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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강 이기는 이들에 대한 도전들(1)

Hernhut 2009. 7. 1. 16:35

19강 이기는 이들에 대한 도전들

 

성경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기는 이”로 불려진다. 승리, 정복, 극복, 획득 이김 등 이런 단어의 여러 구절들에서 쓰이고 있는 많은 동사의 뿌리는 헬라어 “니카오”이다. 이번 강의와 다음 강의에서 우리는 이기는 이들에게 도전들을 볼 것이다. 여기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위한 그분의 자녀들을 원하시는 투기장(鬪技場)이자, 전쟁터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지배하여 승리하는 형태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겨야할 것들이 허다함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전쟁터에서 어떤 실패하는 것들을 깨닫지 못함을 걱정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들에 관하여 주님을 추구하는데 유익을 준다. 그분이 그분의 은혜 안에서 자라는 우리를 원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그분은 그분의 기준으로서 우리에게 설명할 수 있으시다.

 

세상을 이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지배하여 승리하여야만 한다(요일 5:4~5). 요한일서에서 쓰인 세상은 거대한 주제이다. 여기서 세상의 헬라어는 “코스모스”다. 그것의 기본적인 의미는 질서나 배열을 뜻한다. 그것은 사회의 조직된 시스템을 완전하다고 부르는 것이다. 세상 조직은 교육, 예술, 오락, 상업, 유행, 성공, 가족의 삶과 전통, 종교, 그리고 자선 사업들 등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을 기만적으로 빼앗기 위해서 이러한 조직을 사용한다(엡 2:2, 약 3:3~4, 요 2:15~17, 5:19). 구약성경은 이집트를 세상 조직으로 그리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파라오에 의해 노예가 되어 속박을 받았다. 파라오가 이집트 전역을 지배한 것처럼 사탄은 이 세상 조직을 지배한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는 것이며”(요일 5:19)

 

여러분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지 모르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봉사하고 또 예배하는 것을 걷어 치웠다(출 4:22~23, 5:1~3).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세상 조직에 의해 세상 조직의 영향 아래서 그들의 삶을 살도록 유혹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에베소서의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조직이 그들의 본질적인 정욕의 이유에 의해 그것에 사람들을 유인하여 공급하는지를 본다. 이 구절들은 또한 세상 조직 형태와 그 조직과 함께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유혹하여 사람들 안에서 사탄적인 세력들의 일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세상의 과정을 통해서 이전에 걸고 있었던 여러분의 부정들과 죄들 안에서 죽었었다. 영의 힘이요, 공기의 힘인 마왕(사탄)을 통해서 이제는 불순종의 아들로 일을 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우리 역시 이전에 생각과 육체의 욕망을 포함하여 우리 육체의 정욕 안에서 살고 있었으며, 또 지나간 때에도 진노의 천연적인 자녀이었다(엡 2:1~3). 비록 이 구절이 불신앙인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을 지라도 우리는 믿는 이들이 그것의 영향과 세상으로부터 자동적으로 해방시킨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정통파 성경 교사(목사 혹은 신부)는 그리스도인들이 처리해야할 세 가지 적이 있음을 여러분들에게 말하는데 그것은 세상과 육체와 그리고 악마다. 그 사실을 강조함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세상과 그 영향과의 전투를 하고 있다. 우리는 두 구절을 볼 필요가 있다. 사도 요한이 믿는 이들에게 쓴 편지에서 경계를 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헬라에서 이 명령의 의미는 정확하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라”로서 표현될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2)

 

사실 이 구절에서 “세상”으로 번역된 단어는 시대를 뜻하는 “아이온aion”이다. 성경은 세상이 현시대의 유행을 통해서 그 스스로 나타나고 있음을 계시한다. 따라서 에베소서 2:2은 “이 세상의 과정(aion)”을 말하고 있다. 로마서에서 인용한 구절은 믿는 이들이 세상의 현재 형태에 구조적 형태를 제거하도록 변화의 과정을 경험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세상은 우리 육체, 우리 천연적인 생명(옛 생명)의 욕망들과 마음에 흥미를 끄는 것들 즉 그것의 유혹으로 우리를 덫에 걸리게 한다. 스모르개스보르드 - 바이킹 요리 (서서 먹는 스칸디나비아식 요리의 일종: 가짓수가 많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욕망을 돋우는 것처럼 무엇인가로 높게 접기에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저녁식사를 돋구는 것과 같다. 사탄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으로부터 사람을 계속 유지시켜서 그 사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분명한 죄 있는 것들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사탄은 또한 믿는 이들이든지 불신자이든지 둘 다를 배앗고 유인하기 위해서 겉으로 보기에 순결함, 재미, 또는 세상 조직의 흥미 있는 것들(대중음악, 영화, 책, tv)을 사용한다. 만일 여러분이 스포츠를 좋아한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더 동기부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을 종사시키고 또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해 “스포츠 부분”을 높게 개발되도록 한다. 만일 여러분이 생활양식을 건강에 흥미가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과 시간을 빼앗기 위해 셀 수 없는 책들과 잡지들과 비디오와 건강식품 매장과 인터넷 사이트 등이 있다. 또 여러분이 예술을 즐긴다면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줄이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을 기쁘게 하는 모든 종류의 책들과 행동들이 있다. 현대 서구 사회는 특별히 테마파크에서부터 제트스키까지 모든 것들과 함께 레크리에이션과 오락의 문제로 “발전된 슈퍼”가 있다.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의 대부분은 세상 조직에 얽혀져 있다. 많은 이들은 부도덕한 즐거움을 제외하고는 믿지 않는 이들이 즐기는 모든 즐거움을 즐기기 원한다. 결과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은퇴하거나 혹은 지금 여가 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들의 저축을 하여 부자가 되기를 추구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 명성 있는 자동차, 더 큰 집, 모든 종류의 오락, 스포츠, 골프모임, 또 가정에서의 휴가를 추구한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경계하야 한다. 마귀는 하나님과 그분께 그들의 유용함과 친밀감의 잠재능력을 가진 그들을 빼앗기 위해서 계획적인 교묘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입는 것, 유행, 먹는 것, 오락, 성공을 위한 경력과 취미들 등 주의를 끌고 있는 것을 검토하기 위해서 정직하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안으로 돌아가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우리의 정욕을 가득 채우려고 한다고 가르친다. 여러분 가운데 싸우게 되는 것과 불평하게 되는 요소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주위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으로 여러분의 즐거운 요소가 있지 않은가? 여러분이 갈망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은 여러분은 살인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싸우고 다투기 때문에 기쁨을 얻을 수 없고 시기심이 강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가질 수 없음이 틀림없다. 여러분이 요청을 하고 받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의 즐거움으로 보내기 위해서 여러분이 잘못된 동기 때문이다. 간음한 여러분, 세상과의 친밀함은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기를 소망하는 이들은 그 스스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약 4:1~4).

 

가장 큰 문제는 세상 것들을 사랑하는 믿는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 그들의 사랑과 경쟁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제공할 이 세상 조직의 것들로 만족을 추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흩으러 질 것이고, 하나님과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갈망하는 것이 약해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믿는 이들에게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 날 수 있음을 본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을 위한 갈망을 진정으로 갖지 않는데 이는 그들이 세상의 것에서 만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사도요한의 권고는 이 문제에 아주 적절한 것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ㆍ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났음이라. ㆍ이 세상도 그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세상은 부(富)와 과잉 선행과 쾌락을 따르도록 믿는 이들을 유혹하여서 그들을 점령하고 또 흩트리려고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매일 일상 업무인 일반적인 것들을 통해서 마음을 빼앗아 몰두하게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인간관계와 공유재산이 그분을 완전하게 따르고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계속 유지하는 데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에게 경고하신 이유이다. 다음 구절들을 주의 깊게 생각하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자는 ㆍ지금 이 시대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되 핍박과 함께 받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막 10:29~30)

 

우리는 실제적으로 정상적인 소유물들과 이 생애에서의 관련된 마음의 애착을 갖는 것에서 기꺼이 떠나야만 한다. 나는 우리가 이것들로 인해 우리의 책임들과 우리 가족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봉사 안으로 우리를 부르실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봉사 안으로 부르시는 그 때에 주님께서는 잠시 동안 사랑하는 것들 즉 자기 집과 직업과 소유된 모든 것들을 떠나기를 요구하신다. 혼란을 일으키는 것들을 떠나는 것은 우리가 완전하게 주님을 따르고 천년왕국시대가 올 때 풍성한 삶의 보상(영원한 구원이 아님)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주님께서 현시대에서 100개의 교회(the Fold) 증가를 말씀하실 때 우리는 여기 이 땅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족 안에서 이런 것들의 즐거움의 증가됨을 말하고 있다.

 

 

세상 조직의 일부분으로서의 종교

 

사탄의 세상 조직의 한 부문이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토론을 위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믿는 이들이 특별하게 위험을 감수하고 보유하고 있는 부문이다. 그 부문은 바로 종교다. 우리는 사탄이 그들의 교묘함으로 종교 분야에서 심지어 기독교에서 아주 많은 일을 하는 손을 가지고 있음을 보아야만 한다. 항상 그렇듯이 사탄의 목적은 주인에게 진정으로 쓰임 받는 것을 포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넘치는 잠재력을 체험하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묶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사탄의 술책의 어떤 요소가 유일하게 돋보이도록 할 수 있다. 역사 구석구석에서 이 분야에 대해 사탄의 교묘한 조정의 즐길 거리로 오랫동안 설교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만 사탄이 기독교를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는가를 집중 조명할 것이다. 사탄이 사용했던 술책 중의 하나가 의식주의와 율법주의이다. 성경구절을 읽어 보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아시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ㆍ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ㆍ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하노라.”(갈 4:9~11)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嫄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ㆍ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 ㆍ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湺尙)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자기가 보지도 아니한 것들 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육신적 생각으로 헛되이 우쭐대며 ㆍ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느니라. 온 몸이 머리로부터 마디와 힘줄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결합하여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느니라. ㆍ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 ㆍ(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ㆍ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대로 없어지는 것이요,) 사람들의 명령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 ㆍ참으로 이런 것들은 자기 의지대로 경배를 드리며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 있는 것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골 2:16~23)

“이것은 할례 받은 자들이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면서 다만 너희 육신을 자랑하고자 하여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함이라. ㆍ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ㆍ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 효력이 있기 때문이라.”(갈 6:13~15)

 

이 구절들은 세상 조직이 할례와 음식물의 규정들과 특정한 날의 준수와 같이 종교적인 것에 초점을 두는 초등 원리를 포함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육체적인 종교는 우리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제를 반대한다(갈 5:2, 6:15, 골 2:8, 16~17). 이 같은 육체적인 종교는 종종 종교적인 인도자(교사나, 신부나, 목사)들에 의해 구약의 율법을 그들의 가르침의 토대로 하여 열심히 권유한다. 우리가 오래전 강의 6 - 율법으로부터 자유함 -을 다시 보라

 

사탄의 또 다른 교묘함은 미숙한 믿는 이들의 육체적인 욕망을 미혹시킴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비뚤어지게 한다. 또 성경을 찾아보자.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영벌(玲罰)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는 자들이라.”(벧후 2:1)

 

“이는 그들이 헛된 것을 크게 부풀려 말하면서 잘못하며 사는 자들로부터 빠져 나와 깨끗하게 된 자들을 육체의 정욕과 심한 방종으로 꾀어 내기 때문이라.”(벧후 2:18)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ㆍ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딤후 4:3~4)

 

물론 이 구절에서 어느 부요의 복음을 쉽게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관련된 부가적인 면을 보면 오락의 요소들이다. 이것들은 전 세계적으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그 일이나 사건들은 관중을 모으기 위해서 육체에 호소하는 바탕을 두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일에서 수단들을 정당화하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만 한다. 우리의 가르침과 훈련은 영적으로 자기를 부인(고행과 수행이 아님)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육체의 방법들과 욕망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많이 퍼지게 하는 사탄의 방법은 혼합된 종교로 생산된 하나님으로가 아닌 일이나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들어가 생각을 소개하는 것들이다. 혼합되는 것이나 본체는 하나님께 속한 것 같은 어떤 요소들일 것이나 다른 것들은 아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 안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것이 보이기 때문에 혼합된 전체적인 것을 허락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고 그들이 노골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한 그것에 관해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은 혼합된 것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 하나님의 순수함이 아닌 어떤 것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한다.

 

이처럼 믿는 이들은 혼합을 관대하게 여기는 교회나 사역활동에 참여하지 않거나 단순히 인간의 요소나 어떤 신앙심 없는 요소를 뿌리 뽑기 원할 것이다. 여러분은 계시록 2, 3장에서 아시아(지금의 터키)에 있는 일곱 교회를 요한의 평가를 되살림으로 인해 주님께서 이 같은 혼합된 것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볼 수 있다. 바울 역시 교회 안에서의 사람의 수단(방식)과 율법의 혼합을 뿌리 뽑기 원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서구 기독교들은 혼합된 것들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총체적으로 이와 같은 경건치 않은 것으로 혼합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또 예수님께서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어떤 여자가 가져다가 굵은 가루 서 말 속에 숨겨 넣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이 비유에서 거칠게 빻은 가루는 특별하게 그분의 인성 즉 그리스도의 순결을 상징한다(구약의 소제 안에서 묘사됨 - 레 2:1~2). 성경에서 누룩(효모)은 항상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악의 어떤 것을 대표한다(출 12:15에서 누룩에 대해 첫 번째 언급을 보라. [무교병 창 19:3]).신약 성경에서의 한 예로 고린도교회에 있는 부도덕함은 누룩으로 인식되어 있다(고전 5:1~2, 6~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명백한 죄들을 그런 “누룩”의 악을 제한하지 않으셨다. 주 예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에 관해서 경고하셨다. 마태복음은 이 누룩에 대해 기록하기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이라고 기록했다(마 16:12b). 예수께서는 또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사야서로부터 인용하여 적용하셨는데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친다”(마 15:9b) 그들을 꾸짖으셨다.

우리는 혼합된 종교 안에서 적어도 누룩의 한 가지 요소는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닌 사람의 관념에 의해 가르치고 있음을 본다. 사람에 의해 가르치는 신약성경에서 또 다른 입장은 교회를 비난하고 또 교회에 위험으로 보인 것이다(골 2:21, 딤전 1:3~9, 히 13:9). 교회에서의 어떤 가르침은 누룩의 근거로 갖고 있는 것을 디모데에 의해서 분명하게 예언되었다.

 

기독교에서 종교적인 혼합의 누룩의 또 다른 요소는 사람의 전통들이다. 예수께서 종교적인 전통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효력을 잃게 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노골적으로 언급하셨다(막7:13). 성경은 또한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심지어 그리스도 자신을 반대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성경을 또 다시 보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이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골 2:8)

 

사람의 생각들과 사람의 가르침들과 사람의 힘과 뜻과 전통과 방법들로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건축하심 안으로 누룩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올 심판의 날에 믿는 이들 각각의 일이 사람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에 의한 것인지를 보시고서 시험하실 것이라고 경고한 것은 이 많은 문제에 따른 것이다(고전 3:1~15).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들의 요소를 볼 필요가 있다. 그것들이 사람에게서 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인가? 여러분은 원수의 일은 배후에 전적으로 사람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많은 비성경적인 가르침과 훈련들이 있다. 주님께서 우리가 누룩을 깨끗케 하며, 또는 이단적인 것을 용납하는 것에서 떠나도록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누룩에 관해 개의치 않으나 주님께서는 절대로 용납하시지 않으신다(계 2:20~23). 이 구절은 두아디라교회에게 주신 그분의 말씀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썼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ㆍ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肉寃截)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고전 5:6~7)

 

이것은 기독교의 비성경적인 믿음과 훈련들을 설명하기 위한 입장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인의 훈련과 그들의 생활에서 어떤 혼합된 이단에 빠지지 말며, 또 이러한 문제에 관해 하나님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청하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성경을 찾고 형식적인 원리―성직과 평신도적인 계급주의와 교파와 교단주의와 그리스도인들의 경축일(부활절이나 성탄절, 유월절, 사순절 등)―와 같은 문제에 관하여 기도하기를 격려한다.

 

사탄의 세상 조직은 항상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고 개발된다. 이 시대 끝말에 완전하게 개발된 종교적인 사탄의 걸작은 계시록 17장의 커다란 바벨론이 될 것이다. 그 조직 안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의심하지 않도록 매혹시키는 어떠한 하나님의 요소들이 있다. 이 요소들은 금과 은과 보석(진주)로 꾸며지고 도금된 여자(바벨론)다(고전 3:12, 계 17:4). 큰 바벨론은 그 여자의 본성으로서 이러한 요소들을 소유차지 못한다. 다만 여자는 그것들(금, 은, 보석)로 도금될 뿐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녀의 혼합된 징표를 손 안에 가지고 있다.

 

“그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것들과 그녀의 음행으로 인한 더러운 것이 가득하더라.”(계 17:4)

 

많은 보수적인 성경교사들은 배교적인 기독교로 이 바벨론과 동일하게 간주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는 충고는 이 혼합의 종교를 떠나게 하는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또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성경 요한일서 5:4~5에서 세상을 이기는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4절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우리의 승리가 사실로 이루어진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 구절의 후반부에서는 우리 처음 믿음에 의해서 세상에서의 위치적인 승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성취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두 번째 방면은 매일 이 승리 안에서 살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현재분사로 이기고 있는)가 누구냐?”(요일 5:5)

 

이 이기는 이는 앞의 구절에 의해 이와 관련하여 그 상태를 한층 더 뜻을 명확하게 한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세상을 이기기(현재 시제)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우리 인간의 영이다(요 3:6, 히 12:9). 우리는 온통 사랑하는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서 세상의 유혹과 함정(덫)의 모든 것을 이기기 위해서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회개한 우리 영 안에서 살아야 한다. 여기에 세상을 이기는 하루 동안의 생각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대부분 중요한 것들인데 이 문제들이 믿는 이들을 위한 심각한 문제들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의 교묘함과 그것의 우리 생활을 유혹함에 경계해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동일하게 됨을 포함하여 우리가 “땅에서는 나그네요, 순례자”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동의해야 한다(갈 6:14, 히 11:13). 나는 종종 아침 묵상 시간에 갈라디아서 6:14의 고백에 의해 하나님께 동의한다. 이런 동의로 우리는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음의 영적 실재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죽게 하는 세상 사랑함과 어느 혼란하게 하는 것을 위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열어야 한다.

 

분명히 우리는 세상 조직에 얽매이거나 그것에 의해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물러섬으로 인해 조직을 떠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은 결코 사회로부터 떨어져 살도록 우리를 부르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내가 기도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악으로부터 지켜 주시라고 하는 것이니이다. ㆍ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나이다.”(요 17:15~16)

 

이것은 우리가 세상 조직 안에서 살아야 하나 세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험 안에서 이것은 우리 마음이 이 조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가 세상 조직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따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이 우리 활동의 가운데에서 하나님 안으로 살면서 추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생활양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음식, 영화, tv, 오락, 특별한 자동차, 등을 위해 하는 세상 사람들로서 같은 욕망을 갖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의 우리의 선택은 우리를 위한 규칙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성령의 일하심의 민감성과 마음의 욕망의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교회에서 사람의 수단과 방법들에 민감성 때문에 우리의 영은 종종 다른 사람들 보다 다른 길을 따르도록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하게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신성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요 17:15~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