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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의 비전과 144,000명

Hernhut 2008. 12. 15. 21:52

어린양의 비전과 144,000명

 

계시록14:1-5

“ 또 내가 바라보니, 보라, 어린양께서 시온 산 위에 서 계시고 그분과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 안에는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더라. 내가 하늘로부터 나는 한 음성을 들으니 많은 물들의 소리 같고 큰 천둥소리와도 같으며 또 자기 하프로 하프를 타는 자들의 소리를 들으매 그들이 왕좌 앞과 네 짐승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 같은 것을 부르니 땅에서 대속(代贖) 받은 십사만 사천 외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기를 더럽힌 일이 없는 자들이니 이는 그들이 순결한 자들이기 때문이라. 이들은 어린양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며 사람들 가운데서 대속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가 된 자들이라. 그들의 입에서 교활함을 찾을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왕좌 앞에서 잘못이 없기 때문이라.”

 

시온 산에 서 계신 어린양의 비전은 십사만 사천 명의 비전입니다. 이 비전은 마지막 시대에 있는 우리를 포함합니다. 우리가 이 순간에 볼 필요가 있는 것이 비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로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내가 보고 또 바라보았던”(계14:1)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보고 또 바라보았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망을 의미합니다. 그가 보고 바라보았던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였습니다. 그는 시온 산에 서 계신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이 시온 산은 땅 위에 있는 산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시온 산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오르셨으며 높여지셨으며 그분은 오늘도 시온 산에 서 계십니다. 시온 산은 다윗의 왕좌가 세워졌던 곳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 주님께서 반석의 중앙에 있는 하늘의 보좌에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무엇인가 더 보았습니다. 그는 어린양뿐만 아니라 시온산 위에 그분과 함께 서 있는 144,000명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144,000명을 믿는데 이는 육체적인 숫자가 아니라 완전한 수 12의 배수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시온 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서있는 완전한 숫자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일부분이 될 것이라는 나의 마음의 소망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보기 이전의 비전으로서 되어야할 실재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죽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있는 것이다.

 

이 비전은 우리의 복된 희망이요, 우리의 격려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우리 주위를 보는 것 무엇이든지 매우 낙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비전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일반적인 교회를 보면은 그들의 상태들은 매우 낙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역시 낙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이 시간들 동안에 어떻게 지내게 될까? 하고 묻습니다. 주님과 함께 지내는 것은 우리는 시온 산에서 그분과 함께 서 있는 144.000과 어린양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온 산 위에 주님과 함께

그러나 시온 산에 그분과 함께 있게 되면 조건적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온 산 위에서 그분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들은 땅으로부터 구속 받았습니다(계14:3).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는 진실로 우리 주 예수의 귀한 피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격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으로부터 구별되었고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

 

또한 이 사람들은 사람들 가운데서부터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가 된 이들입니다(계14:4). 그들은 주님 안으로 땅으로부터 구별되고 구속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또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주님 안으로 구별된 첫 열매가 되고 사람으로부터 구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을 이마에 가졌습니다(계14:1).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봉인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린양과 아버지 하나님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이마에 있는 어린양과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이것은 우리에게 말할 것이 더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어떤 것이 여러분의 이마에 박혀있다면 그것은 공공연하게 대중 앞에 드러내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볼 것입니다. 이 어려운 시대 안에서의 삶은 아버지와 어린양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도록 하는 것을 쉽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주님의 이름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을 인정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너희가 나를 인정하면 나도 너희를 인정할 것이고 너희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너희를 부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특별하게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께서 반대하시는 나라들 안에 삽니다. 그들의 생명은 위험한 상태이고,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이 모든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죽음 안으로 넘겨짐에도 우리 주님과 아버지의 이름을 기꺼이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에 사람은 이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주님께 믿음이 있다면 박해와 불화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주님을 인정하도록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압박하는 역경에 직면하여 범사에 그분을 인정합니다.

 

 

비파와 물과 같은 소리

그런데 요한은 강한 천둥과 많은 물들 같은 소리를 하늘 밖에서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계14:3). 그러나 그가 들은 그 소리는 비파소리였습니다. 보통 천둥과 비파소리는 틀림없이 정반대입니다. 비파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소리처럼 들립니다. 비파를 연주하는 것은 마음에 연주하는 것 같습니다. 한손에 잡은 비파는 마음으로부터 오는 소리 같습니다. 그것은 비파의 노래를 부르는 듯합니다. 반면 다른 한 손에는 큰 천둥소리와 많은 물들 같습니다. 종종 우리는 많은 반대가 생긴다는 것을 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흔히 144,000명을 비파를 연주하는 사람들이라고 배웠습니다. 즉 이 말은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 뒤에 있었던 다윗처럼 마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음들에서 음악과 노래가 나올 때 많은 물들과 큰 천둥소리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때때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는 큰 천둥소리와 많은 물들 소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44,000명이 노래를 부를 때 그들은 증인들 앞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들은 144,000명을 제외하고 아무도 배울 수 없는 그런 노래로 노래합니다. 음악가들은 그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시인들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시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생활의 체험들로 창작되어 노래하는 것입니다. 144,000명은 많은 체험들을 통해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들의 체험들에서 그들은 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의지식을 체험하는데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좌 앞에서 노래를 하지만 사람 앞에서 구경거리로서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들로 주님 안으로 그들의 체험을 노래합니다. 그들은 얼마나 그분의 은혜를 체험했으며, 그분을 알고, 그분께 감사하는지를 그분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노래는 주님의 살아있는 지식을 표현하고 달콤한 찬양이 되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이 마지막 시대에 주님은 순조로운 삶을 통해 가는 우리를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그분은 많은 어려운 길들인 혼란한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어려운 길들로 그분 아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의 노래가 될 것이며, 한 노래로 그분께 노래할 수 있습니다. 땅에 있는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는데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것을 그들의 체험으로서 배울 수 있습니다.

 

 

순결한 처녀

더욱이 144,000명은 그들이 처녀들이기 위해서 여자로 그들 스스로 더럽히지 않습니다(계14:4). 처녀들인 이것이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 순결한 처녀들이 되고 더렵혀지지 않도록 열심히 권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은 한 사람- 그리스도께 드리기로 되어있고 또 그분을 향하여 단순함으로 남아 있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고후 11:1~3). 이러한 처녀들은 그들의 마음들이 그리스도께 점령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게서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의 입에서 거짓이 없고 그들은 비난할 점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계14:5). 그들은 어린양의 거룩한 보혈로 깨끗해 졌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 있는 그분 앞에서 흠이 없이 되고 거룩하게 되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엡1:4~5). 그것은 우리를 진실되고 순수하고 흠이 없이 되도록 하는 그분의 사랑이십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

마지막으로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은 그들은 그분께서 가시는 곳 어디든지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입니다(계14:4). 이것은 모든 것들을 설명합니다. 내 마음에 이 마지막 시대에 주님께서 곧 오시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분께서 오실 때 시온 산에서 그분과 함께 서게 될 사람들을 찾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이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정말로 이기는 자들로 삼으시는 것은 그들이 그분께서 가시는 어디든지 어린양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통들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떤 시스템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따릅니다. 그들은 온순하고 낮아지신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 주 예수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께서 그분의 지상 생활 즉 베들레헴으로부터 나사렛을 통해 갈릴리를 거쳐 겟세마네까지 그리고 마침내 갈보리 구석구석에까지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걸으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이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어디를 가시든지 어린양을 따르는 그분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된 노예를 대신하고 우리 스스로에게 해방 받을 베들레헴으로 그분을 따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숨겨져 있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비밀한 삶을 사는 나사렛으로 어린양을 따를 것입니다. 그곳은 그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나님께로 알게 되었고 그분은 세상에게서 멸시 받으셨으나 하나님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던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고 멸시를 받게 되고, 또 거절 될지라도 그분께서 행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고 있는 갈릴리로 어린양을 따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게 될 곳인 겟세마네로서 어린양을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그분의 부활하심의 능력을 알 수 있는 갈보리로서 어린양을 따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멀리 떨어져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밀접하게 하여 어린양을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멀리 떨어져 따를 때 우리는 유혹에 빠져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그분을 밀접하게 따를 때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힘으로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그를 따름으로서 그분의 길을 배우게 되고 우리가 그분의 이미지로 따르게 하고 변화되게 하는 시작의 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주님께서 오늘날 하고 계시는 것이 이 같이 따르는 이들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 믿는 이들은 그분이 믿는 이들 안에 그분 자신을 보여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재림을 재촉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사람들 안에 그분 자신을 보여 주실 수 있을 때 신랑께서 그분의 신부를 데리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서 되어야할 비전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은혜로서 우리에게 자비를 가지고 계시며, 우리는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4,000명의 가운데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