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휴거 이후

자정 외침 -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그 너머(3)

Hernhut 2025. 2. 8. 23:56

자정

 

성경에서 자정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11:4이며, 첫 번째 언급 원칙을 형성하여 변할 수 없는 패턴을 확립합니다. 주님께서 이집트 땅을 지나가시며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을 치신(출애굽기 12:29) 때는 자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정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 사용된 방식은 성경에서 그 단어가 이후에 사용될 때에도 적용됩니다. 이 단어는 항상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어 발견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11, 12장에서 처음 사용되었을 때와 정확히 같습니다.

룻기에는 이와 관련하여 자정이라는 단어가 이후에 사용되었습니다. 룻은 자정에 친척 구속자인 보아스의 발치에 누워서 그에게 대접을 받았습니다(룻기 3:8-14). 룻은 자신을 준비했고, 만남은 자정에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보아스의 타작마당 앞에 룻이 나타난 이야기는 심판과 관련된 미래의 시간을 가리킵니다(마태복음 3:11, 12).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타작마당에 나타나 그분으로부터 다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열 처녀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 전체는 앞의 두 비유와 뒤따를 비유와 마찬가지로 미래의 심판의 시간에 초점을 맞춥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5:6의 자정 외침은 성경에서 자정이 처음 소개된 방식과 일치하며 비유 자체와 비유의 맥락(다른 세 가지 비유)과 함께 심판과 연관됩니다(마태복음 25:10-13; 마태복음 24:40-51; 25:14-46).

자정 외침은 현재 경륜의 종결에서 주님의 백성을 기다리는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준비는 출애굽기와 룻기에서처럼 자정 전에 이루어지고, 자정에 할당된 시간은 끝나고 그리스도인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즉 심판뿐입니다.

예표를 형성하는 출애굽기와 룻기 두 권의 기록은 자정과 관련된 두 가지 종류의 준비를 설명합니다. 이 두 가지 예표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주어진 것처럼 자정에 신랑을 만날 미래를 염두에 두고 현재의 준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구약의 배경 자료를 제공합니다.

 

1) 이집트에서

 

주님께서 유월절 밤에 이집트 땅을 지나가실 때, 그분은 오직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를 찾으셨습니다. 그분은 피를 찾으셨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늘 밤에 이집트 땅을 지나가며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을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치리니 이집트의 모든 신에게 심판을 집행하리라. 나는 주이다. 그리고 그 피는 너희가 있는 집에 표적이 될 것이요, 내가 피를 보면 너희를 넘어가겠고,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12:12, 13).

사형 선고는 이집트 땅 전체, 이스라엘 백성과 이집트인 모두에게 선고되었습니다. 아무도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맏아들의 죽음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진영에 있는 사람들과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둘 다 아담의 후손이었고, 타락한 인류의 일원이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죄의 속박 아래 놓인 동물 창조물조차도 주님의 법령에 포함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진영 안팎에서 맏아들의 죽음에 관해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둘 다 같은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 어린양을 제공함으로써 이집트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차이를 두셨습니다.각 이스라엘 가족은 양 떼에서 어린양 한 마리를 취하여 그 어린양을 죽이고 그 어린양의 피를 가족이 거주하는 집의 양 옆 기둥과 윗문 기둥에 바를 수 있었습니다.

한 집에 어린양 한 마리가 있어야 했고, 바른 피는 그 집 안의 맏아들이 이미 대리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린양은 가족의 맏아들 대신 죽었습니다(출애굽기 11:7; 12:1-7).

이것이 주님께서 이집트 땅을 지나가실 때 오직 한 가지만을 찾으신 이유입니다. 그는 피를 찾았고, 제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문설주와 문인방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은 가족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대용품, 즉 양 떼에서 나온 어린 양을 통해 죽음을 경험했습니다(창세기 22:13; 히브리서 11:17).

그러자 주님은 그 집을 지나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선고가 이미 내려졌고, 이미 집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가 없다는 것은 정반대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집 안에서는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선고는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전에 선고한 형을 집행하셨고, 가족의 맏아들은 스스로 형벌을 치렀습니다. 그는 대용품 없이 죽었습니다.

형이 집행되자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와 의로움이 충족되었습니다. 선고된 죽음의 선고에 근거하여 맏아들과 더 이상 정죄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의 첫째 아들은 죽었습니다(대리인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경우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게 문제의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의 죽음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정하신 목적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옮겨져 다른 땅에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배치되었습니다(출애굽기 12:40, 41; 19:4-6).

첫째 아들의 죽음을 넘어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과 관련하여 다루어졌는데, 그것은 이집트에서 옮겨진 목적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루어짐은 (결코 이집트에서 첫째 아들의 이전 죽음과 관련이 없었습니다)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아들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옮겨져 그 땅으로 향하는 순례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순례 여정에서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카데스-바네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복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후에 책임질 수 있는 세대 전체가 전복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가 아니라 광야에서 전복되었지만요.

그들이 광야에서 전복된 것은 이전에 이집트에서 일어났던 일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맏아들의 죽음을 근거로 그들을 다루셨습니다.

그것은 끝난 일이었고, 모세의 지도 아래 이집트를 떠난 자들과 다시는 그분의 거래에 들어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전복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의 오른쪽에서 전복되었지만 그들의 부르심의 목표의 잘못된 쪽에서 전복되었습니다.

맏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이는 예표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차용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지나간 일이고, 실제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차용한 개인들에게는 지나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양 떼에서 맏아들의 대리적 죽음에 만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골고다에서 그의 아들의 대속적 죽음에 만족하고 있으며, 그것은 1500년 후에 일어났습니다. 어느 경우든 - 예표이든 실제이든 - 피를 도용하는 자들에게 맏아들의 죽음은 과거였고, 이 죽음을 둘러싼 어떤 문제도 다시는 제기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피를 도용한 후에는 맏아들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에게 심판이 내려질 수 없습니다. 완전한 심판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께서 이집트 땅을 지나가시고 피가 제대로 발라진 집들을 지나가신 것으로 적절하게 설명됩니다.

그것은 실제에서도 정확히 동일합니다. 한 개인이 피를 차지하면 결코 장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에게 심판이 내려질 수 없습니다. 완전한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의 아들의 인격 안에서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는 거의 3,500년 전 이집트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것과 정확히 같습니다. 내가 피를 볼 때...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이 결코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장자의 대속적 죽음을 둘러싼 모든 문제가 없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원한 구원과 관련하여 확립하고 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만족을 포함하여 무효화되어야 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앞의 내용이 사실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것은 당면한 진정한 문제를 모호하게 합니다. 구원에 따른 문제는 더 이상 맏아들의 죽음이 아닙니다. 다시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완료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입니다. 구원에 따른 문제는 자신의 부름의 목표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구속한 사람들을 다루시며,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과는 결코 관련이 없습니다.

맏아들의 죽음은 자정과 신랑의 출현과 관련된 준비의 한 측면입니다. 심판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신랑이 나타날 때, 피를 소유한 개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다루어질 것입니다.

, 그들은 이미 심판받은 것에 근거하여 다시는 결코 심판받을 수 없습니다. 심판은 지나갔습니다(요한복음 3:18). 그리고 하나님의 완벽한 정의와 의로움은 충족되었습니다.

그러나 모형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과거의 심판은 자신의 부름의 목표를 깨닫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첫째 아들의 죽음은 땅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영생과 관련하여 신랑을 만나는 준비입니다. 후자를 위한 준비는 전자에 이어지고 전자와 완전히 분리됩니다.

전자는 그 사람을 집안의 하인으로 두는 반면, 후자는 그 사람을 집안의 하인으로 회계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미래에 신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2) 타작 마당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그를 만나러 나갈 것입니다. 룻기에서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그를 만나러 나가는 것으로 예표됩니다.

타작마당은 가치 있는 것(곡식)과 가치 없는 것()을 분리하는 장소였으며, 이는 정확히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불 속에서시험을 받을 것이고 분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 , 보석과 비교할 수 있는 행위는 불을 견뎌낼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 건초, 과 비슷한 일들은 불에 타버릴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11-15).

이런 성격의 미래의 심판은 세례자 요한이 마태복음 3:7-12에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다루면서 국가의 회개를 촉구하고 열매 맺기를 언급하면서 주의를 환기한 것입니다.

요한은 타작마당의 상징주의를 사용하여 종교 지도자들에게 선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부채가 있고[그리스도의 손], 그는 그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하게 하고 그의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워버릴 것입니다(요한이 마태복음 3:12).

준비, 타작마당에서의 사건,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일은 룻기에서 전형적인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룻은 결국 추수가 끝나고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보아스를 만나기 위해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러 나가기 전에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적절한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라...(룻기 3:3a).

그리고 보아스를 이런 방식으로 타작마당에서 만난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습니다. 상속 재산을 구속하고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룻기 3:9-18).

이 만남은 또한 자정(룻기 3:8)에 일어났으며, 전형적으로 심판의 때를 예고하는데, 성경에서 자정이 처음 언급된 것(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됨[출애굽기 11:4])과 침례자 요한이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한 말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룻기 3:12).

룻이 예표에서 한 준비는 그리스도인이 예표에서 해야 하는 준비와 동일합니다. 룻은 특정한 방식으로 보아스를 만나기 위해 자정에 그의 타작마당에서 자신을 준비하여 구속된 유산을 얻고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로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자정에 그의 타작마당에서 자신을 준비하여 구속된 유산을 얻고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a) 몸을 씻으라

 

씻음은 현재의 더러움으로부터 깨끗이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제사장의 사역 범위 내에서, 제사장이 될 때 몸을 완전히 씻는 일이 일어났으며, 결코 반복되지 않았습니다(출애굽기 29:4; 40:12-15).

그 후, 제사장들이 놋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사역할 때, 성막 뜰에 있는 놋 대야에서 몸의 일부를 씻었습니다(출애굽기 30:19-21). 그들이 사역을 수행하는 동안 그들의 손과 발은 더러워졌고, 놋 대야에는 몸의 이러한 더러워진 부분을 씻기 위한 위쪽과 아래쪽 대야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씻음은 두 가지 의미로 여겨졌습니다. 몸 전체를 씻는 것(한 번의 초기 깨끗게 함)과 그 다음에 몸의 일부를 씻는 것(수많은 후속 깨끗게 함)입니다. 요한복음 13:8, 10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 언급하신 것은 이 두 가지 예표의 깨끗이 하심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씻지 아니하면[헬라어, 닙토nipto, 몸의 일부를 가리킴(칠십인역은 출애굽기 30:19, 21에서 이 단어를 사용함)] 네가 나와 ​​함께 할 일이 없느니라[나와 함께가 아니라 나 안에가 아님]씻김을 받은 자[헬라어, 로우오louo, 온 몸을 가리킴(칠십인역은 출애굽기 29:4; 40:12에서 이 단어를 사용함)]는 발을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3:8b, 10a).

베드로는 한 번 씻겼고(루우오louo[그의 온 몸]라는 단어로 표현됨) 이제 그는 계속 씻겨야 했습니다(닢토nipto[몸의 일부]라는 단어로 표현됨). 그리고 이러한 계속된 씻음 외에는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문맥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왕국과 지위가 고려되었습니다).

구약의 예표적 가르침과 베드로에게 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가져온다면, 문제는 동일할 것입니다.

현 시대 동안 제사장직에 속한 그리스도인(베드로전서 2:5)은 제사장직에 들어갔을 때, 구원받았을 때 완전한 씻음(로우오louo, 온 몸)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제사장으로서 세상과의 접촉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된 부분적 씻음(닢토nipto, 몸의 일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속된 씻음 외에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미래 왕국에서 그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깨끗게 함은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의 사역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졌으며, 그분이 흘리신 피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에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시어 우리의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피를 도용한 자들은 씻김(로우오louo)을 받았고 제사장직에 들어갔습니다(출애굽기 12:1-51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과 피를 바르는 것과 평행한 예표).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는 오늘날 하늘 장막의 자비소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흘린 피를 근거로 우리를 대신하여 지성소에서 사역하시며, 그분이 곧 낳으실 왕과 제사장들(요한계시록 1:6; 5:10)을 위해 지속적인 정결(닢토nipto)을 이루십니다.

따라서 주님은 정결(로우오louo)게 된 백성을 따로 두셨고, 그들을 통해 그분의 계획과 목적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따로 두신 사람들을 정결(닢토nipto)하게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정결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룻은 스스로 행동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임박한 만남을 위해 자신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타작마당에서 임박한 만남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해야 합니다.

룻의 경우, 그녀는 스스로를 씻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씻으시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룻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자신을 판단할 때만(고린도전서 11:31, 3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깨끗함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한일서 1:9).

 

b) 너에게 기름을 부으라

 

기름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기름을 사용하는 것과 성령이 개인에게 내려와 그가 성별되는 직분에서 임무를 수행할 능력을 주시는 것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사무엘상 10:1, 6). 그리고 사울이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기를 거부한 후에 다윗이 사울 대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사무엘상 16:13). 그리고 분명히 보여지듯이, 이 두 구절 모두에서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은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사울과 다윗에게 내려왔고, 성령은 두 사람 모두에게 수행해야 할 임무를 위해 능력을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25:1-13에 나오는 열처녀의 비유는 이와 같은 전반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비유에서 기름은 구약에서 사용된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처녀는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직 다섯 명의 현명한 처녀만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정에 계산을 위해 불려졌을 때, 오직 다섯 명의 현명한 처녀만이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5:6-46).

이 비유가 그리스도인과 관련되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정에 계산을 위해 불려졌을 때,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만이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것이 자정에 타작마당에서 보아스를 만나기 위해 룻이 준비한 두 번째 부분의 상징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룻은 자신에게 기름을 바르지 않고는 보아스를 만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열 처녀도 각자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고는 자정에 신랑을 만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고는 자정에 주님을 만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룻의 준비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면 분명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 부분 사이에 분리할 수 없는 연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c) 네 옷을 입으라

 

룻은 깨끗해야 했고 기름으로 기름을 바르는 것뿐만 아니라 적절하게 차려입어야 했습니다. 룻은 신랑을 만나러 나갔습니다.

나오미의 옷을 입으라는 말은 관련된 일(룻이 보아스와 결혼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건)을 감안할 때, 그 행사를 위한 특별한 의복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룻이 입어야 할 의복은 그 행사를 반영할 것입니다.

룻의 준비의 이 측면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현재의 준비를 가리키며, 마태복음 22:1-14의 결혼 잔치에 대한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적절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어떤왕의 아들의 결혼을 둘러싼 축제에 나타났습니다. 이 남자는 결혼 예복을 입지 않고 나타났고, 축제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했을 뿐만 아니라 바깥의 어둠 속으로 쫓겨났습니다.

 

(바깥의 어둠[외부 어둠]에 대한 언급은 달란트의 비유[마태복음 25:30]에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다른 관점에서 이전 비유[열 처녀(마태복음 25:1-13)]와 정확히 같은 것을 다룹니다.)

 

마태복음 22:2어떤 왕그의 아들은 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둘러싼 축제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을 가리킬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9:7, 8에서 신부는 고운 아마포로 차려입어 자신을 준비했다고 합니다(요한계시록 19:8에서는 차려입다가 아니라 자신을 차려입다가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리고 신부가 차려입을 이 고운 아마포는 구체적으로 성도들의 의[문자적으로는 의로운 행위]라고 합니다.

룻이 자신을 준비했던 것처럼 스스로를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미래의 만남을 위해 적절한 복장을 해야 합니다. 이 만남은 그분의 타작마당(심판대)에서 시작하여 이어지는 축제로 이어집니다.

결혼 예복을 형성하는 의로운 행위는 자신의 부름에 대한 신실함에서 나옵니다. 행위는 신실함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행위는 결혼 예복이 형성되는 동안 믿음을 적절한 목표에 이끕니다(히브리서 11:17-19, 31; 야고보서 2:14-26; 베드로전서 1:9).

그리고 룻의 준비의 두 번째 부분인 자신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으로 상징되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결혼 예복을 구성하는 의로운 행위(행위)를 수행할 위치에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다가올 날에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로 그리스도의 임재에 나타날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 예복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옷을 입은벌거벗은이라는 단어는 이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개인이 나타나는 것을 구별하는 데 사용됩니다(요한계시록 3:17, 18; 로마서 8:35). 두 집단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22:10-13에 따라 다루어질 것입니다.

적절하게 옷을 입은(결혼 예복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방식으로 다루어질 것이고, 부적절하게 옷을 입은(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벌거벗은)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질 것입니다.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결혼 잔치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목적은 그들이 후에 어린 양의 아내가 되고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공동 상속자로서 지위를 차지하여 그의 배우자 여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결혼 잔치에 들어가는 것이 거부될 것이고, 그 결과 후에 어린 양의 아내, 그의 배우자 여왕, 그리고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을 형성하는 사람들 중에 포함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 위에 대한 그의 통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를 반복적으로 구별하거나 두 가지 모두에 관한 문제를 각각의 영역 내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구원받은 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구원받은 자들과 관련하여, 두 종류의 개인이 보입니다. 신실한 사람과 불신실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종종 잘못 보고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다루어집니다.

시작점은 영원한 운명을 둘러싼 문제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구별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나니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이니라(요한복음 3:18).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를 계속 다루지 않습니다. 구별이 이루어지고, 성경은 그런 다음 이 시작점을 넘어 구원받은 사람을 다루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다루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정죄받은 사람으로 제시하고, 이 땅에서의 현재 삶과 관련된 파괴적인 종말과 행위에 따른 미래의 심판을 언급합니다(시편 2:1-7; 요한계시록 20:11-15).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정죄받는 것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궁극적으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데, 그것은 그들의 영원한 운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직 각자가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불못에서 차지할 자리와만 관련이 있습니다(또한 하나님의 완벽한 정의와 의로움의 일부입니다). 그들의 심판에 대한 다른 근거가 없기 때문에 행위가 반드시 들어와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경의 가르침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전달되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구원받은 자들이 정죄받지 않은 것으로 제시하며, 이 세상에서 오는 구원과 그에 따른 심판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행위에 따른 것(고린도전서 3:11-15; 15:51-57)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자들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설명합니다. 구원받은 개인들이 정죄받지 않는 것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의 행위에 근거한 미래의 심판은 그들의 영원한 운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직 다가올 왕국에서의 그들의 위치(하나님의 완전한 정의와 의로움을 만족시키는 데 필요함)와만 관련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실함에서 나오고 신실함과 분리할 수 없이 관련된 행위는 이 심판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심판(구원받은 자들의 심판이 있은 후인 1,000년 후에 일어날 것임)에서와 같이, 심판을 위한 다른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자들과 그들의 부르심과 관련된 문제의 양쪽에 대한 정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종과 어리석은 종이 있습니다.

모두 같은 부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충실하고 지혜로운 자만이 궁극적으로 그들의 부르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직 거부와 징벌만이 불충실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