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모세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11)

Hernhut 2017. 7. 20. 21:11

 

놋대야

주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또한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것의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씻게 하며 그것을 회중의 성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안에 물을 담으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으리라. 그들은 회중의 성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서 죽는 것을 면할 것이요, 섬기려고 제단에 가까이 가서 불로 예비하여 {}께 드리는 헌물을 태울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손발을 씻어서 죽는 것을 면할지니 그것은 그들에게 곧 그와 그의 씨에게 그들의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30:17-21)

 

놋대야는 제단과 모임장막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놋대야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 즉 제사장들에 의해 쓰였고, 그곳에서 그들은 제단에 희생을 드리러 가기 전과 모임장막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들을 깨끗이 하려고 사용했다. 그들이 대야에서 먼저 씻는 것 없이 섬기려고 한다면 그들은 죽었을 것이다.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는 제단의 헌신을 체험하는 직후 대야로 와야만 한다. 그것은 모임장막에서 더 깊고, 신성한 풍성을 체험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또 그것은 제단에서 헌신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돕는 유일한 방법이다.

 

대야의 필요

아론의 아들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또 그들은 문제들이 많았다. 그들이 제사장 의복을 입었을 때 갑자기 거룩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하나님의 종들을 생각하는 것은 미신적인 것이다.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를 생각하라. 그들은 주님께 드리기 위한 제단에서 나온 불이 아닌 이상한 불을 사용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과 배치된 것이었다. 그들은 즉시 불태워졌다(10:1-2). 아론의 아들들의 느슨함은 고라가 불평함이 정당하다고 느낀 이유일 수도 있다. 레위사람들처럼 그는 지나새나 제사장들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제사장으로 선택하셨는가? 그들이 사는 것을 봐! 그들이 가진 것보다 난 더 자격이 있어.”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섬기는 곳에 가까이에 있으면 있을수록 자기 의견을 고집하기 더 쉬운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서 아론의 가족을 선택하셨다.

 

난 내 아내에게 감사한다. 그녀는 내가 할 수 없는 많은 실제적인 일들을 실행한다. 그녀가 많은 것들을 집안에서 일하기 때문에 그녀는 내 습관, 스케줄, 내가 어질러놓는 것까지도 다 안다. 어느 날 그녀가 자신에게 내가 주호촌을 섬기는 것이 보람인가? 얼마나 그를 존중해야 하나? 그는 우리 나머지를 정말 엉망으로 만들 것 같아!”라고 자문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정말 그녀가 영적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결점이 없 것이 섬김의 요건이었다고 생각하는 나를 단념할 것이다.

 

아론의 아들들은 의심할 것 없이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대야가 있었다. 그들은 아주 좋은 사람으로서 섬길 자격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단과 장막 안에서 자신을 섬기도록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이 대야에서 그들 자신을 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자격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문제점과 결점들을 알았다. 대야 없이 아무도 그분을 섬길 수 없다.

 

대야의 크기

성경은 대야가 얼마나 큰지, 대야를 만드는데 놋이 얼마나 쓰였는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필요가 결정할 일이다. 젊은이들은 죄에 노출된 시간이 적기 때문에 그들의 대야는 정말 작을 수 있다. 나처럼 늙은이들은 시간이 순수하지 못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에 큰 대야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죄인이고, 그분의 십자가를 얻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아주 엉성하고, 주님께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안다. 나는 너무 쉽게 주님께 약속을 하고, 너무 빨리 그 약속들을 뒤집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존재 모든 부분이 문제투성이임을 안다. 그래서 나의 대야는 큰 것이어야 한다.

 

간혹 우리는 섬기러 교회모임에 가기 직전에 논쟁으로 휩싸인다. 그러고서 우리가 주님과 성도들 앞에 깨끗한 헌신을 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깨끗케 하시도록 주님께 요청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심지어 논쟁을 하지 않은 것까지도 우리가 봉사를 하러 갈 때마다 대야에서 씻어야 한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의 발을 씻어 주려는 것을 거절했다. 그런 반응에 대해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13:8)고 하셨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발을 씻을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주님에 의해 씻겨야 한다.

 

젊은이들은 자신을 더 매력적이게 하려고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 늙은이들은 나이가 든 것과 흰머리를 보여주려고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이고, 깨끗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것들은 외적인 것들일 뿐이다. 우리는 더 깊은 곳을 갈 용기가 있는가? 우리는 주님, 내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부분을 깨끗케 하옵소서. 나의 온 존재가 주님을 섬기는데 무가치하게 만듭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큰 대야가 필요하다. 우리의 필요에 맞는 정확한 크기의 대야가 있다.

 

더 깊이 씻음

주님은 우리가 제단의 희생을 지나가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그분께서 거하시는 우리가 가장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그분의 갈망이기 때문에 우리가 동시에 원하는 정상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생활 안에서 전진하기를 갈망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모임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주님은 우리의 가장 경건한 헌신까지도 불순하고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회개의 눈물은 씻음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약함에 대한 모든 고백은 씻음을 받아야 한다. 주님을 따르고, 교회를 섬기는 우리의 열정도 씻음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죄와 세속적인 것보다 훨씬 더 깊다. 우리는 대야가 우리의 성장을 돕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대야를 통과함으로 자라고 섬길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마다 더러움을 모으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씻음 받아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눈물로 우리 자신을 헌신할 때조차도 불순한 동기가 있다. 우리가 제단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원한다면 우리는 대야가 필요하다. 우리가 임재의 빵을 누리러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기 원한다면 우리는 대야가 필요하다. 우리가 이런 것들로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대야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 것이다. 대야는 제사장직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의 열쇠다.

 

섬기는 자매들의 거울들

성경은 대야가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것의 받침도 놋으로 만들었으니 곧 회중의 성막 문에 모인 여인들의 거울들로 그것을 만들었더라.”(38:8)라고 말했다. 거기엔 섬기는 많은 여인들이 있어야 했다. 그 여인들마다 하나의 놋으로 만들어진 거울로서 반사하기 위해 윤을 냈다. 거울들은 모든 사람들 각자가 자신들의 흠과 티를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살펴보도록 하는데 사용되었다. 거울의 용도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매력을 발산시키는데 사용할 수 있다.

 

이 여인들은 모임장막의 출입구에서 섬겼다. 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것은 처음 구원에 대한 우리의 구원을 대표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 여인들을 만나기 전에 아주 많은 죄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울을 떠받쳤고,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죄가 있는지, 필요한 것이 있는지를 그 거울을 보았다. 교회는 오늘날 구원의 문을 통과하는 죄인들을 안내하는 복음전파자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 거울들로 모이도록 하고 대야를 만드는데 그 거울을 사용하도록 모세에게 말씀했다. 우리가 출입구에서 우리의 반사를 보도록 이 거울을 보았을 때 우리는 우리가 구세주가 필요한 죄인들이었음을 보았다. 여인들이 들고 있던 거울은 주로 우리가 행한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울들이 대야로 만들어진 후 우리가 거울들을 보았을 때 우리는 우리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았다. 거울들이 대야로 만들어짐에 따라 거울들은 우리의 노출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고, 우리의 씻음과 하나님 그분 자신에게서 빛 비춤을 받기 위한 것이다. 거룩한 곳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다. 거룩한 곳으로 가는 우리의 길에서 우리는 대야에서 씻어야 하고, 우리가 씻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반사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오기 때문에 이러한 체험을 해야만 한다. 우리의 죄는 이미 용서함을 받았다. 죄 용서함은 우리가 출입구를 통과한 것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점, , 그리고 세상을 만짐으로 매일 묻는 먼지를 씻기 위해 대야에 날마다 오는 것이다. 우리가 씻으면 씻을수록 놋대야에서의 반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우리는 겉모습의 매력을 나타낼 수 있지만 대야는 우리의 속사람이 얼마나 추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곧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을 자격이 있는지, 주님께 아무것도 아니고,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깨달음만이 우리가 임재의 빵과 그리스도인 생활을 더 깊이 누리기 위해 거룩한 곳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그리스도의 빛

우리가 대야를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본다. 이 빛은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반사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폭로한다. 사도바울은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고후 4:6)고 기록했다. 이 빛으로 우리는 깨끗해졌고, 씻음 받았다. 점과 흠은 사라졌다.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에게 공급된다.

 

우리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심판을 받은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더 이상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신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사신다. 우리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원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사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빛 비추는 등대가 되기 원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사신다.

 

종종 우리가 행한 것을 용서해 주시도록 주님께 요청하고 기도할 때 그분의 빛이 오고, 이 그분의 빛이 우리가 누구이든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우리가 그분께 요청하는 이유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빛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시작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심판은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심판하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도살하셔야 했다. 대신 그분은 우리가 합당하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가 얼마나 가련한지도 알지도 못한다는 깨달음으로 우리를 데려가신다. 우리는 그분 없이 우리가 살 방법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예배해야 한다. 오직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과 함께 부활할 수 있고, 거룩한 곳으로 올 수 있다.

 

우리가 빛이 없다면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 모든 사람이 좋은 이유로 일을 한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후 아담은 열매를 자신에게 준 이브를 비난한 후 이브를 자신에게 준 하나님을 비난함으로 의롭게 되었다. 이브는 과일을 그녀에게 준 나아스(서펜트-)를 비난한 후 나아스(서펜트-)를 만든 하나님을 비난함으로 그녀 자신이 의롭게 되었다. 각 사람들은 우선 지식의 나무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었다. 각자의 생각은 자신들이 무고하다고 한다. 맨 처음부터 사람은 어두움에 있었고, 하나님의 빛이 필요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말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것이 빛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대야에 온다면 그리스도의 빛 비춤 안에서 우리 자신의 반사를 볼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씻음과 폭로

대야는 두 기능을 섬긴다. 하나는 새롭게 하고, 깨끗케 하는 물로 우리를 씻는다. 다른 하나는 거울인데 그 거울은 깨끗케 하는 것이 더 깊을수록 우리를 폭로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자만한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기심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만 모든 길을 가려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대야의 깊은 깨끗하게 함 없이 거룩한 곳에 계신 주님께 왔다면 우리는 견딜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주님,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은 제가 저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전 제가 아는 것보다 더 형편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가 십자가에서 당신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전 끝났습니다. 전 이제 저의 새 생명, 새 인격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합니다. 전 거룩한 곳으로 저를 이끄시도록 이 새 생명과 새 인격을 의뢰합니다. 당신의 긍휼에 감사를 드립니다.”하고 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