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이 될 이들에게 주신 공급들 중 하나는 제물들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의 직무로 나를 섬기도록 하기 위해 네가 그들에게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어린 수소 한 마리와 흠 없는 숫양 두 마리를 취하고 또 누룩 없는 빵과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섞어 만든 납작한 빵과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발라 만든 얇은 과자를 취하라. 너는 밀가루로 그것들을 만들어 한 바구니에 담고 그것들을 바구니에 담은 채 그 수소와 숫양 두 마리와 함께 가져올지니라.”(출29:1-2)고 말씀하셨다. 이 제물들은 각각 그리스도의 방면을 대표하고, 우리에게 그 제물들의 적용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
먼저, 주님은 우리에게 수소를 주셨다. 두 번째로 흠 없는 숫양, 세 번째는 또 다른 흠 없는 숫양,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룩이 없는 빵과 과자를 한 바구니에 담게 하셨다. 이 공급은 아주 흥미로운 것이지만 그것들은 제사장들,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만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제사장직분에 대해 갈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필요 없고, 가질 수도 없다. 우리가 섬기기를 갈망한다면 그 제물들이 없이 우리의 섬기는 생활조차도 시작할 수 없다. 이 공급들은 우리의 건강과 누림에 필요한 속죄제, 번제, 화목죄를 위한 것이다.
수소 한 마리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심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속죄제를 위한 큰 수소 한 마리가 필요하다. 이 수소가 우리 각자에게 크기가 다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소의 크기는 우리의 죄에 달려있다. 우리가 자신을 볼 때 얼마나 사악한지를 아는데 달려있다. 젊은이들은 죄에 대해 인식이 부족해 그들은 작은 수소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나이 또래가 되면 우리의 수소가 정말 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체험으로 내가 더 늙고, 더 자라면 자랄수록 섬기는 것을 더 배우고, 더 사역하고, 내가 더 큰 수소가 필요하다고 주님께 말해야 한다.
성경은 “그 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영 밖에서 불로 태울지니 그것은 죄 헌물이니라.”(출 29:14)고 말한다.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은 “그것이 죄니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해석은 훨씬 더 강력한 것이요,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적은 죄를 가진 좋은 사람들만이 아니다. 또 우리는 죄로 풍성한 죄인들만도 아니다. 우리는 죄 자체요, 죄 덩어리다. 이 말은 죄의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제거하는 제물이 더 필요하고, 우리의 죄가 되도록 할 제물이 필요하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그리스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고 썼다.
젊은이들은 이런 자신들에 관해 믿기가 어렵지만 나는 이 시점에서 내가 죄 덩어리라는 것을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다. 나는 죄로 구성되어 있고, 죄로 흠뻑 젖어있고, 내 생활은 죄의 열매뿐이다. 나는 죄 덩어리다. 하지만 주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나의 유익을 위해 죄를 만드셨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의로움이 되었다.
왜냐면 이 수소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죄가 되었기 때문에 그 수소의 고기, 가죽, 그리고 똥이 장막 밖에 불태워졌다. 그 수소의 고기, 가죽, 그리고 똥이 장막 밖에 불태워진 것은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이 수치스럽고, 모멸적이고, 그분께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것들이 죄였기 때문에 그것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젊었을 때 나는 믿기 어려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주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나는 “주님, 전 소망이 있는 젊은이입니다. 젊은 나이에 제 온 인격을 당신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행복하지 않으세요?”라고 기도했다. 이것은 나의 진정한 기도였다. 내가 기도한 것처럼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부담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말 행복하신 것 같았다. 그 후 주의 임재와 이끄심은 나와 함께 계셨고, 그분은 대야와 제단에 대한 많은 체험을 내게 허락하셨다. 하지만 내가 더 자란 것처럼 나는 내 자신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나의 기도는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변했다. “주님, 당신은 큰 실수를 하셨습니다. 당신이 고르신 자요, 당신이 부르신 자요, 당신이 이끄신 자요, 당신과 함께 있기를 당신이 요구하신 자가 너무 두렵습니다. 주님, 제게 긍휼을 베푸소서.” 물론 나는 어떤 사람의 것을 빼앗지도, 훔치지도 않았지만 하나주의 빛 안에 있는 나의 느낌은 정말 두려운 것이었다. 주님과 논쟁하는 것이 어리석었다. 내가 이런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죄가 되시는 나의 큰 수소가 되신다. 그 때마다 나는 계속해서 섬길 수 있다.
원칙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죄이다. 우리가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것을 하자, 저것을 하자고 너무 주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섬길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고집을 피우고, 주장하고, 또 무엇이든지 수행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계획, 우리의 생각, 우리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관심과 반대적인 것이다. 후에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택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방법이 없다. 하나님께서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움직이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 우리가 섬기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것은 장막 밖에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것, 우리의 능력, 우리의 영리함, 세련됨, 창의성 등을 감히 가져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께서 그런 것들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있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섬김 생활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기 원하신다.
첫 번째 흠 없는 숫양 - 하나님의 만족으로서의 그리스도
“또 너는 숫양 한 마리를 취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숫양의 머리에 안수할 것이며 그 숫양 전부를 제단 위에서 태울지니라.......그것은 {주}께 드리는 번제 헌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니 곧 불로 예비하여 {주}께 드리는 헌물이니라.”(출 29:15, 18)
수소 이후 하나님은 숫양 한 마리를 취하도록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숫양 머리에 그들의 손을 얹는 것으로 이 숫양과 완전히 같아졌다. 그런 다음 숫양이 제단 위에서 불태워졌을 때 그들 역시 숫양과 함께 불태워졌다. 숫양이 주님을 만족케 하는 아로마처럼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들 또한 숫양의 연기와 함께 올라갔다.
수소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모든 수치, 고통, 죄를 지고, 죽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죽으신 숫양이시다. 하늘에 오름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달콤한 아로마가 되셨다. 불태워졌다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오름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숫양의 죽음이 아니라 만족케 하는 아로마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제사장이 바깥마당에 있는 대야에서 씻어야 하고, 이 대야가 드러나 있는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앞에서 보았다. 대야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섬길 자격이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되어 그 죄를 없이 하시려고 하나님은 수소로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얼마나 천연적인지를 알게 되어 천연적인 것을 없애시려고 하나님은 숫양으로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나쁜 부분이 불태워질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좋은 부분까지도 불태워져야 한다. 우리의 약함, 강함, 부끄러운 것, 자랑스러운 것 모두 불태워져야 한다. 아무것도 남을 수 없고, 하나님께 재가 되고, 달콤한 향기가 될 수 있다. 그런 후에야 그분은 만족케 되실 것이다.
이 향기는 우리와 함께 머물 것이고, 다른 사람에 의해 느껴지게 될 것이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도움은 우리가 알거나 행하는 것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인가에서 나올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섬김은 그리스도와 함께 상승하는 존재이냐에 달려있다.
두 번째 숫양 – 강함과 사랑으로서의 그리스도
우리의 첫 번째 문제는 죄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수소로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의 두 번째 문제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을 소모케 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달콤한 아로마를 만들도록 한 숫양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의 세 번째 문제는 약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숫양을 주셨다.
“너는 다른 숫양을 취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숫양의 머리에 안수할 것이며”(출 29:19)
이 두 번째 숫양은 제단에서 희생되었지만 첫 번째 숫양과 달랐다. 두 번째 숫양은 모두 소진되지 않았다. 오른쪽 어깨(출 29:22)와 가슴(출 29:26)은 남겨두었다. 이 두 부분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몫으로 주어졌다(출 29:28, 32). 이 부분은 제사장으로서 섬기는 이들에게 속해 있다(출 29:33). 어깨는 숫양의 가장 강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강함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가슴은 마음을 말하는데 우리에게 사랑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우리는 너무 약하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미워하는 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롬 7:15, 18)
비록 우리가 제사장들로서 섬기기를 원하고,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 우지 자신을 드렸다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실패한다. 우리는 우리의 헌신으로 수행하기에는 가슴과 힘이 부족하다.
내가 많은 훈련을 했지만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훈련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바뀐다. 강함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랑 없이 우리는 어떤 것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깨로 우리가 강해지기 위해 두 번째 숫양으로서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분의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을 가지고 움직이기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절대 섬길 수 없다. 아무도 우리 일의 목표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일의 목표가 되는 경우라면 잘못된 아로마를 풍기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잘못된 아로마를 느낄 것이다. 일은 육체 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사랑은 그리스도 같은 향기를 풍긴다. 사람들은 우리의 움직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직관적으로 하나를 거절하고, 다른 하나를 받아들인다. 우리가 두 번째 숫양의 가슴이 얼마나 필요한지!
하지만 사랑으로 수고하는 것은 느리고, 실망으로 가득하다. 포기하기가 너무 쉽고, 더 유익이 있어 보이는 것으로 이동하기 쉽다. 우리는 사랑의 수고를 계속하도록 그리스도로 강해져야 한다. 어깨와 가슴이 함께 있으니 주님께 감사한다.
누룩없는 빵- 합당한 인간성
우리는 항상 주님을 의지해 적은 강함만을 가진 이로서 섬긴다. 우리는 절대 강력해질 수 없다. 말하는 것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무서워한다. 그들은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하나님, 성경, 형제들이 필요 없다고 한다. 나는 한국이 하나님의 선택하신 인종이요, 에덴동산이 한국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을 안다. 어느 나라에나 이런 사람은 있다. 나는 그에게 이것을 뒷받침할 성경구절을 가르쳐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소리를 치며 방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에게 들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종류의 능력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우리가 자신감이 넘치고 열정적이라면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지라도 그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너희가 나의 인도함을 따르기만 하면 사역을 할 것이다. 너희가 내 방법으로 하기만 하면 사역을 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강함이 하나님을 위해 소모된 숫양의 어깨로부터 나오도록 우리에게 주신다. 주님의 강함은 우리의 강함이 아니다. 주님의 강함은 그리스도의 강력이다.
우리가 너무 작기 때문에 심지어 작은 강력까지도 우리는 우리 눈 안에서 크고 강력한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누룩 없는 빵, 과자와 더불어 아론에게 숫양의 어깨를 주라고 말씀하신 이유다(출 29:23). 이것은 섬기는 이들이 자신들의 인간성을 돌아봐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의 인간성이 좋지 않다면 우리는 섬길 수 없다.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 인간성을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제물의 결론이 신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성을 대신하는 것이다. 신약성경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하늘에 속해 있고, 신성하고,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말아야 한다. 대신 우리는 다가가고, 인간성이 좋은 이들이 돼야 한다. 누룩 없는 빵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컨퍼런스 > 모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세: 성막을 건축함(1) (0) | 2017.08.01 |
---|---|
모세: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14) (0) | 2017.07.30 |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12) (0) | 2017.07.25 |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11) (0) | 2017.07.20 |
신성한 약속을 전달하는 사람(10) (0) | 2017.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