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재미있다. 저기, 내가 말했다. 죄는 매력적이고 만족스럽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것이 우리가 그것에 의지하는 이유다. 미국의 연사이자 작가인 로사리아 버터필드가 “만약 당신의 죄가 기분이 좋지 않다면, 당신은 그것을 미워하고 있다.”라고 조롱했다. 확실히, 그녀는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짓도록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단지 명백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죄가 정말로 유쾌하게 느껴진다.
야고보는 이렇게 표현한다. “각자는 자신의 사악한 욕망에 이끌려 유인될 때 유혹을 받습니다.”(야고보서 1:14) 그것은 확실히 내 체험에도 해당된다.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자존심이나 분노에 사로잡혀 있거나, 세상 즐거움이나 음탕에 대한 욕망에 유혹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야고보가 성적으로 충전된 단어 ‘유혹’을 사용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유혹의 순간에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강력하게 유혹적으로 느껴진다. 저항하기 힘든 고혹적인 전화다. “확실히 아프지 않을 거야. 이번만.” ‘얼마나 나쁠까?’
그때 나는 죄가 결코 쾌락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죄는 결코 현금화되지 않을 크고 뚱뚱한 수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우리를 속이고 우리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할 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죄가 그렇게 나쁘면 하나님은 왜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십니까? 왜 그는 우리를 유혹적인 상황으로 몰아넣고 실패하게 만들었을까? ’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말한다. “누구도 유혹을 받으면 ‘하나님이 나를 유혹하신다’라고 말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악에 유혹될 수 없고, 누구도 유혹할 수 없기 때문이다.”(야고보서 1:13) 하나님은 끝까지 선하시다. 우리와 달리 악에 휘둘릴 수도 없고, 우리가 유혹에 굴복할 때 우리가 받을 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원하지도 않는다. 야고보의 말씀처럼 “그러면 욕망이 잉태된 후에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라는 것이다(야고보서 1:15).
야고보에 따르면, 우리의 사악한 욕망에 굴복하는 것은 우리를 유혹한 악한 사람의 침대에 ‘끌려가는 것’과 같다. 그 불법적인 성적 결합으로부터, 욕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 삶에 영적인 죽음을 낳는 죄를 낳는다. 이 생생한 이미지는 우리가 죄의 심각성과 그 영향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그것이 보기 좋고 기분이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파괴적이고 치명적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죄의 죽음의 타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발견되는 그분의 생명을 주는 선함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끼시고, 우리를 위해 최선을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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