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이것,
곧 아무도 자기 형제의 길에 걸림돌이나
넘어질 기회를 두지 않는지를 판단할지니라.”
—로마서14:13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행하고 사역을 하시면서 많은 사람을 불쾌하게 하신 것에 대한 논의를 방금 마쳤다.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불쾌해했던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이것의 반대편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방금 가버나움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사역 순회를 마치고 짧지만, 절실히 필요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왔다.
그분의 사역을 위한 기지로 여겨질 만한 곳이 있다면 바로 이 도시였다.
거기에 있는 동안 시몬 베드로는 성전세를 징수하는 관리에게 다가갔다. 그때 세관원은 “당신의 선생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라고 질문했다(마태복음 17:24).
베드로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예수님과 논의하기 위해 돌아갔다.
예수님은 세리의 요청을 예상하셨기 때문에 시몬 베드로에게 “시몬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땅의 왕들이 누구에게서 세금이나 관세를 받느냐? 아들들에게서 받느냐, 아니면 낯선 사람들에게서 받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낯선 사람들에게서 받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들들은 자유롭다”(마태복음 17:25, 26).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들은 자유롭다”는 요점을 말씀하고 계신다. 아들들은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들들은 세금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금이 유지 관리하기 위해 지불하는 궁전에서 살고 있다. 아들들은 왕의 식탁에서 먹고 왕족의 의복을 입는데, 모두 세금으로 제공된다. 그들은 자유롭게 살고 자유롭게 부양받는다.
이 관리는 성전 세금을 받았다. 하지만 성전의 왕이나 소유자는 누구였는가? 누구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는가? 답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베드로는 방금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계시를 받았다.
이러한 근거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성전을 소유하신 분의 아들이라면 성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라고 물으셨다. 물론 그분은 면제될 것이다. 그분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전적으로 정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시몬 베드로에게 한 말씀을 주의해서 보라.
“그렇지만 우리가 그들을 실족시키지 않으려면 바다로 가서 낚싯바늘을 던져 먼저 올라오는 물고기를 잡아라. 입을 열면 돈 한 조각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해 그들에게 주어라.”(마태복음 17:27)
그분은 방금 자신의 자유를 증명했다. 하지만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 그분은 베드로에게 “돈을 내자!”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에게 가서 물고기를 잡아서 먼저 올라오는 물고기를 잡으라고 지시하셨을 때, 그분은 그 입에서 돈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그분의 자유에 대한 또 다른 확인이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세금까지 내셨다.
예수님은 땅의 주님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분에게 복종한다. 따라서 그는 돈이 그 물고기의 입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아들이셨기 때문에 그 돈을 위해 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분은 여전히 세금을 내고 실족시키지 않기로 선택하셨다.
이 예수님이 지난 장에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사과하지 않는 것과 같은 분이신가? 그분은 자신이 성전 세금에서 면제된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우리가 그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면 가서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셨다. 뭔가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가? 우리의 답은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러면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사람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크니라.”(마태복음 18:1-4)
여기서 핵심 구절은 “자기를 낮추는 자”다. 조금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확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마태복음 20:26-28)
와! 무슨 말씀인가!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 그분은 아들로 오셨다. 그분은 자유로웠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었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자유행동과 자유의지를 섬기기로 선택했다.
봉사하기 위해 해방되다
우리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형제를 본받고 예수님에게서 본 것과 같은 태도를 갖도록 권고받는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디아서 5:13)
자유에 대한 또 다른 단어는 특권이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자유나 특권을 우리 자신을 섬기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유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한다. 섬기는 데는 자유가 있지만, 노예 상태에서는 속박이 있다. 종은 섬겨야 하는 사람이고, 하인은 섬기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종과 하인의 태도의 몇 가지 차이점을 살펴보겠다.
• 종은 해야 하고, 하인은 하게 된다.
• 종은 최소한의 요구 사항을 수행하고, 하인은 최대한의 잠재력에 도달한다.
• 종은 한 2km를 간다면, 하인은 2km를 더 간다.
• 노예는 강탈당했다고 느끼지만, 하인은 그냥 준다.
• 노예는 묶이지만, 하인은 자유롭다.
• 노예는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지만, 하인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원망하는 태도로 섬기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세금을 내면서 마지못해서 주고 불평한다. 그들은 여전히 해방된 법에 대한 노예로 살고 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노예이다.
이 법이 신약 성경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가장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명령을 내리신 “마음”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섬기기 위해 해방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계속 싸운다.
바울은 로마인과 고린도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태도에 맞서는 생생한 예를 보여준다. 이 성도들에게 자유는 음식에 의해 도전받았다. 바울은 그들에게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받아들이되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말라”고 권고하면서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지만, 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로마서 14:1, 2).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모든 음식을 믿는 자들에게 깨끗하게 하셨다(마가복음 7:18, 19).
바울은 믿음이 약해서 우상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을까 두려워 고기를 먹을 수 없는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이 사람들은 여전히 깨끗한 양심으로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제사한 것을 먹는 것에 관하여, 우리는 우상이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분의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를 위하여 있고, 한 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있고 우리가 그를 통하여 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이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상을 의식하면서도 지금까지 우상에게 제사한 것으로 먹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은 약해서 더럽혀졌다.”(고린도전서 8:4, 6, 7)
그 교회에서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들은 약한 성도들 앞에서 의심스러운 원산지의 고기를 먹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음식을 정결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일으켰다. 약한 자들은 우상의 제단에 있는 고기의 이미지를 떨쳐낼 수 없었다. 강한 성도들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먹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형제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보다 신약성경 성도로서 권리를 지키는 데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깨닫지 못한 채 약한 형제들의 길에 걸림돌을 두었다. 이런 태도는 종의 마음에는 없다. 바울이 그들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형제들의 길에 걸림돌이나 넘어질 만한 것을 두지 않기로 결심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화와 기쁨이다.”(로마서 14:13, 17)
그는 “왕국이 실제로 무엇인지 기억하라. 곧 의로움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혜택은 새로운 성도들 안에서 뒤틀렸다. 더 강한 성도들은 그들의 자유를 섬기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권리”를 위한 플랫폼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신약의 자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지식은 파괴한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성전세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여 섬기기 위해 우리 삶을 드리는 것의 중요성을 예시하셨다. 그분은 자유가 우리의 권리를 요구하고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허가증이 되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권리에 대한 지식이 있지만 섬기려는 그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경고를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약한 형제는 너희의 지식으로 멸망할 것이냐? 그러나 너희가 형제들에게 이와 같이 죄를 지어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8:11, 12)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사용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다. 어떻게? 양심이 약한 사람들을 상처입히고, 그리스도의 어린아이 중 한 명을 화나게 하고 넘어지게 함으로써 말이다.
우리의 권리를 내려놓음
예수님께서 성전세와 관련하여 자신의 자유를 확립하신 후, 그분은 제자들에게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셨다.
“그러나 누구라도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방아 맷돌을 자기 목에 매단 채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것이 그에게 더 나으리라. 실족하게 하는 것들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으리로다! 이는 실족하게 하는 것들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실족하게 하는 것을 일으키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런즉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들을 찍어 내버리라. 다리 저는 자나 불구자가 되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존하는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라. 또 만일 네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뽑아서 네게서 내버리라. 네가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라.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무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바라보느니라, 하기 때문이라.”(마태복음 18:6-10)
마태복음의 이 장 전체는 범죄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신약의 특권 중 하나일지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약한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그의 앞에서 그것을 잘라내라.
그러면 이 책의 이전 장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을 불쾌하게 하셨는지 궁금할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결과로 어떤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셨다. 그분의 범죄는 자신의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온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을 때 불쾌해했다. 그분의 제자들은 아버지가 그분에게 전파하라고 하신 진리에 불쾌해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고치기 위해 돌아오는 것을 늦추셨을 때 불쾌해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섬기심으로써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하신 것을 발견할 수 없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그러나 이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린도전서 8:9)
우리의 자유는 섬기고 우리의 목숨을 드리기 위해 주어졌다. 우리는 파괴하지 말고 건설해야 한다. 또한 이 자유는 우리 자신에게 물건을 쌓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에 불쾌감을 느낀다.
고린도전서 8:9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경고를 다시 들어보라. “그러나 이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계명이 어떻게 깨졌는지에 대한 예가 있다. 내가 방문한 교회의 한 장로는 마을의 매우 시끄러운 지역에 있는 소박한 호텔을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먼 거리를 여행했고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나는 지쳐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큰 소리와 짖는 개 소리에 여러 번 깨어났다.
나는 하룻밤만 머물렀고 필요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다음 날 나는 다른 도시로 계속 가서 매우 바쁜 일정으로 다음 2주 동안 사역했다. 그 2주 동안 나는 단 하루만 자유 시간을 가졌고, 그것은 여행을 위한 것이었다. 24시간 동안 나는 3만 명의 교인이 있는 교회에서 5번 사역했다.
여행이 끝나고 우리는 돌아갈 예정이었다. 목사는 내가 다시 그의 장로의 호텔에 머물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우리는 2주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어 기뻤다. 우리가 다음 날 아침, 한 귀한 자매가 훌륭한 리조트 호텔 중 한 곳에서 숙박비를 지불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휴식을 취하고 아름다운 곳에 머물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 우리가 짐을 챙기기 위해 식당을 나설 때, 동역자는 이 자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역자와 나는 그녀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어리석어서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교회에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고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간청했지만 나는 그녀를 무시했다. 목사를 만났을 때 나는 그 여인의 제안 때문에 장로님의 호텔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 말에 불안해 보였고, 나는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그는 나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주호촌, 이게 장로과 그의 가족을 화나게 할 거야. 그들은 이미 당신을 위해 방을 예약했고, 그날 저녁은 다 매진됐어.” 나는 또한 그들이 우리를 위해 마련한 것을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를 화나게 한 것 같다. 마침내 나는 장로의 호텔에 머물고 그 여인의 제안을 무시하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주님께서 내 태도에 대해 다루셨다. 목사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았다. 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이 형제를 화나게 했고, 그것이 죄라는 걸 알았다. 나는 그의 용서를 구했다. 그는 나를 용서해 주었다. 다시는 그 교훈을 배우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의식 교양의 시험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을 이루는 일들과 서로를 세워주는 일들을 따르자.”(로마서 14:19)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자유 때문에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성경에 따라 허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것은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것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세우려고 하는가?
“모든 것이 내게 적법하나 모든 것이 적절한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이 내게 적법하나 모든 것이 세워주는 것은 아니니라. 아무도 자기 것을 구하지 말고 오직 각 사람은 다른 이들이 잘되기를 구하라. . .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아무에게나 어떤 실족거리도 주지 말라. 곧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면서 내가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린도전서 10:23-24, 31-33)
이 성경 구절을 통해 성령이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을 흐르게 하시기를 권한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닌 숨은 동기나 의제를 보여 주시도록 허락하라. 삶의 어떤 영역을 받아들이던 모든 사람의 종으로 살라는 그분의 도전을 받아들이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마라. 이것은 바울의 사역 지침 중 하나였다. 그는 “우리는 어떤 일에도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노니 이는 우리의 사역이 비난을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6:3)고 썼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얼마나
큰 빚을 용서해 주셨는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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