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엘리야와 엘리사

2. 엘리야의 성장과 발전

Hernhut 2014. 9. 22. 22:30

 

 

엘리야의 배경

왕 아합 아래에서 모욕을 당한 상황과 어둠 한가운데 있던 엘리야가 그 장면에 어디선지 모르게 불쑥 갑자기 나타났습니다(왕상 17:1~24). 아합과 이사벨이 바알과 아세라에 따라 사람들을 유혹시킨 것처럼 엘리야는 주님의 증거를 위해 선 자로서 자신을 천명했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 1:1). 이 용감한 예언은 영적인 사람으로서 엘리야의 삶과 경영의 기초를 이뤘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엘리야의 배경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것은 길르앗 디셉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디셉사람이라는 단어는 억류되다, 포로가 되다라는 의미요, “되돌아오다, 의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디셉사람들은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증거를 하기 위해 쌓은 돌무더기를 의미하는 길르앗 원주민들로부터 포로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이 이름에 대해 첫 등장은 야곱이 장인 라반을 피해 도망쳤을 때입니다. 라반이 길르앗 언덕에서 야곱을 따라잡은 후(31:17, 23) 두 무리들은 거기에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서로가 넘어가서 서로를 해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했습니다. 이 무더기는 증거의 무더기가 되었습니다. 그 무더기가 그들의 맹세에 대한 증거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당시에 모든 땅은 번영과 행복을 추구하는 바알과 아세라의 포로 아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를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엘리야는 주의 포로가 되었고, 그의 포로생활은 주님께서 하나님이시었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증거의 무더기가 되었습니다. 외견상 이 작은 세밀한 사항들은 엘리야와 같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아주 많이 계시합니다. 사람들이 엘리야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그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고 반응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국적을 물었을 때 그는 주 하나님의 포로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사는 곳을 더 물었다면 그는 그들에게 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의 무더기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엘리야의 담대함과 이상함

성경이 엘리야를 언급하는 가장 첫 번째는 그가 왕에게 걸어가 담대하게 내 말이 있지 아니하면 이 몇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b)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용감한 말을 존중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런 설명을 할 담대함을 가졌습니까? 나는 아합이 그 앞에 있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고, “그 사람 제 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해.”고 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이것이 엘리야가 살아있었던 이유입니다.

 

왕이 그를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그가 비가 오게 할 때까지 왕은 엘리야를 감옥에 가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은 엘리야가 미쳤다고만 생각했고, 그를 보내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들 주변 사람들에게 미쳤다고 생각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이름은 예수께서 주이시라. 나의 배경은 내가 그리스도의 포로인 것이다. 나의 삶은 세상에 속한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방법으로 산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그들의 경건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 일에 우리를 초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어떤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학에 있을 때 나는 500여명의 학생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나 혼자 뿐이었습니다. 나의 과 친구들은 명성을 이루고, 성공하려고 하는 극도의 야심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 모두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나는 그들과 이야길 했습니다. 한 사람은 우리 모두 네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내가 미쳤다는 의미였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었고, 이제 은퇴를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더 바쁜 사람이 된 것이 경이롭습니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 예수께서 주이시라.”는 것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의 포로입니다. 나는 그분에 대한 증거의 무더기가 되도록 나의 생명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런 생명을 살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중요하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슬과 비가 오지 않는 이유

엘리야는 자기의 말없이는 땅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주했던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축복하신 좋은 땅에서 이 예언을 했습니다. 이 땅은 이슬과 비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슬과 비로 이 땅이 경이로울 만큼 기름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 이슬과 비가 마를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이슬은 성경에서 4가지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슬은 축복의 원천을 대표합니다. 이삭은 하늘의 이슬로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이슬은 땅을 비옥하게 합니다. 이슬은 새 포도주와 곡식을 풍성하게 합니다(27:28). 이슬로 새 포도주와 곡식이 풍성하게 하지만 이슬이 내지지 않을 때 땅이 그 비옥함을 산출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침에 이슬로서 주님을 누린다면 우리가 모든 날을 축복받게 될 이유입니다.

 

이슬은 하늘에 속한 것을 나타냅니다. 모세는 이런 방식으로 요셉족속을 축복했습니다. 요셉에 관하여는 그가 이르되, 원하건대 그의 땅이 {}께 복을 받아 하늘의 귀한 것과 이슬과 밑에 누운 깊음과”(33:13). 이 구절은 이슬이 하늘의 가장 질 좋은 것 중 하나라는 것을 계시합니다.

 

이슬은 생명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이슬이 있던 곳에서 주께서 영원한 생명 곧 축복을 명하셨습니다(133:3).

 

이슬은 퍼지고, 증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관련해 다윗은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아침의 태에서 나와 거룩함의 아름다움들 속에서 자원하리니 주께는 주의 젊음의 이슬이 있나이다.”(110:3)고 썼습니다. 이슬이 자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슬은 생명의 번식을 대표합니다. 이슬의 이런 면은 어울립니다. 우리가 받는 축복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축복을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가 생명의 축복을 누립니다. 이런 하늘에 속한 생명주는 축복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은 퍼지고, 번식하게 됩니다.

 

비 또한 성경에서 중요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했다면 내가 너희 땅에 비 곧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때에 주리니 네가 네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을 거둘 것이요, ”(11:14)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비는 풍부한 추수의 원천입니다. 비로 각종 소산물을 내는 땅이 되도록 합니다. 비는 또한 어떤 소산물이 산출될 수 있도록 함께 일을 하는 하나님과 사람을 상징합니다. 창세기 2:5절에 따르면 사람이 땅을 갈기 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비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할 때 내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은 아합왕에게 엘리야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이슬이 없이는 땅의 모든 축복은 메말랐을 것입니다. 거기엔 하늘에 속한 축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요, 생명의 복도 없었을 것이요, 그리고 번영의 축복도 없었을 것입니다. 비 없이는 추수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기꺼이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온 나라가 육적으로, 영적으로 메말라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엘리야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 그 땅을 더 이상 축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아합이 하나님께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백성들을 이끌 때까지 축복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장하기 위한 엘리야의 필요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렇게 용감한 말을 했을지라도 왕은 엘리야가 말한 것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합이 엘리야를 죽이거나 감옥에 넣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더 훈련시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선지자로서 기록된 그의 첫 번째 행동에서 엘리야는 일을 아주 잘 수행했습니다. 그는 자신으로 아주 행복했어야 합니다. 그가 궁중을 나갔을 때 그는 자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했던 것을 그가 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당연하게 사람들은 그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가끔 이것은 사람들이 좋은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기 시작할 때 일어납니다. 갑자기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감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형제가, 자매가 교회의 미래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개 젊었을 때 나에게 말한 것입니다. 이 컨퍼런스에 참석한 수많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컨퍼런스에 있는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오늘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주 적은 무리들뿐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에서 우리의 성공은 자랑스럽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자라도록 돕는 체험을 통해 더 가져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성공적인 사람이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미숙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행하고 있었던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경영하신 것과 주님께서 하기 원하셨던 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큰 성공 직후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선한 일을 하라. 모든 사람이 더 너를 높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가 네게 보상으로 축복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르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왕상 17: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자라기 위한 실제적인 공과를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겸손케 되는 만큼 성장함

그릿 시냇가에 가기 위해서 엘리야는 요르단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요르단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 이름은 내려가기, 강하하다.”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은 땅에 들어가려고 건넜던 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12족속을 대표하여 강바닥에 12개의 돌을 세웠습니다(4:9). 이스라엘의 모든 족속들은 거기서 수몰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요단강 건너로 보내셨을 때 그분은 엘리야에게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도록 요구하고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긴 것으로 너무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낮아짐이 없이 엘리야는 그의 남은 생애동안 이 영광스런 순간을 반복해서 다시 체험했을 것입니다. 성장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높은 자부심과 자긍심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주를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어떤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중요했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교회의 미래였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미래는 그 지체들 스스로가 낮아지고, 요르단 죽음의 물로 내려감으로 이기심이나 빈 자만심에 대한 그들의 느낌에서 벗어나는 그 지체들에게 달려있습니다(2:3, 5).

 

그러므로 엘리야는 요르단 동쪽에 있는 그릿 시냇가로 갔습니다. 이 개울의 이름은 자르다, 찌르다, 뚫다, 살해하다를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단지 내려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잘리고, 찔리고, 살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고, 그릿시냇가로 간 후에 하나님은 그가 점점 더 낮아지도록 그를 꺾으셨습니다. 자르심으로 자르시는 하나님은 엘리야가 뽐낼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빼앗으시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꺾인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으스대는 신기한 모든 것을 잘라낼 작정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자신감을 꺾으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에 우리를 꺾으시지 않고, 반복해서 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것조차도 꺾으실 때 우리는 정말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고 주님, 이 꺾으심을 통해 저는 기뻐합니다. 끝난 것을 찬양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꺾으심을 통해 우리가 되었지만 더 큰 꺾으심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통과하기 어려운 과정이지만 주님 안에서 우리의 성장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제게 부드럽게 하옵소서. 저를 너무 많이 꺾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완전하게 꺾으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작은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까마귀로 하여금 먹을 것을 먹이게 함으로 살아야 했습니다(왕상 17:4). 이것은 낮아지고 끊어내는 과정의 부분이었습니다. 까마귀는 썩어가는 고기를 먹고 사는 더러운 새입니다. 이 까마귀들은 시체들을 먹은 부리로 엘리야에게 고기와 빵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까마귀들이 엘리야에게 가져온 고기의 종류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갈비가 아님을 보장합니다. 그것은 아마 특이한 어떤 것이었지만 적어도 엘리야는 그것을 요리함으로 그것을 살균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까마귀가 빵을 가져왔을 때 그는 그것을 다시 요리하거나 깨끗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모두 먹었습니다.

엘리야는 얼마나 이런 굴욕적인 모습으로 살았을까요? 내 생각으로는 적어도 1년은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엘리야는 그가 이런 불결하고 부정한 환경 가운데서 깨끗하고 정결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단지 이런 더럽고, 불결한 까마귀들의 곁에 있지 않았고, 매일 그는 까마귀들에게서 먹을 것을 받아먹었습니다.

 

불결한 까마귀에 의해 먹을 것을 먹게 된 엘리야는 우리 주변에 있는 세상적인 사람들과의 친분관계에 대한 그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처럼 우리는 모든 면에서 정결치 않은 많은 사람들 한 가운데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땅 바닥을 세 발작 이상을 떠서 걷지 못하고, 모든 순간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과 관계 있는 정결치 않은 이웃들, 동료들, 주변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정결하지 않은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지만 그들은 그들이 그들의 문제들을 우리에게 말할 수 있고, 우리는 기꺼이 그들과 함께 있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주위에 있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돕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들에 의해 먹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떻게 친구가 되셨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9:10, 11:19). 예수님은 그들의 죄에 참여하시지 않으셨지만 항상 그들과 함께 말하고 먹는 것을 즐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물에서 죄가 있는 여자에게 좋은 소식을 나누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4:3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아주 더러운 까마귀에 의해 먹여짐으로 배운 것입니다.

 

제련되는 만큼 성장함

엘리야에 대한 첫 번째 주님의 훈련은 그가 낮아지게 하고, 꺾이고, 굴욕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후에 개울조차도 메말라버렸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더 고통을 받는 원인이 되었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영적성장의 또 다른 단계를 엘리야에게 주시는 의미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은 흥미롭습니다. 가끔 하나님은 우리를 요르단강 앞 그릿 개울 아래로 가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랑과 자만심을 꺾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건강한 성장과정으로 우리는 정말 메마르게 됩니다. 그릿 개울은 메말랐습니다.

이런 점에서 좌절하고 주님, 제가 낮아지고 꺾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지라도 저는 그런 상태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지금 개울은 메말랐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기도하기 쉽습니다. 사실상 이 메마름은 성장의 또 다른 단계로 이끕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것은 새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활을 누리라고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라는 것처럼 이러한 것들은 조금씩 우리를 준비시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라도록 돕는 바로 그것들은 또 다른 단계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메마르도록 한 것만큼 우리가 그분 안에서 더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전진하는 것을 준비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더 풍성한 축복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엘리야는 물이 메마르기 시작했을 때 절망적이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거하라. 보라, 내가 그곳의 과부 여인에게 명령하여 너를 돌보게 하였느니라”(왕상 17:9) 사르밧은 제련, 정제, 고상함, 세련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엘리야가 왕에게 말을 하고 개울 옆에서 살고, 또 까마귀에 의해 먹을 것을 구했을 때 여전히 광야에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를 제련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이 광야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제련하시는 주님의 사역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를 낮아지게 하고 꺾이게 한 후 주님은 우리를 제련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새로 믿는 많은 이들은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완전히 광야에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이것은 그들이 되는 방식입니다. 사람 생명에서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거친 경향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아버지들과 논쟁을 하고, 그들의 어머니의 감정에 상처를 줍니다. 그들이 생명을 체험하고, 더 자라기 시작하자마자 거칢이 사라지고, 더 멋진 사람이 됩니다.

 

엘리야가 왕 앞에 나타났을 때 거친 영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더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그릿으로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꺾으심이 그를 자라게 하고, 덜 자랑하게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하나님의 제련을 받기위해 사르밧으로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도시 안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뭇가지를 줍는 과부를 만났습니다. 목이 몹시 말랐기 때문에 엘리야는 즉시 자기에게 물 좀 가져오도록 그녀를 불렀습니다. 그녀가 물을 가져왔을 때 그는 또 빵을 좀 가져오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 당신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게는 납작한 빵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이니이다. 보소서, 내가 나뭇가지 두 개를 줍고 안으로 들어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해 그것을 차려서 우리가 먹고 죽으려 하나이다”(왕상 17:12)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절망하는 과부에게 대답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가 말한 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해 작은 빵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뒤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만들라. *{}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가 비를 땅 위에 내리는 날까지 가루 통이 고갈되지 아니하고 기름병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느니라”(왕상 17:13~14)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엘리야와 과부사이의 차이가 보이십니까? 엘리야는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부는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으로라고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는 성숙의 다른 단계에 있는 세 믿는 이들이었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어린 사람들은 더 성숙한 자들에게 주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약간 성숙을 가진 사람은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성숙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와 과부 둘 다 하나님에 대해 말을 했지만 그들은 다른 두 레벨로 그분을 간주했습니다. 과부가 주님께서 엘리야의 하나님이셨다고 알았다할지라도 그녀는 주님께서 경영하셨던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음식을 더 요청하는 사람을 위해 충분치 않은 음식만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그 음식만 먹고 죽으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엘리야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간단하게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주님은 그분의 증거를 좋아하십니다.

 

 

매일 공급하시는 하나님

엘리야는 과부에게 먼저 자신을 위해 빵을 만들고, 그런 후 그녀와 아들을 위해 만들 것을 말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과부는 제가 당신에게 우리의 음식을 조금이라도 공급한다면 우리가 3시간 정도만 살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가 말한 것을 그녀가 믿도록 하는 말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그가 요청한대로 그녀가 했다면 “{}가 비를 땅 위에 내리는 날까지 가루 통이 고갈되지 아니하고 기름병이 마르지 아니하리라”(왕상 17:14)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경에 있는 원칙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매일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매일 만나를 보내셨습니다(16:4).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매일 우리에게 공급해 주소서.”(11:3)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은 가루와 기름만을 매일 주실 것입니다. 가루 통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요, 기름병이 절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방식은 다릅니다. 우리가 모든 주()에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한 주간에 20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20장을 읽을 수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놓친 하루를 보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루에 한번만 가루와 기름을 충분히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번에 한 가지씩 받을 수 있는 것 외에 우리에게 주시기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한 번에 한 분깃을 매일 매일 그분의 풍성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의 몫을 빼먹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내일 채울 수 없습니다. 그 몫의 크기가 받을 우리의 능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주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덜 주시지도 않으시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주시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주님께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정적이라 하더라도 날마다 그분은 그 날의 영적 공급만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교회생활이 좌절시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나쁜 환경일지라도 하나님은 매일 양식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급 원칙입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는 만큼 빵과 케잌을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루와 기름을 많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빵으로 당신의 집을 채우거나 빵 가게를 열거나 부유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공급하셨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매일의 공급을 위해 그분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매일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묻어 두거나 남겨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늘 공급하시는 공급만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남

엘리야가 날마다 빵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공급의 원칙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더 어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보여 주신 것은 그분의 부활능력의 원칙입니다. 슬프게도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녀는 비통해 했습니다. 과부는 엘리야를 비난하며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이 내 죄를 생각나게 하며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 17:18)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은 이유가 없었고, 불합리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엘리야가 한 것이 그녀의 아들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사실 처음에 엘리야가 과부와 그녀의 아들에게 왔을 때 굶주림에서 그들을 구했습니다.

 

한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또 다른 사람을 할 때 비난받은 사람은 육체적인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엘리야는 화를 내며 당신이 어리석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당신의 아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육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무고하게 비난하는 것을 볼 뿐입니다. 우리는 절대 은혜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람들을 위한다하더라도 그들의 감사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변화시키심이 아니면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부를 꾸짖는 대신 엘리야는 그녀에게서 그녀의 아들을 데리고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서 {} [하나님]이여, 주께서 내가 머무는 집의 과부의 아들을 죽이심으로써 그녀에게 또 재앙을 내리셨나이까?”(왕상 17:20)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야가 어떻게 제련되었는지를 보십시오. 그는 과부가 자신에게 화를 냈을 때 분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세심함이 있었습니다. 아마 다듬어지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분을 내고 혈기를 부렸을지 모릅니다.

 

엘리야는 그가 과부의 집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주님의 증거였음을 주님께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주님을 기대했습니다. 그가 이 과부의 손님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 그녀를 축복하셔야 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한 후 자신의 몸을 아이 위에 세 번 쭉 피고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이 다시 아이에게 들어가게 하옵소서”(왕상 17:21) 주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소년의 생명을 회복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부터 소년을 일으키는 엘리야는 우선 그에게 그녀의 아들을 데려오도록 말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죽음의 상태에서 기꺼이 분리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돕기가 불가능합니다. 과부는 자신의 죽은 아들에게 매달렸고, 엘리야가 그를 도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엘리야는 그녀에게서 아들을 데려다가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더 높은 어떤 것 안으로 낮은 상태에서 그를 일으켰습니다. 엘리야는 살아있었던 상태로 죽음에서 일으켜야 했습니다.

 

세 번째로 엘리야는 자신의 침대에 그 소년을 눕혔습니다. 그가 휴식을 체험했던 바로 그 곳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휴식을 주는 것을 그들에게 가져가야 합니다. 찬양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힘의 원천이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힘과 평안을 찾도록 이런 것들을 가져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달콤한 임재를 갖도록 하는 것을 그들에게 가져감으로 죽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엘리야가 주님께 세밀한 기도를 한 후에 그는 세 번 소년 위에 엎드렸습니다. 그 소년 위에 엎드린 것은 엘리야가 아이와 동일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복음전파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그들을 위축시키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동일시합니다. 숫자 3은 주님께서 3일째 되는 날에 부활하신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부활을 상징합니다.

 

이 네 번째 단계는 부활생명의 원칙을 보여줍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송장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와 불법으로 죽어있습니다(2:1). 그들 모두 구원받고, 치유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치유시키려면 우리는 그들의 죽음의 상태에서 분리되도록 그들을 먼저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그들의 죽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들을 돕기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락방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 우리의 침상에 눕혀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임재 안으로 그들을 안내함으로 더 높은 곳으로 그들을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있는 평안 안으로 데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동안 우리는 그들과 동일해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누림을 그들에게 가져오고, 그리스도의 체험을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죽은 자들을 돌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땅에서 우리와 연합하도록 죽음 밖으로 그들을 이끌 것입니다. 主護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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