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삶으로 대표된 세 단계를 그들이 체험해 알도록 하셔야 했던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께서 누구이신가를 배우는 것이다. 먼저, 이집트에 있던 모세와 같이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준비하시고, 비록 섬김이 나중에 그렇게 영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하지만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갈망하도록 하시는 그분의 통치권을 보아야 했다. 그 다음으로 미디안 광야에 살던 모세처럼 그들은 그들의 거주지로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들 자신 속에 어떤 자신감도 없음을 배워야 했다. 그제야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헌신으로 그분을 영접하고, 불꽃의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을 만날 자격이 얻었다.
흥분과 열정
첫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흥분과 열정으로 특징짓게 된다. 그들은 항상 이것·저것으로 바쁜 계획을 세우고, 여기·저기로 돌아다닌다. 그들은 이것 한 가지, 저것 한 가지에 대한 부담이 있지만 어떤 이유 때문인지 그들 스스로 자라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을 알지만 아주 조금 그분을 체험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는 방법을 알지만 그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목적을 알지 못한다.
어떤 형제들은 교회에서 메시지 준비를 요청했을 때 아주 많이 수고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메시지에 대한 목표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이 말씀으로 수고하는 것보다 어떤 것으로 훨씬 더 열정적이고 흥분으로 가득 채우고 아멘 소리를 외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비밀스런 목표다. 아멘 소리가 없다면 그들은 아주 실망스러워한다. 그들은 교회의 목표가 더 멀어졌는지, 어떤 누군가 도움을 받았는지 물어보는 것조차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이 여러 해를 보내고, 어떤 사람들은 움직이지도 않는다.
어느 날 어떤 젊은이들은 그들이 그들의 사역확산을 위해 아프리카, 유럽, 다른 아시아 국가에 가서 수고하기를 원한다고 내게 말했다. 이 지역들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활짝 열려 있는 곳이다. 그 곳에 나가기를 원하는 형제들은 그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외에 나가서 사역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수고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고 열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의문이 생긴다. 왜 그곳에 나가려고 하는가? 그런 곳에는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나가 있거나 그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다. 하나님께서 형제를 보내시는가? 형제가 그 곳에 가려고 하는 목표나 목적이 무엇인가? 형제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해외로 나가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큰 인수(人數) 증가를 위해 수고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은 이미 많은 지체들을 교회원으로 속하게 한다. 그런데 왜 그들을 위해 수고하지 않는가? 많은 교회들이 수많은 지체들을 교회당 안으로 이끌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수고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공급하기 위해 성경으로 수고할 수 있지만 많은 회중들은 이미 성경연구로 사람들을 모으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을 위해 수고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가 그들이 하나님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충성은 전혀 그분을 만족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목적의식이 있기를 갈망하시고, 또 그분의 목적과 일치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와 섞이는 사람들
그리스도는 그분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분과 섞이는 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얻고 싶어 하신다. 이 섞임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달콤한 체험이다. 이런 섞임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사는 젊은 커플의 체험과 같다. 처음에 그들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에 서로 놀란다. 해가 지남에 따라 다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은 같이 웃고,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섞이고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사랑 안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냄으로 정상적이고 달콤하게 일어난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으로 그분의 인격을 섞으시기 원하신다. 얼마나 형언할 수 없이 달콤한 체험인지! 우리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것과 섞이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되는 사람이다.
가끔 우리는 바울이나 베드로 등 또 다른 영적 모델이 되려는 야심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야심은 좀처럼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갈망하심 안에서 쉬는 것을 배울 때까지 좌절을 겪도록 결말을 맺게 된다. 그런 다음에 영적인 활력이 우리 안에 떠오른다. 우리는 우리의 야망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만족한다. 웅장한 이룸을 갈망하는 대신 우리는 자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섞이게 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쓰신다면 다른 것에 아무런 관심조차도 없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리고, 배우는데 쉬운 공과가 아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기를 한 후 모세는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려고 그의 야망을 잃었고, 그의 거주지로서 그분 안에 거하기를 원했다. 하나님께서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분 자신을 그에게 보여 주신 때였다. 야망이 없는 모세가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것은 이 부드러움이었다. 모세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집트로 갔고, 결국 사람들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바로 그 산으로 이집트에서 나왔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사는 사람들
그 산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불리는 십계명을 그 사람들에게 주셨다(출 20:1–17). 우리가 단순히 이것을 규칙으로 보고서 지켜야 하거나 일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잃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나 비난하도록 이 계명을 가져오시지 않으셨고, 우리가 그분과 달콤한 관계를 맺고 그분께서 누구신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가져오신 것이다.
첫 계명
“나는 너를 이집트 땅 곧 속박의 집에서 데리고 나온 {주} 네 [하나님]이니라.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출 20:2–3)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그분께서 누구신지를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알기 시작할 때부터 그분은 우리의 초점과 갈망이 될 것이다. 아무것도 그분을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또 다른 하나님을 절대 소유할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다른 것들로 하나님을 대체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다른 대체물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는 증거다.
둘째 계명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20:4–6).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는 다른 어떤 것에게 절대 숭배할 수 없었다. 이 계명은 단순히 조각상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대부분의 조각상들은 단순히 예술품에 불과하다. 숭배할 대상이 아니다. 이 말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하는 어떤 것들도 이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직업, 종교적인 성공, 돈, 명예, 지위, 재산, 자동차나 가전제품, 집 등 수많은 것들을 숭배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질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돌이키기 위해 그분의 통치권을 발휘하신다. 그분은 필요하실 때 우리의 부당함에 방문하셔서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긍휼을 보여 주신다. 그분은 다시 우리가 이기도록 내적으로 자극하시고, 우리의 환경을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신 이래로 다른 아무것도 우리를 차지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의 통치권에 항복하고 그분께서 우리 삶을 통제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계명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주}가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나와 관계되지 않고, 하지도 않은 나에 관해 말을 하고 나의 이름을 사용한 사람들과 한 방에 있었다면 아주 모욕적이었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되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에 관해 말할 수 없고, 헛된 방법으로 그분의 이름을 사용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만지기 위해 주의 이름을 불러야만 한다. 우리 영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옳으시기 때문에 응답을 기다리는 것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분이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가장 쉽고, 순수하고, 달콤한 기도다. 고린도교회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모든 곳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고전 1:2)을 부를 수 있다.
넷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네가 수고하고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거하는 네 나그네나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처음 세 계명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체험은 안식으로 왔다. 안식일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권과 그분의 친밀하신 임재를 알기 위해 우리 하나님 안에서 휴식(안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휴식(안식)은 우리의 환경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 외적인 것으로는 간혹 혼란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확신 가운데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오늘날 안식일을 지킨다든지 주의 날을 안식일처럼 지킨다든지 하는 거짓교리에 빠지지 말라. 이러한 것들은 표면적인 것들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셨고, 안식일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성도(교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안식일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 계명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이 네게 주는 땅에서 네 날들이 길리라.”(출 20:12)
나머지 계명들은 우리의 생활이 주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와 같은 생활의 첫 번째 방면은 우리가 우리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우리의 근원이시다. 하지만 우리의 부모는 육적으로 우리의 근원이다. 이런 육적인 면에서 부모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으시다. 부모는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젊은이들은 사랑한다고 말함으로 부모를 공경할 수 있다. 대부분의 부모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원한다. 대부분의 부모는 그들의 아이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눈물을 흘린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라.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우리가 안식을 누리는 첫 번째 증거다.
나머지 계명들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너는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출 20:13–17)
우리가 안식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경건하고 합당한 모든 부(富)를 산출한다. 그러므로 많은 계명들이 없다. 왜냐면 그 적은 계명들이 하나님을 아는 열매이고, 그분의 통치권, 그분의 친근하심과 안식을 체험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열매의 첫 번째는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지만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의 임재 안에서 안식을 취할 때 어떤 것을 훔칠 생각을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탐낼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셨다는 것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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