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험

3. 한밤중의 찬양

Hernhut 2024. 7. 5. 17:21

 

 

“그뿐 아니라, 형제들아, 나는 이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 곧 우리 모든 조상이 구름 아래에 있었고, 모두 바다를 지나갔으며, 그리고 모두가 구름 안으로 또한 바다 안으로, 모세에 의하여 침례를 받았고, 모두가 같은 영적 음식을 먹었으며,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쓰러진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매우 기뻐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본보기들이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역시 욕망한 것 같이, 우리가 악한 것들을 욕망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또한 그들 중의 어떤 자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라고 기록된 것과 같다. 또한 우리는 간음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이 간음하여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어 쓰러졌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이 또한 시험하여, 뱀들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너희는 불평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이 또한 불평하여, 파멸시키는 자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모든 일들은 그들에게 선례들로 일어났으며,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린도전서 10:1-11)

 

논쟁할 일이 아니다. 바울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들의 불쌍한 모범을 따르지 않도록 우리의 유익을 위해 보존되었다. “광야의 회중”(사도행전 7:38)들이 받았던 시험마다 시험이 실패하였고, 그들이 결국 의심에 찬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절망적인 자로 내주셨다.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히브리서서 3:19). 참으로 비극적인 이야기다.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군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갖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은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 아닌 결론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기업을 소유했는지는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항상 자기 명철을 의지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40년 동안 황야를 방황했으며 그곳에서 대다수는 결국 죽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새로운 세대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예를 들어 여리고에서 분명히 테스트받았다.

 

당신과 나는 확실히 이스라엘 백성의 첫 번째 세대의 가련한 모범을 따르고 싶지 않지만, 불행히도 우리 중 너무 많은 사람이 그렇다. 우리 성경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하셨는데도 우리는 늘 당면한 문제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한다, 하나님과의 모든 합력은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로마서 8:28).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은 흔들린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또한 우리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만다.” 결코 우리 삶에 대한 주님의 최대한의 축복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리고 결코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의 축복을 베푸는 봉사자가 되지 마라.

 

사도 야고보를 통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훈계함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모든 기쁨을 생각하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 줄을 앎이라. 그리고 인내가 완벽한 결과를 얻게 하여 너희가 완벽하고 완전하며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하라”(야고보서 1:2-4).

 

이 구절의 한 번역에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들을 친구로 환영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는가? 시련이 우리 문을 두드리면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안녕하세요. 주님! 당신은 제가 하나님의 약속이 진실임을 증명할 기회로 오셨고, 당신이 떠나고 나면, 저는 당신을 곁에 둔 것에 대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나눌 좋은 간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완벽하고 완전하며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것에 더욱 가까워질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려움은 우리 모두를 괴롭히지만, 믿음의 보상을 받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뿐이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물어보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사막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자신의 상황에서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본질적으로 광야에서 직면했던 모든 시험에 실패했고, 가나안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그 땅에 거인있다는 것을 들었고, 그들은 메뚜기처럼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라난 가나안 사람 몇 사람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크기로 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가나안 사람들은 개미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된 관점을 받아들였으므로 결국 모두 광야에서 멸망하게 되었다. 모두, 즉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상황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고 믿었던 유일한 두 사람을 제외하고 황야에 남아 그곳에서 떠돌아다니다 죽었다. 결국 그 둘만이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쓰여진 교훈은 너무나 명백해서 오직 신학자만이 그것을 놓칠 수 있다!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 의심은 그렇지 않다.

 

그런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광야에 머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한다.

 

때로 우리의 상황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우리는 소수에 속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3백만 명이 넘는 다른 사람 중 유일한 두 명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러나, 나는 뼈가 180cm 아래에 있는 대다수보다 우유와 꿀이 흐르는 땅에 살고 있는 소수로 분류되고 싶다!

 

불 아래 있는 바울과 실라

 

원망과 불평의 기도는 호의적인 응답을 거의 받지 못하지만,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믿음에 응답하시고, 믿음은 기쁨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원칙의 훌륭한 예는 사도행전 16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다시 하겠다.

 

바울과 실라는 어느 날 밤 바울이 환상을 받았을 때 두 번째 선교 여행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결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환상에서 그는 마케도니아에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는 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우리를 도와라라고 말했다(사도행전 16:9). 그래서 그와 실라는 마케도니아로 항해를 떠났고,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리디아라는 여자가 구원받았고, 한 어린 소녀가 악마에게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그러자 문제가 시작되었다. 바울과 실라는 지역 로마 당국에 의해 막대기로 구타당한 후 곧 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제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보자.

 

첫 번째 질문: 바울과 실라를 빌립보로 인도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답: 하나님 자신이었다.

 

두 번째 질문: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힐 것을 미리 아셨는가?

 

답: 물론 그러셨다. 그러므로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의 주권 안에 안식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감옥에 갇히면 조금 다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이다.

 

세 번째 질문: 바울과 실라는 그들의 역경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답: 한밤중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질문: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답: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죄수마다 쇠사슬이 풀렸다. 구원받지 못한 간수는 거의 자살할 뻔했지만, 온 가족과 함께 영광스럽게 구원받았다. 몇 시간 후, 새로 태어난 간수는 자신의 집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영광을 받으소서!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바울과 실라였다면 다르게 행동했을 수도 있고 이야기가 다른 결말을 지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렵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신, 우리는 간수에게 룸의 온도와 음식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을 것이다. 간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누구와도 다르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 왜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는지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옥에서 구출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는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핍박에서 항상 건져내리리라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의 중심에 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좋은 모범을 따라야 한다. 바울이 유명한 말을 쓴 것은 투옥되어 있는 동안이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내가 말하리라, 기뻐하라!”(빌립보서 4:4).

 

이기는 믿음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던 한 남자의 마지막 예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는 성은 없었지만, 이름은 다윗이었고, 힘든 시기에 수많은 시편을 저술했다. 우리는 시련 중에 그에게 있었던 믿음의 많은 예를 살펴볼 수 있지만 시편 3편만 조사해 보라.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목숨이 걸려있을 때 이 글을 썼다.

 

“주여, 저를 괴롭히는 자들이 어찌 그렇게 많이 늘어났습니까! 저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제 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구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합니다. 셀라. 그러나, 오 주여, 주는 저를 지켜주시는 방패이시며, 저를 영화롭게 하시는 영광이시며, 저의 머리를 들어올리시는 분이십니다.”(시편 3:1-3).

 

그래서 거기에 문제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라고 한다. 다윗이 더 잘 알고 있다는 말로 기도를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 외에 고려해야 할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십시오.” 그것은 그를 잡으러 나온 사람들이 그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의 영광, 그리고 그의 머리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그 목소리로 주님께 부르짖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그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라. 그렇다. 그분은 그분의 거룩한 산에서 다윗의 소리를 들었다. 누워서 잤고 밤새도록 깨어 초조해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는 깨어났다. 주께서 그를 붙드셨다. 하나님이 그를 지키시므로 그가 자는 동안 그의 대적들이 그를 얻지 못하였다. 그는 그를 반대하는 만 명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편이시라면 왜 대적 모두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일어나소서, 오 주님,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그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셨다. 그의 믿음은 강한데 이는 주께서 전에 그를 그의 원수들에게서 건져내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께서 악인의 이를 깨뜨리셨다. 구원은 주님께 있다. 그리고 그분의 백성에게 축복이 있기를 빈다(시편 3:3-8).

 

시편 3편에는 하나님, 저는 당신이 주권자이심을 알고 있으므로 이 고난을 당신의 손에서 받은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왜 반항적인 십대가 저를 죽이고 저의 왕좌를 차지하기를 원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길은 제 길보다 높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겸손히 이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라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믿는 자가 되기보다 운명론자가 되기가 항상 더 쉽다.

 

다윗은 운명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했다. 사무엘하 15장에서 그가 직면했던 재판의 세부 사항을 읽는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듯이 구원받았다.

 

다윗이 누렸던 그런 결과를 원한다면, 그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잊지 마라. 의심하는 자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믿는 자들은 축복을 받는다. 의심은 삐죽거리지만 믿음은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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