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12 복수: 함정

Hernhut 2024. 8. 13. 21:25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모든 사람의 눈에 정직한 일들을 준비하라.”

(로마서 12:17)

 

용서하지 않는 범죄를 붙잡는 것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하면, 그는 자신에게 빚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금전적이든 아니든 어떤 종류의 대가를 기대한다.

우리의 법원 시스템은 잘못을 당하거나 피해당한 당사자를 복수하기 위해 존재한다. 소송은 사람들이 빚을 갚으려고 시도하는 데서 비롯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인간의 정의는 “그들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말한다. 용서하지 않는 종은 동료 종이 빚을 갚기를 원했기 때문에 법정에서 보상을 요구했다. 이것은 의의 길이 아니다.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 반대로 진노하심에 맡겨라. 왜냐하면, ‘원수 갚는 일은 내 것이다. 내가 갚겠다. 나 주가 말한다.’라고 기록 되었기 때문이다.”(로마서 12:19)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스스로를 복수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복수를 원하고, 추구하고, 계획하고, 실행한다. 빚이 완전히 갚아질 때까지 우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우리만이 받아들일 만한 보상을 결정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행해진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판사로 세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율법을 주시는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구원하실 수 있으시며, 파멸시키실 수도 있다. 그런데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도록, 형제들아, 너희는 서로 불평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보라, 재판관께서 문 앞에 서서 계시기 때문이다!”(야고보서 4:12; 5:9)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관이다. 그분은 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의에 따라 갚으실 것이다.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갈보리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빚을 탕감하신다.

당신은 “하지만 그 잘못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에게 가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그분께 행한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 무고한 희생자였던 그는 다른 모든 인간이 죄를 지어 죽음에 처하는 동안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우리 각자는 땅의 법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 정의가 실현된다면 우리 모두는 우주의 최고 법원의 손에 사형을 선고받아야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손에 가해진 잘못을 자극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 행해진 일과 용서받은 일을 비교한다면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당신이 지고 있는 빚을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속았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베풀어진 자비에 대한 개념을 잃었다.

 

원한에 대한 회색 지대는 없다

 

구약 언약에 따라, 당신이 나에게 범죄를 저질렀다면, 나는 당신에게 같은 것을 되돌려줄 법적 권리가 있었다. 빚을 징수하고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허락되었다(레위기 24:19; 출애굽기 21:23-25). 율법이 최고였다. 예수님께서 아직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분이 새 언약의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보라.

“너희는 옛 사람들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아라.’라고 말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악에게 맞서지 말라. 도리어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너는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라. 그리고 어떤 사람이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웃옷을 빼앗으려 하거든, 너는 그로 하여금 네 겉옷도 가지게 하라. 그리고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 리를 가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를 너는 물리치지 말라.”(마태복음 5:38–42)

예수님은 원한에 대한 회색 지대를 제거하신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태도가 복수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다시 이용당할 가능성에 기꺼이 자신을 열어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우리에게 행해진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판사로 세우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하지 않는 종은 동료 종을 감옥에 가두었을 때 그렇게 했다. 그 후, 이 용서하지 않는 종은 고문하는 자들에게 넘겨졌고, 그의 가족은 그가 모든 것을 갚을 때까지 팔려 다녔다.

우리는 자리를 마련하고 정의로운 판사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는 의롭게 상을 주신다. 오직 그분만이 의로움으로 복수하신다.

나는 한 교회에서 범죄에 대한 주제로 목회하고 있었다. 그 후에 한 자매가 나에게 왔다. 그녀는 전 남편이 한 모든 일을 용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범죄를 용서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여전히 내면에 평화가 없고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여전히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네, 그랬어요.” 그녀가 말했다. “용서의 눈물을 흘렸어요.”

“당신은 울었을지 몰라도, 당신은 아직 그를 풀어주지 않았어요.”

그녀는 내가 틀렸고 그녀가 그를 용서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를 풀어줬어요.”

“그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봐요.” 내가 물었다.

“남편과 나는 교회에서 목회를 했어요. 그는 나와 세 아들을 두고 교회에서 유명한 여성과 도망쳤어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나와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을 그리워했다고 말했어요. 그가 도망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뜻이었기 때문이라고요. 그는 그녀가 훨씬 더 지지적이기 때문에 그의 사역에 자산이라고 말했어요. 그는 내가 방해물이라고 말했어요. 그는 내가 비판적이라고 말했어요. 그는 결혼 파탄의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렸어요. 그는 결코 돌아와서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이 남자는 분명히 속였고 아내와 가족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녀는 그의 행동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고 그가 빚을 갚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빚은 위자료나 자녀 부양비가 아니었다. 그녀의 새 남편이 그녀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에게 대가를 치르기를 바랐던 빚은 그가 틀렸고 그녀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가 당신에게 와서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고,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당신의 용서를 구할 때까지 당신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을 묶어 놓은 이행되지 않은 대가입니다.”라고 나는 그녀에게 지적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분께 와서 사과하기를 기다리셨다면, “우리가 틀렸습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을 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라고 외치셨다(누가복음 23:34).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 와서 그분에 대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기 전에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에서 훈계를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골로새서 3:13). 그리고 “서로 친절하고, 자비롭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에베소서 4:32)라고 말한다.

내가 이 여인에게 “그가 ‘내가 틀렸고, 네가 옳았다’고 말할 때까지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가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가져다준 모든 고통에 비하면 사소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의 정의에 속박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판사로 내세워 빚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을 기다렸다. 이 범죄는 그녀의 새 남편과의 관계를 방해했다. 또한 그녀의 전 남편이 그녀의 목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모든 남성 권위자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우리 마음의 상태를 흙의 상태에 비유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굳게하라는 훈계를 받는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결국 의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착함, 성실, 온유, 자제이다.”(갈라디아서 5:22, 23)

그러나 땅은 그 안에 심은 것만을 맺을 것다. 우리가 빚, 용서하지 않음, 불쾌함의 씨앗을 심으면 하나님의 사랑 대신 다른 뿌리가 돋아날 것이다. 그것은 쓴맛의 뿌리라고 불린다.

프랜시스 프랑지파네는 쓴맛에 대한 훌륭한 정의를 내렸다.

“쓴맛은 이루어지지 않은 복수다.” 그것은 복수가 우리가 원하는 정도로 충족되지 않을 때 생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직접 말했다.

“모든 사람들과 함께 화평과 거룩함을 따라라. 왜냐하면 그것들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살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 쓴 뿌리가 돋아나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그것에 의하여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라.”(히브리서 12:14, 15)

“많은 사람이 더럽혀진다”는 말에 유의하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불쾌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많은 사람”일 수 있을까?(마태복음 24:10)

비통함은 뿌리다. 뿌리를 돌보고, 물을 주고, 보호하고, 먹이고, 주의를 기울이면 뿌리의 깊이와 힘이 커진다. 재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뿌리를 뽑기 어렵다. 범죄의 힘은 계속 커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에 해가 지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권고받는다(에베소서 4:26). 이제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고 분노, 원망, 질투, 증오, 다툼, 불화의 수확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악한 열매라고 부르셨다(마태복음 7:19, 20).

성경은 범죄를 놓아버림으로써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더럽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소중한 것은 결국 용서하지 않는 사악함으로 인해 타락하게 될 것이다.

 

더럽혀진 잠재적 왕

 

앞부분에서 우리는 사울이 다윗에게 신실하지 않았을 때 다윗이 사울 왕에게 신실함을 유지한 방법을 살펴보았다. 다윗은 두 번이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스스로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울과 자신 사이에서 판단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사울에게 떨어졌을 때 다윗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사울에 대해 슬퍼했는데, 그에게 원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국가를 강화하고 군사적, 재정적 성공을 누렸으며 왕위를 안전하게 지켰다. 그는 암논(장남)과 압살롬(삼남)을 포함하여 자녀를 낳아준 많은 아내와 결혼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인 이복 누이 다말에게 사악한 죄를 지었다. 그는 병을 가장하고 아버지에게 다말을 보내 음식을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말이 그렇게 하자 그는 하인들을 내쫓고 그녀를 강간했다. 그는 그녀를 멸시하고 그녀를 자신의 시야에서 쫓아냈다. 그는 처녀 왕녀를 모욕했고, 그녀의 삶을 수치심으로 황폐하게 만들었다.

압살롬은 이복형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동생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그녀를 부양했다. 하지만 그는 암논이 다말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그를 미워했다.

압살롬은 아버지가 이복형제를 처벌하기를 기대했다. 다윗 왕은 암논의 사악함을 듣고 격노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정의의 부족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다말은 한때 왕의 처녀 딸에게만 입혀진 왕의 옷을 입었다. 이제 그녀는 수치심으로 옷을 입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소녀였고 아마도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은둔 생활을 했고, 더 이상 처녀가 아니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었다.

불공평했다. 그녀는 왕의 명령에 따라 암논을 섬겼고, 강간당했다. 그녀의 삶은 끝났고, 이 잔혹한 짓을 저지른 암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의 무게를 짊어졌고, 그녀의 삶은 엉망진창이었다.

압살롬은 날마다 슬픔에 잠긴 여동생을 보았다. 공주의 완벽한 존재가 악몽이 되었다. 압살롬은 아버지가 무언가를 하기를 1년 동안 기다렸지만, 다윗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화가 났고, 사악한 암논을 미워했다.

2년 후, 암논에 대한 그의 증오심은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낳았다. 압살롬은 아마도 적절한 권위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여동생의 복수를 할 것이다.

그는 왕의 모든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암논이 그를 의심하지 않자, 압살롬은 그를 죽였다.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복수를 마치고 게슈르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에 대해 품은 원한은 더욱 강해졌고, 특히 그가 궁전을 떠나 있는 동안 더욱 그랬다.

압살롬의 생각은 비통함으로 오염되었다. 그는 다윗의 약점을 비판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랐다. 다윗은 부르지 않았다. 이것이 압살롬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만, 그들은 그의 진정한 본성을 보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을 은폐하는 데 사용하는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다. 아니, 그는 사울 왕보다 더 나쁩니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의 왕을 죽이지 않고 그들의 가장 좋은 양과 소 몇 마리를 살려두지 않아서 왕좌를 잃었다. 내 아버지는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 중 한 사람의 아내와 간통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죄를 덮었다. 그는 살인자이자 간통자다. 그래서 그는 나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에 대한 가짜 숭배로 덮는다.’

압살롬은 3년 동안 게슈르에 머물렀다. 다윗은 아들 암논의 죽음에 위로를 받았고, 요압은 왕을 설득하여 압살롬을 집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다윗은 여전히 ​​압살롬을 직접 만나기를 거부했다. 2년이 더 지나고 다윗은 마침내 압살롬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에게 다시 모든 특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압살롬의 마음속 원망은 여전히 ​​강했다.

압살롬은 겉모습에 능숙했다. 암논을 죽이기 전에 “압살롬은 그의 형 암논에게 좋은 말도 나쁜 말도 하지 않았다. 압살롬은 암논을 미워했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3:22). 많은 사람이 압살롬처럼 자신의 원망과 증오를 숨길 수 있다.

이런 불쾌한 비판적 태도에서 그는 불만을 품은 사람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온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내어주었고, 그들의 불평을 경청할 시간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왕이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그는 왕이 그들에게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건을 재판했다. 아마도 압살롬은 자신에게 정의가 베풀어지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들의 사건을 재판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듯했다. 성경은 압살롬이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훔쳤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그들을 걱정했는가? 아니면 자신을 화나게 한 다윗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고 있었는가?

 

오류에 대한 전문가

 

압살롬은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다윗에 대항했다. 다윗 왕은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다. 압살롬이 자신의 왕국을 세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다윗을 쫓다가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그를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말이다.

사실 압살롬은 자신의 원망과 모욕으로 죽었다.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왕위 계승자가 아버지가 빚졌다고 생각했던 빚을 갚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전성기에 죽었다. 그는 결국 더럽혀졌다.

교회의 지도자를 보좌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섬기는 사람에게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들은 곧 비판적이다. 지도자나 지도자가 임명한 사람에게 잘못된 것이 있다면 전문가가 된다. 그들은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들의 시각은 왜곡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본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사명이 불공정한 지도자로부터 주변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불만스럽고 불만족스럽고 무지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이 알기도 전에 교회나 사역을 분열시키거나 나눈다. 압살롬처럼.

때때로 그들의 관찰은 옳다. 아마도 다윗은 암논에 대해 조치를 취했어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지도자에게는 오류가 있을 것이다. 누가 심판관인가? 당신인가? 아니면 주님이신가? 다툼을 뿌리면 다툼을 거두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압살롬에게 일어난 일과 현대 사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마음에 범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쓴맛의 뿌리는 자라면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양육되면 자라서 강화될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권고하듯이,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쓴맛의 뿌리가 돋아나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히브리서 12:15).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고 주님의 훈계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며 우리를 정죄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정죄를 무시하거나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일을 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그분의 훈계에 마음을 열라.

한 목사가 나에게 그가 행한 어떤 일에서 압살롬처럼 행동했는지, 아니면 다윗처럼 행동했는지 물었다. 그는 어느 도시에서 목사의 보조로 일했는데, 목사가 그를 해고했다. 그 선임 목사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 청년에게 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질투하고 두려워하는 듯했다.

1년 후 해고된 목사는 주님께서 그가 도시 반대편에 교회를 시작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고, 그가 떠난 교회의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합류하기 위해 왔다. 그는 압살롬처럼 행동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분명히 이전 지도자에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른 교회의 무관심에 대응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인도로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압살롬과 다윗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압살롬은 지도자에게 화가 나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울에게 신실하라고 격려했다. 압살롬은 사람들을 데리고 갔고 다윗은 홀로 남겨졌다.

“당신은 교회를 홀로 두었나?” 내가 그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오거나 당신을 지지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했는가?”

“저는 홀로 남겨졌고 사람들을 제게로 끌어들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괜찮아. 당신은 다윗처럼 행동했다. 당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전 목사에게 화가 나지 않도록 하고, 화가 난다면 그들을 자유와 치유로 인도하라.”

이 사람의 교회는 이제 성장하고 있다. 내가 그에 대해 가장 감사하게 여긴 점은 그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경건한 조언에 복종했다. 그에게는 자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길에 복종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성령께서 용서하지 못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더 오래 숨길수록 더 강해지고 당신의 마음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라. 어떻게?

“너희는 모든 냉소와, 격노와, 분노와, 소리 지르는 것과, 비방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라. 그렇게 해서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부드러운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때문에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에베소서 4:31, 32)

 

당신은 가장 도전적인 공격, 즉 당신이 훈련받지 못한 공격을 통해 더욱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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