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항상 무언가의 끝에 도달하고 있다. 이 땅의 어떤 것도 오래 살지 못한다. 많은 것들이 하루하루 이어가는 것이다. 잠깐만. 일몰 구름을 바라보며, 그 안에는 혼을 전율시키는 영광이 있다. 당신은 당신과 함께 그 광채를 보고서 친구를 부르기 위해 돌아섰고, 다시 돌아서자 그것은 사라졌고, 새로운 화려함이 그 자리에 있다. 초여름 아침에 들판을 걸으면 모든 잎사귀와 풀잎이 이슬방울로 덮여 있으며, 첫 번째 태양 광선이 떨어지면 수백만 개의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인다. 그러나 잠시 후에 당신이 돌아왔을 때 이슬방울이 보이지 않는다. 그대는 오늘 그대의 정원을 거닐며, 그 경이로운 다양한 꽃들이 피는 것을 주목하고, 그들의 경이로운 색조와 그들의 절묘한 사랑스러움을 보며, 내일 그대는 같은 길을 따라 다시 걷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똑같이 다양하고 풍성한 아름다움이 있지만, 모든 것이 변한다.
우리의 모든 개인적인 체험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만화경이다. 매 순간 보기가 바뀐다. 한눈에 볼 때 아름다운 것들이 다음 순간에는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은 사랑스럽게 똑같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 나타난다. 어제 우리가 가졌던 기쁨은 오늘은 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지금처럼 행복하고 순수하고 깊은 기쁨으로 가득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대부분에게 인생은 일상적이고 끝없는 반복이다. 같은 일, 같은 의무, 같은 보살핌, 매일, 해마다, 그러나 이 루틴에는 끊임없는 변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책을 읽고, 새로운 그림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동시에 많은 오래된 친숙한 것들이 계속해서 우리 삶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어제 본 얼굴이 오늘 그리워지고 군중 속에 새로운 얼굴이 있다. 작년에 우리가 불렀던 노래는 올해는 부르지 않는다. 우리가 열정적으로 읽었던 책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한때 우리를 기쁘게 했던 즐거움은 더 이상 우리에게 매력이 없다. 어린 시절에 그토록 많은 것을 의미하고 너무나 실제적이었던 장난감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에 대한 매혹이 없다. 스포츠와 게임, 학교와 학업, 우정과 비전이 있는 청소년의 행복한 시절은 절대 잊히지 않지만, 더 어려운 일, 더 험난한 길, 더 무거운 짐, 더 깊은 연구, 더 엄격한 현실을 안고 실제 삶으로 넘어갈 때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옛것의 끝과 새로운 것의 시작에 도달하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오래 보관하지 않는다.
우리의 우정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마음은 사랑하고 집착하도록 만들어졌다. 아주 일찍부터 어린아이는 미묘한 애정의 끈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 자신을 묶기 시작한다. 일생 우리는 친구들을 모으고 다양한 힘의 끈으로 그들을 묶는데, 때로는 가벼우면서도 쉽게 끊어지고, 때로는 삶 자체처럼 강하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가 어린 시절과 젊음에서 성숙으로 넘어갈 때 자라서 뒤처진다. 그들 중 일부는 외부적으로 붙어있고, 쉽게 떨어지고 거의 붙잡지 않고 흉터를 남기지 않는다.
모든 진실한 삶에는 우리 마음의 섬유로 짜여진 끈으로 우리와 묶여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내부적으로 끈끈하게 붙어있는 섞임이 있다. 이들 중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우리 집안의 구성원들이다. 아이의 첫 번째 친구는 아이의 어머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가 아이의 친구가 된다. 그런 다음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은 개방 생활 때문에 신성한 걸쇠로 옮겨간다. 어린 마음은 바깥으로 뻗어 사람들의 위대한 세계와 지나가는 수많은 동료 중에서 다른 친구들을 선택하고 우정의 가장 강한 끈으로 그들을 묶는다. 그리하여 모든 참된 남자와 참된 여자는 자신의 생명처럼 그들에게 소중한 친구들에 의해 모여 성숙한 나이에 이른다. 우리 삶의 순수하고 좋은 우정에 대한 우리의 빚은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로 만든다. 어머니의 마음은 아이의 첫 번째 교실이다. 초기 가정의 영향은 사후 삶에 색조와 경향을 부여한다. 친절한 말만 하고 사랑의 생각과 기질을 소중히 여기는 온화한 가정은 그 피난처에서 나오는 삶을 부드러운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운다. 모든 초기 우정은 숙성된 성격에 자신의 특징을 새긴다. 우리의 혼은 사진사가 카메라에 넣는 민감한 판과 같아서 반사되는 모든 이미지를 포착하여 완성된 사진에 담을 준비를 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이것은 특히 우리 삶의 순수한 우정에 해당된다. 그들이 우리 삶에 주는 인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의 혼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마침내 우리의 품성 안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부드럽고 거룩한 우정조차도 영원히 간직할 수는 없다. 하나씩 그들은 우리 삶에서 떨어지거나 찢어진다. 친구를 잃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때때로, 설명도 없이, 불쾌감도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유의 그림자도 없이, 암시나 경고도 없이, 우리의 친구는 갑자기 우리에게서 물러나 자신의 길을 가며, 인생을 통해 우리는 옛 우정에 대한 힌트나 표시를 결코 갖지 못한다.
어떤 친구들은 갑작스런 파열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눈에 띄지 않게 계속되는 느리고 점진적으로 떨어져 나가고, 모든 것이 풀릴 때까지 묶여 풀리고, 한때 거룩한 연합으로 함께 짜여진 마음이 절망적으로 멀어지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에게서 길을 잃는다. 작은 나나와 모모(앵무새)가 바위에 씨앗을 떨어뜨렸다. 씨는 갈라진 틈으로 떨어져 자랐고, 마침내 큰 바위는 싹이 튼 나무의 뿌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소외의 작은 씨앗이 때때로 두 친구 사이에 떨어지고, 결국 그들의 우정을 찢고 영원히 분열시키는 분리를 낳는다.
그런 다음 많은 경우 처음에는 몇 마디의 정직한 말로 제거되었을 수 있는 오해로 인해 친구를 잃게 된다. 속담에 “속삭이는 자는 우두머리의 친구들을 갈라놓는다”라는 말이 있다. 친구들 역시 사업의 치열한 경쟁에서, 야망의 치열한 경쟁에서 길을 잃는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특별한 구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이 거룩한 우정을 버린다.
친구들도 죽음으로 잃어버린다. 인생을 통해 사별의 슬픈 이야기가 계속된다. 무례한 폭풍에 의해 나뭇잎이 나무에서 찢어지는 것처럼, 죽음의 무자비한 손에 의해 우리 삶에서 우정이 뽑힌다. 거의 모든 친구를 잃은 채 살아남은 노인들의 외로움에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것이 있으며, 인생의 결말의 그림자가 모여드는 가운데 거의 완전히 홀로 서 있다. 한때 그들은 인간의 애정이 풍부했다. 아이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다른 진실한 마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에게 이끌렸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하나씩 하나님의 품으로, 그분의 집으로 모인다. 다른 친구들은 또한 떠난다. 마침내 남편이나 아내는 부름을 받고, 한때 행복했던 부부 중에서, 세상의 모든 기쁨의 파멸과 잃어버린 기쁨의 부드러운 기억 속에서 외롭고 황량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아니었다면, 오랜 세월 동안 친구들을 잃은 이러한 일은 경감되지 않고 한없이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내세에 대한 계시뿐만 아니라 현재의 치유와 함께 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의 마음을 그들의 슬픔 속에 싸매시고 그들의 외로움 속에서 위로하신다. 사라진 아이들과 친구들은 길을 잃지 않는다. 손은 다시 손을 잡을 것이고 마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재회에서 마음을 움켜쥘 것이다. 무덤은 겨울일 뿐이고, 겨울이 지나면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던 아름다운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오는 놀라운 부활과 함께 봄이 온다.
우리는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삶의 많은 비전과 소망의 끝자락에 도달한다. 꽃은 퇴색하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아침 구름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몰의 화려함만이 사라지는 유일한 화려한 그림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모든 공상, 젊음의 백일몽, 남성과 여성의 비전 구조는 무엇인가?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완성되었는가? 인생은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부유한 화물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상상의 부유한 땅으로 보내는 많은 배는 전혀 돌아오지 않거나, 돌아오더라도 찢어진 돛과 낡은 배와 함께 빈 채로 기어 돌아올 뿐이다. 인생의 행로에 따라 우리 모두는 실망을 겪는다. 인생의 바다에 대한 우리의 모험 중 많은 부분이 난파되어 항구로 돌아 오지 않는다. 우리의 열렬한 소망 중 많은 부분은 우리가 그것을 잡을 때 터지는 찬란한 거품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높은 것들, 즉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위해 산다면, 우리 인생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이 땅에서의 소망이 실패하더라도 실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다. 우리는 그림자를 쫓아 그것이 현실이라고 가정한다. 그것은 우리를 피하고 우리는 그것을 파악하지 않고 대신 보이는 것이 그림자에 불과한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 손에 쥐고 있다. 젊은이는 가능한 완성과 완성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수고와 고통으로 한 사람 한 사람, 그러나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그는 그들을 따른다. 그의 생애 내내 밝은 소망이 그의 앞에 빛나고 있으며,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탐구로 계속해서 그들을 쫓고 있다. 어쩌면 그는 그 중 어느 것도 깨닫지 못하고, 빈손으로 노년을 맞이할 수도 있지만, 세상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동안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영적 정복의 보물을 그의 혼에 모으고 있다. 그의 내면의 삶에서 그는 매일 더 부유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구를 주시고, 우리 마음의 덩굴손은 그들 주위를 꼬고 있다. 그들은 한동안 우리와 함께 머물렀다가 우리를 떠난다. 우리의 상실은 매우 아프며, 우리는 인생의 길을 따라 슬프고 외롭게 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잃지 않았다. 우리 친구들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의 가능성을 성숙시키기 위해 나왔다. 그런 다음 친구들은 빼앗겼지만 무르익은 사랑은 남아 있다. 우리의 마음은 비어 있지만, 우리의 삶은 더 크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환상은 아름다운 건물 자체가 영속적인 화려함 속에서 두드러지게 건물을 세우는 데 사용된 무례한 비계가 떨어져 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시련과 슬픔의 끝에 가까이 다가간다. 매일 밤에는 아침이 있고, 아무리 어두워도 빛이 어둠을 쫓아낼 해가 뜨기까지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하늘에 모여 파랗게 가려지거나 별을 가리는 모든 검은 구름은 오래지 않아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면 파란색에 얼룩이 남지 않으며 별의 광선이 꺼지거나 어두워지지 않는다. 인생의 고통과 고난도 마찬가지다. 질병은 건강에 자리를 내준다. 슬픔은 아무리 쓰라리더라도 신성한 사랑의 부드러운 위로로 위로를 받는다.
또 다른 결말이 있다. 우리는 삶 자체의 끝에 올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날을 마칠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일을 하고, 마지막 산책을 하고, 마지막 편지를 쓰고,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마지막 ‘굿나잇’을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내일 우리는 사라질 것이며, 우리를 알았던 곳들은 더 이상 우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겪거나 놓칠 수 있는 다른 체험이 무엇이든, 우리는 죽는 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길은 어떤 장면을 헤매든 마침내 그림자의 계곡으로 구부러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재앙이나 재앙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에서 하늘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는 날이 우리 일생 중 가장 밝은 날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일이 끝나고, 갈등이 끝나고, 슬픔은 지나가고, 죽음 자체는 뒤에 남겨질 것이며, 완전하고 진실하며 풍부한 의미의 삶이 실제로 시작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참된 준비는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마감할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내일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어느 날 밤 불완전한 것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각각의 분리된 작은 하루는 의무가 남아 있지 않고 그 자체로 완전한 미니어처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생명을 주시며, 날마다 그 자체로 할당된 의무, 즉 이루어져야 할 그분의 계획의 일부, 우리에 의해 완성될 그분의 목적의 일부를 주신다. 페이버Faber는 “매 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조금씩 등에 매달려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사명은 그 신성한 뜻을 찾아서 행하는 것이다. 잘 사는 날은 완성된 세월을 만들고, 잘 사는 세월은 인생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만든다. 그러한 삶에서는 어떤 종류의 특별한 준비도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 날마다 다음 날을 준비하고, 마지막 날은 영광을 위해 준비한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인생의 끝에 도달하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운 일이 아니다. 죽어도 잠시도 삶을 방해하지 않는다. 죽음은 길을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이 그림자와 비현실의 세상을 빠져나가 주님의 즉각적인 면전과 영원한 본향의 영광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문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즉 짧은 생애를 잘 살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며, 우리 손에 주어진 모든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갑작스런 종말이 준비되지 않은 채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를 이곳에 남겨 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오래 사는 것이 기쁘지만, 우리를 안식과 집으로 인도하기 위해 황금빛 기쁨을 가지고 오는 온화한 천사를 환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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