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생활
우리가 모세시대에 살았고, 성막바깥 뜰에 들어갔다면 우리는 먼저 제단을 대면했을 것이다. 우리는 제단을 건너 뛸 수 없었고, 우리가 선호한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었다. 제단이 너무 뜨겁고 역겨운 냄새가 났어도 문제가 될 것 없었다. 제단은 우리를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인 생활이 제단의 문제임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가 구원을 받자마자 하나님은 우리가 제단생활을 시작하도록 하게 하려고 하신다.
불태워지고, 확대함
제단생활은 로맨틱한 생활이다. 한 면에서 우리는 잿더미가 되기까지 계속적으로 불태워지고, 다른 면에서 우리는 확대되고 있다. 둘 다 동시에 일어난다. 자신의 능력을 확대하고, 잿더미 속으로 자신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난 젊었을 때 강수도, 주도우 형제로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 말에 대해 이해를 잘 못했다. 우리가 잿더미라면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확장케 할 수 있는가? 나에게는 우리가 잿더미라면 우리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주님을 여러 해를 섬긴 후 나는 우리가 잿더미이면 일수록 우리가 확장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께서 우리를 소모시키면 시킬수록 그분은 우리를 세우시고, 건축하신다.
교회(제단)생활
우리 중 다른 곳에 가서 음식을 먹는 것을 힘들어 하거나 또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다른 배경에서 왔다. 서로가 만나고, 섞이는 교회생활을 무척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을 가르치고, 좋은 음악으로 은혜가 넘치도록 하는 교회생활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생활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한다. 어떤 이는 외국어(방언)으로 말하기를 좋아하고, 치료하는 교회생활을 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 때 그분께 우리자신을 헌신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교회생활로 우리를 건축하실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모든 다름과 선호를 소모시키기 원하신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헌신한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소모시키신다. 그리고 우리를 건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를 소모시키시는 것이요, 그분은 우리를 세우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헌신하면 할수록 우리가 제단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우리는 변화된다. 우리는 여전히 음식을 먹고, 찬양 음악을 듣고, 성경공부를 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것들은 이제 잿더미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우리의 교회생활을 구현하는데 그것들을 사용할 수 없다. 우리의 자랑은 제단이요, 우리의 교회생활은 궤이다.
오래 전 나는 다른 지방에 있는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들은 큰 교회당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교회당을 짓기 위해 7년이 걸렸고, 상상할 수 없는 돈이 들어갔다고 그들은 말했다. 메인 룸은 5,000명을 채울 수 있었고, 그와 유사한 방들이 여러 개가 있었다. 목사는 몹시 행복해 했고, 내게 다가와서 하는 말이 “이것이 주의 긍휼입니다.”였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형제, 성막은 오소리 가죽으로 덮여있는데 성막이 아주 추한데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그의 얼굴이 어그러졌다.
큰 홀을 건축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지만 우리는 그 홀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해야 한다. 오소리 가죽은 우스꽝스럽고, 추한 것이다. 큰 교회당이 자랑스럽거나 뽐낼 것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외적인 건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하지 말아야 하지만 제단에서의 우리의 체험을 통해 우리 안에 건축되시는 그리스도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제단에 대한 체험
교회생활은 제단 위에서의 삶이다. 한 면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잿더미다. 다른 면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확대되고, 건축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능력이나 재능을 뽐낼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감이나 자만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했던 모든 것이 소모되었다. 우리는 잿더미가 되지만 동시에 우리는 건축된다.
“당신의 치수를 내 안에서 확장해. 나를 돌이켜 잿더미가 되게 해.”라는 찬양이 있는데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비록 잿더미가 되고, 건축되는 것이 함께 갈 수 없을지 몰라도 우리의 체험으로 백업된 영적인 사실이다. 우리가 소모되었을 때 우리는 건축된다.
전시간을 주님을 섬기는 이들은 이 체험을 잘 안다. 그들은 많이 오지만 시간이 지나 모두 사라진다. 그들은 학벌을 내세우고, 체험을 말하고, 성경지식을 가지고 온다. 그들은 항상 재능, 야망, 꿈이 있다. 전시간을 섬기려고 하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을 헌신하고, 제단 위에서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배우자 역시 자동적으로 그들과 함께 제단 위에 있다. 그것은 어려운 삶이다.
시간이 지나 그들은 잿더미로 돌아온다. 어떤 동창생들은 유명한 이가 되고, 어떤 사람들은 사업가가 되지만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가 모였을 때 뽐내거나 가장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스스로 건축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아는 빈틈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교회를 돕고, 지지하는 주님의 유용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잘 자라고, 건축되는 전시간을 제단에 거주하는 이들을 보는 것이 아주 행복하다.
제단을 벗어남
물론 우리는 제단생활을 하려고 전시간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자신들을 헌신하는 어떤 사람과 궤에 눈을 분명하게 고정하려는 사람들은 이 체험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와 주님과의 영적교제다. 문제는 제단 위에 한 다리를 올려놓고, 다른 다리는 내려놓으려는 것이다. 너무 뜨거울 때 잿더미로 가려고하기보다 오히려 점프를 하고 냉각기간을 가지려하기 너무 쉽다. 우리는 우리가 훨씬 멀리 가려고 주님께서 그분을 말씀하실 것 있는 것을 제한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진시키느냐에 따라 그분께서 우리 안에 정말 많이 건축하실 수 있다. 우리가 우리를 소진시키도록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으면 있을수록 주님은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을 더 건축되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고, 가장 좋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영적인 생활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나가고,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이유이다. 우리가 갈 때에 그리스도를 가지고 가야 한다.
증거
나는 대학 때 주님을 만났다. 그 즉시 내 자신을 그분께 헌신했다. 그 때부터 주님은 나를 불태우고, 내 안으로 그분 자신을 건축하기 시작하셨다. 난 가끔 제단에서 점프했지만 나의 본래의 헌신과 그에 대한 사랑은 항상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다. 주님은 많은 고통으로 많은 시련과 힘듦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나의 삶은 잿더미가 되었지만 주님은 내 안에 계신 실제가 되신다.
주의 긍휼로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다. 그들이 예수님을 얻게 되었고, 그들은 “당신의 예수님”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고 고백을 했다. “당신의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 들은 내가 제단에서 얻은 나의 예수님이 그들의 예수님보다 더 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내 삶이 제단에서 소진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지라도 내 안에 건축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견고한 증거를 산출한 것이다.
우리가 꺼리지 않는다면 제단은 우리의 생활이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불태우고, 건축하고 소진시키시고, 우리의 전 생애를 확장시키실 것이다. 우리는 잿더미가 되는 동시에 견고해 질 것이다. 우리가 궤를 바라보고, 제단에 있을 때마다 이 신성한 사역은 진행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것을 보고 제단에서 내려오면 신성한 사역은 멈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보이는 영적 성공을 누리는 것을 멈추게 되면 우리는 끝난다. 시편기자는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라고 기록했다. 주님을 위해 소진되는 것은 귀중한 것이다. 이것이 제단의 삶이다.
좁고 험한 길
이것은 좁고 험한 길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모두 간단한 일이 아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제단 위에 있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헌신하면 헌신할수록 주님은 우리를 소모시키실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소모시키면 소모시킬수록 그분은 우리를 건축시킬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소진시키시고 건축시키실 때 우리는 그분을 찬양해야 하고, 계속적으로 증거의 궤를 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아무것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증거의 궤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역을 위해 어떤 것을 발전시키려는 갈망이 없다. 우리는 발전하는 것에 관심조차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예배한다. 왜냐면 우리에게 사역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분 자신을 위해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가 사역을 위해 있을 때 우리는 아주 낮은 단계에 있다. 우리가 증거의 궤를 위해 있을 때 우리는 가장 높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고, 우리를 소진시키시고 건축하시도록 말씀드리고, 그분의 증거에 유용하고 유익하게 우리 안에 건축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는 증거의 궤를 위해 있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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