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험

2. 광야에서

Hernhut 2024. 7. 4. 19:04

 

 

 

하나님이 시험하신 두 가지 예표적인 예(아담과 아브라함의 시험)를 보았다. 우리는 그 시험 뒤에 숨은 신성한 목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하신다. 아담과 아브라함의 시험만이 그 진리를 보여주는 유일한 예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히스기야 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그를 시험하사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 아시려고 그를 내버려 두셨느니라”(역대하 32:31).

 

이와 같은 성경 구절은 종종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들의 눈썹을 치켜세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알려고 하시는가?”고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말 간단하다. 하나님께서는 알아야 할 모든 것을 확실히 알고 계신다. 그러나 자유 도덕 행위자가 시험을 받기 전까지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테스트를 받고 테스트에 반응한 후에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확실히 영원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내다보시고 자유 도덕 행위자들이 그들의 시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실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 도덕 행위자들이 어느 시점에 시험을 받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시간이 지나면서 앞을 내다보실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시험의 결과를 미리 아시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느 시점에 시험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시험 후에 (아브라함의 시험 후에 하셨던 것처럼) “이제 내가 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다. 시험은 결과를 드러내며, 일단 결과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실 일이 있다. 시험과 결과가 없다면 하나님은 알 것도, 예지하실 것도 없다. 사건의 예지는 예지할 ​​사건을 전제로 한다!

 

이스라엘의 시험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성경 인물들의 몇 가지 예를 더 살펴보자.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몇 가지 시험에 직면하면서 약속의 땅을 향해 여행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여행한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우리 자신의 영적 여정을 상징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멸망시키려는 천사에게서 구원받았다(출애굽기 12:7-13).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약에서 “우리의 유월절”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언급된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았다(고린도전서 5:7; 요한복음 1:29).

 

우리가 죄와 사탄과 영적 사망과 어두운 나라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와 악한 왕국에서 구원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이것이 우리의 침례로 가르친다(고린도전서 10:2).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건너편에 서서 해변에 밀려온 바로의 군사들의 시체를 보았을 때, 이전에 그들을 압제하던 세력이 꺾인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사탄의 능력과 권위가 무효화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광야에 있는 교회”(사도행전 7:38)와 오늘날의 교회 사이의 몇 가지 유사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신 방식을 연구함으로써 그분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배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향해 여행하는 그분의 백성들을 지금도 시험하고 계신다.

 

그분은 그들을 데려오려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목적지인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데려가시는 것을 의도하셨다. 그러나 가나안은 새 언약의 성도들에게 하늘의 왕국을 상징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하늘의 왕국에서는 싸울 전투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땅에 거인”이 없다. 따라서 가나안 땅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성숙에 이르게 되는 것을 더 잘 나타낸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마라. 때때로 간증하는 저 사랑하는 옛 성도들처럼 말이다.

 

“나는 35년 전에 구원받았습니다! 정말 좋은 날이었어요! 제가 끝까지 버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것 안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어떤 것에서 구원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선한 일 가운데 행하라(에베소서 2:10).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처럼 되어 언젠가 그분 앞에 설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가면서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가는 최적의 경로를 찾기 위해 GPS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라. 하나님 자신도 그분의 신성한 길에 따라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셨으며, 이에 대해 누구의 마음에도 의심이 없었다.

 

“그리고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셔서, 밤낮으로 가게 하셨다. 그분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을, 밤에는 불기둥을 그 백성 앞에서 치우지 않으셨다.”(출애굽기 13:21, 22)

 

또한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구체적인 길에 대해 적어도 한 가지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리고 다음 일이 일어났다. 곧 파라오가 그 백성을 가게 하였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있는 길이 가까웠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길을 통하여 인도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백성이 전쟁을 보고 혹시나 뜻을 돌이켜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출애굽기 13: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전투에서 누구와도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다. 그렇다면 병력도 부족하고, 무기도 부족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이후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적들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 있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분은 때때로 그분의 백성에 대한 확률을 높이기도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단순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블레셋 군대를 보면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이 적은 그분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과 맞서지 못하는 길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백성이 궁극적으로 약속의 땅을 소유하려면 그들의 믿음이 자라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나안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포함하여 가공할 만한 적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싸움은 믿음으로 승리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가나안을 소유하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 자신들의 칼로 그 땅을 얻어 소유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 자신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주께서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이 비추는 빛이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시편 44:3)

 

믿음을 세우는 하나님의 방법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이 돼라. 당신이 그분이고, 당신이 신앙으로 성장하고 싶은 삼백만 명의 그룹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뭘 할지 정확히 알 것이다. 당신은 그들이 당신을 신뢰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소한 어려움으로 그들을 이끌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을 문제에서 구해 주고, 당신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커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홍해 해안으로 인도하여 그들을 갇히게 하셨다. 그들은 전진하는 파라오의 군대로부터 도망할 길이 없었고, 마치 학살당할 것처럼 보였다.

 

홍해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옆에 진을 치기를 원하셨던 정확한 장소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고하여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돌아서서, 믹돌과 바다 사이의 비하히롯 앞, 바알스본 맞은편에 진을 치게 하라. 그것 앞에서 너희가 바닷가에 진을 쳐라.’”(출애굽기 14:1, 2).

 

또한 하나님께서 그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신 목적이 파라오를 미끼로 삼으셨다는 점에도 이견이 없다. 그분은 이집트 독재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혼란스럽고 광야에서 길을 잃었으며 전략적으로 공격에 취약하다고 생각하기를 원했다. 출애굽기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파라오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그들이 그 땅에서 얽혔고, 광야에 갇혔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로 하여금 그들의 뒤를 따르게 하겠다. 그리고 내가 파라오와 그의 온 군대 위에서 영예를 얻겠다. 그렇게 해서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주인 것을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대로 행했다.”(출애굽기 14:3, 4).

 

그래서 거기에 전체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조감도가 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기적을 행하고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려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어려운 상황에 빠뜨리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홍해 시험을 통해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라. 당신이 이스라엘의 처지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기적을 행하실 것을 믿고 전진하는 파라오의 군대를 보고 기뻐하겠는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곤경을 생각할 때 했던 것처럼 반응하겠는가?

 

“그리고 파라오가 가까이 왔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드니, 보라,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들의 뒤를 따라 행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주께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세에게 말했다.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데리고 나와,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이집트로부터 끌고 나와, 이같이 우리를 대하느냐? 우리가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었느냐?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겠고 말하지 않았느냐? 왜냐하면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출애굽기 14:10-12).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시험을 정확히 통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그날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을 밟게 하셨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히브리서 11:29에서처럼 어느 정도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으로 그들은 마치 마른 땅을 지나가는 것처럼 홍해를 통과했다.”

 

믿음으로 걷기

 

홍해 바닥으로 걸어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당신 양쪽에는 물의 벽이 쌓여 있고, 어떻게 든 물이 당신에게 다시 떨어지지 않고 있는가? 나는 항상 두 명의 이스라엘 사람이 그 물의 갈라짐 속을 한 줄로 걸어가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경이롭게 말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와! 그 물이 어떻게 갈라지고 있는지 아는가?” 그 뒤에 있는 다른 사람은 “모르겠어요, 친구. 그런데 좀 더 빨리 걸어가 주겠어?”라고 반응한다.

 

흥미로운 질문이 하나 있다. 왜 하나님은 홍해 위에 즉시 다리를 놓지 않고 홍해를 갈라놓으셨는가? 아니면 왜 단순히 이스라엘을 건너편으로 날려 보내지 않으셨을까? 분명 하나님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분은 그렇지 않으셨을까? 나는 그것이 그들의 믿음을 세우려는 그분의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그들이 반대편 해안으로 걸어갈 때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셨고, 그분께서 물이 그들에게 다시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체험을 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너무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조금 더 가져야 했다. 그들은 상황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야 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간의 도피할 길이 없이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으로 인도하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질문하거나 불평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기뻐하기를 원하시며, 그분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으신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히브리서 11:6).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의 증언이나 다른 어떤 것의 증언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시험과 시련이 없다면 믿음도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적은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당신은 불평하는 그리스도인인가? 빌립보서 4:4에서 당신에 대한 치료법을 찾았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내가 말하노니 기뻐하라!”

 

우리가 투덜거릴 때, 우리는 믿음의 부족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홍해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닥치도록 허락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를 대신하여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이러한 어려움은 기적을 위한 놀라운 기회이며, 그 중 하나는 우리의 영적 성장이다.

 

첫 번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연안에서 첫 번째 시험에 분명히 실패했다. 시편 106:7에서 “이집트에 있는 우리 조상들은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은 주의 풍성한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홍해 바다에서 반역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쉽게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경 한 장과 불과 3일 후,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이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될 새로운 장소로 인도하셨다. 구름은 그들을 사막으로 인도했고, 3일 후에 그들의 물 공급은 고갈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사흘을 갔지만, 물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마라에 왔을 때, 그들은 마라의 물을 마실 수 없었다. 그곳의 물이 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을 마라라는 이름을 붙었다. 이에 백성이 모세에게 “무엇을 마실까?”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그는 주님께 부르짖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나무를 보여주셨다. 그는 나뭇잎을 물속에 던졌다, 그러자 물이 달콤해졌다. 거기서 그분은 그들을 위해 율례와 규정을 만드셨고, 거기서 그분은 그들을 시험했다(출애굽기 15:22b-25).

 

갈증을 해소할 방법이 없는 목마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우리 대부분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이나 음료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물 공급이 고갈된 후에 이스라엘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의 입은 메마르고 물은 보이지 않는다. 모든 방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래와 돌뿐이다. 당신은 걷기에 지쳤다. 당신의 아이들은 계속 물을 달라고 울부짖는다. 사막의 태양은 뜨겁다.

 

갑자기 누군가가 지평선에 녹색 패치를 발견한다. 신기루인가, 오아시스인가? 모든 사람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특히 하나님의 구름이 그 먼 푸른 안개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더욱 그렇다. 곧 300만 명의 희망적인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확실히 오아시스이어야 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소리친다. “습지다!” 그리고 환호하고 부풀어 오르는 군중 속에서 기쁨의 초승달이 솟아오른다. 물가에 먼저 간 남자는 꿈같은 기대의 표정으로 입술을 표면에 내밀었지만, 그는 즉시 찡그린 표정으로 물을 뱉었다. 물은 부패하고 마실 수 없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헐떡이는 사람들의 무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랬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도착하기 전에는 마실 수 없는 물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셨다. 그러면 왜 그들을 마라의 쓴 물가로 인도하셨을까?

 

우리는 이미 출애굽기 15:25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읽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고 계셨다. 하나님이 알고 싶어 하셨다. “이 상황에서 내 백성이 나를 신뢰하겠느냐? 그들이 나의 공급의 또 다른 기적을 목격하려 한다고 믿으면서 손을 들어 나를 찬양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의심하고 불평하고 투덜거릴 것인가? 그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스라엘이 이 시험에 실패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쓴 물을 달콤하게 만드셨다.

 

초주권주의자와 비주권주의자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조금 언급하기에 좋은 것이다.

 

마라의 쓴 물 사건 중에 모세의 입장에 있던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서 이렇게 선포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그분을 신뢰하자. 그분은 우리가 이 쓴 물을 마시기를 원하시는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계신다. 왜 우리 모두가 병에 걸리거나 죽기를 원하시는지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우리는 그분께 질문해서는 안 된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다.” 그러면 그들은 경건하게 쓴 물을 마시고 죽을병에 걸렸을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극단으로 기울어 반응했을 것이다. 그들의 대변인 중 한 사람이 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그분의 백성에게 선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경은 그분이 사랑이시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을 리가 없다! 악마였을 것이다! 속았으니 마귀를 꾸짖고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때 그 자리로 되돌아가자!”

 

두 관점이 부분적으로는 옳지만, 부분적으로는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그룹인 “초주권주의자”는 그들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를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정해진 뜻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인 “비주권주의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축복을 받기 원하신다고 믿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들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어려움을 가져오는 것은 신성한 목적이 없다. 여기에는 균형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려운 곳으로 데려가시거나 어려움이 닥치도록 허용하신다고 해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그 어려움을 삶의 운명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그분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실 것을 믿으며, 시련 가운데서 계시된 그분의 뜻을 확신 있게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을 더 큰 믿음과 영적 성숙을 위한 디딤돌로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시험 3

 

우리가 하나님의 시험 중 하나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대개 시험을 다시 볼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은 우리가 마침내 통과하거나 절망적인 경우임을 증명할 때까지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시험 중 하나를 통과한다면 그것은 대개 우리가 더 큰 축복과 열매를 맺는 자리로 승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금 읽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그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주셨다. 마라의 쓰라린 물에서 일어난 사건 이후 몇 구절만 지나도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다시 시험하셨다. 이번에는 그분의 시험이 그분의 백성이 목마르게 되도록 하는 데 집중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들이 배고프도록 허락하셨다.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고기 솥 옆에 앉았던 때와, 빵을 배불리 먹던 때에, 주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데리고 나와, 이 온 회중을 굶주려 죽게 했기 때문이다.”(출애굽기 16:2, 3).

 

슬프게도, 그들의 것은 또 다른 불신앙의 표시였고, 바로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또 다른 시험을 고안하심으로 응답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빵을 비같이 내리겠다. 그러므로 백성은 나가서 날마다 정한 양을 거두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들이 내 법 안에서 걷는지, 걷지 않는지, 그들을 시험하겠다. 그리고 내가 다음 일로 하여금 일어 나게 하겠다. 곧 여섯째 날에는 그들은 자기들이 가져오는 것을 비축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내가 그것으로 하여금 그들이 날마다 거두는 것의 두 배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출애굽기 16:4, 5).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험을 통과했는가? 슬프게도,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첫날에 너무 많이 모은 자들과 너무 적게 모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사람의 몫은 기적적으로(그리고 자비롭게) 정확하게 한 오멜씩, 즉 하나님께서 각자가 모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몫을 모을 수 있었다.(출애굽기 16:17, 18).

 

하나님은 또한 어떤 사람도 아침까지 그 일부를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셨는데,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에까지 남겨 놓았다. 그 결과 벌레가 생기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더러워졌다. 분명히,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보다 더 많이 모은 사람, 또는 다음 날을 위해 일부를 남겨 놓으려고 노력한 사람은 하나님이 매일 공급하실지 의심스럽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거에도 매일의 공급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해야 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분은 항상 신실했다. 한번은 약 40년 전, 내가 거의 알지 못했던 누군가가 내게 와서 나에게 등록금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었음을 믿는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기도가 되었다.

 

그 시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고, 나의 믿음은 커졌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시련은 기적을 볼 때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두 상황 모두 원망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을 믿고 찬양하기 시작했어야 했다.

 

우리가 방금 읽은 사건들을 40년 동안 되돌아보면서 모세는 다음과 같은 신성한 영감을 받은 매우 흥미로운 논평을 썼다.

 

“그리고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낮추시려고, 또 너를 시험하셔서,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네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시려고,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하라. 그때에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 뒤에, 너도 알지 못했으며, 또한 네 조상들도 알지 못했던 만나를 네게 먹이셨다. 이것은 사람이 빵에 의하여만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하나 하나에 의하여도 산다는 것을, 그분께서 너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 하심이다.”(신명기. 8:2, 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중 일부와 매우 유사했다. 자급자족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도록 강요하는 상황을 우리 삶에 허용함으로써 우리에게도 똑같은 교훈을 가르쳐야 한다.

 

이 모든 겸손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처럼 만들기 위해, 우리를 완전한 성숙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다는 표시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충만하셨고 그분의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존하셨으며,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모세는 이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그의 담론을 끝냈다

 

“그분께서 네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만나로 광야에서 너를 먹이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셔서, 너의 마지막 끝에 네게 선을 행하시려 하심이다.”(신명기 8:16).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신 목적은 결국 그들에게 선을 행하시는 것이었고, 물론 우리를 시험하신 목적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시험이 어떻게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선을 이룰 수 있겠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역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더 큰 축복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근원임을 알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재산이 하나님의 청지기 직분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진리를 돈의 영역에 적용하겠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영하게 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번영하는 그리스도인은 돈이 그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는 성도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어온 구절의 바로 다음 문장에서 모세가 경고한 내용이다.

 

“그리고 네가 마음속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부를 얻었다고 말할까 염려한다. 반대로 너는 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분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자신의 언약을, 오늘과 같이 굳게 세우시려고, 네게 부를 받을 능력을 주시는 분이 바로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신명기 8:17, 18).

 

하나님께서 재물의 근원이심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재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더 잘 관리하여 땅보다 하늘에 보물을 쌓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신뢰하실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작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작은 도전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라고 하실 때 사탄이 보내는 더 큰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이미 말했듯이, “위대한 믿음은 위대한 싸움의 산물이다. 위대한 증언은 위대한 시험의 결과이다. 위대한 승리는 위대한 시련 후에만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실해지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더 큰 열매를 맺는 곳으로 승진시키실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고 도전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행사할 때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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