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모세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1)

Hernhut 2017. 7. 8. 15:43


며칠에 걸쳐 모세를 생각하고자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인기 있는 사람이든 인기 없이 나왔다가 그냥 다음구절에서 죽은 인물이든 우리는 그들의 특성과 기질들을 연구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기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집중하지만 하나님은 인기 없는 인물도 계획이 있으셔서 그 구절에 그를 삽입시키셨다. 오늘부터 수일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인기 있었다고 생각되는 모세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모세의 헌신

 

모세가 죽었을 때 120살이었다. 사도행전 7장에 있는 스테반의 말에 의하면 모세의 삶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왕자로서 40년을 이집트에 있었고, 아무도 없이 미디안의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기로 있었으며, 40년 동안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시나이 산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좋은 땅 앞까지 이끌었다. 첫 번째 40년 동안 모세는 주로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했다.

 

 

하나님의 통치권

파라오 칙령에 의하면 모세는 아기 때에 살해되어야 했지만 하나님은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그를 구하시려고 그분의 통치권을 발휘하셨다. 모세의 엄마는 모세를 바구니에 넣고서 나일 강에 그 바구니를 띄웠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딸이 그 바구니를 볼 곳으로 그 바구니가 떠내려가게 하셨다. 파라오의 딸은 강에서 모세가 누워 있는 바구니를 발견하고서 건져내었고, 그의 유모가 되도록 모세의 엄마를 고용했다(2:110).

 

그의 엄마는 그의 진정한 정체성과 그의 히브리 유산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그에게 말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확실하게 그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어떻게 사람이 타락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을 부르셨는지를 가르쳤다. 그녀는 요셉의 형제들이 어떻게 노예로 그를 팔았는지, 하나님께서 기근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집트로 그의 가족을 데려오는데 통치권을 활용하셨는지를 말해야 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파라오의 가정을 맡은 자가 되었다. 그는 가장 좋은 음식을 먹고, 키가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고 힘도 강해졌다. 누군가를 하나님께서 세우셔야하셨다면 아마도 모든 면에서 그분은 모세를 세우셨을 것이다.

 

 

모세의 선택

모세는 자신이 특별한 자였다는 것을 알았고, 그런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자가 되가 되어야 안전할 것 같았다.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었던 3가지 방법이 있었다.

 

모세는 파라오를 암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2. 그는 자연적으로 파라오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양모인 파라오의 딸에게 보위를 넘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는 양모가 죽기를 기다리고 다시 자신에게 보위를 넘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는데 쉽고, 합법적일 수 있겠으나 이 방법은 너무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물론 양모를 변화시킬 수는 있었겠지만 그 기다리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

 

3. 그는 즉시 강제로 어떤 것을 할 수 있었다. 계획적이든 충동적이든 간에 이것은 그가 행했던 선택이었다. 그는 궁중에서 나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학대하는 이집트인들을 찾았다. 이와 같은 학대는 날마다, 매 순간 일어났다. 그래서 학대를 하는 이집트 사람들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모세는 학대하는 이집트 사람을 죽였고, 이스라엘 사람을 구했다. 나는 모세가 특정한 이스라엘을 보호하려고 이집트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저항을 일으킨다 하여 그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속박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때에 그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바탕으로 하여 이와 같은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확신해야 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런 방법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기에 이르렀다(2:15).

 

 

광야에서 양치기를 한 모세   

광야는 이집트에서의 모세의 생활과 대조가 되는 생활이다. 이집트에서 그는 로열패밀리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그에게 절을 했다. 그런 그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양을 치는 자가 되었다. 심지어 양들조차도 그에게 순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궁중은 달콤한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양치는 곳은 동물 냄새가 났고, 더러웠다. 궁중에서는 종들이 그의 목욕을 준비하기 위해 뛰어 다녔다. 광야에는 목욕탕도 없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가 이집트에 있을 때 통치자가 되셨다면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그의 통치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잘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주님께 찬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가고 싶은 학교, 직장 등으로부터 거절되었을 때나 승진이나 어떤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는가? 그런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통치권을 증거할 수 있는가? 바울은 믿는 성도들로서 우리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도들 서로가 복종하라고 기록했다(5:20). 여기서 모든 일들은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합격하든지 불합격 하든지, 승진하든지 승진을 못하든지 이 모든 일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이런 공과를 배워야 했다. 그가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불평을 했었다고 성경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것은 광야에서도 모세가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느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께 갈 때 다른 모든 일들이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모세가 살았던 누옥(陋屋)은 양의 더러운 냄새로 가득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셨기 때문에 누옥(陋屋)이든, 냄새가 나든, 비가 새든, 집이 작든 크든 상관없었다. 모세는 아주 평안해 보였다. 궁중에서 살던 때보다 그 누옥(陋屋)에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누리는 것이 더 나았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될 것이다.

 

모세는 질문을 했어야 한다. 자신이 왜 하나님께서 아기 때에 강에서 구하셨는지, 그의 친 어머니에 의해 유대 신앙을 강화하도록 하셨는지, 이집트 교육을 받도록 하셨는지, 또 이집트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이 되도록 하셨는지에 대해 궁금해야 한다. 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행하셨을까? 이게 지금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모든 것이 모세가 광야에서 양치기를 할 수 있도록 했을까? 모세에게 하나님은 재미가 있으신 분이시고, 그의 모든 것의 시작이 무가치한 허영심처럼 느꼈던 것이 틀림이 없다.

 

모세의 글쓰기

이렇게 제목으로 잡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가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글을 쓸 능력이 있었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양치기들은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모세오경(Pentateuch)을 썼고, 역사와 시를 썼다. 하지만 이러한 글을 쓰는 데는 양치기로서 살기 시작한 오랜 뒤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시점에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 모든 갈망은 사라졌었지만 그의 정체성은 남아 있었다.

 

그는 양치기로서 어떤 글을 썼다. 그는 주님을 모든 세대에서 거처가 되신다고 말했고, 영원 전부터 영원 미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되신다고 썼다(90:1-2). 누가 이와 같은 글을 쓰려고 양과 함께 살기를 바랄까? 누군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사탄은 거주지가 어디니? 나는 네가 거주하는 곳을 보지 못하겠는데.”라고 그에게 물을 것이다. 그럴 때 모세는 나는 당신을 볼 수 없지만 나는 진실을 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모세는 계속해서 사람의 생명이 7-80년에 불과하고 그 삶이 수고와 슬픔만을 안겨 주고 금방 사라져 버린다고 기도를 했다(90:10). 모세가 이것을 기록했을 때 그는 80살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의 말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그의 형 아론과 그의 누이 미리암을 생각한다면 더 오랫동안 산다는 것이 정말 특이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모세의 장인 이드로 조차도 동시대, 비슷한 나이였을 공산이 크다.

 

모세는 거주하고 마무리할 장소에 관해 쓸 제대로 된 곳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거주하는 곳이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광야에서 만큼 그가 거하는 곳이 궁중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그의 날수가 하나님의 손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얼마나 길게 살았든지 하나님께 달려있었다.

      

거룩한 헌신

모세가 시편 90편에서 쓴 내용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이해함을 보여 주었지만 그의 삶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비전이 아니었다. 비전은 그가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왔다. 그 가시덤불은 불꽃을 잡아주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타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모세의 남은 삶의 그림이었고, 주의 참된 종의 그림이었다. 모세는 이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 시점부터 그가 보았던 것으로 그가 지배받고, 통제받았다(3:110). 이 비전은 그의 헌신이 되었고, 그의 삶을 직접 변화시켰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모세 나이 80살에 말씀하셨다. 모세의 반응은 40년 전보다 사뭇 달라졌다. 그의 모든 열망은 사라졌다. 그는 그것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느꼈다. 파라오와 맞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 나이 든 사람에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시간, 에너지, 명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구하셨고, 모세는 선택하지 못했다.

 

모세는 파라오와 맞섰고,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 주셨던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가시덤불 산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려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집트인들에게 행하신 일들과 독수리 날개에 이스라엘을 실어 그분 자신에게 데려오신 것을 상기시키시며 말씀하셨다(19:4). 사실 하나님은 독수리 날개 위에 우리를 실어 나르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일을 가질 수 있고, 행복한 삶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에게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순종할 것을 명령하시면서 그분과 맺은 언약을 지키면 어떤 민족들보다도 특별한 보물이 되고 제사장의 왕국과 거룩한 민족을 약속하셨다(19:5-6a). 하나님은 이미 모든 땅(지구)이 그분의 소유이지만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왕국, 제사장,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신다(벧전 2:9). 그분의 말씀에 사람들은 어리석은 반응과 긍정적인 반응 두 가지였다. 이런 반응은 오늘날과 같다.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리이다.”(19:8)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사실 그들이 수행하기에 불가능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또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을 위해 살겠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통치자 하나님과 비전을 통제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우리는 우리 통치자 하나님께 거룩한 헌신을 함으로 이와 같은 비전을 통제하도록 기도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