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모세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6)

Hernhut 2017. 7. 12. 06:00


, 아카시아나무,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또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도록 그들이 나를 위해 성소를 만들게 하라. 또 너희는 내가 네게 보여 주는 모든 것에 따라 성막의 양식과 성막의 모든 기구의 양식대로 그것을 만들지니라.”(25:89) 하나님은 모세가 시내산에 있었을 때 성막의 패턴을 주셨다. 이 성막은 하나님의 증거가 되고, 하나님의 증거를 건축하는 것이어야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특정한 성막재료들을 내놓도록 요구하셨다. 각각의 재료들은 엄청난 영적의미를 갖는다. 하나님께서 성막건축에 있어 요구하신 재료들은 그분자신을 대표하는 금, 엄청 단단한 인성을 대표하는 아카시아나무,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대표하는 은을 포함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심판을 대표하는 동, 순전한 인성으로 사시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고운 아마포를 포함했다. 이 모든 항목은 교회에서 우리의 성장이 그분의 법리적 증거가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놀라운 그림을 나타낸다.

 

-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 자신이신 금은 성막 전체에 사용되었다. 금은 궤()와 각종 기구를 만드는데도 금을 입혔다. 우리가 성막에 있었다면 금만 보였을 것이다. 금촛대에서 나오는 빛은 모든 금벽에 반사했을 것이고, 금빛이 우리를 목욕시켰을 것이다. 물론 금이 하나님과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증거가 그렇게 많은 금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하나님, 금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아카시아나무(시팀나무)- 단단한 인성

성막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갈망에 대한 가장 풍성한 표현이다. 성막은 하나님과 사람, 금과 아카시아나무 둘 다 포함된다. 물론 하나님은 본질적이시지만 우리는 사람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절대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아카시아나무의 다른 종류가 있다. 어떤 종류는 널빤지와 판재로 쓸 수 있도록 굵고, 크다. 하지만 어떤 것은 덤불처럼 작고, 얇다. 일반적으로 아카시아나무는 아주 긴 가시가 있다. 우리가 이 가시를 본다면 그 사이즈에 놀랄 것이다. 이 가시 때문에 대부분의 동물들이 아카시아나무를 갉아 먹지 못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아카시아나무들이 대부분 크다. 그러나 중동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낮고 작다. 사도바울은 이 중동의 아카시아나무를 목격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너희가 보거니와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주님은 크고, 굵은 영적인 아카시아나무를 선택하지 않으신다. 우리들 중 우리가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 건축하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준비를 하는 크고, 굵은 아카시아나무라고 감히 말하는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키가 작고 덤불을 이루는 나무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는 좋은 가시가 있다. 영화가 우리를 사로잡기 원할 때 우리의 가시가 영화들을 쫓아내기 위해 나온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사악한 것으로 우리의 시간을 빼앗을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의 가시가 나온다. 이 가시 때문에 광야의 척박한 환경에서 우리가 자랄 수 있다. 우리 중 어떤 이가 정말로 그게 자랐다면 우리가 그들을 지나치게 가치를 상승시키고, 그들을 숭배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교회는 하나님과 그분의 어떤 것을 대신하여 그들의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하게 그들의 지도자들을 사랑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지도자들을 숭배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위대한 지도자들이 그들과 함께 있는 한 그들의 교회가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성숙한 이가 필요하지만 그들 스스로 다른 사람들 위에 오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더 큰 아카시아나무인 사람을 보기를 경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경쟁을 해야 한다면 누구의 가시가 더 강한지를 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더 크다고, 더 재능이 있다고, 더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좋은 가시가 있다고 말하라. 사탄이 당신을 유혹하러 올 때 당신의 가시들은 그를 찌르고, 그가 도망가게 하라. 이것이 아카시아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하나님은 그분의 증거를 위해 엄청 단단한 인성을 요구하신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인성은 그분의 증거를 위한 자격이 부족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사용되기 원한다. 하지만 우리 인성의 질()은 너무 약하다. 우리는 본래 타락했다. 우리는 어려움이나 유혹에 맞설 능력이 없어 이기적이게 된다. 심지어 우리는 다른 믿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변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꿋꿋이 붙잡지 못할 수 있다. 우리의 인성은 아카시아나무가 아니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은 은으로 만들어진 소켓에 자격이 없는 이 아카시아나무 널판을 놓으신다(26:19). 소켓은 무엇인가? 소켓은 양 끝에 나사가 절삭되어 있는 짧은 관 모양의 관 이음쇠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특별한 바탕으로 소켓과 같은 그리스도의 구속 위에 굳게 세워진다. 우리는 은 갈고리, 띠로 함께 연결되었다(27:10).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탕으로 한 이 자격 없는 아카시아 널판은 자격을 갖추게 된다. 자격이 없는 아카시아 널판은 교회생활에서 형제들과 함께하기 어렵다. 겉으로 보기에 하늘에 속한 모든 사람은 가끔 꽤나 육체적인 것에 속해 있다. 한 형제는 아주 달콤할 수 있고,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줄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 친구, 자매, 형제가 될 것이다. 다른 형제는 무섭고, 부담이 되고, 빨리 분을 낼 수도 있다. 세 번째 형제는 아주 능력이 있지만 현재의 환경과 상황을 유지하기 좋아하는 반면 네 번째 형제는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움직이는 일을 좋아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와 같은 널판을 사용하여 그분의 증거를 건축할 수 있을까? 은에 널판을 넣어 두는 것만으로 은띠로 널판들을 연결시키고,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없이 그것은 불가능하다. 한 널판이 빠지기 시작할 때 다른 널판이 빠져가는 널판을 붙잡아 준다. 한 널판이 달아나가기를 원할 때 다른 널판들은 달아나는 널판을 붙잡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함께 세워진다.

 

 

널판넓이가 1.5큐빗

성막에 있는 널판들처럼 우리 각자는 넓이가 1.5큐빗(68.58cm)이다(26:16). 우리가 구원받았는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어떤 은사를 가졌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더 넓을 수가 없다. 0.5큐빗(22.86cm) 단위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는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널판처럼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들 중 아무도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1.5큐빗(68.58cm)의 다른 널판이 필요하다. 왜냐면 우리는 완전한 3큐빗(1.3716m)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증거를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 갈고리와 은띠로 붙잡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교회생활의 원칙이다. 우리 각자는 1.5이기 때문에 또 다른 1.5인 동료가 필요하다. 우리는 가끔 결과가 좋은 어떤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칭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들의 칭찬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 안에서 더 넓게 자라기 시작할 수 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우리가 2큐빗(0.9144m) 넓이이고 우리의 동료가 하나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완전한 3큐빗(1.3716m)이요, 더 이상 아무도 필요 없다고 믿기에 이른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의 일원이라고 가르치지만 우리의 생각과 실제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자부심으로 인해 생긴 착각 아래에 살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따라 행동하려고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면 우리는 우리가 여전히 1.5큐빗(68.58cm)일 뿐이요, 은 갈고리와 은띠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연결된 것을 유지할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하다고 빠르게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연결되자마자 우리는 보호받았고, 건강한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이 내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몇 번 실패했고, 그리스도를 공격했고, 하나님의 구원에 먹칠을 했는지를 묻었다면 나는 여러 번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고백했을 것이다. 내가 하루에 3번만 실패했다면 이기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내가 여기에 여전히 있을까? 내가 대학 때 구원받은 후 줄곧 내 곁에 다른 널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간증해야 한다. 내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였기 때문에 널판이 변했지만 거기에도 항상 널판이 있었다. 가끔 널판 덕분에 살맛이 났고, 다른 때에는 그것들이 고문이 되었지만 항상 나의 구원과 축복이 되었다. 하나님은 이 널판의 도움으로 나를 유지시키셨다. 주님은 성막을 통해 우리에게 이와 같은 그림을 보여주시려는 지혜가 되셨다. 우리는 아마 널판 없이 하나님의 증거가 되시려한다는 것을 전혀 모를 것이다. 우리가 모든 방면의 풍성한 체험으로 자라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