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14 목표: 화해

Hernhut 2024. 8. 14. 07:22

 

 

 

 

“너희는 옛 사람들이,

‘너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까닭 없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내가 그로 하여금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하겠고,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라가’ 라고 말하는 자는,

내가 그로 하여금 공회의 위험에 처하게 하겠으며, 누구든지,

‘너 어리석은 자야.’하고 말하는 자는,

네가 그로 하여금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하게 하겠다.

그러므로 네가 네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오다가,

네 형제가 너를 대적할 어떤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네가 거기서 기억하면,

네 예물을 거기에,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려라.”

(마태복음 5:21–24)

 

예수님은 “옛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느니라...”라고 말씀으로 시작하셨다. 그런 다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메시지의 이 부분 전체에서 이 비교를 계속하신다. 먼저 그분은 우리의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법을 인용하신다. 그런 다음 그분은 그것을 마음에 가져와서 그 성취를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 살인자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또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이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당신의 실제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 설교의 이 부분에서 범죄의 결과를 명확하게 묘사하신다. 그는 분노나 쓰라린 모욕을 참는 것의 심각성을 예시한다. 누군가가 이유 없이 형제에게 화를 내면 그는 심판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 분노가 열매를 맺고 형제를 “라카!”라고 부르면 그는 의회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라카라는 단어는 “머리가 비어 있는” 또는 바보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용된 비난의 용어였다. 그 분노가 형제를 바보라고 부를 정도에 이르면, 그는 지옥에 갈 위험에 처하게 된다. 바보라는 단어는 경건하지 않다는 뜻이다. 바보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시편 14:1) 그 당시 형제를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심각한 비난이었다. 그들이 품은 분노가 증오로 바뀌지 않는 한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그것은 형제에게 “지옥에 가라”고 말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말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노를 다루지 않으면 증오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다루지 않은 증오는 그들을 지옥에 빠뜨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그들에게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를 찾아가 화해를 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든 형제를 위해서든 화해를 그렇게 시급하게 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형제를 위해 가야 한다. 우리가 그를 불쾌함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촉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에게 화를 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손을 내밀어 회복시키려고 하지 않고 화를 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이 넘어지는 형제를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불쾌감을 주는 시나리오는 무한하다.

어쩌면 우리가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은 우리가 그를 대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부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반면에 그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부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우리가 한 말은 다양한 의사소통 채널을 통해 처리된 후에 심하게 왜곡되었을 수 있다. 우리의 의도는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었지만, 우리의 말과 행동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종종 우리는 자신의 의도로 자신을 판단하고 다른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동으로 판단한다. 완전히 다른 것을 전달하면서 한 가지를 의도할 수 있다. 때때로 우리의 진정한 동기는 우리에게도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우리는 그것이 순수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걸러낼 때 우리는 다르게 본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죄를 지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화가 났거나 압박을 받았고, 그는 그 대가를 치렀다. 아니면 그 사람이 끊임없이 고의로 우리에게 화를 냈고, 우리는 그에 따라 대응했을 수도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든, 이 기분 나쁜 사람의 이해는 어두워지고, 그는 가정, 소문, 외모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리고, 우리의 진정한 동기를 알아챘다고 믿더라도 자신을 속였다. 정확한 정보 없이 어떻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가 온 마음으로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믿는다는 사실에 민감해야 한다. 그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느끼든, 우리는 겸손하게 사과할 의향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잘못이 아니더라도 화해하라고 권고하신다.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걷는 데 성숙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첫걸음을 내딛는 것은 종종 상처받은 사람에게 더 힘들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다.

 

기분 나쁘게 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함

 

사도바울은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을 이루는 일과, 서로를 세워주는 일들을 추구하자.”(로마서 14:19)

이것은 우리가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좌절하는 태도로 가면 평화를 증진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어려움을 줄 뿐이다. 우리는 자존심을 희생하고 겸손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화해를 보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상처 입혔거나 나에게 화가 난 사람들에게 접근했고 그들은 나에게 화를 냈다. 나는 이기적이고, 사려 깊지 않고, 거만하고, 무례하고, 가혹하다는 말을 들었다.

내 자연스러운 반응은 “아니, 그렇지 않다.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를 변호하면 그들의 공격에 불을 지필 뿐이다. 이것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권리”를 위해 일어서는 것은 결코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대신 나는 그들이 말해야 할 말을 할 때까지 듣고 입을 다물고 있는 법을 배웠다. 동의하지 않으면 그들이 말한 것을 존중하고 내 태도와 의도를 살펴볼 것이라고 알린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내가 그들을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다른 때는 그들이 나를 정확하게 평가한다. 나는 “당신 말이 맞아. 용서해 줘.”라고 인정한다.

다시 한번, 그것은 단순히 화해를 촉진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신 이유일 것이다.

“네가 네 대적과 함께 길에 있을 동안에, 속히 그와 합의하라. 그렇게 해서 언제라도 그 대적이 재판관에게 너를 넘겨주고, 재판관이 관리에게 넘겨주어, 너를 감옥에 가두지 않도록 하라. 진실로 내가 네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내가 너로 하여금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게 하겠다.”(마태복음 5:25, 26)

교만은 방어한다. 겸손은 동의하며 말한다. “당신이 옳아. 나는 이런 식으로 행동했어. 용서해 쥐.”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화평을 좋아하며, 부드럽고, 간구를 잘 들어주며, 긍휼과 선한 열매들로 가득 차 있고, 차별이 없으며, 위선이 없다.”(야고보서 3:17)

경건한 지혜는 양보할 의향이 있다. 개인적 갈등에 관해서는 완고하거나 고집이 세지 않다. 경건한 지혜에 복종하는 사람은 진실을 훼손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관점에 양보하거나 따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신을 화나게 한 사람에게 다가가기

 

이제 형제를 화나게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했으니, 형제가 우리에게 화나게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겠다.

“그뿐 아니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하면, 너는 가서 너와 그만 따로 있을 때, 그의 잘못을 그에게 일러 주어라. 그가 네 말을 받아들이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복음 18:15)

많은 사람이 이 성경 구절을 예수님이 의도한 것과 다른 태도로 적용한다. 그들이 상처를 입었다면, 그들은 복수심과 분노의 정신으로 가서 그 사람을 마주할 것이다.

그들은 이 구절을 정당화로 사용하여 자신을 상처 입힌 사람을 정죄한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에게 가라고 지시하신 이유를 전부 놓치고 있다. 그것은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화해를 위한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형제에게 그가 우리에게 얼마나 못됐는지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관계 회복을 막는 균열을 제거하기 위해 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회복시키는 방식과 유사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그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라고 말한다(로마서 5:8). 우리는 자기 보호를 내려놓고 교만함을 죽임으로써 우리를 화나게 한 사람에게 회복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우리를 용서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지만, 우리는 화해의 말씀을 받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화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니,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화해의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 자니,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간구하시는 것 같으니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하나님과 화해하라.”(고린도후서 5:18-20)

화해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공통된 근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분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화해나 구원을 원하지 않는다.

신약에서 제자들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전파했다. 하지만 왜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를 지었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들을 정죄하기 위해서인가?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이 그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7).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일까?

무엇이 사람들을 회개로 이끄나? 그 답은 로마서 2:4에서 찾을 수 있다.

“아니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당신을 회개로 이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용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지옥에 정죄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보내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써 그의 사랑을 증명하셨다. 우리가 그에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신다. 그분은 정죄하기 위해 손을 내밀지 않고 회복하기 위해, 즉 구원하기 위해 손을 내밀어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므로(에베소서 5:1), 우리에게 죄를 지은 형제에게 화해를 베풀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패턴을 정하셨다. 그에게 가서 그의 죄를 보여주라. 그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분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화해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 형제를 회개와 관계 회복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갇힌 자인 내가 간청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며,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며, 평화의 띠로 성령의 일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라.”(에베소서 4:1-3)

우리는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태도를 유지하고 사랑으로 서로의 약함을 뒷받침함으로써 이 평화의 띠를 지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의 띠가 강화된다.

나는 정죄로 나를 마주한 사람들에게 잘못했다. 그 결과 나는 화해하려는 모든 욕망을 잃었다. 사실, 나는 그들이 화해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미쳤다는 것을 내가 알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내가 잘못한 다른 사람들은 온유함으로 나에게 왔다. 그러자 나는 재빨리 내 관점을 바꾸고 용서를 구했다. 때로는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이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와서 “더 나은 친구가 되지 못하고 나를 위해 이것저것을 하지 않은 것을 용서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다음 그들이 당신을 비난한 후에 “당신은 나에게 사과해야 한다”라는 표정을 짓는다.

당신은 당황하고 혼란스럽고 상처받은 채로 서 있다. 그들은 당신의 관계를 화해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협하고 통제하려고 온 것이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어떻게 반응하든 마음으로부터 그를 용서하기로 하기 전까지는 우리를 화나게 한 형제에게 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없애야 한다. 그에게 다가가기 전에 그에게 적의를 품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반응하여 그를 상처입히고, 그를 치유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과 올바른 태도를 보이고 화해하려고 하지만 그 사람이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그가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이 확증되게 하라. 그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아니하면 교회에 말하라. 그러나 그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하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태복음 18:16, 17)

이러한 각 진행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화해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계속 노력하라”고 말씀하셨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모든 단계에 연루된다는 점에 유의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가기 전에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얼마나 잦은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 이야기를 하면서 정당하다고 느낀다. 그것은 우리의 대의를 강화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얼마나 심하게 대우받았는지에 동의할 때 우리를 위로한다. 이런 유형의 행동에는 이기심만 있다.

 

결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동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때, 상대방이 우리와 화해하지 않기로 선택하더라도 우리는 자유로울 것이다. 다음 성경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상황에 사용할 수 있다.

“가능하다면, 당신에게 달린 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라.”(로마서 12:18)

그는 “가능하다면”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평화롭게 지내기를 거부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또는 화해를 위한 조건이 주님과의 관계를 훼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어느 경우든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 당신에게 달린 한”이라고 말한 것을 유의하라. 우리는 진리에 신실한 한, 상대방과 화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관계를 너무 일찍 포기한다.

친구가 매우 답답한 상황에서 물러나지 말라고 조언했던 때를 결코 잊지 못한다. “형제, 물러나는 데에는 성경적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기 전에 기도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이 상황에 하나님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지 확인해.”

그런 다음 그는 “어느 날 돌아보며 이 관계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지 자문해 보면 후회하게 될 거야. 다른 방법이 없고 진실을 타협하지 않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아는 게 낫지.”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조언에 매우 감사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임을 깨달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화평을 이루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임이니라.”(마태복음 5:9)

그분은 “화평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평화를 지키는 자는 진실을 타협할 위험이 있어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대립을 피한다. 하지만 그가 유지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오래가지 못할 민감하고 피상적인 평화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사랑으로 나아가 진실을 가져와 화해가 지속되도록 한다. 그는 인위적이고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그는 개방성, 진실, 사랑을 원한다. 그는 정치적 미소로 불쾌함을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는 실패할 수 없는 대담한 사랑으로 화해한다.

하나님은 인류와 이런 식으로 사신다. 그분은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분은 관계를 위해 진실을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피상적인 조건이 아닌 진정한 헌신으로 화해를 추구한다. 이것은 어떤 악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유대감을 발전시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다.

결론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것은 결코 실패하지 않고,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쉽게 화내지 않는다(고린도전서 13:5).

사도 바울은 사랑이 모든 종류의 죄를 이길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분별력으로 더욱더 더욱 풍성해져서 여러분이 훌륭한 것들을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날까지 진실하고 허물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의의 열매로 충만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빌립보서 1:9-11)

하나님의 사랑은 허물이라는 미끼에 걸린 함정에서 벗어나는 열쇠다. 이것은 풍성한 사랑, 끊임없이 자라나고 우리 마음 속에서 강화되는 사랑이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피상적인 사랑, 말은 하지만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랑에 속아 있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줄 사랑은 사심 없이 생명을 내어놓는다. 심지어 적의 유익을 위해서도 말이다. 이런 종류의 사랑 안에서 걸을 때, 우리는 사탄의 미끼에 걸려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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