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모세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5)

Hernhut 2017. 7. 11. 11:48

 

하나님의 증인되기

모세는 이집트 밖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약 3개월 간 여행을 한 후 시내 산에 도착했다. 이 산에서 하나님은 메세에게 많은 것들을 밝히시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미 주된 것 3가지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율법, 율법에 포함된 안식일, 그리고 절기들이다. 이 셋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 그분의 평강, 그분의 유익, 그리고 절기생활을 주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절기 사람들이 되기

절기를 지키도록 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시끄럽게 하고 설이나 추석처럼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매년 설과 추석 때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고향을 가거나 친지들을 만나러 집을 떠난다. 그 기간에는 비교적 도시는 한산하고 조용하다. 모든 사람들이 일에 열중하는 것 같다. 이런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이런 명절은 지속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아무도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기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 우리 안에서 성숙되고, 증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분의 절기를 기념하지만은 않는다. 우리는 절기 사람들로 변했다. 우리는 절기로 가지만 않는다. 우리는 절기들이 되었다. 우리는 절기를 누리지만 않는다. 절기들이 우리의 실제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슈퍼 그리스도인들로 빠르게 변화되기 원하기 때문에 그 영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절기들을 누리는 것이요, 그리스도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훨씬 더 느리다. 각 주()3+4일로 구성되어 있다. 숫자 3은 하나님을 대표하고, 숫자 4는 사람을 대표한다. 이 절기로 가는 방법은 많은 3+4를 누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풍성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서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얻는 상호교제를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절기를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3+4, 3+4, 3+4, 3+4의 체험을 할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절기를 추수하고, 수확을 하게 될 것이다.

 

수확하는 절기는 결국 장막절이라 불렸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상(理想)에서 요한은 내가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라.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21:3)고 기록했다. 사람과 성막에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갈망이었다. 요한에 의해 이 체험이 설명되었다. “그분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실 것이요,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그분 자신은 그들 가운데 계실 것이다.” 우리는 많은 3+4, 3+4, 3+4, 3+4의 체험을 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많은 3+4, 3+4, 3+4, 3+4의 체험은 장막절에 대한 누림으로 우리를 이끄는 축적(蓄積)이다.

 

하나님+사람, 3+4의 많은 체험은 우리를 절기의 사람들이 되게 한다. 하지만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가끔 3에 관해 모두 잊어버리고 느슨해진다. 간혹 그리스도인들도 남편과 아내가 싸울 수 있고, 서로에게 화를 낼 수 있다. 그 때 3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그런 시간에 그들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절기의 누림이 없음을 느낄 것이다. 심지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도 이런 날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놀랍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에게 주의 이름을 부르자. 당신의 문제는 3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문제는 3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항상 유익이시다. 당신의 문제는 당신의 완고한 4를 가지고 있다. 당신의 완고한 4는 항상 유익한 3과 연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해주라.

 

한번은 한 형제가 내게 난 충분히 고통을 받았다. 난 더 이상 고통을 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난 많은 공감을 했다. 하지만 난 그가 고통을 받은 이유를 알았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일을 하기 원했기 때문에 3이 부족한 것이었다. 3에서 우리 자신을 잘라내고 4만을 갖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자신의 방법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통치권을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을 취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서 머물고, 그분을 더 많이 얻는 것이 강화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것이라는 것,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임재를 요청한다고 주님께 말을 하고, 그분을 말할 때 우리는 절기의 사람들이 된다. 변화는 실제로 빠르게 올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영 안에 계신 주님을 만지는 즉시 3은 우리의 4에 추가가 되고, 우리는 어떠하신 그리스도를 얻는다.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심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고한 후 그는 그때에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 명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는데 그분의 발밑은 마치 사파이어 돌로 포장한 듯하고 청명한 하늘의 본체 같더라. 그분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고귀한 자들에게 자신의 손을 대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도 [하나님]을 보며 먹고 마셨더라.”(24:9-11)고 말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내 느낌으로는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누림이 있는 구절이다.

 

얼마나 놀라운 그림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을 보기에 충분히 가까운 곳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했나? 그들은 먹고 마셨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을 보았을 때 모두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하고 경배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하나님과 모세는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발아래가 사파이어 돌로 포장한 듯하고 청명한 하늘의 본체 같은 것을 볼 정도로 하나님과 충분히 가까웠다. 하나님은 그들이 먹는 동안 그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인해 책망하시 않으셨다. 아무도 하나님을 보고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그들 위에 그분의 손을 얹지 않으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에서 가장 높은 체험 중의 한 그림이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무를 때 교리적인 분쟁은 사라졌다. 아무도 모세의 리더쉽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을 보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렀고, 먹고 마셨다.

 

 

하나님께로 사람을 데려옴

먼저 모세는 산 위로 갔다(19). 그는 율법, 안식일, 그리고 절기들을 가지고 돌아왔다(20, 23). 이 세 가지는 절기생활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사람에게 하나님을 이끈 것이다. 그런 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라.”(24:1)고 말씀하셨다. 칠십인 장로들은 모든 이스라엘을 대표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먹고 마신 것처럼 모든 이스라엘이 먹고 마신 것을 대표했다.

 

그들이 연회를 가진 후 주님은 모세에게 산에 올라와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내가 기록한 돌 판들과 율법과 명령들을 네게 주리니 이것은 네가 그들을 가르치게 하려 함이라.”(24:12) 말씀하셨고, 모세가 올라갔을 때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덮었더라.”(24:15)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가기 위해 연회를 떠나 산위로 갔을 때 그는 그들 모두를 대표했다. 그는 더 이상 개인 자격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단체적 자격으로 갔다.

 

먼저 번 모세가 산위로 가서 그가 가져온 세 항목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번엔 그가 세 항목을 더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항목들은 성막, 제사장직분, 그리고 제사였다. 이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모세가 먼저 번에 가지고 돌아온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에게 오시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이번에 가지고 돌아온 것은 그분의 증거를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오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성막은 우리가 주의 법리적 증거로 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막은 그리스의 풍성, 교회생활 속에서의 우리의 성장을 전람되어 채워져 있다.

 

제사장직분은 몸을 섬기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각자가 제사장이 될 수 있지만 모든 제사장들이 함께 제사장직분을 수행하게 된다. 교회는 증인으로서 주의 이름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제사장직분으로 서로를 섬긴다. 몸 안에서 섬기는 모든 각 제사장은 번제, 소제, 화제, 속죄제, 속건제인 다섯 제물로서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드린다. 아울러 이 항목들은 모든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고, 교회생활을 살고, 몸 안에서 섬기는 완전한 그림을 보여준다. 이 항목들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모든 제물로 성막과 제사장직분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고 이해의 은혜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