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셨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 안식년은 그분께서 열매를 맺도록 삶의 성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또한 그분께서 절기를 세우셨을 때 어떤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절기는 혼자서 체험할 수 없다. 절기는 모든 회중이 필요하다. 온 교회생활은 축하하는 교회생활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주된 세 절기 즉 유월절,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에 관심이 있다.
유월절은 무교절로 즉시 이어졌다. 사실상 유월절과 무교절은 한 절기가 다른 한 절기로 직접 이끌었기 때문에 한 절기로 구성되었다. 이 절기들 중간에 초실절이 있었다. 유월절은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을 대표한다. 재건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이 절기를 체험했다.
맥추절은 정확하게 50일 후였다. 이날은 신약성경에서 50이란 숫자 때문에 오순절로 불렸다. 맥추절은 7주로 계산이 되었고, 50일째 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칠칠절로 불렸다. 각 주는 7일이다. 7일은 3+4로 구성되었다. 성경에서 숫자 3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숫자 4는 창조, 특히 사람을 나타낸다. 우리가 그 두 숫자를 함께 둘 때 숫자 7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절기들 사이의 50일은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사역하심으로 채워져 있으며, 하나님과 사람은 7번 사역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마지막 1일을 더해서 된 숫자다.
맥추절로 이끄는 우리의 시간은 7이란 숫자로, 3+4란 숫자로,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사역하심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역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수확하시기 어려우실 것이다. 우리가 4란 숫자만을 가지고 있고 사람의 사역을 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완전해 질 수 없다.
우리의 체험이 3+4인지, 4뿐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까? 우리는 시험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가? 주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우리는 주의 이끄심을 누리는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주님을 생각는가? 아니면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그 좋은 일을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은 4뿐이다.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계실 때마저도 우리는 종종 3+4을 3+4+2로 바꾼다. 여기서 뒤의 숫자 2는 우리의 두 다리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를 이끄시는 그분대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 어디서든지 그분을 얻고자 우리의 두 다리를 사용한다. 그분은 우리가 학교를 가거나 직장에 가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그분을 데려 간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곳에서 살기 원하시지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간다. 우리 두 다리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자유를 준다. 이것이 우리의 경우라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를 추수하시도록 기대할 수 있을까?
이는 어떤 영적인 풍성을 모아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위험이 있다. 그 위험은 자랑하기 쉽고, 이 자랑은 행동하도록 하는 두 다리에서 나온다. 그런 자랑은 큰 모임에서 전파하거나 사역하게 될 때 갑자기 느끼게 된다. 그들은 “나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무엇을 느끼든 간에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7에 더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 추수될 수 없다.
그런 다음 우리는 수장절로 간다. 이 절기는 장막절로 불린다. 이 수장절은 한해의 끝 무렵에 치러진다. 우리의 수고를 정상적인 결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이 자란 사람도 수장절 안으로 절대 발전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3+4의 체험을 계속하는 것뿐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만큼 쓰시느냐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의 온 생애에서 반복적으로 3+4, 즉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소한 것조차도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함께 포함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삶이 얼마나 풍성한지! 하나님과 사람에게 얼마나 만족함을 주는지!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