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모세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4)

Hernhut 2017. 7. 10. 21:51

 

계명, 안식일, 절기 체험

모세의 삶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시작했고, 그런 다음 미디안에서 살았고, 마지막으로 이집트에서 나와 시나이(시내) 광야에서 좋은 땅까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었다. 처음 두 단계는 하나님께서 준비된 모세가 되도록 하는 준비단계였다. 마지막 단계에서 불꽃이 이는 가시덤불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분의 증거가 되어야 했음을 계속해서 벗기셨다. 이것은 모세가 그의 나머지 삶을 짊어져야 했던 거룩한 헌신이 되었다.

 

 

계명 체험

먼저 하나님 자신께서 10계명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우리가 할 목록으로나 하지 않을 목록으로 이런 계명을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실제를 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앝으신 분이 아니시다. 이 계명은 먼저 그분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결코 대체될 수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두 번째로 그분은 계속적으로 그분 자신께 우리를 이끌어내시려고 그분의 통치권을 행사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악에 방문하시고, 필요에 따라 긍휼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지나고 나서 보니까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도록 은밀히 사역하셨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우리가 아직도 여기에 있는가? 하나님이 통지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통치권은 역사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통치권 행사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유익되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은 항상 이긴다. 복음은 심지어 가장 어려운 때에도 승리한다. 복음은 국제적인 사건들로 인해 혼란 속으로 빠져들 때에도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대통령이 있고, 국회가 있을지라도 믿는 성도로서 우리는 통치자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다른 것에 맞춰져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마치 그분이 아닌 것처럼 그분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음으로 그분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항상 우리의 부르짖음에 대답할 준비를 하시고 계시며, 우리가 그분의 손에 의해 붙잡힌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1:27, 10:2829).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한다(딤후 2:22)

 

안식일 체험

계명은 우리가 우리의 놀라우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도록 우리를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로 이끈다. 의로운 생활 가운데 있는 이 안식의 문제들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고,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신 많은 것들로 만족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신한다. 이제 마지막 여섯 계명이 있다. 여섯 계명은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방식의 목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생활하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서 여섯 계명은 하나님의 통치권과 임재하심으로 우리의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이 매주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열매 맺고,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먹이는 안식년으로 확장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떠한 것을 산출하기 위해 수고할 수 있는 어떤 땅을 찾아야 한다. 이 땅은 우리의 교회에서 어떤 봉사로 수고할 수도 있고, 어떤 새로운 것을 산출하기 위해 다른 먼 외국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수고할 수도 있다. 창조적인 자들이 되라. 그것은 새로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것을 알기 위해 성경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을 위한 나의 가장 큰 관심은 그들이 안식년을 체험하기 위한 땅을 가져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안식년 끝 무렵에 우리는 다른 기간 동안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다음 안식년을 위해 준비할 때까지 우리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이 시간 동안 우리의 동료들은 대개 우리가 우리의 수고로 일으켜 세워진 사람들이다. 우리가 많은 것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할 수 있는 반면 결국 우리는 모두 함께 성장한다.

 

이것이 나의 경험에도 있었다. 나는 주님께서 정기적으로 나를 어떤 장소에 가도록 하셨다고 느꼈다. 나는 매년 같은 장소에 네 번 가서 한 달씩 머물러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거기에 있는 형제들과 아침저녁으로 교제만을 나눴다. 이와 같이 몇 해를 지난 후 많은 교회들이 일어났고, 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수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안식년이 아니었을 때 동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데서 나온 것이었다.

 

한번 우리가 어느 정도 자라면 주님은 새로운 수확을 위해 수고하도록 또 다른 안식년을 갖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우리가 안식년에 들어갈 때 전에 얻은 형제들이 또 다른 형제들을 얻기 위해 수고하고 또 산출할 것이다. 나는 내가 전에 수고했던 곳에 이와 같은 동료들이 많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모임에 가고,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안식년을 체험할 땅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수고하고 열매를 맺으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 열매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와 누릴 자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일으킨 성도들은 우리의 성장을 위한 우리의 동료들이 될 것이다.

 

 

절기 체험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셨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 안식년은 그분께서 열매를 맺도록 삶의 성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또한 그분께서 절기를 세우셨을 때 어떤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절기는 혼자서 체험할 수 없다. 절기는 모든 회중이 필요하다. 온 교회생활은 축하하는 교회생활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주된 세 절기 즉 유월절,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에 관심이 있다.

 

유월절은 무교절로 즉시 이어졌다. 사실상 유월절과 무교절은 한 절기가 다른 한 절기로 직접 이끌었기 때문에 한 절기로 구성되었다. 이 절기들 중간에 초실절이 있었다. 유월절은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을 대표한다. 재건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이 절기를 체험했다.

 

맥추절은 정확하게 50일 후였다. 이날은 신약성경에서 50이란 숫자 때문에 오순절로 불렸다. 맥추절은 7주로 계산이 되었고, 50일째 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칠칠절로 불렸다. 각 주는 7일이다. 7일은 3+4로 구성되었다. 성경에서 숫자 3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숫자 4는 창조, 특히 사람을 나타낸다. 우리가 그 두 숫자를 함께 둘 때 숫자 7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절기들 사이의 50일은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사역하심으로 채워져 있으며, 하나님과 사람은 7번 사역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마지막 1일을 더해서 된 숫자다.

 

맥추절로 이끄는 우리의 시간은 7이란 숫자로, 3+4란 숫자로,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사역하심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역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수확하시기 어려우실 것이다. 우리가 4란 숫자만을 가지고 있고 사람의 사역을 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완전해 질 수 없다.

 

우리의 체험이 3+4인지, 4뿐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까? 우리는 시험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가? 주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우리는 주의 이끄심을 누리는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주님을 생각는가? 아니면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그 좋은 일을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은 4뿐이다.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계실 때마저도 우리는 종종 3+43+4+2로 바꾼다. 여기서 뒤의 숫자 2는 우리의 두 다리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를 이끄시는 그분대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 어디서든지 그분을 얻고자 우리의 두 다리를 사용한다. 그분은 우리가 학교를 가거나 직장에 가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그분을 데려 간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곳에서 살기 원하시지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간다. 우리 두 다리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자유를 준다. 이것이 우리의 경우라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를 추수하시도록 기대할 수 있을까?

 

이는 어떤 영적인 풍성을 모아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위험이 있다. 그 위험은 자랑하기 쉽고, 이 자랑은 행동하도록 하는 두 다리에서 나온다. 그런 자랑은 큰 모임에서 전파하거나 사역하게 될 때 갑자기 느끼게 된다. 그들은 나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무엇을 느끼든 간에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7에 더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 추수될 수 없다.

 

그런 다음 우리는 수장절로 간다. 이 절기는 장막절로 불린다. 이 수장절은 한해의 끝 무렵에 치러진다. 우리의 수고를 정상적인 결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이 자란 사람도 수장절 안으로 절대 발전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3+4의 체험을 계속하는 것뿐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만큼 쓰시느냐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의 온 생애에서 반복적으로 3+4, 즉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소한 것조차도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함께 포함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삶이 얼마나 풍성한지! 하나님과 사람에게 얼마나 만족함을 주는지!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