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엘리야와 엘리사

4.헛된 추구

Hernhut 2015. 1. 29. 16:30

 

 

엘리야가 주께서 참되신 분이신지, 아니면 바알이 참된 신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갈멜산 위로 모든 사람들을 모은 후 먼저 바알의 선지자들이 바알신에게 제사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숭배하는 신이 불로 그들의 희생을 받아들임으로 그들의 신을 입증할 수 있다면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쓰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 바알의 관심을 얻기 위해 큰 소리를 지르며, 펄떡펄떡 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 바알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바알이 그의 제물 위에 불의 표적을 일으키기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이므로 지금 이야기하고 있거나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이거나 혹은 자고 있으니 반드시 깨워야 하리라(왕상 18:27)하며 그들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야가 조롱하면 할수록 자포자기하는 바알 선지자들은 피가 나도록 칼로 자기 자신의 살을 베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구경거리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소리침, , 기도, 피 흘림 모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그들의 거짓 신을 위해 전력투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신하는 허영심, 자만심으로 우리자신을 포장하고, 학력과, 맘몬과 직장의 직급, 물질적 성공을 위해 우리의 온 생명을 투자합니다. 우리 생활을 누가 통치하고, 무엇이 통치합니까? 그런 통치로 인한 결과는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참된 것처럼 거짓을 숭배할지라도 그것이은 헛된 것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탈진된 후 엘리야는 자신에게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왕상 18:30). 그는 사람들이 그와 같이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그들의 땅이 황폐화 되고 있었던 가뭄에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 당신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도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리가 굶어서 죽어 무덤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기도하고 춤추고 뛰고 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기기를 소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증거보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행복과 더 쉬운 삶을 살려고 하는 결과만을 소망했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바알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엘리야에게 기꺼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제단 보수와 회복

이스라엘 사람들이 엘리야에게 돌아왔었을 때 그는 기도하고, 춤추거나 뛰지 않았고, 어떤 극단적인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단지 무너졌던 주의 제단을 보수하기 시작했습니다(왕상 18:30). 내가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정말 쉽게 하나님의 증거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 제단의 상태는 하나님의 증거의 상태를 대표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람들이 봉헌을 할 수 있는 제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시간을 지나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다른 것들이 그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왔고, 심지어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생활은 주의 제단의 증거를 전해야 합니다. 주의 제단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것들에게 우리 자신을 제사하기 시작할 때 주의 증거는 타협을 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봉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용하시도록 기도를 합니다. 나중에 이 헌신은 잊혀지고, 그들은 그분 대신 다른 것에 자신들을 헌신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지만 내일에는 경력, 직업, 학위, 음악, 영화, 게임, 세상에 있는 많은 항목들 중 한 두 개로 우리의 마음을 훔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건축하는 제단은 빠르게 손상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믿을 수 없고, 항상 타협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제단을 계속적으로 회복해야 하고, 재건해야 합니다. 무너진 제단은 오랫동안 잘 보수되지 않기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감 있는 집회라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집으로 갑니다. 아무리 영적인 책이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 직장, 가족에게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하나님 외에 것들로 제단을 세우는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 없으면 우리가 주님께 세운 제단은 손상을 입힙니다. 우리는 석사, 박사 학위, 승진, 재정적인 성공으로 제단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바알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이러한 것들이 약속처럼 보여도 결국 바알의 어떤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뜻으로 하는 예배는 바알의 이름으로 세운 제단 위에 불을 사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멜산 위에 있는 단 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대표했습니다. 엘리야는 몇 년 동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바댜까지도 엘리야를 완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가운데서 거짓 신들에게 제단을 세우는 것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주의 제단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알에 대한 거짓 숭배는 폭로되었습니다. 이 외로운 선지자 엘리야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단을 보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참된 모든 영적인 것들은 주의 제단의 보수에서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실패한 것이 있습니까? 이집트로 내려간 적이 있습니까? 실패하거나 이집트로 내려간 것은 여러분 자신의 흥미와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까? 여러분이 보수와 회복의 방법을 찾고 있다면 여러분은 제단과 장막에서 그것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은 제단에서 시작합니다. 세상은 학위, 직급, 재정적인 성공, 생활환경, 외모를 쫓도록 사람들을 완전히 억압합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제단을 불태우는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주의 제단 위에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 자신을 이미 헌신했기에 우리의 헌신이 무너질 때 우리는 제단을 세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보수하고, 회복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헌신이 오늘날 보수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런 후에 우리는 주님 앞에서 다시 걷기 시작할 수 있고, 주의 증거를 전할 수 있습니다.

 

 

주의 제단의 열두 돌

엘리야가 하나님의 제단을 보수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야곱의 아들들의 부족수에 따라 12돌을 취했다”(왕상 18:31)고 말합니다. 이 열두 돌들은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제단은 엘리야에게 속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증거의 제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은 모든 부족을 포함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의 증거가 되는 것이라면 우리 교회생활 안에 있는 주의 믿는 이들을 포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왕국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일어났던 수모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여전히 열두 돌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적어도 르우벤을 거절할 생각을 했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열두 돌을 사용하기에 어려웠을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는 누구든 르우벤이 끔찍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35:22, 49:3~4). 르우벤은 하나님의 제단에 있는 돌이 되는데 우리에게 충분치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단은 어떻게 하나님의 제단에 사용될 수 있었을까요? 단은 사탄이 우상숭배를 하게 해 부족을 통해 직접 일을 하기 때문에(18:30~31, 왕상 12:26~30) 뱀으로 비교되었습니다(49:17). 하지만 우리는 선택적이거나 독점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다나 베냐민과 같이 강하고, 건강한 부족만을 사용하기를 선호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부족을 대체하는 것으로 아론의 가족을 홍보하기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증거는 유다와 마찬가지로 거 나은 족속과 같이 귀중하게 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족속까지도 포함한다.

 

주의 제단의 열두 돌은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오늘날 이 제단은 하나님의 증거가 회복된 모든 사람들을 망라하기 때문에 모든 믿는 이들을 대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증거가 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작고, 독점적인 관점을 갖는 것을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온몸을 대신합니다. 구속된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증거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습니다(3:28).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순절 그리스도인들이나 침례 그리스도인들이나 다른 교파의 그리스도인들도 없습니다. 거기엔 그리스도인만이 있습니다. 신성한 생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 놀라운 제단에 포함되었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어떤 부분을 대신하지 않지만 온몸을 대신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제단 주위에 만든 도랑

제단을 재건하는데 열두 돌을 사용한 후 엘리야는 그 주위 모든 길에 고랑을 파게 했습니다(왕상 18:32). 갈멜산은 다른 신들에게 숭배함으로 인해 더럽혀졌습니다. 이 도랑은 제단을 오염시키고, 타락하게 한 바알의 제단, 모든 불결함, 우상들로부터 주의 제단을 분리했습니다. 도랑은 주의 제단이 하나님 자신에게만 속해 있었다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이와 같은 분리는 우리 교회생활에서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인 형제가 경영능력의 은사를 가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는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기 위해 제단 안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드리고, 교회를 섬기려는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탄이 그의 마음에 와서는 그가 사탄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교회 행정사무를 보는 중에 장로를 가장해 다가옵니다. 이것은 세상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장로는 그에게 형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도 중에 가장 뛰어난 형제야. 형제는 올해 우리 사역을 훨씬 더 많은 사람들로 부흥시킬 수 있겠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형제는 주의 제단을 오르내리고 자신의 부서와 사역에 시간을 드리고, 은사를 발휘합니다. 몇 주 동안 그는 분주하게 달리느라 바빠서 교회를 섬길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은 제단 주위에 도랑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도랑이 있다면 사탄이 우리 생활과 시간에 하나님 외의 것으로 유혹하려고 어떤 것을 가져올 때 사탄은 우리의 제단 주변에 있는 해자(垓字) 때문에 제단을 무너지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이와 같은 유혹에 특별히 취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그들 자신을 헌신합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자신들의 삶에서 주님께 제단을 재건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그리스도인 특별집회에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교로, 직장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들은 세상을 섬기는 것으로 되돌아갑니다. 이것은 그들이 제단 주변에 도랑을 파지 않고 주님께 제단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후 우리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이 아주 더럽고, 부패하고, 우상이 가득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좋은 땅에도 많은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강치 못한 모든 것에서 우리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도랑을 파야 합니다.

 

그런 후 우리가 제단 위에 계신 하나님께 더욱 더 우리 자신을 드리므로 우리의 헌신을 위협한 세상의 모든 교묘한 것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선을 긋게 될 것입니다. 제단 주위에 도랑이 있는 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포함되어 있는 더러운 것이 무엇이든지 계속해서 구별될 것입니다.

 

 

두 세아의 씨

엘리야가 제단 주위에 판 도랑은 두 세아의 씨를 채우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왕상 18:32). 얼마나 귀한 성경인지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그 도랑은 약 379kg을 담을 수 있습니다. 대신 그 도랑은 두 세아의 씨를 담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믿기 어렵고 의미심장한 설명입니다. 구별하는 도랑에서 이어진 것은 죽음이 아니요, 그 도랑에서 나오는 생명의 씨였습니다. 세상과의 우리의 구별은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씨앗을 심도록 합니다.

 

우리 교회에 한 형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했고, 많이 공부도 했습니다. 말도 잘하고 다른 성도들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형제입니다. 어느 날 그는 장로 형제로부터 사회적인 성공, 존경받는 부분들에 관해 간증하도록 부탁받았습니다. 그가 교회에서 간증하기 시작했을 때 그러나 그는 그가 이룬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 청중들에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것 외에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역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뒹굴었던 헛된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는 도랑 없이 이와 같은 씨를 심을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구별됨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제단 주위에 판 그의 도랑은 씨앗 두 세아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숫자 2는 증거 증언을 대표합니다. 주의 증거를 전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사람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헌신된 사람과 하나님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기 위해 제단을 세우고, 그분 안으로 우리를 구별하기 위해 도랑을 팔 때 하나님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안에서 생명을 가져올 많은 씨앗을 산출하실 수 있으십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와 관련이 있는 4가지 큰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1. 주의 제단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완전히 우리 자신을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증거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증거를 가리키는 이 한 제단이 12돌로 세워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3. 이 증거는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시키는 도랑을 파도록 요구합니다.

 

4. 이 구별은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하는 성도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씨를 뿌릴 수 있는 씨앗을 산출합니다. 이 씨앗은 그들 안에서 생명을 산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증거의 체험 안으로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그분께 드려져야 하고, 그분 안에 서 있어야 하고, 그분 안으로 구별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 안으로 생명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강렬한 불

제단이 재건된 후 엘리야는 주의 제단 위에 나무를 올려놓고, 황소를 잡아 나무 위에 그 조각을 올려놓았습니다(왕상 18:33). 외견상으로는 모든 것이 그가 제물에 불을 보내시도록 주님께 요청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신 그는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두 번째 그리하라, 하니 그들이 두 번째 그리하고 또 그가 이르되, 세 번째 그리하라, 하니 그들이 세 번째 그리하매”(왕상 18:33~34)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3번 더 했습니다. 그런 다음 도랑에도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 후에도 그는 불을 보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거나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해진 저녁 제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엘리야가 이런 인내를 할 수 있었다고는 믿기 어렵지만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따라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 어떤 제사들을 위한 정해진 시간을 두셨습니다.

 

엘리야는 저녁 제사를 위해 정해진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저녁제사 때를 기다렸던 것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행동원칙을 이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그분의 영께서 사역하시고, 말씀하실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엘리야는 “{}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을 저들이 이 날 알게 하소서. *{}, 내 말을 들으소서. 내 말을 들으사 주께서 {} [하나님]이신 것과 또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신 것을 이 백성이 알게 하소서.”(왕상 18:36~37)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야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 하나님으로서 호칭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호칭했습니다. 하나님은 발꿈치를 잡는 자”, “빼앗는 자를 의미하는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왕자”,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는 자를 의미하는 이스라엘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증거를 위해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완전히 하나님의 증거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람들을 되찾으시는 것이었고, 그분께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 주님, 이 완강한 사람들에게 공과를 가르치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알에게서 주께로 돌이키도록 기도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한 후 “{}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왕상 18:38) 불이 내려왔을 때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고, 산비탈을 불태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불은 강렬했었습니다. 제물에 불이 내려왔을 때 제물과 제단과 흙까지도 때웠습니다.

 

우리가 제단 위에 올려놓은 모든 것은 이와 같은 불로 태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려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제단 위에 우리 온 생명과 우리 자신을 놓는 것입니다. 어느 날 주님은 우리의 제물을 불사르기 위해 불을 보내실 것입니다. 엘리야의 제물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만족하실만한 향기를 제외하고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르는 불이 내려왔을 때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이르되, {}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9)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사역을 통해 일어난 반응은 오바댜가 행했던 것보다 훨씬 상상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증거가 되도록 할 사람을 얻기 위해 정말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증거를 위해 세워지는 엘리야와 같은 사람을 얻으실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그분께 되돌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있었던 것처럼 엘리야는 빠르게 행동했습니다. 엘리야는 거짓 선지자들을 붙잡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의 선지자들을 꽉 붙잡은 것처럼 큰 몸부림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모든 이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 아래로 데리고 가서 그들을 죽였습니다(왕상 18:40). 기손 시내는 이김을 위한 곳입니다. 기손 시내는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와 싸워 이긴 곳이었습니다(4:12~16).하지만 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의 우상숭배를 이기려고 기손으로 왔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시는 비

엘리야가 바알의 모든 선지자들을 상해한 후 그는 아합에게 이제 가서 먹고 마시십시오. 폭우 소리가 들려옵니다.”(왕상 18:41)라고 말했습니다. 3년 동안 거기에 비나 이슬이 없었고, 이제 엘리야가 말을 드리고 있었고, 주님께서 비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런 후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가서 땅에 엎드려 무릎 사이에 그의 얼굴을 넣었습니다. 일곱 번 그는 구름이 몰려오는지 바다를 향해 보라고 그의 종을 보냈습니다. 일곱 번을 그렇게 한 후 그의 종은 손바닥만 한 구름이 보인다고 보고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것도 그분께서 비를 멈추시든 비를 보내시든 그분은 항상 사람과 함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수행하시기 원하시는 능력의 일이나 큰 기적이더라도 그분은 사람의 손과 함께 하고, 사람의 손을 통해 일하시는 원칙을 절대 우회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분의 증거를 세우시기를 강렬하게 갈망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먼저 그분과 함께 동역할 어떤 사람을 얻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구름이 나타났을 때 사람의 손바닥만 한 크기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엘리야가 이 작은 구름에 관해 듣자마자 그는 그 메시지를 아합왕에게 그의 종을 보냈습니다. “.......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왕상 18:44)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빛을 뿌리는 비를 보내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마른 땅을 적실만한 폭우를 보내시고 계셨습니다. 하늘에 작은 구름뿐이었을 때 엘리야는 아합에게 경고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손을 통한 주의 행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왕상 18:45) 이것은 아합에게 엘리야의 말을 확인해 준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을 전한 후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습니다”(왕상 18:46) 바알의 선지자들이 살해되고 비가 온 지금 하나님은 엘리야로 그분의 능력 안에서 이스르엘의 문에서 아합을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섬김의 단계에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이루셨던 모든 것에 대한 마지막 구두점이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이스르엘에 있는 아합 앞에 도달한 것은 엘리야가 진실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기적이었습니다. 아무리 엘리야가 큰 사람이 되었을지라도 그는 왕의 가장 좋은 말에게로 절대 달려갈 수 없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가 3년 동안 어떤 것도 일으키지 않은 것, 큰일을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알려고 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의 하나님 외의 어떤 자에 의해 수행될 수 있었는지를 알기 원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들이 주님을 위해 시작하는 것에 관해 쉽게 흥분하지만 그들이 시작한 것을 끝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쉽게 캠퍼스에서, 직장에서, 자신이 속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연구하기를 고무시키지만 며칠이나 몇 주 후에 그들은 조용하게 그러한 것들을 내려놓습니다. 엘리야는 어떤 것도 내려놓지 않았지만 대신 비와 이슬이 닫혀있던 이 모든 문제를 해결되도록 했습니다.

 

 

이사벨의 협박과 엘리야의 싸움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모든 것을 하신 후 엘리야는 바로 그 승리의 느낌을 다시 가져야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주님께 찬송함으로 가득했었지만 그 자신의 역할에 대해 지나치게 감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쩜 그는 자신의 종에게 내가 주님께 사용될 줄은 기대하지 않았다. 갈멜산에서 주님께서 나를 통해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라고 언급했을 것입니다.

 

아합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의 아내 이세벨은 그에게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데 이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물으니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왕상 19:1)에게 고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에게서 감동을 받았고,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아합은 주님께서 참되신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세벨은 이처럼 돌이킬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합이 그녀의 선지자들 모두가 살해되었다고 그녀에게 말하자마자 그녀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녀가 아합에게 이런 일이 당신에게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 바알의 선지자들 모두가 살해되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벨은 엘리야에게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왕상 19:2)하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세벨의 사자(使者)는 이와 같은 메시지를 엘리야에게 전달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가 어떻게 불을 내려오게 했는지, 그렇게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어떻게 살해되었는지에 관해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사자(使者)는 엘리야의 문 앞에서 떨어야 했습니다. 안에 있는 엘리야는 자신의 영광스런 승리를 상세히 재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거짓 선지자들을 꾸짖고, 하나님의 제단을 재건하는 것을 누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누군가의 노크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스라엘 장로들이 그를 축하해 주러 왔다거나 그를 보상해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자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이사벨의 사자(使者)가 서 있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이사벨의 협박을 들었을 때 그의 모든 배짱과 낙천적인 성질이 사라졌고, 즉시 자신의 종과 더불어 피했습니다(왕상 19:3). 그들은 여행을 위해 준비할 겨를도 없이 살기 위해서 즉시 피했습니다. 그의 체험은 담대한 승리에서 비겁한 퇴각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성장의 또 다른 단계로 그를 데려오시기 위해 이와 같은 체험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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