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이 나쁜 것은 어떠한가? 영국의 한 작가는 우리 중 절반 이상이 성질이 나쁘다고 말했다. 그는 수치를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는 약 2,000명의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평범한 기질에 대해 나쁜 행동을 하게 한 다음 결과를 표로 작성하여 보고했다. 그들 중 절반 이상(완전히 정확히 말하면 52%)은 다양할 정도로 성질이 나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전적으로 보면 나쁜 성질은 신랄하고, 공격적이고, 임의적이며, 말다툼을 잘하고, 변덕스럽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담즙이 많고, 다투고, 별난 생각을 하고, 독재적이고, 횡포하고, 쉽게 분을 내고, 멍청하고, 고집스럽고, 완고하고, 성가시고, 음탕하고, 복수심에 불탄다고 정의하고 있다. 모두 46개의 용어가 사용되며, 그 중 어느 것도 달콤한 기질을 묘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일이 너무 심각해서 우리 중 매 순간보다 조금 더 공격적인 정도가 우호적이지 않다고 믿고 싶지 않다. 이웃의 잘못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지적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잘못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지적하기보다 훨씬 쉽다. 그러므로, 48퍼센트의 선량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우리 자신을 위해 피난처로 삼는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아는 많은 사람이 때때로 칭찬할 수 없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들은 쉽게 자극을 받는다. 그들은 사소한 모든 것에 열을 올린다. 그들은 거만하고, 횡포하고, 짜증 내고, 신경질을 부리고, 분개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 대부분이 자신의 연약한 성품을 교정하고,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설익은 과일은 지나가는 해에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부드러워지고 달콤해지지 않는다. 다이아몬드의 광택 있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거칠기를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똑같은 충동적인 자존심, 허영심, 이기심 및 기타 불쾌한 특성들이 생활 속에 남아 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달콤하게 자라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극복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 있을 때, 그리고 해가 갈수록 더 훌륭하고 더 아름다운 영적 품성을 향한 진보를 감지할 수 있을 때, 비록 그 발전이 그 어느 때보다 느리더라도 성질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흠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자신의 결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격려할 근거가 거의 없다. 소망은 악을 극복하고, 그릇된 것을 쫓아내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는 삶에서 시작된다.
사람이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할 때, 그는 불쌍할 정도로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아무도 그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는 어떤 결핍도 의식하지 못하며, 그의 결핍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이 약하고 결점이 있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의 결점에서 자라기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자신에 대한 승리와 품성의 완전성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끝날 투쟁할 시기인 것이다.
나쁜 기질은 품성의 손상이며, 그뿐만 아니라 자신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기 위해 고통이나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깨지지 않는 친절의 삶이다. 그것은 사랑, 그 초상화가 불멸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를 위해 그토록 정교하게 그려 놓은 사랑에 의한 지배력이다. “오래 참고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스스로 보기 흉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으며, 노여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랑의 그림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완성된 삶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복음서를 펴야 한다. 예수님은 결코 화를 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그분을 시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살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둔함으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쓰라린 적대감과 박해로 살았지만, 그분은 달콤함과 인내와 자아-부정하는 사랑에 있어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다. 으깬 경우에만 향수를 내뿜는 꽃들처럼, 두들겨야 도끼를 향기로 목욕시키는 나무처럼, 그리스도의 생애는 인간의 무례함과 그릇됨의 거친 충격에 가장 감미로운 사랑만을 바쳤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과 품성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본이다. 폭력적인 기질이 분출할 때마다, 추악한 기질의 그늘이 생길 때마다, 우리가 우리 혼 속에 형성하고자 하는 그림의 빛나는 사랑스러움을 해롭게 한다.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절대 사랑스럽지 않다.
또 다른 단계가 있다. 성질이 나쁜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 종종 가장 친한 친구를 해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시끄럽고, 한 사람의 시끄러움은 온 집안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다른 사람들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사소한 일에도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화를 낸다. 따라서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독재적이며 친절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의견 표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다투기 때문에 가장 온유하고 온화한 사람조차도 그들과 평화롭게 살 수 없다. 나쁜 기질의 특별한 특징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그 사람의 친구들에게 고통과 굴욕을 줄 뿐이다.
일반적으로 나쁜 성질에는 날카로운 혀가 동반된다. 형제자매는 같은 식탁에서 먹고 같은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자면서도 서로 말하지 않고 몇 달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최근에 사망한 남자가 12년 동안 매일 세 번씩 같은 식탁에 앉았지만 아내와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아내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그는 고기와 함께 그녀에게 대접했지만 그들의 우울함은 결코 예의의 말로 풀리지 않았다. 나쁜 성질은 때때로 단호한 침묵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침묵은 속담에서 황금이라고 부르는 종류가 아니다. 하지만 보통 성질이 나쁜 사람은 혀를 내두르고 마음속의 증오심을 털어놓는다. 그들의 말이 온유한 마음속에 낳는 고통과 해악에는 한계가 없다.
“이 서투른 발은 여전히 커다란 그릇에 있습니다.
끝없이 꽃을 짓밟아 주십시오.
우리가 밀어 넣는 이 단단하고 선의의 손
친구의 마음속에.
우리가 지킬 수도 있었던 시기적절하지 않은 진실 —
얼마나 날카롭게 찔리고 찔렸는지 누가 압니까?
우리가 말하지 못한 단어는 —
그것이 얼마나 웅장하게 울렸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것에 대한 치료법이 없는가? 성질이 나쁜 사람은 항상 성질이 나빠야 하는가? 아니면 악을 변화시킬 방법이 있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은혜는 옛것을 새롭게 하실 수 있다. 단맛으로 훈련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하게 나쁜 성질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사랑스럽지 않은 삶을 취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도덕적 변화와 마찬가지로 은혜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도움이 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악한 성향과 습관을 이기기 위해 투쟁해야 하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 우리가 전쟁터에 참여하지 않는 한 그분은 우리를 정복자로 만들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격의 문화에서 크고 필요한 몫을 가지고 있다. 성질이 나쁜 사람은 고의적으로 그 과업을 스스로 정하고 그 완성에 단호하고 끈질기게 착수하기 전까지는 결코 성질이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결코 저절로 오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크리스천에게서도. 복숭아가 신맛에서 감미로움으로 익어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만지심이 아니면 사람들은 추악한 기질에서 달콤한 세련미로 자라지 않는다.
완성되어야 할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성질의 파괴가 아니다. 성질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좋다. 달성해야 할 과제는 자제력을 얻는 것이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성질이 강한 사람, 즉 강한 열정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큰 분노를 낼 수 있고 완벽한 자제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제력에서 설정해야 할 과제는 모든 감정과 자아를 지배하여 모든 충동을 억제할 수 있고 결코 무분별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최고의 캐릭터는 악한 경향에 대한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 때문에 만들어진다. 그의 상냥함은 나쁜 기질의 폐허 위에 세워졌고, 그의 관대함은 지나치게 지배되고 변형된 이기심에서 솟아난다. 적들 앞에 세워진 그러한 성격은 본래 유쾌한 성격보다 훨씬 더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스스로 정해 놓는 것보다 더 높은 달성 표준이 필요하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이상보다 더 높이 올라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아름다움은 항상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비춰져야 한다. 우리 주님의 이름이 우리로 하여금 영과 성품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항상 노력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주인을 대표한다. 사람들은 그분을 볼 수 없으며, 우리 삶에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이라도 보기 위해 우리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분의 인내와 자기 통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의 본질적인 부분을 놓치게 된다. 주님의 종은 거칠지 않다. 부드러워야 한다.
우리의 매일의 행실은 잦은 분노의 폭발과 다른 성미의 표현으로 인해 손상되는 동안 우리는 결코 세상에서 크게 쓸모가 없을 것이다. 오직 우리 자신의 삶이 거룩한 애정의 광채로 빛나고, 우리의 마음과 입술이 인내와 온유함의 감미로움에 스며들 때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참된 사자로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종종 그들의 눈에는 사랑스럽지 않게 보이고 우리에 대한 그들의 관용을 몹시 시험하는 우리 안의 어떤 것과 균형을 이룬다.
“당신 마음을 살피라. 그대가 무엇을 괴롭히는가?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 안에 있을 수 있다.
모든 티끌은 연약하고 모든 육체는 연약하다.
그대가 찾는 참된 사람이 되라.”
우리가 이웃과 함께 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그들도 우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더 큰 잘못이 있는지 말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정말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어느 누구와도 다투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어떤 부당한 투쟁에서도 파트너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결심했다. 그는 보복을 제안하기보다는 차라리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기를 원한다. 그는 참는 법과 인내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면 부드러운 재치로 화를 내는 사람들을 화해시킬 수 있다.
우리가 구성할 수 없는 차이나 다툼이 있다면 그 잘못은 결코 우리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우리 안에 거짓말이 있는 만큼 우리는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한다. ‘모든 사람은 이웃이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조심하지만, 그가 이웃을 속이지 않도록 돌보기 시작하는 날이 온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된다. 그는 시장의 수레를 태양의 수레로 바꿨다.’ 사람이 자기 이웃의 다투는 기질만을 보는 한, 그는 거룩함을 향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깨어 살피고 자신의 기질을 제어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는 법을 배웠을 때, 그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 있는 것이며, 곧 자신의 연약함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지켜볼 필요가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생은 너무 짧아서 하루나 한 시간도 말다툼과 다툼으로 보낼 수 없다. 사랑은 너무나 신성해서 예리한 성질의 추악한 찔레에 의해 찢어지고 찢길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그처럼 무한한 참을성을 나타내셔야 하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참을성을 배워야 한다. 참된 사랑의 본질은 쉽게 노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는 정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생활을 더 감미로운 부드러움으로 훈련시킬 수는 없겠는가? 조금이라도 거칠게 만지는 법을 분개하고 화를 내지 않고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보기 흉한 분노에 휩싸이지 않고 작은 상처와 명백한 불공정을 견딜 수 없는가? 우리로 하여금 그분처럼 모든 잘못과 상처를 견디어 내고, 어떤 말이나 비통한 표정도 되돌려 주지 않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속에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우리와 우리의 친구가 함께 걷는 길은 논쟁에 소비하기에는 너무 짧다.
'자기통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에 이르다 (0) | 2023.09.15 |
---|---|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 (0) | 2023.09.15 |
사랑은 가정에서부터 (0) | 2023.09.07 |
언제나 네 편이야! (1) | 2023.09.07 |
없어서는 안 될 그리스도 (0) | 2023.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