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의 두 번째 덮개
성막의 바깥마당의 제단은 놋제단으로 불렸지만 그 가장 기본적인 재료는 아카시아나무다. 아카시아나무는 제단의 기본이요, 내구력이었다. 성경에서 아카시아나무는 질이 좋고, 품격이 있고, 품위가 있는 인간성을 대표한다. 이 아카시아나무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표하는 놋으로 덥혀 있었다. 이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좋고, 자격이 있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때 우리는 그분의 심판 아래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다. 우리 모두는 구속이 필요하고 계속적 구원이 필요하다. 이것이 제단의 생활이다.
일생의 과정
우리는 헌신에 대한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안으로 그분 자신을 건축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때 우리의 깨달음은 우리가 어떤 자격도 없고, 제단의 심판을 받는 자격이 되어야 한다. 이 심판에 의해 하나님은 우리를 소진시키신다. 신성의 소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이 소진에 의해 그분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건축하시기 때문이다.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소진시키는 것은 모세시대에 상대적으로 빨랐지만 우리에게는 그 소진이 일생의 과정이다.
나는 30여 년 동안 그리스도인이었다. 그것은 30여 년 동안 제단의 소진됨을 체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소진되고 있는 동시에 하나님은 내 안으로 그분 자신을 건축하심으로 나를 건축하시고 계셨다. 이 과정은 어렵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내가 첫 번째로 구원 받았을 때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의 피가 나를 깨끗케 하셨고, 나는 교회당에 가야만 했다. 30년 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제단에 머무는 나는 어느 정도 내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도바울처럼 나는 증거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루느니라.”(고후 4:16-17).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를 소진시키시고, 제단위에 우리를 건축하신다. 우리의 헌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건축사역은 우리의 삶 속에 세워질 것이다. 우리가 전부 잿더미처럼 태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우리는 건축된다. 흥미 있는 일은 이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 건축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고, 모든 관점과 의견이 벗어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섬기는 이들을 바라보고, 그들보다도 조금 더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생각은 새롭고, 신선하고, 더 매력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쓰실 수 있는가? 이 논리는 옳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빨리 우리 주위에 무리를 형성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고라
이와 같은 일은 구약성경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스할의 아들이요 고핫의 손자요 레위의 증손인 고라와 르우벤의 자손들 곧 엘리압의 아들들 다단과 아비람과 블렛의 아들 온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어떤 자들과 함께 모세 앞에서 일어났는데 이들은 회중 안에서 유명하여 명성이 있는 자들이요, 그 집회에 속한 이백오십 명의 통치자들이더라.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려고 함께 모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넘치게 행하는도다. 온 회중 곧 그들 각 사람이 거룩하고 {주}께서도 그들 가운데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 자신을 {주}의 회중보다 높이려 하느냐?”(민 16:1-3)
고라는 레위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막 바깥뜰에서 섬길 자격이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제단 주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비록 그가 백성들 가운데 지도자였을지라도 그는 모세가 한 것처럼 행정적으로 섬기지 못했거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한 것처럼 제사장으로서 섬기지 못했다. 그들은 레위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 자신께서 결정하신 것으로 섬겼다. 고라는 “우리가 모세와 아론과 같은 레위족속에 속했다. 우리 모두가 거룩하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계시다. 왜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고, 우리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닌가? 누가 그들을 이처럼 높였는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단과 아비람을 먼저 뽑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250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해 고라는 더 담대하게 성장했고, 모세를 비난했다.
모세는 매우 지혜로웠다. 모세는 논쟁하지도 않았고, 다투지도 않았다. 그는 주님 앞에서 그의 얼굴을 땅에 대었다(민 16:4). 오늘날 어떤 이들은 전혀 영적이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거나 더 강한 무리에게 투항할 것이다. 모세는 그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고, 권위의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 안에서 80년을 불태워져 잿더미가 되었고, 그 안에 단단한 어떤 것이 건축되었다.
모세는 고라의 무리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와 같이 하라. 너희 곧 고라와 그의 모든 무리는 향로를 취하고 내일 {주} 앞에서 그 안에 불을 담고 그것들 안에 향을 두라. 그때에 {주}께서 택하시는 자는 거룩하게 되리라. 레위의 아들들아, 너희가 분수에 넘치게 행하는도다!”(민 16:6-7) 모세는 또 고라의 무리에게 “그러나 만일 {주}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자기 입을 벌려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삼켜 그들이 산 채로 구덩이에 들어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주}를 격노하게 하였음을 너희가 알리라”(민 16:30)고 말하러 그들에게 갔다.
우리는 이 말이 고라와 다른 이들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갖고, 그들의 모반행위를 회개하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향로를 가진 그들은 그들의 약속된 시간에 멸망당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한다. “땅이 자기 입을 벌려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모든 물건을 삼키매 {주}에게서 불이 나와 향을 드린 이백오십 명을 소멸시켰더라.”(민 16:32, 35). 그들의 향로가 땅에 빠져들었다.
두 덮개
이것은 아주 부정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아주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에서 나온다. 주님의 지시로 모세는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제단을 덮는데 도금을 한 판을 사용하고, 놋을 두들겨 만든 250향로를 들게 했다. 이것은 기본 제단 덮개에 추가된 것이었다.
제단의 이 두 덮개의 활용은 정말 진지한 것이다. 첫 번째 덮개는 하나님께 우리가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요, 우리를 소진시킴으로 우리 위에서 그분께서 사역하시도록 하는 것이요, 우리 안으로 그분 자신을 건축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 덮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치리를 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우리가 우리의 섬김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의 갈망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100%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새로운 믿는 이들일 때 제단의 첫 번째 덮개 위에 있기를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소진시키시고 우리를 건축하신다. 우리가 더 체험을 얻을 때 우리는 두 번째 덮개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것으로 섬김의 희생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정말 주의 긍휼이 필요하다. 우리의 섬김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보다 훨씬 더 진지한 것이다. 사는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섬기는 것은 아주 많은 것에 영향을 준다.
내가 날마다 주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고 이긴다면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활이다. 내가 각종 사악한 문화로 끊임없이 보낸다면 그것 또한 개인적인 생활이다. 내가 24시간을 실패한다면 그것은 나를 실패한 것이다. 24시간을 승리했다면 그것 또한 나를 승리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제단의 첫 번째 덮개에 의해 다뤄졌다.
우리는 섬김의 생활이 있다. 섬김의 생활은 제단의 두 번째 덮개를 요구한다. 두 번째 덮개는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드린 이들의 향로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크고 너그러우시다. 그분의 몸 안에 많은 지체들이 있다. 아무도 그들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없고, 또한 다른 어떤 이를 위한 것이라고 할 여지가 전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갈망에 따라 모든 것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 섬김은 두 번째 덮개의 헌신을 요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 무리는 모든 방식으로 섬긴다. 아무도 그것이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다. 바울은 복음이 불순한 동기로 전파되었을지라도 기뻐할 수 있다고 말했다(빌 1:18). 하지만 이와 같은 섬김은 하나님께 풍성한 만족을 드리지 못한다.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초기 구원만으로 성막의 입구에서 멈출 때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증거의 궤에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두 증거판과 하늘에 속한 양식이 들어 있는 금대접으로 그분을 누리는 그들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부활 안에 있는 싹 나는 지팡이로 그분과 함께 수고하는 그들을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을 따라 그분의 공급으로 부활 안에서 경영되는 우리를 원하신다.
이 겹의 덮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첫 번째 덮개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리를 소진시키도록 우리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진시키실 때에 그분은 우리를 또한 건축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두 번째 덮개에 올 때 우리는 섬김의 생활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우리 섬김의 생활은 하나님에 의해 합당하게 판단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섬김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실까? 그분은 우리의 섬김을 소진시켜야 할 까? 우리의 모든 일은 어느 날 불로 태워졌을 것이지만, 우리의 모든 일이 소진되지 않을 것이다(고전 3:13-14). 남아 있는 우리의 일 때문에 우리는 제단의 두 번째 덮개를 알아야 한다.
고라의 후손들
하나님은 긍휼하시다. 고라의 후손은 많은 시편을 쓰는 음악가와 시인들이 되었다. 올라가는 것에 대한 시편의 대부분은 고라의 아들들에 의해 지어졌다. 이 시편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축복이 되었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도록 했다.
고라의 자손들은 그들의 가족사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깊은 느낌을 많이 가졌다. 매순간 그들은 두 번째 덮개가 덮여 있는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하찮음과 하나님을 의지함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인도하심을 기대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느낌은 그들의 시편에 나온다.
보통 다정함은 많은 체험과 고통에서 나온다. 많은 체험과 고통 없이 주님을 위한 눈물을 흘릴 수 없다. 날마다 고라의 후손들은 제단을 보았고, 소중한 느낌을 가져야 했다. 그들이 주님께 자신들을 드릴 때 그들은 가치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얼마만큼 경건하고, 경외함을 자신들이 가져야 했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위해 얼마나 많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했는지를 알았다.
고라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시를 짓도록 고라의 자손들에게 허락함으로 그분의 긍휼을 보여 주었다. 그로 인해 결국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자라도록 도울 것이다. 나는 이 역사의 빛으로 이 시편을 읽는 우리 모두를 격려한다. 또 난 회개와 의지에 대한 그들의 심오한 체험 안으로 들어가도록 추구하라고 격려한다. 우리 섬김 역시 제단의 두 번째 덮개에 의해 영향을 받게 하소서.
'컨퍼런스 > 모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12) (0) | 2017.07.25 |
---|---|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11) (0) | 2017.07.20 |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9) (0) | 2017.07.16 |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8) (0) | 2017.07.14 |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7) (0) | 2017.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