7년과 주의 날 초기에 일어난다. 이 날은 다니엘의 이뤄지지 않은 70번째 주()(9:24-27), 다니엘 예언의 끝에서 볼 수 있는 75일이다(12:11-13).

 

마지막 세 비유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앞의 두 비유(보물과 진주)에 있는 사건에 이어서 연대적으로 집 안으로 돌아와 주어진 것(그물)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이 이웃하는 비유에 있는 사건들은 연대순으로 볼 수 있다. 이 각각의 비유들은 과거에 있는 사건을 언급함으로서 시작한다. 하지만 각 비유의 중심적 주제는 과거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 비유의 중심적 주제는 이 과거 사건을 기초로 하고, 미래 사건과 관계가 있으며, 제도 이후 일어나는 사건이 전개가 된다. 이 세 비유는 하늘왕국과 관계가 있고, 계시된 목표에 가까워지는 사건들과 관계가 있다. 이 사건들은 이 제도 끝과 다음시대 초, 인자의 날 끝과 주의 날 초에 일어날 사건들이다.

 

분리(구별)

 

현제도 동안 바다에서 옮겨진 자들(13:47)은 계시된 방식에 따라 시대 끝에서 다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두 주된 카테고리로 분리되고 그들이 전에 있던 카테고리에 따라 다뤄지는 것을 볼 수 있다(13:48-52). 그물에 걸려 바다에서 옮겨진 이들은 해안가로 가져왔다. 이 비유에서의 그림은 나쁜 자들로부터 선한 자들을 선별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선별해 선한 자들은 그릇에 모았지만 나쁜 자들은 바다에 던진다(13:48). 다음 구절은 이것이 천사들이 수행했고, 또 이뤄질 것이라고 계시한다(13:49).

 

그 그림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보았다. 추수가 있었고, 알곡과 가라지의 선별이 있었다. 가라지는 불태우기 위해 다발로 묶었고, 알곡은 주인(그리스도)의 곳간에 모아졌다(13:30). 주님께서 이 세 마지막 비유를 주시기 전에 집 안으로 돌아오신 후 알곡과 가라지 비유 끝에서 일어난 일, 이 세 비유 끝에서 일어날 일들을 설명해 주셨다.

 

그런즉 가라지를 모아 불에 태우는 것 같이 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것이요, 그들이 실족하게 하는 모든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그의 왕국에서 모아다가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3:40-42)

 

위의 세 구절은 그물비유의 구절들과 유사하다(13:48-50). 이 구절들은 가라지에서 알곡을, 나쁜 이들에게서 선한 이들을 선별하는 것을 계시한다. 이 선별은 시대 끝에서 일어날 것이다. 시대 끝에서 일어날 알곡과 가라지, 그물비유에서 묘사된 사건들은 같은 것이다. 이 두 비유는 같은 일이 다른 그림으로 나타난다. 이 두 비유에서 묘사된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사건과 관계가 없다. 이 비유들에서 묘사된 일들은 적어도 7년 후 일어나는 사건과 관계가 있고, 이미 결정된 것을 기초로 하여 심판대에서 일어난다.

 

1) 비유의 주제

 

마태복음 13장에서의 일곱 비유에 대해 명심해야 할 것은 하늘왕국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들은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 받는 것과 관계가 없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은 이 일곱 비유에서 중심 주제가 아니다. 이 비유들이 분리(선별)를 다룰 때 선별의 결과에 따라 말한 모든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비유의 의미는 아주 가까운 장래의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이론인지 종말론적 교리인지 또는 그런 것들이 아닌지 등이 가타부타 조금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시고, 만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에서도 만나시고 아시는 편재하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분은 이 비유들을 세우시고, 분명한 방식으로 조성하시고, 그분 말씀에 특별한 순서와 위치로 그 비유들을 배열하셨다. 그분께서 세우신 방식에 따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은 일의 맨 끝에 있다. 일곱 번째 비유에서 하나님 자신은 여섯 비유를 다루신 후에 사람에게 계시하셨다. 먼저 바다에서 나온 이들을 선별하실 것이다. 이 선별은 시대의 끝에서 일어날 것이다. 심판대 사건이 이어질 것이고,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이어질 것이다. 이 일은 천사들에 의해 수행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왕국에 들어가고, 어떤 이들은 왕국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곱 비유의 주제는 제안된 하늘왕국의 중심이다. 이 주제는 각 비유의 시작에서 주어졌다. 이 주제는 이 비유에서 계속 나열되고 있다. 어떤 비유는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지만 놓칠 수 없는 주제다.

 

2)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 다뤄진 이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 다뤄진 이들은 구원을 받은 이들이다. 성경은 이 비유에 배어있는 메시지, 하늘왕국과 관계된 메시지와 관계해 구원받지 않은 이들을 다루지 않는다. 구원받지 않은 이들은 항상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의 메시지와 관계되어서만 다뤄졌다. 그들은 절대 왕국의 메시지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 왕국의 메시지는 구원을 받은 이들만을 위한 것이다. 왕국 메시지는 일곱 비유에서 적절하게 묘사되었다. 이런 면에서 마지막 비유가 기록되었다. 이 비유에서 다뤄진 이들은 그물을 통해 옮겨졌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바다 안으로 던져졌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이방인들로부터 옮겨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의 옮겨짐은 그들의 일부가 깨닫지 못하는 목적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그물에 있다는 것으로 인해 엄격하게 바다에서 옮겨졌다. 옮겨진 그들은 더 이상 바다와 관계가 없었다. 말하자면 옮겨진 그들은 더 이상 이방인들과 관계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그들의 옮겨짐은 그들이 이방인에게서 옮겨졌다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앞에서의 여섯 비유에서 볼 수 있었던 시간적 틀 안에서 이방인들에게서 옮겨졌다면 그들은 한새사람과 관계될 수 있는 무리는 하나뿐이다(2:15).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창조의 일부가 되었다(고후 5:17). 한 사람은 유대인, 이방인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인이다. 이 세 창조들은 분명하게 구별되는 전문적인 용어다. 하지만 이 유대인-그리스도인, 이방인-그리스도인, 소유자와 반대되는 교수 등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성경은 2/3, 혹은 셋 중 둘을 회색지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흑과 백으로 보는 것이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창조이거나 아니면 새창조가 아니다. 만일 그가 새창조가 아니라면 그는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 그 문제는 단순하다.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모든 비유를 이해에 따라 이것을 이해한다면 이 비유들을 해석할 때 혼동이 적을 것이다. 성경이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사이를 분명한 구별을 하지만 성경은 가끔 유대인, 이방인이라는 민족적 기원을 말함을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서 옮겨진 믿는 이들이라고 말한다(28:28, 1:13, 16, 2:9-10, 1:16, 2:2, 3:6, 8). 이것은 A.D.33-62년에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재제안하는 동안 볼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이 제안으로 믿는 유대인과 믿는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는 구별을 확인하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유대인-그리스도인이나 이방인-그리스도인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면 성경은 절대 이런 방식으로 세 창조 중 둘을 이끌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이런 방식에 따라 사용될 때 문맥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자체가 아닌 유대인과 이방인에게서 옮겨진 이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성경은 은유를 사용해 구원받은 이와 구원받지 않은 이를 혼합해 말하지 않고, 그물비유에서처럼 바다에서 옮겨진 이, 이방인들에게서 옮겨진 이로 말한다.

 

비슷한 그림을 요한계시록 2-3장에 있는 일곱교회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인만이 언급되고 있고, 일곱교회 모두에게 메시지에서 다뤄졌다. 구원받지 않은 이들로 구성된 것으로 언급하거나 구원받은 이들과 구원받지 않은 이들에게 언급하는 것은 모순어법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밖으로 불러낸 이들로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esia. 구원받은 이들만이 밖으로 불러내어졌고, 구원받은 이들만이 교회를 구성할 수 있다.

 

그물에 있는 모든 이들은 바다에서 옮겨졌고, 바다에서 옮겨진 이들은 바다가 상징하는 것과 더 이상 관련이 없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더 이상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옮겨진 후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창조, 완전하게 선별되고, 구별되는 창조와 관련이 있었다. 모든 것을 따라 그들의 옮겨짐은 하늘왕국을 위한 것이었다. 영원한 진리들은 전혀 그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일은 실현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영원한 구별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는 그들이 바다에서 옮겨진 때에 끝이 났다. 끝이 나지 않았던 것은 옮겨지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바다에 남아있을 뿐이다.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

 

두 부류로 분리되었지만 한 무리의 사람들만이 선하다, 나쁘다, 혹은 의롭다, 사악하다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13:48-49). 모든 이들은 바다에서 옮겨졌고, 이방인들에게서 옮겨졌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포함될 수가 없다. 주제의 본질, 이 비유에서 다뤄진 이들은 구원받은 이들인데 이들만이 중심이 될 수 있다. 이 비유가 말하는 목적은 구원받은 이들이 결정과 판단 이전을 기초로 하여 다뤄질 수 있다. 이 결정과 판단은 이미 심판대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심판대에서 나오는 결정과 판단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신실함에 근거가 될 것이다. 심판은 사역에 기초가 되겠지만 심판을 받는 일은 신앙과 불신앙에서 나올 것이다(고전 3:12-15, 11:17-19, 31,2:21-25).

 

하지만 이 비유에서 다뤄지는 구원받은 이들만이 보이는 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등장한다. 왜냐면 이 비유에 있는 몇몇이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던져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곳에 던져지는 그리스도인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예외 없이 그릇된 곳으로 밀고 들어간다. 그들은 그릇된 해석을 하는 것으로 인해 그 용광로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 각자 구원받은 이와 구원받지 않은 이의 위치로 들어간다.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어떤 이는 영원한 용광로를 위해 다뤄졌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은 단순히 성경이 그 문제에 관해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비유가 구원받은 이들만을 다룬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 이 구원받은 이들은 다가오는 왕국을 위해 다뤄졌다.

 

나쁘고, 사악한 이들이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던져진다고 묘사된 사실은 이 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두 틀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다뤄져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왕국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진리를 바탕으로 이 비유에서 다루고, 불 못에 던져지는 구원받지 않은 이들을 다루는 것은 이 일곱비유에서 볼 수 있는 주제범위 밖의 문제다. 이 비유에서 구원받지 않은 이들이 포함된다는 가르침은 원문과 문맥적으로 잘못된 가르침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이런 방식에 따라 이 비유에서 다뤄지고 있는 어떤 생각은 토론할 가치도 못 느낀다. 은유를 제외하고 원문이 문자 그대로 다뤄졌다면 단 하나의 결론에만 도달할 수 있다. 시대의 끝에서 구원받은 이들의 일부, 그리스도인 일부는 이 비유에서 불려진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던져질 것이다. 그곳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신 부분에서 말씀하신 곳과 똑같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것이요, 그들이 실족하게 하는 모든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그의 왕국에서 모아다가 ()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3:41-42)

 

여기서 가라지들은 불법을 행하고, 역겨운 행위를 하는 이들이요, 사탄의 일을 행하는 이들이다. 또 그물비유에서도 기록되었다.

 

세상(시대)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가운데서 사악한 자들을 갈라내어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시니라.”(13:49-50).

 

그러므로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 표현이 활동적으로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로 문자 그대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비유에서 표현된 은유적 언어의 연속인가? 사람이 바깥 어두운 곳, 불 못, 게헨나와 관계있는 성경을 연구할 때 이 두 비유에서 볼 수 있는 정확한 가르침을 알 것이다. 마태복음 13:42, 50절의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는 알곡과 가라지비유, 그물비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약성경 다른 부분에서 볼 수 있는 가르침의 일부다(15:1-6, 살후 1:5-10, 6:7-9, 10:26-31, 1:20-23). 이런 방면에서 게헨나, 바깥 어두운 곳, 불 못에 관한 가르침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

 

1) 게헨나Gehenna, 바깥 어두운 곳

 

게헨나Gehenna는 영어식 헬라어다. 헬라원문은 게엔나다. 이 게헨나는 신약성경에서 12번 사용되었다. 게헨나는 세 공관복음에서 11(5:22, 29-30, 10:28, 18:9, 23:15, 33, 9:43, 45, 47, 12:5)과 야고보서에서 1(3:6)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만이 복음서에서 단어를 사용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늘왕국에 들어가는 것과 그곳에서 쫓겨나는 것과 관계있는 문맥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셨다. 그리고 야고보서에서 게헨나Gehenna는 혀와 관계가 있는 원문에서 사용했다.

 

혀는 지옥(Gehenna)에 불을 던지다”(3:6)

 

게헨나가 야고보서에서 다소 다른 의미로 사용했지만 그것은 혼의 구원과 다가오는 왕국과 관계있는 문맥에 나타나 있다(1:12, 21, 2:5, 14-26, 5:7-8, 19-20). 게헨나Gehenna(Geenna)는 구약성경 히브리원문 힌놈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힌놈은 힌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아들에게 주어졌고, 여호수아 시대에 예루살렘 남부 골짜기에 명명된 이름이다(15:8, 18:16). 이 골짜기는 구약성경 당시 사람희생을 하는 곳으로서 가끔 사용되었지만(왕하 23:10, 7:31)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셨을 당시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버렸던 곳은 더 이상 없다. 힌놈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의 원문을 영어로 번역되었지만 같은 것은 신약성경의 대부분의 영어 원문에서 게헨나Gehenna, Geenna, Hinnom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신약성경 구절에서 게헨나Gehenna, Geenna12번이나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와 야고보서 당시에 사용한 게헨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쓰레기를 버린 곳의 이름이었다.

 

이런 방면에서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버려진 곳을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 야고보서는 같은 곳을 혀의 오용과 연결시켰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동일한 관계, 의미로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으로 쓰였다. 복음서 원문에서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 있는 통치권에서 분리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게헨나는 절대 복음서에서 문맥적으로 구원받지 않은 이들과 영원한 진리를 다루는데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게헨나는 단지 다가오는 왕국을 위한 구원받은 이들과 관계있다.

 

바깥 어두운 곳은 마태복음에서 모두 나타나 있는데 세 곳 다 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8:12; 22:13; 25:30). 바깥 어두운 곳은 주님께서 같은 무리의 사람들 가운데 같은 문제를 다루셨는데 단순히 다른 방식이다. 한 방면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있는 위치를 부인한 이들은 도시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버려진 도시 바깥에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것이다. 다른 방면에서 또 그들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는 그리스도와 분리된 장소에 자신들이 있음을 알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그분과 위치를 차지하는 것에 관해 그들은 어두운 곳과 관련되어 있는 곳, 어두운 바깥에 있음을 알 것이다. 게헨나와 바깥 어두운 곳은 그리스도께서 같은 것을 호소하기 위해 사용하신 두 은유적 방법이다.

 

이 두 표현, 게헨나와 바깥 어두운 곳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 하늘왕국이 이스라엘에게 제안되었던 직후 복음서에서 사용되었다. 제안된 왕국에 대해 이스라엘의 거절로 왕국은 이스라엘을 떠나 전혀 새로운 독립체가 이스라엘이 거절한 것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21:33-46, 벧전 2:9-11). 이 사건이 일어남으로 이미 유대인들에게 사용한 것처럼 게헨나와 바깥 어두운 곳은 이제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서 사용될 것이다. 이 표현은 과거 이스라엘에게든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든 제안된 하늘왕국을 받는 것과 관련해 성경에서 사용되었다.

 

2) 불 못

 

요한계시록 21:8절에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는 묘사는 성경이 같은 것을 다시 다루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이 구절에 있는 불 못은 요한계시록 11-15장에서 구원받지 않은 이들이 영원히 지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제도에서 세상, 육체, 그리고 마귀를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에 그 결과를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마태복음 13:42, 50절에 있는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던져지는 그리스도인들과 같을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일곱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들 중 두 번째에서 볼 수 있다. 이 두 장은 일곱교회에게 짧은 일곱 서신을 기록한다. 각 서신 끝에는 이기는 이들에 대한 약속이 있다.

 

이기는 그에게는‧‧‧‧‧‧‧

이기는 그는‧‧‧‧‧‧‧”(2:7, 11, 17, 26-28, 3:5, 12, 21).

 

이 서신은 구원받은 각자(기기는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전달되었고, 주님은 이기는 것보다 오히려 이기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그들이 오늘날 믿음의 경주를 하도록 장려, 격려하기 위해 보상, , 포상을 그들 앞에 놓았다. 이기는 이들에 대한 각각의 약속은 이뤄지는 범위가 천 년간이다. 경우에 따라 이기는지 이기지 못하는지를 천년 메시야시대만 깨닫게 될 것이다. 이뤄지는 범위가 천년이라는 사실은 아주 쉽게 묘사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26-27, 3:21절에서 일곱교회 중 두 교회에게 약속이 기록되었다. 이 구절에서 표현된 장면은 천년왕국을 지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천년왕국을 지나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 상속자들은 요한계시록 2:26-27절에서 이 통치가 묘사된 것처럼 더 이상 민족들 위에서 통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통치가 이 땅을 넘어 확장되고, 우주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분의 상속자들과 함께 그들 스스로 통치자의 위치로 이동할 것이다(22:2, 5). 천년왕국을 지나 아들은 요한계시록 3:21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분 자신의 보좌에 더 이상 앉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주적인 통치가 나올 때로부터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22:1, 3, 5).

 

서머나교회에 있는 이기는 이들에 대한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불 못과 관계가 있다. 이 약속의 이룸은 천 년간뿐이다. 말하자면 이 약속에서 이기지 못하는 이들에게 넌지시 암시하는 조건은 메시야 시대에서만 존재하고, 영원한 시대에는 없다. 성경은 천 년간의 보상을 받거나 잃거나, 영원한 보상을 얻거나 잃거나 하는 것을 다룬다. 만일 보상이 영원한 것이라면 보상을 잃기 때문에 이것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보상을 잃음은 죽음과 관계성을 포함한다(8:13). 성경이 계시하는 어떤 것은 천년왕국을 지나 영원한 시대 초기에 사라질 것이다(고전 15:26, 21:4). 서머나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에게 이기는 이들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에게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2:11, 20:6).

 

이 약속에는 분명한 암시가 있다. 이기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둘째 사망에 처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약속을 받으려는 어떤 시도와 어떤 것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약속을 무너뜨리는 것이요, 주님께서 엄숙히 경고하시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22:18-19). 이기는 이들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이 약속을 액면 그대로 받지 않고, 이기지 못하는 이들이 둘째 사망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정확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둘째 사망은 불 못과 관계가 있다(21:8). 이기지 못하는 이들(21:7)은 이 불 못에 있는 그들의 위치에 갈 것이다(21:8). 말하자면 불 못에 있는 영역을 가짐으로서 두 번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1:8절에서의 불 못의 일부를 갖는 것과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나? 요한계시록 21장은 천년왕국을 지나 영원한 시대로 이동한다. 요한계시록 21:1-6절은 영원한 시대가 시작하는 조건과 관련해 완벽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6절에 이루어질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었다. 사실 이 단어는 이루어진으로 바꿔야 한다. 헬라 원문에서 이 단어가 완료시제이기 때문이다. 보이실 일들이 끝난 상태에서 오늘날 존재하고 완료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런 다음 6절 후반부부터 8절까지 이기는 것과 이기게 되는 것이 마지막 시대에 있음을 이 책에서 다뤘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볼 수 있는 같은 장소를 상기하게 한다. 그런 다음 나머지 부분은 요한계시록 21:8절에 대한 해석이다. 첫 번째 해석은 처음 부분에 대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21:9-22:5절은 요한계시록 21:1-6a절에 대한 해석이다. 이 부분은 천년왕국이 지난 상황과 관계가 있다. 이 해석이 요한계시록 22:5절에서 끝난다.

 

거기에는 밤이 없겠고 등잔불이나 햇빛이 그들에게 필요 없으니 이는 []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라. 그들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리로다.”(22:5).

 

요한계시록 22:6-21절은 천년왕국 이전, 천년왕국이 진행되는 시대와 관계있는 두 번째 부분의 해석이다(21:6b-8). 이 부분은 메시야시대에 예루살렘의 문 밖에서 있는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사람은 개들과 마법사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누구든지 밖에 있느니라.”(22:15)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용은 빛 비춰졌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1:7-8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전해준다. 또 요한계시록 21:7-8절의 내용은 이기는 이들에 대한 약속을 빛 비춰준 것이다. 특히나 요한계시록 2:11절의 둘째 사망을 다루는 서머나교회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과 관계가 있다. 이런 방면에서 천 년의 환경과 영원한 환경 사이가 구별됩니다. 새 예루살렘이 새 땅에 기초하는 것(21:24-27)처럼 영원한 시대에 문 밖에 있는 이들은 이방민족이 되겠지만 하늘에서 땅 위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옴으로 메시야시대 이전에 문 밖에 있는 이들은 이기지 못하는 이들이 될 것이다(22:14-15). 그들이 차지할 곳은 성경에서 게헨나Gehenna, 바깥 어두움,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 불 못으로 묘사되었다. 게헨나Gehenna와 불 못을 둘러싼 그림은 오해의 여지가 없이 나타난다. 게헨나Gehenna가 땅에 속한 예루살렘 도시의 쓰레기장이었던 것처럼 불 못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 도시의 쓰레기장으로 볼 수 있다. 게헨나Gehenna가 하나님께서 거주하신 곳에 있는 반대편에 있었던 것(1:11, 14:13)처럼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에 있는 게헨나Gehenna는 그 반대편에 있게 될 것이다. 불 못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통치를 제외하고 완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이들은 1,000년 메시야시대 동안 이 곳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이런 방식으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관해서 불 못과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연관시키는가? 그 해답은 성경이 천년왕국 이후 끝없는 영원한 시대에 불 못과 구원받지 않은 이들과 연관시키는 것과 같은 이유가 될 것이다. 불 못은 사람을 위해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불 못은 마귀와 그가 부리는 천사들을 위해 준비되었다(25:41). 불 못은 하나님의 으뜸의 능력과 권위를 거절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되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는 본래 사탄이 하나님께 위임받았던 것이다(14:13-14). 이런 방면에서 불 못은 왕권과 연결된다. 사탄과 그가 부리는 천사들을 대신해 창조된 사람은 이런 정확한 기초로 불 못과 연결되는 것을 안다. 자신의 구원, 즉 통치권에 대한 이유를 무시하는 구원받은 이들은 천년왕국 동안 불 못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 것이다. 또 사람창조에 대한 이유와 구원을 무시하는 구원받지 못한 이들도 천년왕국 이후 영원한 시대에 불 못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과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해 성경은 무슨 말씀을 하고, 무슨 은유를 다루고 있는가? 성경은 다른 부분에서 같은 것을 다루기 위해 은유를 사용한다고 기록했다. 요한복음 15:6절과 히브리서 6:8절에서 구원받은 각자에게 불이 이글거리는 곳으로 은유적 의미로 표현되었다. 두 곳의 문맥에서 열매를 맺는 것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이기는 이들과 이기지 못하는 이들로 표현된 것처럼 정확하게 같은 것이다. 부정적인 면은 성경에서 적어도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되었는데 하나는 게헨나Gehenna에 던져지거나(5:22, 29-30, 23:15, 33), 다른 하나는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진다고 말한다(8:12, 22:13, 25:30). 요한계시록 2:11에 있는 이기거나 이기지 못하거나 그리고 둘째 사망을 당하거나 당하지 않거나 하는 것은 로마서 8:13절에 있는 표현을 다소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너희(형제들)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면(억제하면) 살리라.”

 

게헨나Gehenna, 바깥 어두운 곳, 불이 이글거리는 곳, 불 못, 용광로, 죽음, 둘째 사망을 당함은 같은 것을 다른 측면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열매를 맺는 것과 왕국이 구원받은 이들과 관계가 있고 그런 것을 말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함으로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분명하다. 문자적 바깥 어두운 곳, 게헨나Gehenna,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 불 못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은유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이들과 불 못이 구원받은 이들과 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성경에서 표현된 경우는 없다. 이것은 은유가 아닌 문자로 이해하는 것 외에 어떤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 앞의 경우를 제외하고 신실하거나 신실하지 못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왕국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8-19장에서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롯 둘 다 산 위에서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산은 왕국을 의미한다. 하지만 각자가 차지한 곳이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그가 항상 일어섰던 주님 앞에 일어섰다(18:22; 19:27). 하지만 롯은 그가 항상 일어섰던 곳에서 주님과 분리된 곳에서 자신이 있음을 발견했다(19:1, 30).

 

왕국

 

하지만 이기는 이들 때문에 어떤 것은 그물비유에서 실제로 다뤄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천년왕국의 환경이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것이 다뤄졌다(13:43). 이기는 이들에 대한 약속은 그들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오를 것이라는 것, 그리고 민족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들로서 통치할 것이라는 것이다(2:11, 26-28, 3:21).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상속자(그분의 아내, 그분의 여왕)은 구속된 상속 위에서 통치할 것이고, 이 통치는 1,000년 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 통치는 모든 통치, 권위, 그리고 능력을 내려놓게 할 때까지 지속할 것이다. 그 통치는 모든 대적들이 그분의 발아래로 내려올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고전 15:24-28). 여기엔 사망도 포함된다.

 

멸망 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5)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상속자의 통치는 마태복음 13:43절이 이뤄지게 될 이 때다.

 

그때에 의로운 자들은 자기들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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