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엘리야와 엘리사

5. 엘리야의 완벽함(1)

Hernhut 2017. 9. 14. 13:23


갈멜산 이후 엘리야의 필요

 

엘리야는 흥미로운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행했던 것은 역동적이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왕에게 자신의 말에 의하지 않고는 비나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담대한 선포로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 3년 넘게 첫 번째에는 그릿 개울가에서 그다음에는 사르밧에서 조용하게 살았습니다. 그동안 엘리야는 작은 것은 행했지만 주님의 다루심 아래에서 끈기 있게 성장했습니다. 그런 후 어느 날 그는 갑자기 갈멜산으로 왔습니다. 그곳은 그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물리친 곳이었습니다. 그 어느 날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이 살해되었고, 주님은 모든 이스라엘의 눈에 입증되셨습니다.

하지만 이 기적적인 승리 후 하나님은 더 그와 함께 사역하시기 위해 다시 그를 떠나셨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한 엘리야의 도전은 성경에서 가장 흥미롭고 역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사건은 주님 앞에서 더 더욱 더 깊이 다뤄지기를 요구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넘어트린 엘리야의 승리를 고마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소망하는 점까지도 우리를 격려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광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태어났었어야 한다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적을 행하는 이때는 계시의 때요, 하늘에 속한 이상의 때였습니다. 우리는 흥미로운 일을 좋아하지만 흥미로운 일들은 우리가 영적인 성장에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습니다.

사실 엘리야의 기적적인 승리는 텅 빈 어떤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참되신 하나님이셨고, 바알이 거짓 신이었다고 사람들이 인정했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정말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를 알았지만, 그분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승리는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사실상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까지도 장기적으로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이야기 속에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엘리야 자신에게는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승리를 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더 깊은 체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영적인 성과나 계시에 대한 진실입니다. 우리가 보는 하늘에 속한 이상과 우리가 소유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장차 그들의 입증을 위한 어떤 체험을 요구합니다.

그 같은 것은 생명의 모든 측면에서 진실입니다. 최근에 졸업한 학생들은 지식이 풍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육으로 되돌아가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을 했더라도 그들은 실수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그들의 상사들과 동료들에게 지적을 받고,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 해 동안 그들의 일터에서 일한 후에만 그들은 그들의 교육을 평가를 받게 되고, 뒤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갈멜산에서의 엘리야의 승리하는 체험 후에 미래를 위한 훈련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비겁한 도망

 

하나님은 엘리야의 실제적인 상태를 폭로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아주 용감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사람이 있는 가운데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에게 맞서지 못했습니까? 하지만 바알의 선지자와 엘리야를 비교해 보십시오. 이사벨에게서 위협을 받았을 때 바알의 선지자들은 거짓 우상을 위해 기꺼이 죽었었으나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던 엘리야는 속히 도망했습니다. 엘리야는 남쪽 광야 근처 유다왕국에 속해 있는 브엘세바로 도망했습니다. 이사벨의 영향이 있는 영역 밖에 있었던 그는 안전함을 느꼈어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망명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신뢰하지 않았고, 불안함에 떨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 것 같습니다.

그가 주의 이름을 선포하기 위해 갈멜산에 있었을 때 그는 능력과 승리를 나타낸 직후 군중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었다. 브엘세바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하심을 선포하신 곳이었다(26:23-24).

엘리야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할 수 있어야 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리라는 것을 알아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종에게 그곳에 머물기를 요청했습니다. 아마 엘리야의 종은 엘리야여, 도망하느라 제 다리가 너무 아프고 피곤합니다. 제 발이 퉁퉁 부었습니다.”라고 말했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나는 아직 튼튼하니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곳을 찾을 때까지 자네 없이 계속 도망할 것이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좋은 땅 밖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광야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엘리야는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사벨이 몹시 화가 났다. 이사벨이 분명 나를 찾으라고 사람들을 보낼 거야. 그들이 어느 순간 여기에 올 수 있어. 내가 어디로 도망할 수 있는가? 내가 만일 죽어야 한다면 이사벨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보다 내 삶을 주님께서 취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로뎀 나무(주니퍼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여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원칙적으로 엘리야가 갈멜산 위에 행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증거하기 시작할 때마다 어려움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산 삶은 다른 어떤 삶보다도 더 위협과 갈등으로 채워집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자신의 생명을 취해달라고 주님께 요청했던 이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와서 그에게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먹으라고 보여준 요점이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주의 천사가 다시 그에게 나타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왕상 19:7)고 말했다.

엘리야가 먹고 마신 후 40일 밤낮을 도망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시험, 노력, 유혹을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그가 숨을 동굴을 찾아 하나님의 산 호렙산으로 40일 밤낮을 도망했습니다. 마침내 엘리야는 도망하지 않고도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얼마나 비겁해 보였던지요!

 

패배를 통해 성장함

 

이 모든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엘리야의 도움으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좋은 증거를 줌으로 인해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스스로 자랑스럽지 않은가요?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자신 일을 마친 후 자신에 대해 아주 높은 평가치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했던 모든 것이 주의 은혜 때문이었음을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가 헤쳐 나갔던 것이 그분의 긍휼이요, 은혜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 영광을 훔치는 엘리야를 받아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야에게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길 때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이뤄놓은 것을 얼마나 감사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이 말을 들을 때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들을 때 우리는 관심 두기 시작합니다. 세 사람이 이렇게 말한 후에 우리는 그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께 말하기까지 합니다.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위해 이루어 낸 놀라운 일을 보셨나요? 당신은 저 없이 그렇게 제한적이실 것입니다. 제가 여기 있는 한 당신은 많은 것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같이 일으켜질 때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셔야 합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서 도망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가 누구인지를 그에게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엘리야가 도망한 후에도 패배로 인해 갈멜산에 있었던 것처럼 영적 승리자도 아니요, 높은 곳에 있다고 해서 영적으로 성숙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가 패배의 체험을 통과할 때입니다. 우리가 그분만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진실로 그분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주님 안에서의 성장이 하찮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항상 시간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그분께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누리는 분위기에 있을 때 그분은 거기에 계실 것입니다. 그들이 문젯거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분은 그들을 위해 그 문젯거리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들은 산타클로스예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그분 자신을 고의로 숨기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잃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 하찮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값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견고히 서기 원한다면 우리는 값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값싼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필요한 값을 지불하는 것은 종종 폭로되는 것, 좌절감을 주는 것, 귀찮은 것, 심지어 일정기간 동안 분명치 않게 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값을 지불한다면 모든 패배와 어려움은 우리를 생활의 다른 단계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 위 동굴에 숨음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40일 밤낮을 도망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동굴을 찾았고, 거기가 별장이 되었다(왕상 19:9). 그가 하나님의 산에 도착했을 때 어떤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거기서 하나님을 찾는 대신 그는 동굴만을 찾았습니다. 동굴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고, 공급된 피난처입니다. 동굴에서 거주하는 것은 돈이 들지 않습니다. 동굴에서 엘리야의 거주는 주님을 따르고, 자라는 데 어떤 값도 지불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바댜는 동굴에 주님의 선지자들 100명을 숨겨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값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것은 거주할 동굴이 아니고, 그들이 그분을 위해 굳게 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도망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그는 주님의 축복으로 푸르고 과실이 풍족한 갈멜산에서 그의 필요가 하나님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하나님의 산으로 왔습니다. 그의 피난처, 보호처, 방어 처로서 그분을 붙잡고, 하나님께로 오는 대신 그는 동굴에 숨었으며, 동굴이 적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신뢰했습니다.

 

 

우리의 동굴로서 교회생활을 함

 

우리는 종종 교회 생활 안에서 편안한 동굴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들로부터 도피해 평안과 안전을 찾게 되는 곳이 교회 생활입니다. 교회생활은 하나님의 가족, 우리의 동료들과 함께 평안을 체험하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도피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생활 속에 있는 문제들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때 우리는 교회생활 동굴로 도피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이 덜 요동치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더 이상 교회생활이 필요하다고 더 이상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동굴을 나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이 직업이 없을 때 모든 교회 모임에 빠짐없이 출석합니다. 그리고 환경과 현실에 관해 기도합니다. 얼마 지나 직업을 찾자마자 그들은 교회 생활에 뜸하거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또 배우자를 찾기 위해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지만 배우자를 찾자마자 교회 생활을 떠납니다.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 많은 기도를 하지만 문제가 가라앉았을 때 주님의 필요가 무엇인지 고려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동굴 안에서 우리 자신의 평안만을 관심 가진 것입니다.

 

엘리야의 불평과 하나님의 대답

 

이것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나타나 그에게 물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엘리야야,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니?”(왕상 19:9)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대언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증거를 대표했고, 땅에서의 그분의 갈망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굴에 숨어 있었고, 패배했습니다. 엘리야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나이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며 칼로 주의 대언자들을 죽였기 때문이오며 나만 곧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제거하려 하나이다.”(왕상 19:10).

그는 주님께서 선하신 하나님이셨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분께서 신뢰할만한 분이었다면 엘리야는 혼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대답했을 것입니다.

주님, 정직하게 제게 말씀해 주세요. 저는 이세벨이 두렵습니다. 그녀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저 두려운 여자를 제가 살해하게 해 주세요. 그것이 제가 동굴에 숨어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패배한 상태까지도 하나님께 대한 엘리야의 반응은 패배한 사실을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자기 행위를 옳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그라면 주님께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 지혜로우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당신은 조금 어리석으십니다. 당신은 내 방식대로 하셨습니다. 일이 더 잘 될 것입니다. 이 상황이 당신이 그 일을 해결하실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아 아주 혼란스럽습니다.”

이 느낌은 우리가 경건하게 기도할 동안 우리 마음속에 숨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활 속에 있는 모든 혼란이 그분의 잘못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말하고 싶어 합니다. 이같이 우리가 정직하게 말할 때 적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드러내십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정직하면 정직할수록 그분은 더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 즉 강한 바람, 지진, 불로 엘리야에게 대답하셨습니다(왕상 19:1112).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산 위에 일어서도록 말씀하신 후 산을 나누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을 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후 지진이 있었고, 불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자신께서 통제하고 계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을 일으키실 수 있으셨다면 하나님은 또한 엘리야의 상황과 환경을 다루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하고 부패한 상황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이들의 주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바람 속에도, 지진 속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겉으로 보이게 하는 힘으로 엘리야에게 보여주려는 그분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 하나님은 작고 고요한 목소리, 신약성경의 원칙을 선호하셨습니다(왕상 19:12). 그런 후 주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한 번 물으셨습니다.

엘리야야, 너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니?”(왕상 19:13)

엘리야가 처음에 했던 방식으로 대답할 것이라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한번 사람들은 하나님과 논쟁하기 위해 자신 생각을 세우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접근하시는 것과 상관없이 그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반복해서 하나님께 대답했습니다.

내가 {}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나이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며 칼로 주의 대언자들을 죽였기 때문이오며 나만 곧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제거하려 하나이다”(왕상 19:14).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잠자고 잠들어 계셨고, 일어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줍니다.

 

엘리야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사역

 

주님은 엘리야와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논쟁들은 그러한 고집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그를 가르치려고 기적을 발휘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은 이미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를 드러냈습니다. 대신 주님은 그분의 크신 지혜를 드러내심으로 어떤 것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추가적인 약속을 엘리야에게 주셨습니다. 그가 세 사람에게 기름을 붓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엘리야를 성숙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다루셨던 더 큰 그림 일부였습니다. 이 그림은 하나님을 아는 세 단계입니다. 첫 번째 우리는 그분의 움직이심을 통해 그분을 압니다. 그다음 우리는 그분의 방법과 경영하심의 원칙을 통해 그분을 압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압니다. 앞서서 엘리야는 이슬과 비가 내리시지 않도록 하고, 내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따라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릿시내와 사르밧 과부를 다루심으로 엘리야는 다루심을 받고, 겸손케 하시고, 그분의 공급을 의지하도록 하고, 부활 생명을 살아내도록 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분께서 누구이셨다는 것을 아는 엘리야를 원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시련과 다루심을 통과했습니다. 이사벨에게서 도망하는 그의 패배와 하나님과 논쟁함으로 드러났던 그는 하나님 자신을 알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거룩하신 공급자로서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가 광야로 도망하는 최악의 패배를 했을 때까지도 하나님은 그를 먹이셨고, 로뎀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알도록 하신 그분은 우주 가운데서 모든 것을 통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람, 지진, 그리고 불로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셨습니다. 마침내 그분은 엘리야가 직접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온화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엘리야에게 오셨습니다.

결국 이 모든 일 후에도 엘리야는 하나님과 계속해서 논쟁했고, 심지어 하나님을 비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엘리야와 일하기가 발람의 당나귀와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습니다(22:1-41). 하나님이 당나귀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간단하게 말했지만, 엘리야는 그 자신의 방법과 관점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아합에게 선포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했지만 이제 하나님께 전파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고집스러움과 미성숙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포기하지 않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시작하셨고, 그분께서 완성하셨을 것입니다. 비록 엘리야가 겁먹고, 이기주의고, 완고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가 성숙하기까지 그와 함께 계속해서 일하려고 하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숙할 수 있도록 더 발전적인 약속을 주십니다.

 

더 전진적인 약속

 

엘리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부분의 지시는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시리아)을 다스릴 왕으로서 다마스쿠스 광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왕상 19:15). 다마스쿠스는 아람의 수도였고, 이스라엘과 유대의 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 나의 선지자가 돼라.”

엘리야는 순종할 힘과 용기가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염려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사벨이 그를 찾을 수 없는 장소로 그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닙니까? 엘리야는 아람인들 가운데 정치적 망명자를 찾을 수 있었고, 그를 통해 하나님은 그들을 다스릴 새로운 왕을 임명하셨을 것입니다. 그가 하사엘인데 하사엘은 하나님께서 보셨다, 만나셨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이방인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보십니다. 우리가 정치적 상황으로 괴롭다면 우리는 심각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불공평하게 대우받는다면 우리는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아람인 왕에게 기름 붓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예후에게 부름을 부으라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9:16). 이 첫 번째 부분의 약속이 이사벨의 통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엘리야에게 위로가 되었지만 아합을 대체하여 왕으로 예후에게 기름 붓는 두 번째 부분은 그에게 사형집행 영장과도 같았습니다. 아합이 이것을 들었을 때 그는 엘리야를 죽이려고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이 명령을 하실 때 하나님은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람들까지도 다스리도록 할 그분의 의도를 지시하셨습니다. 예후는 여호와는 그분이시다를 의미합니다. 이방의 나라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십니다. 하지만 좋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시고 계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목적과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상황에 관해 불평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악화되어 가고 있는 교회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교회에서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대체자가 일으켜짐

 

엘리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약속에 왔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벨므홀라 출신의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 대신 대언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b).

엘리사는 엘리야의 대체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3부분입니다. 각 하나님의 지시는 이전의 지시보다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사벨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보내졌기 때문에 첫 번째 부분은 비교적 안전했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위험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부분에 왔을 때 하나님이 자신을 포기하시고, 그를 대체하시고 계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은 누군가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공과입니다. 아무도 대체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엘리야 자신의 대체자에게 기름을 붓는데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대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부지런히 섬기고, 더 순종하고, 더 믿음을 갖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때 하나님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큰 기적을 일으키는 엘리야와 주님으로부터 이 마지막 지시를 받아들이는 엘리야 중 어떤 것이 더 영적입니까? 엘리야의 행사는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들로부터 내리는 비를 그치게 했고, 이슬을 마르게 했습니다. 그를 통해 과부가 음식을 공급받았으며, 과부의 아들이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했고, 바알 선지자들 모두를 죽게 했습니다. 이렇게 영향력 있고 승리를 하는 엘리야와 패배해 자신을 대신하는 이에게 기꺼이 기름을 부어 완전히 자신을 드러낸 엘리야 중 누가 더 영적입니까? 아무도 대체되는 것을 원치 않지만, 그는 그것을 했습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영적 성숙을 전람합니다. 자신을 대체한 이를 곁에 두기를 기꺼워하는 이를 찾기란 어렵지만 엘리야는 기꺼워했습니다. 사실 그는 엘리사에게 더 가까이 오게 하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엘리사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너는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너는 그분께 훈련받으라. 어떤 도움도 나에게 요청하지 마라.”

대신 그는 자신의 대체자가 되도록 엘리사를 훈련했습니다. 그는 엘리사를 돕는 선생이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달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이런 영적인 방식으로 엘리사가 정말 성숙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그분의 신약성경 경륜의 원칙을 세우실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주의 증거를 위해 세워졌지만, 그의 선지자 직분 안에 훨씬 많은 본질적인 힘, , 그리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강력한 일은 하나님의 신성과 심판을 나타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은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은 다르게 움직이실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사밧의 아들이었습니다. 엘리사는 그분께서 심판했다. 심판을 의미합니다. 엘리야처럼 엘리사는 심판했지만, 그는 웃음거리의 장소, 춤추는 목초지를 의미하는 아벨므홀라로부터 심판받았습니다. 이것은 다른 심판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심판에서는 그가 누군가를 죽이고, 불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단순히 은혜의 하나님을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춤추는 목초지에서 그분을 누림으로 사람들은 우상들을 쓰러뜨리고, 죄를 회개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의 놀라우신 구세주가 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도입하시려고 하셨던 심판의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주님께 들은 명령을 자원해서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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