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9 공격의 바위

Hernhut 2024. 8. 9. 19:24

 

 

 

 

그런즉 그것이 성경기록에도 포함되어 있으니,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으뜸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당황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분께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로우시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거부한 돌이시니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고

또 걸려 넘어지는 돌과 실족하게 하는 반석이 되셨으니,

곧 불순종함으로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에게 그리되셨느니라.

그들은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하여졌느니라.”

베드로전서 2:68

 

오늘날 믿는다는 단어의 의미는 약해졌다. 대부분의 사람의 눈에 그것은 단지 어떤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순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위의 구절에서 믿는다는 단어와 불순종한다는 단어는 반대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권고한다(요한복음 3:16). 우리가 믿는다는 단어를 보는 방식의 결과로, 많은 사람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존재하고 갈보리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뿐이며, 그들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것이 유일한 요구 사항이라면, 마귀는 그분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성경은 또한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으니,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말한다(야고보서 2:19). 그러나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성경에서 믿는다는 단어는 사실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영적으로 동의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가 있다. 위의 구절의 맥락에 충실하게, 우리는 믿는 것의 주요 요소가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너희에게는 그가 귀중하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잇돌이 되었고,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었느니라.”

당신이 복종하는 사람의 성격과 사랑을 안다면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랑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원칙이나 가르침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확고히 자리 잡지 못하면 우리는 걸려 넘어질 수 있다.

주님께서 건축자로 부르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퉁잇돌인 예수님을 거부했다. 그들은 구약의 가르침을 사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해석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해석에 만족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모든 법률주의에 도전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간청하셨다.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노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함이요, 이것이 곧 나를 증거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그들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아들과 딸을 원하셨다는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통치하고 다스리고 싶어 했다. 그들의 눈에는 율법이 관계보다 더 중요했다. 그들은 값없이 주어진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얻기를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 그들의 삶과 구원에 대한 소망이 그들에게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었다.

시므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 예언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일어나게 하려고 정해졌느니라”(누가복음 2:34). 넘어지고 일어나는 것을 주목하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보내진 분이 결국에는 자신이 보내진 사람들에게는 분열의 칼을 가져다주셨고(마태복음 10:34),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가져다주셨다.

 

예수님과 범죄

 

성경 학교에서 예수님은 종종 잃어버린 어린양을 어깨에 메고 우리로 돌아오는 목자로 묘사되었다. 아니면 어린아이들을 축복하는 동안 팔을 두르셨거나 미소를 지으며 사랑해라고 말씀하셨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예수님은 또한 바리새인들의 독선을 비난했다.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마태복음 23:33). 그분은 성전에서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서 쫓아냈다(요한복음 2:13-22). 그분은 자신을 따르기 전에 아버지를 장례를 치르고 싶어 했던 사람에게 죽은 자는 자기 죽은 자를 묻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9:59, 60).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분이 사역하는 동안 많은 사람을 불쾌하게 한 사람이 드러난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겠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화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이 지도자들과 마주하고 화나게 하셨다. 그들이 화를 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보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셔서 진실을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이르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내게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고 헛되이 나를 경배하느니라”(마태복음 15:7-9). 이 말씀은 그들을 화나게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 후에 그에게 무엇을 물었는지 주목하라.

그러자 그분의 제자들이 와서 그에게 말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화를 냈다는 것을 아십니까?”(마태복음 15:12) 그분의 대답을 연구하라.

그러나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아니하신 초목마다 뿌리째 뽑히리라. 그들을 그대로 두어라. 그들은 눈먼 자들을 인도하는 눈먼 지도자들이로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더라.”(마태복음 15:13, 14)

예수님은 죄가 실제로 그분의 아버지에 의해 진정으로 심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없앨 것이라고 보여주셨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나 사역 팀에 합류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지지 않았거나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진리가 전파될 때 오는 죄는 그들의 진정한 동기를 드러내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뿌리를 뽑게 한다.

다른 교회를 방문하면서 나는 목사들이 직원이나 회중에서 떠난 사람들에 대해 슬퍼하는 많은 사례를 목격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들은 진리가 전파되었고 그것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맞섰기 때문에 화가 났다. 그들은 교회의 모든 방면을 비판하고 떠났다.

목사들이 문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붙잡으려면 결국 진리를 타협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진리를 전파하면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그들은 뿌리를 뽑히고 떠날 것이다. 그들을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계속 먹이고 양육하라라고 말한다.

어떤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잃을까 두려워서 대립을 피한다. 어떤 사람들은 특히 교회나 지역 사회에서 큰 기부자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직면해야 하므로 주저한다. 다른 사람들은 오랫동안 함께 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결과 목사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보호하고 먹이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잃는다.

내가 처음 목회직에 들어갔을 때, 한 현명한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당신의 권위에 머물러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빼앗아 당신에게 불리하게 사용할 것이다.”

사무엘은 왕조차도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사울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주님은 사무엘에게 그와 마주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렇게 했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주님의 말씀에 진정한 회개로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더 걱정했다.

사무엘이 사울을 떠나려고 하자, 사울은 그의 겉옷을 움켜쥐고 한쪽 모서리를 찢어버렸다. 사무엘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황폐하게 했다.

주께서 오늘 이스라엘 왕국을 당신에게서 찢어내셨습니다”(사무엘상 15:28).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울을 위해 슬퍼했다. 그는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었고, 통치하도록 훈련했으며, 그의 대관식을 주관했다. 그는 사울의 개인적인 친구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사울을 두고 슬퍼하는데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들어보라.

내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버려두었으니 언제까지 사울을 위하여 애통해하겠느냐? 네 뿔에 기름을 채워서 가라. 내가 너를 보내노라”(사무엘상 16:1).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계속해서 새로운 기름이나 기름 부음으로 움직이려면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이 완벽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그를 버려두신 후에 사울에게 돌아갔다면 그는 새로운 기름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계속 애통해했다면 그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나 친구라는 이유로 교인들과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위해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목사들은 결국 그들의 삶에서 기름 부음의 기름이 마르게 된다. 어떤 사역은 죽고, 어떤 사역은 그저 살아있는 것을 흉내낸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선택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떠난 사람 중 누구에게도 반응하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의 유일한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가장 많은 사람에게 이롭게 될 것이다.

나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파 교회에서 설교하던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약 1년 동안 길을 떠났다. 첫 번째 일요일 아침, 나는 회개와 첫사랑으로 돌아가라는 간단한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저항을 느꼈지만, 그것이 내가 전해야 할 메시지라는 것을 알았다.

예배가 끝난 후 한 목사는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목사가 전한 내용을 보여주셨지만, 내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성령의 감명을 받아 그에게 교회의 목사는 누구입니까? 당신이신가요, 아니면 예수님이신가요?”라고 물었다.

그 목사는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 말씀이 한 달 전에 주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이 사람들이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교회의 3분의 1이 예배 순서, 음악 또는 설교에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는 오래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강해지고 주님께 순종하라고 격려했다.

우리는 교회에서 4번 더 예배를 드렸는데, 매번 더 어려웠다. 그 도시를 떠났을 때, 나는 마치 내 배에 모래 자루가 들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더 무거워지고 더 불쾌해졌다.

보통 교회를 떠날 때,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주님과 홀로 있을 때, 나는 아버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왜 내 혼에 이렇게 무거운 짐이 있는 걸까요? 목사의 권위를 찬탈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분은 단순히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라.”(누가복음 9:5)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분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계속 기도하고 그분에게 질문했지만, 같은 말을 들었다.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라.”

마침내 나는 순종했다. 내 손이 두 번째 말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무거움이 사라지고 기쁨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한번 놀라면서 말했다. “주님, 그들은 나를 공격해서 마을 밖으로 내쫓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지도부와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거부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님, 그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내가 간청했다. “내가 그들에게 50년 더 준다 해도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마음을 정했다.”

나는 이 지도자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타협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뿔은 신선한 기름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본질이 없는 형태만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권능이나 임재가 부족했다. 나중에 그가 목사직을 사임했고 교회는 그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들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통제받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그것이 대립과 궁극적으로 모욕을 의미한다고 해도 진실을 말씀하실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의 승인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당신에게 내릴 수 없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모욕할 위험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로 마음먹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모욕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에 사역하기 위해 오셨다. 하지만 그분은 다른 많은 사람에게 가져다주셨던 자유와 치유를 그들에게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들이 한 말을 보라. “이 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아니냐?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세, 시몬, 유다? 그의 자매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러면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서 얻었느냐?” 그래서 그들은 그분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만 존경을 받지못하느니라”(마태복음 13:55-57).

나사렛의 이 남녀들이 그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여 권위 있게 우리를 가르치는 거지?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 그는 여기서 자랐다. 우리는 그의 장로들이다. 그는 단지 목수의 아들일 뿐이다. 그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가?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화를 내지 않게 하려고 진실을 타협하지 않으셨다. 마을 사람들은 너무 화가 나서 그를 절벽에서 밀어내어 죽이려고 했다(누가복음 4:28-30). 그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그는 계속 진실을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런 남자와 여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을 불쾌하게 했다. 심지어 그의 집안 식구들도 그에게 화를 냈다. 그들은 그분이 하는 일로 인해 그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다.

이에 그분의 친지(가족)들이 그것을 듣고 그분을 붙들러 나왔더니, 이는 그들이 이르되, 그가 제정신이 아니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그때에 그분의 형제들과 그분의 어머니가 와서 밖에 서서 그분께 사람을 보내어 그분을 부르더라. 무리가 그분 주위에 둘러앉았는데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보소서, 선생님의 어머니와 선생님의 형제들이 밖에서 선생님을 찾나이다, 하더라.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냐? 하시고 그분께서 자기 주위에 앉은 자들을 둘러보시고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이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바로 그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라, 하시더라.”(마가복음 3:21, 31-35)

그분의 친족(가족)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갔다고 말씀하신 것을 유의하라. 마가는 그 친척(가족)들을 예수님의 친어머니와 형제들로 밝혔는데, 그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누군가의 집에서 설교하는 것을 보았다. 요한복음에서도 그분의 형제들은 그를 믿지 아니하였더라”(요한복음 7:5)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척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찾고 있던 것은 가족의 수용이 아니었다. 그분은 그들의 욕망에 지배받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그들이 승인하든 그렇지 않든 아버지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이다.

나는 특히 결혼한 부부들이 배우자나 가족을 화나게 할까 두려워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 결과 그들은 타락하거나 부름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다.

내가 처음 거듭났을 때, 내 가족은 모두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내가 새로 찾은 믿음에 대한 흥분을 공유하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는 내가 그녀가 로마카톨릭교회를 떠나기로 한 결정에 매우 불만스러워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중한 가톨릭 신자들이 분명히 있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았다.

두 번째 타격은 내가 목회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을 때 왔다. 나는 대학교에서 전기 공학 학위를 받기 원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계셨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것이 내 가까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년 동안 불편했다. 오해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아무리 화를 내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복음으로 그들을 압도하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미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나는 현명하지 못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내 선행을 그들에게 보여 주라고 지시하셨다. 그래도 나는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았다.

오늘날 부모님은 매우 지지해 주시고, 가장 많이 나를 반대하셨던 어머니는 죽기 전인 80세의 나이에 영광스럽게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이 혼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께 순종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구원을 받고 오순절에 다락방에 있었다. 야고보는 그분의 이복형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사도가 되었다.

우리 가족을 기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타협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에서 신선한 기름을 잃을 것이고, 그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화나게 하셨다. 이전 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화나게 하셨을 때 제자들의 관점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다. 다시 검토하여 예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겠다.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 중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이것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스스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것이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분의 제자 중 많은 사람이 돌아가서 더 이상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복음 6:60, 61, 66)

상황은 이미 충분히 힘들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의 죽음을 모의했다. 그분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했다. 그분의 가족은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압력을 가하기 위해, 많은 그분의 제자들이 기분을 상하게 한 채 떠났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남은 사람들에게 원한다면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날 그분이 홀로 서 계셨다면, 그것은 그분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일부를 기분 나쁘게 했다. 이제 어떤 사람이 병들었는데, 베다니의 나사로였다. 마리아와 그녀의 자매 마르다의 동네였다. 향유로 주님께 기름을 바르고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은 사람은 마리아였고, 그녀의 형제 나사로는 병들었다. 그래서 자매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말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습니다.”(요한복음 11:1-3)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그들은 가까웠다. 예수님은 그들과 시간을 보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의 예수님의 반응에 주목하라. 그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곳에 이틀 더 머물렀다(요한복음 11:6). 예수님께서는 계시를 통해 나사로의 병이 죽음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분은 계시던 곳에 이틀 더 머물렀다. 마침내 그분이 베다니에 오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각각 그분께 말했다. “주님,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1:21, 32). 다시 말해, “왜 즉시 오지 않으셨어요? 그를 구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아마도 두 자매는 약간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분께 전하기 위해 인편을 보냈고, 그분은 이틀 동안 지체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상한 대로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셨다. 대신 성령의 인도를 따르셨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분이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목사들은 종종 사람들에게 통제를 받는다. 그들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의 한 임원이 목사를 잃은 적이 있는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줄 목사를 원합니다. 아침 8시에 저의 집에 와서 커피 한잔할 수 있는 목사를요.”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사교적인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요. 나중에 알게 된 건 이 교회가 1년 반 동안 목사를 네 명이나 바꾸었다는 것이다. 내가 청소년 목사였을 때, 내가 목회를 시작한 지 6개월 후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제 친구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가 물었다. “제 마지막 청소년 목사가 제 친구였어요.” 나보다 먼저 사역했던 청소년 목사가 청소년들과 매우 사교적이었다. 그들은 활동을 전공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사교적인 목사에게 원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마태복음 10:41을 인용했습니다. 그 구절에서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의 이름으로 의로운 사람을 영접하는 자는 의로운 사람의 상을 받을 것이다.” “당신은 많은 친구가 있지 않은가?” 내가 그에게 물었다. “.”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청소년 목사는 한 명뿐이잖아요?” “.” “청소년 목사의 상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친구의 상을 원하시나요? 왜냐하면 당신이 나를 초대하는 방식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 요점을 알아챘다. “저는 청소년 목사의 상을 원합니다.” 많은 목사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감정을 상하게 하고 지지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갇힌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사람들에게 통제받는다. 그 결과, 그들의 교회나 회중에서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침례 요한을 화나게 하셨다. 침례 요한조차도 예수님께 화나게 하는 유혹을 다루어야 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에 대해 그에게 보고했다. 요한은 제자 두 명을 불러 예수님께 보내며, “당신이 오실 분이신가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나요?”라고 물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침례자 요한이 우리를 당신께 보내어, 당신이 오실 분이신가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나요?”라고 물었다(누가복음 7:18-20)

잠깐만. 요한이 예수님께 오실 분, 메시아인지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고 그분의 도래를 알린 사람이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 그는 이분이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복음 1:33)라고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심지어 그분은 증가하셔야 하고 나는 감소되어야 한다”(요한복음 3:30)라고 말했다. 요한은 그 당시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말로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직 시몬 베드로에게 계시되지 않았다.) 왜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나요라고 묻는가? 요한의 입장에 서보라. 당신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최첨단에 있는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당신에게서 사역을 받았다. 당신은 이 나라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전도 사역을 했다. 당신은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았다. 당신은 당신의 부름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결혼조차 하지 않았다. 당신은 사막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자주 금식했다. 당신은 바리새인들과 싸웠고 귀신 들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신의 전 생애는 이 다가오는 메시아를 위한 길을 준비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제 당신은 감옥에 있다. 당신은 꽤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은 매우 적다. 당신이 준비한 사람들의 주의가 이제 나사렛 예수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신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합류했다. 당신을 섬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이 당신을 만나러 올 때, 그들은 이 사람과 그의 제자들이 당신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사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온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 그들은 안식일을 어기고 금식조차 하지 않는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지만, 이것이 메시아의 행동인가?” 당신이 감옥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분을 상하게 하는 유혹이 커진다. “내가 평생을 바쳐 길을 준비한 이 사람이 감옥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만나지도 않았구나! 어떻게 이럴 수 있나? 그가 메시아라면 왜 나를 이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는 거지? 나는 잘못한 게 없어.” 그래서 당신은 충실한 제자 두 명을 보내어 예수님을 심문하게 한다. “당신이 오실 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요한에게 하신 예수님의 대답을 살펴보겠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에 그분께서 병약함과 역병과 또 악한 영들이 들린 많은 사람을 치료하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에게 시력을 주시더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길을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들을 요한에게 말하되, 어떻게 눈먼 자가 보고, 다리 저는 자가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정결하게 되고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지 전하라. 또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할 자는 복이 있도다, 하라, 하시더라.”(누가복음 7:2123)

예수님의 대답은 예언적이다. 그분은 요한에게 매우 친숙한 책인 이사야를 인용한다. 이사야 29:18, 35:4-6, 61:1의 구절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지켜본 모든 것에 적용된다. 그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증거했다.

하지만 그분은 거기서 끝내지 않는다. 그분은 나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덧붙이신다. 그분은 요한, 네가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나의 많은 길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네가 기대한 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에게 실족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요한에게 과거와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길에 대한 자신의 이해로 판단하지 말라고 촉구하셨다. 요한은 오늘날 우리가 완전한 그림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전체 그림이나 계획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를 격려하시며 네가 명령받은 것을 행하였으니 네 상이 클 것이다. 다만 나로 실족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사과 없는 모욕

 

침례자 요한처럼 하나님의 여러 방법으로 훈련을 받았다 하더라도 예수님께 모욕을 당할 기회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믿는다면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싸우며 그분의 방법이 항상 당신의 방법보다 높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에 순종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모욕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8에서 바람은 원하는 곳으로 불고, 그 소리는 들으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느니라. 영으로 난 자도 다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영과 함께 움직일 때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불쾌한 반응 때문에 마음속으로 진실이라고 아는 것에서 당신을 꺾지 마라. 사람들의 욕망 때문에 영의 흐름을 중단하지 마라. 베드로는 이것을 잘 요약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겪으셨으니, 그와 같이 너희 자신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이는 육체 안에서 고난을 겪은 자는 이미 죄를 그쳤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그는 자기 육체 안에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들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리라.”(베드로전서 4:1, 2)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면, 사람들의 욕망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 결과, 여러분은 육신으로 고난을 겪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가장 큰 반대를 겪으셨다. 종교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한계 내에서만 일하신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과 함께있다고 믿는다. 만약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종교인들을 불쾌하게 하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분명히 그들을 불쾌하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의 박해는 좋은 예다. 갈라디아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할례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말하는 종교 지도자들 편을 들어 십자가 복음을 타협했다고 잘못 들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바로잡았다.

나를 보라.” 그는 말했다. “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사방에서 박해를 받고 있다. 내가 할례를 전파했다면 그들이 나에게 이런 짓을 했을까? 십자가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고, 나는 다른 것을 전파할 리가 없다!”(갈라디아서 5:11)

누군가가 복음의 진리에 도전한다면, 사과 없이 공격적으로 대할 때다. 우리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압력을 받고 선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선택이 내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지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결코 누군가를 불쾌하게 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