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모세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8)

Hernhut 2017. 7. 14. 09:59

  

놋제단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의 내용물들을 공개하시지 않았을 때 그분은 지성소에 있는 궤와 함께 시작하셨다(25:10). 궤는 하나님 자신을 대표했고, 그분 사역 모두 여기서 시작하신다.

 

다음 항목은 떡 상이었다(25:23). 하나님은 우리의 만족을 위해 첫 번째 빵이 되심으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사역을 하신다. 우리는 오늘날 이 빵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다(6:35). 우리가 그분으로 풍성한 만족이 될 때에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열매를 우리에게서 맺게 하실 수 있으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을 늦추기 원한다면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어떤 누림을 피해야 한다. 떡 상은 궤를 언급한 후 첫 번째로 언급되었다. 왜냐면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의 만족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이들과 함께 일하기를 갈망하시기 때문이다.

 

세 번째 항목은 순금으로 등잔대였다(25:31). 등잔대는 순금으로 구성되었다. 순금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우리 인성이 포한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만족하는 빵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신성한 빛의 특별한 원천이시다.

 

그 때 우리는 바깥뜰에 있는 놋 제단으로 간다(27:1). 놋 제단은 축복의 장소다. 우리가 이 제단에 머물고, 축복의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완전한 그분의 사역을 하실 수 있다.

 

향제단과 놋대야는 나중에 추가되었고, 이것은 부차적인 것이다(30:1,18). 여기에 기록된 네 번째들은 기본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사역의 완전한 그림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그분은 어울리는 상대가 그분의 2.5큐빗(1.143m)을 완성시키려는 그분의 갈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궤에서 시작하신다. 그 때 그분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우리의 빵이 되신다. 그런 다음 우리가 제단 위에서 축복된 삶을 사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은 금 등잔대에서 비추는 신성한 빛으로 우리 안에 빛을 비추신다. 이것이 성막 중앙에 있는 지성소에서 시작하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사람의 관점

하지만 우리의 관점은 궤를 향해 바라보이고 바깥뜰에 있는 제단에서 시작한다. 사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궤가 보이는 제단에서 보내야 한다. 우리의 눈이 궤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절대 제단에서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궤는 우리의 유일한 목표다. 확신하라. 우리가 다른 것을 따라 걷고 있는 우리 자신을 안다면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일이라도 우리는 제단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스도인 음악이나 교회가 절기를 사랑하고, 행위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다른 것을 따라 걷고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것은 상대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을 잊고, 우리의 눈이 제단에서 벗어나기 너무도 쉽다. 우리가 다른 것을 따라 걷고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축복을 제하는 것이요, 제단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음악은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음악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순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고 성도들과 함께 먹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음악은 우리의 교회생활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교회생활의 목표로 누리지 말아야 하고, 궤를 잊지 말아야 한다.

 

실행들

우리를 포함해 모든 그리스도인 무리는 자신들의 실행을 가지고 있다. 쉐이커교도들은 자신들의 예배에서 자신들의 의자를 흔들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가졌다. 나는 그들이 사도행전 4:31절에 의자를 흔드는 실행을 근거했다고 믿는다. 사도행전 4:31절에서 성령은 교회가 기도하는 곳을 흔들었다는데서 왔다.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의자를 흔드는 방식이 쉐이커교도들은 주님을 만지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또 일반적인 컵에서 조금씩 포도주를 따라 조금씩 마실 수 있도록 하고, 주의 상 앞에 일반적인 빵집에서 산 빵을 먹고 마시는 무리에도 참여했었다. 많은 교파들은 상을 취하는 것, 침례를 주는 것, 기도하는 것, 찬양하는 것, 행하는 방식들이 다 다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죄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행정과 질서에 따라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를 들여오는 것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초점이 되고, 중심이 되는 것이라면 이런 어떤 것도 붙잡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합당한 실행을 따르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분의 반쪽을 따르신다. 궤에 있는 우리의 눈이 제단에 구별된 채 남아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목표가 될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그리스도인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작은 가치를 갖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궤로서 주님을 위해 그리스도인 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만은 가치를 얻게 된다. 궤는 2.5큐빗(1.143m) 뿐이다. 이것은 그분께서 2.5큐빗(1.143m) 뿐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맞춰지기 위해 자라고, 성숙되어야 한다. 이것 때문에 그분은 하늘에 속한 빵으로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공급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만족시키려고 먹고 마시도록 그분께 오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순금 등잔대가 되어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통해 빛 비추기 원하신다.

 

기름을 얻음

이 등잔대는 방짜(두들겨)로 만들어졌다(25:31). 가끔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25장에 잇는 10처녀의 비유를 읽고, 자신들의 램프에 기름을 채우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신랑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항상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제단에 없고, 그들의 눈은 궤에 없다. 우리는 씻음만으로 이 기름을 채우지 못하고, 심지어 기름을 위해 기도하지도 못한다. 주님께서 이런 기도를 시작하실 것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두들기는 사역을 체험하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 제단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의 두들기는 사역을 체험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으로 기름을 산출한다. 나는 기름을 얻지 못한 이들이 그리스도의 이 솜씨를 통과하는 사람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제단에서 내려오는 것, 하나님이나 그분의 목적인 궤를 보지 않으려는 우리의 선택은 너무도 쉽다. 우리가 직업, , 휴가를 보내는 방법을 결정할 때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제단인가? 회의를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나 제단을 바탕으로 결정하는가 아니면 선택이나 제단을 바탕으로 결정하지 않는가? 새로운 가정을 방문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갈망이나 제단을 바탕으로 가기를 선택하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갈망이나 제단을 바탕으로 가지 않는가? 모든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달려있다.

 

우리는 절대 제단을 졸업하지 못한다. 우리가 거룩한 곳에서 순금 등잔대와 떡 상을 체험한다고 해도 우리는 제단에 남아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축복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고통이 증가함

제단에 대한 참된 체험은 우리의 눈이 궤에 향할 때에만 온다. 고통을 위한 고통은 제단이 아니다. 과거에 아주 영적인 한 자매가 자신의 아름다움이 늙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두려워했다. 왜냐면 그녀는 얼굴이 늙어가는 것이 제단을 체험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통해 제단을 정말로 체험하는 이는 그녀의 남편뿐이었다. 우리의 목표가 고통이라면 우리가 갖게 될 모든 것이 고통이다. 이런 것은 제단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초점이 궤라고 한다면 제단은 가장 좋은 배우자와 직업까지도 함께 그 일을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불태우기 위해 불 때우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고통만을 당하게 하려고 불태우지 않으신다. 제단의 과정은 우리를 상승케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한다. 그렇다. 우리는 잿더미다. 하지만 아름다운 잿더미요, 그분께 만족케 하는 잿더미다. 우리가 너무 뜨거워질 때마다 제단에서 내려오기가 너무도 자유로울 때 절대 더 아름다운 잿더미가 되지 못할 것이고 우리에게 고통만을 안겨줄 것이다.

 

욥에 대한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처음에 하나님은 욥의 아이들 모두 죽게 하셨다. 이것은 너무 잔인해 보인다. 끝에서 하나님은 이 아이들 대신 새로운 아이들을 주셨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은 너무도 소중해서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다. 새로운 아이들은 의심할 수 없이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 아이들은 방법 없이 잃은 아이들을 대신했다. 여기서 욥의 고통은 엄청났다. 하지만 이 이해는 너무도 표면적인 것이다. 진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욥을 소진시키신 후 그를 상승시키셨다는 것이다. 끝에서 욥은 하나님을 알았고, 그분께 달콤한 향기가 되신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이것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고통만을 보게 된다.

 

우리가 소진되는 반면 우리는 건축되었다. 우리가 허물어질 때 어떤 것은 건축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감소하면 다른 어떤 것은 증가되는 것이다. 제단은 우리 삶을 지속적으로 체험케 한다. 우리는 우리가 나머지 성막을 체험할 때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 도망칠 수 없다. 100년 후 나는 여전히 제단에 있을 것이다. 왜냐면 내가 증거궤를 볼 수 있는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증거의 궤를 바라보지 않고는 나의 제사는 진실이 아니다.

 

궤를 보며, 제단에 머묾

대부분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에 제단에 있기를 원한다. 그들은 그분께 전 이제 헌신합니다. 주여, 저를 쓰소서.”라고 말한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자신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칭찬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천진스럽게 격려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의 눈은 궤에 없고, 자신들의 쓰임 받는 것과 섬김의 성공에 대한 것에 눈이 가 있다. 그들의 헌신은 하나님께 있기보다 그들 자신에게 더 있다. 열정적인 모세는 40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광야에서 양을 돌보는 일을 하며 보내도록 하나님께 지시를 받았다. 주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제단에 머물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려고 한다면 그들은 들을 귀가 없다. 그들은 소위 그리스도인 사역을 시작하려고 제단에서 빠르게 내려온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담대하다. 나는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지만 주님은 번번이 나를 멈추게 하시고, 제단에 머물고, 궤에 나의 눈을 응시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나의 구원이다.

 

주님, 전 당신께 나의 생명을 드립니다.”라고 말하기는 아주 쉽다. 하지만 우리가 궤를 바라보는가? 우리가 제단에 올라가지 않고 내려간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헌신할 것이요, 후퇴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많은 것을 할 것이지만 항상 우리의 결정으로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큰 부담이 되겠지만 우리 자신에게는 변명거리가 될 것이다. 제단에 있는 사람들 모두 증거의 궤에 대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런 후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사는 우리 자신을 드리게 된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표현하고,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이든 하려고 하나님과 함께 걷고, 일하게 된다. 이것이 참된 헌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