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 소망 안에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여
항상 실족하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의식을 갖도록,
스스로 단련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4:16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바울은 이를 운동에 비유한다. 우리가 몸을 운동하면 부상 위험이 줄어든다. 한 도시에 있는 동안 사진을 찍기 위해 담벼락을 올랐다. 사진을 찍었을 때 무릎 근육이 삐어서 나흘 동안 걸을 수 없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물리 치료사가 말했다.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부상 위험이 커요.”
걸을 수 있게 되자 다른 전문가가 “무릎 근육을 적절한 모양과 상태로 되돌리려면 이런 운동을 해야 합니다.”라고 지시했다. 무릎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 몇 달이 걸렸다.
사도행전 24:16에서 운동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아스케오askeo다. 바인 익스포시토리 사전에서는 운동을 “고통을 감수하고, 노력하며, 훈련이나 규율을 통해 운동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지만 용서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는 마음을 훈련하여 공격에 대처할 수 있는 상태가 되게 했다. 따라서 부상이나 영구적인 손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그 도시에서 그 벽을 오르고도 몸이 건강했기 때문에 다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단련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조건화된다. 우리의 성숙도는 부상 없이 얼마나 잘 범죄를 처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어떤 범죄는 우리가 훈련받은 범죄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추가적인 부담은 상처나 부상을 초래할 수 있으며, 그 후에 우리는 영적으로 단련하여 다시 자유롭게 치유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는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이러한 극단적이고 강렬한 범죄에 대해 다룰 것이다.
내 삶에서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했다. 내가 체험한 이 극단적인 범죄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1년 반 동안 심화된 그 사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중 하나였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당신은 다치지 않았어?” 그들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할 거야? 그냥 물러서서 그것을 감수할 거야?”
“괜찮아.” 내가 말했다. “나는 영향을 받지 않았어. 나는 내 삶에 대한 부름을 계속할 거야”
하지만 내 대답은 자존심에 불과했다. 나는 극도로 상처를 받았지만, 스스로도 그것을 부인했다. 나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몇 시간을 보냈다. 나는 충격에 빠져 무감각했고 놀랐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억누르고 실제로는 약하고 심하게 다쳤을 때 강한 척했다.
몇 달이 지났다. 모든 것이 말라 보였고, 사역은 싱겁고, 내 기도실은 외로웠고, 나는 괴로움을 겪었다. 나는 매일 악마와 싸웠다. 나는 모든 저항이 내 삶에 대한 부름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용서하지 않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었다.
나는 이 악마 주변에 있을 때마다 영적으로 구타당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코 잊지 못할 아침이 왔다. 나는 베란다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주님, 제가 다쳤나요?” 제가 물었다.
이 말이 내 입술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내 혼 깊은 곳에서 외침을 들었다. “응 그래. 다쳤어!”
하나님은 내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싶어 하셨다.
“하나님, 이 상처와 불쾌함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세요.” 내가 간청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내게 원하신 곳이었다. 나 자신의 끝이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혼의 힘으로 일을 하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키지 못한다. 대신, 우리는 넘어지기 쉽다.
치유와 자유를 향한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종종 교만함은 우리가 상처받고 기분 나쁘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나의 진짜 상태를 인정한 후, 나는 주님을 찾았고 그분의 시정에 마음을 열었다.
나는 주님께서 내가 며칠 동안 금식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느꼈다.
금식은 나를 그분의 영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위치에 두었고 다른 혜택도 제공할 것이다.
“내가 원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냐? 곧 사악함으로 결박한 결박을 풀어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에게 자유롭게 가게 하고, 너희가 모든 멍에 하나하나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6)
나는 그 사악함의 결박이 끊어지고 압제에서 자유로워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나를 화나게 한 그 사람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교회 뒤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주님, 저는 그를 용서합니다. 그가 한 모든 일에서 그를 풀어줍니다.” 나는 즉시 짐이 내려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를 용서했다.
얼마나 큰 안도감이 밀려왔는가!
하지만 이것은 회복으로 가는 길의 시작일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용서했지만, 상처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취약했고 다시 상처받을 수 있었다. 마치 신체적 부상에서 회복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운동을 해야 했고, 심장, 마음, 감정을 강화해서 앞으로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해야 했다.
재발은 어떨까?
몇 달이 지났다. 가끔 용서하기 전에 가졌던 것과 같은 생각과 싸워야 했다.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은 사람이 나에게 불평을 하거나, 그 사람을 보거나 그의 이름을 들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알아차리자마자 거부하고 내던졌다(고린도후서 10:5).
이것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나의 운동 또는 노력이었다. 마침내 나는 주님께 이런 생각들이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로 다시 끌어들이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물었다. 나는 그분이 나에게 더 높은 수준의 자유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남은 인생을 불쾌함을 멀리하고 살고 싶지 않았다. 주님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지시하셨고, 그분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셨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고, 너희를 악의적으로 이용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그래서 나는 기도했다. 처음에는 열정의 기색도 없이 건조하고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의무감에 나는 “주님, 그를 축복해 주세요. 그에게 좋은 하루를 주세요. 그가 하는 모든 일을 도와주세요. 예수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몇 주 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주님께서 시편 35편을 내게 각인시키셨다. 나는 시편 35편에 무엇이 있는지 펴서 읽기 시작했다. 반쯤 읽었을 때, 나는 내 상황을 보았다.
“맹렬한 거짓 증인들이 일어나, 제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제 책임으로 떠넘겼다. 그들이 제게 선을 악으로 갚아 제 혼을 상하게 하였습니다.”(시편 35:11, 12)
나는 다윗과 공감할 수 있었다. 내 생각에 그 사람과 그의 동료들 중 일부는 선을 악으로 갚았다. 내 혼은 분명히 슬픔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편을 통해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겪은 싸움을 지적하셨다. 한 구절을 읽고 나는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이 뛰어올랐다.
“그러나 저의 경우에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제가 굵은 베로 제 옷을 삼았습니다. 또 제가 금식하며, 제 혼을 겸허히 낮추었으므로, 제 기도가 제 자신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마치 제 친구나 형제인 것처럼 제가 행동하였으며, 제가 크게 몸을 굽히고 애곡하기를, 자기 어머니로 인해 애곡하는 자같이 하였습니다.”(시편 35:13, 14)
다윗은 이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가 그럴 만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악으로 그를 공격했다. 그러자 내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다윗의 반응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옳은 일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마치 그들이 자신의 가까운 형제인 것처럼, 혹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긴 사람처럼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내가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그를 위해 기도하라!”
이제 내 기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고 그에게 좋은 하루를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으로 주입되었다. 나는 “주님, 그에게 더 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 주십시오. 당신의 임재로 그를 축복해 주십시오. 그가 당신을 더 친밀하게 알게 해주십시오. 그가 당신을 기쁘게 여기고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나는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기를 바라는 것을 기도했다.
그를 위해 열정적으로 기도한 지 한 달 만에 나는 큰 소리로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 그것은 내 영 깊은 곳에서 나오는 외침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내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치유가 완전히 완료되었다고 믿었다.
대치 속에서의 치유
몇 주가 더 지나고 나는 그를 다시 보았다. 불편한 감각이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나는 여전히 비판하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그에게 가야 해.” 나의 동료가 나를 격려했다.
“아니야,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그에게 확신시켰다. “나는 지금 치유되었어.”
하지만 나는 성령께서 내가 방금 한 말을 증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내가 그에게 가야 할지 물었다.
그분은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남자와 약속을 잡고 선물을 가져왔다.
나는 겸손하게 처신하고, 내 잘못된 태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우리는 화해했고, 용서와 치유가 내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치유되고 강해진 채로 그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나는 더 이상 고통과 싸울 필요가 없었고, 그를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튼튼해졌고, 우리는 다시는 문제를 겪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서로를 매우 지지한다.
나는 동료에게 “그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라고 말했다. “내 눈에는 그가 잘못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결점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가 완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상처를 받았을 때는 그를 사랑하기 힘들었다. 내가 가진 모든 믿음이 필요했다. 이제 이 회복 과정을 거쳐 치유되었으므로, 나는 어떤 결점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강도로 그를 사랑한다. 성숙한 사랑이다.”
이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희 자신들 가운데서 뜨거운 사랑을 품어라. 왜냐하면 사랑은 수많은 죄들을 덮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 4:8)
우리 눈에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허니문 사랑이다. 특히 우리가 그들의 희생자였을 때 그들의 잘못을 볼 수 있을 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성숙시키고 내 마음을 강화했다.
그 이후로 비슷한 사례가 있었지만, 불쾌함을 풀어주는 데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 마음이 불쾌함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후로 나는 그 남자의 사무실에서 나와서 치유될 때까지 몇 달이 지났다. 그것은 내 마음이 훈련되고 강화되는 훈련 기간이었다. 그 몇 달 동안 나는 때때로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나는 내가 더 나빠졌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회복으로 가는 확실한 길에 있었다. 주님의 영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나를 인도하셨다. 그것은 내가 성숙해지는 과정의 일부였다. 나는 그 체험을 바꾸고 싶지 않으며 그것이 내 삶에 가져다준 성장에 감사한다.
고난을 통해 성숙해지다
우리는 쉬운 때가 아니라 힘든 시기에 성장한다. 주님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힘든 시기는 항상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지만 직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 안에서 완전해지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들로부터 도망치기로 선택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성장을 심각하게 방해할 것이다.
당신이 다른 장애물을 극복함에 따라, 당신은 더 강해지고 더 자비로워질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고난을 겪고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 범죄에서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복은 당신의 선택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입었지만 결코 회복하지 못한다. 이것이 아무리 잔인하게 들리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겪은 일로 순종을 배우셨다. 베드로는 자신이 겪은 일로 순종을 배웠다. 바울은 자신이 겪은 일로 순종을 배웠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배웠는가? 아니면 당신은 냉정하고, 차갑고, 비통하고, 원망이 많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순종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 “오리 등에서 흘러내린 물”처럼 사라지지 않는 범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당신은 그것들을 극복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신은 성장하고 성숙해질 것이다.
성숙은 쉽게 오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누구나 그것을 얻을 것이다.
그들이 직면한 저항 때문에 이 수준의 삶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저항이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행로가 경건하지 않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공중 권세의 왕자”(에베소서 2:2)에게 지배받고 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성숙함에 들어가려면 이기심의 흐름에 맞서서 오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세운 세 도시로 돌아갔다.
그의 목적은 제자들의 혼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들을 강화했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들을 격려했다.
“... 믿음 안에 계속 머물도록 권고하며, ‘우리는 많은 환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사도행전 14:22)
그는 그들에게 편안한 삶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기준에 따른 성공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기쁨으로 길을 마치려면 환난이라고 부르는 많은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보여주었다.
만약 당신이 강물에서 흐름에 맞서 노를 저으면, 강의 흐름에 맞서 전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를 저어야 할 것이다. 노를 젓는 것을 멈추고 긴장을 풀면 결국 흐름에 따라 흘러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면 많은 환난을 겪게 될 것이다. 모든 시련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줄 것이다. 세상이 하는 것처럼 자신을 돌볼 것인가, 아니면 자기 부인의 삶을 살 것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삶을 잃을 때, 우리는 그분의 삶을 찾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투쟁이 아닌 최종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우라. 베드로는 이것을 아주 잘 표현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험하는 불 같은 시련을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만큼 기뻐하라. 이는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너희가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베드로전서 4:12, 13)
그가 고난의 정도를 기쁨의 정도와 비교한 것을 유의하라. 어떻게 그 정도로 기뻐할 수 있는가?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 여러분은 그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이 영광은 여러분이 그분이 여러분 안에서 자신의 성품을 완전하게 하도록 허락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그러니 범죄를 보지 마라. 다가올 영광을 보라.
할렐루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넘어진 형제를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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