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는 것 VS 타협하는 것
엘리야가 명했을 때까지 이스라엘에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을 주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이 가뭄은 온 땅에 극심한 기근을 가져왔습니다. 3년 후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가서 너를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땅 위에 내리리라”(왕상 18:1).
같은 때에 아합왕은 말들과 노새들을 구하도록 풀들이 나있는 골짜기와 샘을 찾도록 그의 종 오바댜를 보냈습니다. 그는 땅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자신이 찾았고, 반은 오바댜를 보내어 찾도록 했습니다(왕상 18:5~6). 자신의 모든 백성들이 굶어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 아합왕이 노새들을 걱정했을 것이라는 것을 믿기 어렵습니다.
오바댜는 하나님을 크게 경외했던 선한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8:3).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있었을 때 “오바댜가 대언자 백 명을 데려다가 그들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그들에게 빵과 물을 먹였습니다.”(왕상 18:4) 오바댜와 선지자들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숨겼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하나님께 그분의 증거를 위해 쓰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심각한 공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그분의 증거를 위해 완전히 쓰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바댜의 위치가 아합에게 접근할 준비를 다 했는데 왜 그는 아합에게 바알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는 경고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길에 관해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아합에게 “바알을 숭배하는 것을 멈추라. 이스라엘 왕이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같은 것을 세우고, 홍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만을 섬기라. 왜냐면 그분만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분명히 오바댜와 선지자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아합왕은 보호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선지자였을지라도 그들 중 아무도 하나님의 증거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요?
어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입장을 취하기를 꺼리는 것은 주의 증거에 약하다는 것입니다. 고학력자요, 고위 관료요, 세상적으로 가장 성공한 오바댜는 왕이 수치스럽고, 모독적인 행동을 계속한다면 왕위를 내놓아야 한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오바댜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조차도 “하나님의 종”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증거를 해야 할 시간이 왔을 때 완전히 소극적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주님을 위해 행동을 취하기보다 오히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우리가 오바댜들이라면 우리는 “나는 주를 사랑한다. 나는 주를 따른다. 나는 그분의 사람들과 선지자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을 잘 돌본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나요? 모든 희생을 감당하나요?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서 기꺼이 우리 자신의 삶을 내려놓습니까? 우리는 오바댜가 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긴 세월 속에서 우리에게 커다란 손실일 것입니다.
오바댜의 소극적임은 아합의 완전한 타락보다 훨씬 더 나를 괴롭힙니다. 아합은 분명하게 이사벨과 결혼하는 심각한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는 이방 여자, 특히 바알을 숭배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 결혼은 아합의 통치의 모든 실패와 비극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악한 아내조차도 아합이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오바댜라 불리는 친근한 친구이자 청지기 때문에 충격이 완화되었거나 균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바댜는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려는 값을 기꺼이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생활에서 종종 있는 문제들은 아합이 일으키는 문제들이 아니라 오바댜가 일으키는 문제들입니다. 주님을 섬길 것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오바댜들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증거를 분명하게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주를 섬기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오바댜 사이나 엘리야와 오바댜가 숨겨준 100명의 선지자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었나요? 결국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나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었고 그분을 섬겼습니다. 차이는 오바댜와 선지자들은 모두가 겁쟁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관심보다 그들 자신들의 삶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선지자들로서 그들은 주님의 관심과 증거에만 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선지자들이 된 것이죠? 하지만 그들은 왕이 잘못되었고, 또 사람들을 타락으로 이끄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던 것입니다.
주의 증거에 관심을 가짐
우리는 오바댜가 주의 선지자들을 숨긴 것을 인정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바댜가 태도를 취하는 것을 실패했고, 경건함이 이스라엘에서 나타나지 않았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아주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단지 선한 사람인가 아니면 경건한 사람인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멋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장로들을 행복하게 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들은 배신자들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왕국과 증거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멋진 사람들도, 선한 사람들도 아니고 그분께 사로잡힌바 된 자들입니다. 그분께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분의 증거를 위해서 어떤 값도 기꺼이 지불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용하실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의 이름은 그가 하나님의 증거를 위한 자였음을 입증합니다. 그의 배경은 하나님에 의해 사로잡힌 자였음을 입증합니다. 그는 대가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그분의 갈망에 따라서만 살았습니다. 이것이 엘리야와 오바댜 사이의 차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쓰셨지만 지금이 중대한 시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아니고 엘리야만 쓰실 수 있으셨습니다. 다른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종들은 선한 것에 관해 주의했지만 경건에 관한 것에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우리 개인적인 그리스도인 필요에 두지 말고, 그리스도의 증거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평생의 기도는 “주님, 저는 선한 사람만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경건한 자가 되길 원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선한 그리스도인과 경건한 그리스도인, 믿음이 강한 것과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거룩한 생활로 사는 것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오바댜의 원칙으로 삽니다. 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엘리야의 원칙으로 삽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것을 합니다. 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증거에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되려고 합니다. 오바댜는 그가 100명의 선지자들을 구해 그들을 먹였을 때 하나님께 도움이 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지지할 위험에 자신을 둘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우리의 생각이 오바댜와 같은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풀타임으로 주님을 섬길 것을 주의 인도를 느낍니다. 하지만 그들이 각자의 직업에서 보장받은 경력을 포기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은 선뜻 그렇게 행할 수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나는 주를 섬기는 사람들을 후원하기 위해 돈을 벌고,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1년에 6,000만원을 벌면 매년 600~1,000만을 헌금할 수 있다. 그리고 주님과 그분의 종들을 도울 수 있다”고 이유를 댑니다. 이것이 오바댜의 논리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지만 불완전한 헌신은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나는 주의 증거를 계속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풀타임으로 그분을 섬겨야 하지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은 단순히 그분을 위한 것을 하는 우리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분께 전 존재를 드리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나다.
오바댜는 왕 아합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그 나라를 통과하는 동안에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 하라”(왕상 18:8)고 오바댜에게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가기보다 아합이 자신에게 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주의 증거를 위해 더 높은 위치를 유지했습니다.
오바댜의 반응은 소심했었고, 두려워했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주어 죽게 하려 하시나이까?” (왕상 18:9). 오바댜는 엘리야가 아합왕을 보기 원한다는 것을 아합왕에게 말한 후를 두려워했습니다. 오바댜는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아, 화가 난 왕에게 처형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릿 개울가와 사르밧으로 피해 여러 해를 보낸 후 엘리야가 사라졌다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오바댜의 두려움은 그가 왕을 위해 엘리야를 기다리게 하기보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그를 호의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지자의 품위를 위협했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맹세하여 강요했습니다. “내가 서서 섬기는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반드시 나를 그에게 보이리라” (왕상 18:15). 이후 오바댜는 믿음을 발휘해 엘리야가 말한 것처럼 행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러 갔습니다. 나는 엘리야의 맹세가 오바댜 안에 있는 믿음을 격려했다고 믿습니다. 처음으로 오바댜는 주의 증거와 관계된 어떤 것을 직접 행하게 되었습니다. 오바댜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만날 수 있었던 곳을 말했습니다.
갈멜산으로 모이기
아합이 엘리야가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냐?” (왕상 18:17)고 즉시 비난했습니다. 아합은 자기 자신을 탓하지 않고, 비를 오게 하지 않게 한 엘리야를 탓했습니다.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지 아니하고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집이 괴롭게 하였나니 곧 당신들이 {주}의 명령들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나이다.” (왕상 18:18)라고 대답했습니다. 엘리야가 이슬과 비가 그칠 것이라는 것을 예언했을 때 사람들과 땅을 괴롭게 하지 않았지만 주의 증거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가뭄은 사람들이 회개하게 하고, 그들의 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의도였습니다.
아합의 비난에 대답한 엘리야는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또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대언자 사백오십 명과 작은 숲의 대언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왕상 18:19)라고 말하여 아합에게 명령하게 했습니다. 아합이 그렇게 했고, 세 무리들의 거대한 군중들이 거기에 함께 모였습니다. 가장 작은 무리는 엘리야였습니다. 그는 그가 종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습니다(왕상 18:43). 엘리야와 그의 종을 반대하는 이들은 거짓선지자 850명이었습니다. 가장 큰 무리 아합은 이스라엘의 사람들과 이 두 무리의 사이에 있는 곳에서 조금 뒤로 물러서 있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대립은 갈멜산에서 일어났습니다. “갈멜”이라는 이름은 “푸른 들, 포도원, 열매 맺다”를 의미합니다. 엘리야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이도록 하기 위해 의미 있는 곳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푸르렀고, 열매가 있었고, 기쁨의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동산 같았고, 포도원 같았습니다. 그곳은 땅 중에서도 높이 올라가야 하는 산이었습니다. 이처럼 갈멜산은 모든 좋은 땅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갈멜산은 이스라엘의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했습니다. 그곳은 아셀족속에게 속한 곳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그때 아셀이 “왕의 진미를 산출할 것”이라고 축복했습니다. 그 의미는 “최고로 좋은 음식이 왕의 입맛에 꼭 맞다”는 말입니다(창 49:20).
갈멜에 대한 히브리어는 “기름진 밭”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때에 판단의 공의가 광야에 거하며 의가 열매를 많이 맺는 밭에 머물리니”(사 32:16) 엘리야는 영적인 의미가 가득한 완벽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아합은 도시였고, 돈이 많았던 사마리아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단이나 벧엘을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왜냐면 그들이 예배의 국가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산을 선택합니다. 그곳은 동산이었고, 열매 맺는 들이었습니다. 그곳은 공의의 장소였고, 왕의 진미를 산출하는 곳에 위치했습니다. 이곳은 주님께 제단을 세우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만족하시게 할 어떤 것을 제사할 곳이었습니다.
양자택일
이 놀라운 장소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꾸짖고, 그들에게 도전하도록 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려니와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왕상 18:21). 이것은 중요한 원칙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면 완전히 세상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분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보고 미지근하지 말고 덥든지 춥든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계 3:15~16).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게임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엘리야에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그들이 선택하는 것을 부담지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냉정한 표정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려운 3년이었습니다. 분명하게 아합은 엘리야가 책임을 지고 있던 것을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우리에게서 나온 결정을 요구하라고 한 이가 누구인가? 우리가 3년 동안 가뭄으로 산 것이 당신 때문이다. 우리는 주께서 참 하나님이든, 바알이 참 하나님이든 관심 없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은 비가 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가 먹을 것을 얻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마디도 없이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돌로 엘리야를 죽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서조차도 적은 무리만이 진실로 하나님의 증거에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증거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로 괴롭게 될 것이라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몇몇은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을 듣기 원합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시고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하거나 우리 자신을 위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완전히 따르는 사람들을 얻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주}의 대언자로는 나 곧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대언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왕상 18:22)라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왜 주의 선지자들 중 엘리야만이 유일하게 홀로 남게 되었을까요? 오바댜가 관심을 가졌던 주의 선지자 100명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은 동굴에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이 의미를 잃는 자신들의 삶에 더 많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중 아무도 이런 선지자들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해 동안 그들을 보호하셨고 지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분의 선지자들로 삼기 위해 그들 중 한 사람을 더 투입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셨을 때 그들 중 한 사람도 주님의 증거를 위해 싸우고 계속 주의 증거를 세우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도전
비록 엘리야가 거기에 서 있는 주님의 유일한 선지자였을지라도 그는 용감했습니다. 그는 제물로 수소 두 마리를 가져오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멧비둘기를 제물로 드리도록 했었기 때문에 멧비둘기 두 마리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 어린양과 염소를 요구할 수 있었지만 수소는 제물로 드리기에 가장 비싸고, 가장 큰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므로 황소는 가장 큰 표현이 되게 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런즉 그들(바알의 선지자들)이 수소 두 마리를 우리에게 주게 하고 또 자기들을 위해 수소 하나를 택하여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자르고 나무 위에 놓되 그 밑에 불은 붙이지 말게 하라. 나는 다른 수소를 예비하여 나무 위에 놓고 그 밑에 불은 붙이지 아니하리라. *또 너희는 너희 신들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리니 불로 응답하는 신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니라, 하매 온 백성이 응답하여 이르기를, 잘 말씀하셨나이다” (왕상 18:23~24)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이 그들이 원한대로 황소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한 마리의 황소가 제물로서 좀 더 적당한 것처럼 보이거나 어떤 방법이 좀 더 잘 불태워지는 것이었다면 그는 기꺼이 그들에게 그것을 선택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는 황소나 어떤 외부적인 편리함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그들에게 선택하도록 했고, 먼저 제사하도록 했습니다.
모든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분주하고 흥분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군중들이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하기 위해 황소를 준비하는데 분주히 돌아다녔기 때문에 아세라의 400명의 선지자들은 바알 선지자들을 도우려고 연합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그들의 신이 실재한다고 증명할 기회 때문에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를 하고 있었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1,000마리의 어리석은 원숭이들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을 찬양하기보다 다른 어떤 것을 것에 대해 우리의 삶을 줄 기회를 잡았을 때 우리도 아마 그렇게 할 것입니다.
바알의 모든 선지자들은 그들의 신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들이 진심 어리게 충분한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그들 모두는 그들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바알에게 제사를 지냈는지에 관해 서로를 체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그들의 희생을 불사르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정말 절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가 그들 모두를 덮을 때까지 자신들을 베기 시작했습니다(왕상 18:28).
순간 우상숭배에 대한 모든 자만심과 거짓이 노출되었습니다. 우상숭배로 사람들을 이끌기 쉽습니다. 왜냐면 그것으로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거짓을 추구하고 지지하는 것과 관계없이 끝에서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과 예배의 가치와 참된 것을 찾으실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선지자들이 기도했던 것을 강조해 꾸짖었습니다. 그들이 불만스러워 하면 할수록 그는 더 꾸짖었습니다(왕상 18:27). 그의 꾸짖음은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와 거짓을 보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들의 마음속에 우상숭배와 거짓에 관한 것이 남지 않을 때까지 바알의 거짓증거를 버리기를 갈망했습니다. 主護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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