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의 시험의 주제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곧 그분이 시험하신 사람들의 다른 많은 성경적 예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때때로 그분이 고쳐주신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나는 왜 어떤 사람들은 만성적으로 질병에 시달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지 누구 못지않게 당황스럽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많은 격려를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사람들의 마음 든든한 치유의 약속과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병이 나기 전에 믿음의 시험을 받은 병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피할 수 없다.
왜 예수님께서 누군가의 믿음을 시험하시겠는가? 진정한 믿음에는 위조품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믿음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 진정한 믿음인지 확인하려면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믿음이 참되다는 것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믿음을 분명하게 시험하셨을 때의 몇 가지 사건들을 생각해 보라.
중풍병 친구를 지붕으로 내린 네 남자의 잘 알려진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그들의 굳은 믿음은 고무적이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그 네 사람은 마비된 친구를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집에 데려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집은 분명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막지는 못했다. 그들은 지붕을 뜯고 안으로 들어갔다(마가복음 2:4). 그것은 평평했고 아마도 외부 계단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보자. 그들이 파헤친 그 집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그 중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지붕을 뜯는 것에 화가 났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수리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친구가 치유되면 집주인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굳어진 점토 벽을 뜯어내고 그 점토를 지탱하는 모든 것을 자르기 시작했다. 집 안의 광경을 상상할 수 있는가? 굳어진 흙 지붕에 구멍을 파는 것은 깨끗하고 조용하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바위가 쿵쿵거리거나 일부 굴착 도구의 긁는 소리가 집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을 상상해 보라. 마른 점토의 작은 덩어리가 천장에서 떨어져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것을 상상해 보라. 확실히 집안의 공기는 먼지로 막혔고, 아마도 사람들이 기침하고 눈에서 그것을 닦아낼 정도였을 것이다. 확실히 소란이 있었고, 확실히 누군가가 지붕을 파괴하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도 그들은 듣지 않았다.
마침내 네 친구는 작은 구멍을 만들었고, 공기 중의 모든 먼지 입자로 인해 천장에서 바닥까지 빛의 줄기가 쉽게 보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그들은 친구의 들것에 맞게 구멍을 확대하기 위해 구멍 가장자리를 찢기 시작했다. 이는 더 많은 소음과 먼지를 수반할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기침과 눈의 먼지를 닦아내는 것을 수반한다. 그 네 사람이 예수님이 목표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구멍 가장자리를 들여다봤을 때, 나는 그들이 그들을 다시 쳐다보는 상당히 적대적인 군중을 발견했겠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그들은 친구를 방으로 내리면 집회 전체를 훨씬 더 방해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반응
예수님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성경은 말하지 않으니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소란 중에 계속 설교하셨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우리가 아는 한 가지는 그분이 하지 않았다. 그분은 사람들이 천장에 큰 구멍을 내는 것을 막지 않았다.
복음서의 어떤 기록에도 예수님께서 누군가에게 그 사람들이 구멍을 내는 것을 막으라고 말씀하셨다고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 그분의 음성이 지붕으로 다다를 만큼 구멍이 충분히 커지자, 그분께서 친히 그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셨다는 것이다. 성경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한다(마가복음 2:5). 이것이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전부다. 그분은 그들의 믿음을 지키시는 것으로 반응하셨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이 지붕을 뜯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까? 왜냐하면 예수님과 그들의 친구 사이를 막고 있던 그 담이 그들의 믿음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 지붕에서 뜯어진 모든 진흙 조각은 그 끈질긴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증거였다.
만일 악마가 그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았다면, 그 사람들의 마음은 그들이 파헤칠 때 의심과 낙담으로 공격당했다. “아래에 있는 방에서 사람들이 모두 기침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미쳤나? 친구가 치유되지 않으면 어쩔 건데? 그럼 이번 스턴트는 정말 바보와 같아질 거야!”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믿음은 인내했다.
나는 예수님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그분의 얼굴에 점점 더 커지는 미소로 천장에 있는 그 구멍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상상하고 싶다. 그분이 그 일로 화를 내셨다는 기록은 없다.
마침내 네 사람은 마비된 친구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 앞에 어렵게 밧줄로 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있다면 그분이 그를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만일 그들이 친구를 그 집에 데리고 갔는데 들어가는 것을 찾지 못하고 “만일 우리 친구가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께로 갈 길을 열어 주셨을 텐데”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만약 그들이 그러한 추론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의 친구는 치유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수님은 마비된 사람이 치유되기를 바라신다.
결국, 힘든 시험을 통과하며 버텨준 것에 모두 기뻐했을 것이다.
눈먼 바디매오
그는 치유하려는 그의 끈기에 비추어 “믿는 바디매오”라고 불려야 한다.
바디매오는 여리고 밖 길에 앉아 매일 구걸하고 있었다. 그는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생각해 보니, 백성을 인도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고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즉시 “울부짖으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마가복음 10:47).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멈추지 않으셨고, 어떤 주의도 기울이지 않으셨다. 아마도 예수님은 처음에 그의 말을 듣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디매오가 너무 소란을 피워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엄하게 말했기 때문에, 예수님 그의 말을 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마가복음 10:48).
예수님께서 그의 말을 들으셨다면 왜 즉시 응답하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이 고쳐주시려 하지 않아서, 예수님이 결국 고쳐주셨기 때문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 사람의 믿음이 증명되어야 했고, 증명되려면 시험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바디매오는 낙담하고 그만둘 기회가 많았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고 말한다. 엄하게 조용히 하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책망은 예수님을 위해 외치는 것을 그만둘 정도로 그들을 낙담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낙담하지 않았다. 성경은 그가 계속 부르짖었다고 말한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가복음 10:48). 그는 거부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무시한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무시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시험을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끈기 있는 믿음의 보상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에게 당신께로 오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로 걸어가지 않으셨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분은 바디매오가 눈이 멀었음에도 그분께 걸어오기를 기대하셨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을 것이다. 바디매오가 정말로 시력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걸려 넘어지더라도 예수님께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성경은 바디매오가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겉옷을 버리고 뛰었다고 말한다(마가복음 10:50).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시대에 시각 장애인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을 시각 장애인으로 식별하는 망토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질 때 확실히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곧 더 이상 망토가 필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가 뛰었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것은 그가 흥분했음을 나타낸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좋은 것을 기대하고 있어서 흥분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시험이 왔다. 바디매오는 시력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믿고 그분 앞에 섰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터무니없어 보이는 질문으로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가복음 10:51). 분명히 예수님은 눈먼 사람이 보고 싶어할 것을 아셨다. 그분은 다시 한 번 바디매오 신앙을 시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진정한 믿음을 소유할 때, 당신은 항상 그들이 말하는 것을 통해 말할 수 있다.
감사하게도 바디매오는 “예수님, 제가 눈이 먼 것이 당신의 뜻임을 겸손히 받아들입니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는 “랍오니여! 시력을 되찾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마가복음 10:51).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를 치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우리는 바디매오의 치유를 기뻐할 수 있지만, 얼마나 많은 다른 병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짖고, 예수님께서 즉시 응답하지 않으시자 낙담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바디매오와 달리 방관자들의 질책에 굴복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바디매오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위해 기도한 후에 믿음으로 인내하고 인내의 시험을 통과해야 할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열 명의 끈질긴 나병환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문둥병자 열 명이 멀리서 그분께 부르짖었다. “예수님, 스승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누가복음 17:13). 그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감염되지 않도록 나병이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서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주목하시고 소리쳐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누가복음 17:14). 다시,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깨끗하게 된 문둥병자는 제사장의 심문을 받아야 했다. 제사장이 그를 깨끗하다고 선언하면 그는 사회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확실히 그들의 믿음을 시험받았다. 그들은 제사장들에게 갈 때쯤이면 그들의 나병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어야 했다.
흥미롭게도,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그 열 사람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의 심문을 받기 위해 약 80km를 여행하라고 지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누가복음 17:11). 즉,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낫기를 원하느냐? 좋다. 80km를 걸어가라!”라는 말을 남기신 것이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믿고 “가면서 나음을” 받았음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누가복음 17:14). 지체한다고 해서 거부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돌아온 나병환자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낫게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믿음은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참됨이 입증되었다.
수로보니게 여인
개인적으로 예수님께서 다루셨던 그 사람 중에서 수로보니게 여인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그녀의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5:28).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극심한 시험을 받았니다.
그녀는 한동안 예수님을 따라가며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내 딸이 심하게 마귀에게 사로잡혔어요”라고 말했다(마태복음 15:22).
예수님은 그녀의 말을 들으셨지만,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셨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마태복음 15:23).
분명히 그녀는 계속 예수님을 따르며 소리쳤다. 왜냐하면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에게 그녀를 보내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예수님께 말했다(마태복음 15:23). 그러나 그녀는 낙담하지 않았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집으로 피신하셨는데, 이 여자가 집에 들어와서 예수님 앞에 절하며 간절히 부르짖었다.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마태복음 15:25; 마가복음 7:24, 25)
그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잔인해 보인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5:26).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이 여자가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보다 믿음이 더 큰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낙담시키려고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을 낙담시키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내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무시하시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녀를 무시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분은 그들의 기도를 무시하신다. 그들이 그분을 주장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믿고 회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악된 생활 방식으로 그들은 하루 종일 하나님께 “나는 당신을 미워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그분께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요청한다!
신약성경은 “주님의 눈은 의로운 자들을 향하시고 그분의 귀는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대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베드로전서 3:12).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귀가 열려 있지 않으며,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처음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부르짖음을 무시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녀가 실제로 그녀의 식탁에서 부스러기를 요청하는 개임을 인정하자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죄인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통과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여인이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녀의 딸이 즉시 치유되었다는 내용을 읽었다 (마태복음 15:28). 그녀는 예수님의 테스트를 통과했다.
물론 귀족의 아들, 백부장의 하인,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 야이로의 딸의 치유와 같은 다른 유사한 치유 이야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이야기의 모든 주요 등장인물은 반대되는 의심과 낙담에도 불구하고 믿어야 했다. 모든 사람이 믿음을 시험받았고, 모든 사람이 시험을 통과하여 믿는 것을 받았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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