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통제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

Hernhut 2023. 9. 15. 12:10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은 부활 직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분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 것 같았다. 그분이 살아 있는 동안 그분은 큰 힘을 가졌다. 그분의 봉사의 직무는 친절로 빛났다. 그분의 개인적 영향력은 온 땅에 영향을 미쳤다. 그분이 돌아다닐 때 그의 은혜로운 말은 모든 곳에서 축복을 남겼다. 그분은 모든 고통과 슬픔에 동정심을 나타냈다.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서 두루 다니며 선을 행하다가 마침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분의 친절은 그분을 보편적인 사랑을 받게 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을 위해 박수를 받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분의 사역에서 그분이 초자연적인 일을 했을 때 그것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었다. 그분은 굶주린 군중을 먹이기 위해 떡을 늘리셨다. 그분은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고, 절름발이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귀머거리를 열어주셨는데,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고난에 동정심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그분이 죽임을 당했을 때 그분의 권세는 끝나는 것 같았다. 그분은 적들의 손아귀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그분은 그 땅에서 가장 약한 자보다 강하지 않았다. 그분의 구원을 위해 손을 들지 않았다. 강력한 경이로움 속에서 그토록 저항할 줄 모르고 일했던 그분 자신의 힘은 아무런 힘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분의 이름은 그가 죽은 죽음 속에, 망각 속에 묻힌 것 같았다. 어떤 사람도 예수님처럼 그의 죽음에서 그렇게 완전히 무너진 것처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부활의 순간에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분은 하나님처럼 무덤에서 나왔다. 그분을 본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분의 존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친구들과의 익숙한 대화를 다시 시작하지 않고, 그분은 자신의 영광의 광채로 그들을 경외하거나 당황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계속되는 인간성의 사실로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 단순한 나타나 보이시는 활동으로 거듭거듭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냈다. 마리아는 그분이 정원사라고 생각했고, 그분의 모습과 태도는 너무나 친숙했다.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같은 길을 가는 낯선 사람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간단한 저녁 식사 때, 떡을 떼면서 자신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드러내셨다. 호수의 어부들에게는 해변의 희미한 모습으로 보였지만 새벽녘에 그들은 그분을 사랑으로 섬기는 주님으로 보았다.

 

어느 곳에서나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을 볼 수 있다. 부활 자체에 임한 놀라운 권능을 생각해 보라. 이야기가 전설적이라면 모든 상황에 대한 세부 사항이 있어야 한다. 복음서는 신화와 전설이 가장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곳에서 가장 조용하다. 그러나 부활은 모든 기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이었다. 세상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왔을 때 죽음에 대한 이 숭고한 숙달과 같은 또 다른 권력 행사를 본 적이 없다. 우리 주님의 다른 모든 기적은 단지 섬광의 섬광에 불과했다. 그분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그분은 눈먼 사람이 보게 하시고, 절름발이가 걷게 하시고, 귀먹은 사람이 듣게 하셨다. 소수를 위한 빵이 그분의 손 아래에 많아져서 수천 명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죽은 자들이 회복되었지만, 그들은 매번 다시 죽음으로 돌아갔다. 이 가장 위대한 기적들이 위대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그분의 모든 권능의 행위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이 기적에 비하면 작은 것이었다. 그분은 더 이상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났다.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시자마자 그분에게서 능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분의 친구들이 그들의 주님이 정말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되자마자 그들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변화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후 그들이 얼마나 절망했는지 안다. 그들의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두려움이 그들을 마비시켰다. 그들은 빗장이 쳐진 문 뒤에 숨었다. 그러나 그들이 못 자국이 있는 손을 보고 믿었을 때, 그들은 새 사람과 같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보고 들은 모든 사람은 그들의 담대함에 놀랐다. 금요일의 베드로와 오순절의 베드로를 비교할 때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한 사람으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그들 모두도 마찬가지였다. 연약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어둠 속에 숨어 멀리서 주님을 따르고, 자신이 주인에게 속해 있음을 부인하고, 폭행이나 체포가 두려워 문을 잠그는 대신, 그들이 얼마나 대담해졌는지 보라.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자처럼 용감했다. 그들의 말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저들 위에 임했다.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그 평범하고, 배우지 못하고, 칭호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은 교회 세기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교회는 죽은 지도자, 죽음을 극복할 만큼 강하지 않은 사람의 작품인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교회도 없고 소망도 없다고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셨으면 우리의 전도가 헛되고 너희의 믿음도 헛되도다 . . . 너희는 아직 너희 죄 가운데 있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이것이 그에 대한 마지막 말이라면 소망의 그림자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시니라.” 교회의 이야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그분이 한 모든 일을 하셨다. 제자들을 보내실 때 하신 마지막 약속은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것이었다. 이 약속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나 바울이교회에 있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그분의 친구들과 함께 현존하고 계신가? 그들은 영향력 가운데 교회 안에 있었다. 세상은 요한이 살았기 때문에 더 달콤하다. 그는 사랑의 사도였다. 그의 이름이 말하는 곳마다 향기가 쏟아진다. 바울은 여전히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의 말씀은 신약성경이 가는 곳마다 살아 있다. 그리스도의 약속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오직 이런 방법뿐인가?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분은 오직 그분의 삶과 일과 성품을 기억하는 동안에만 그분의 추종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지,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구들에게 그 약속을 주었을 때 그 약속은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살아 계시고, 인격적인 임재 가운데서, 항상, 모든 날에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그분이 그들의 동반자, 조력자, 친구가 되실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스도께서 죽기 전에 그분의 사역에서 하기 시작하신 일들은 그 이후로 여러 세기 동안 계속해 오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은 선한 일이 이루어지는 곳마다 나타난다. 우리는 그분의 공적 사역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 그분이 어떻게 모든 곳에서 선을 행하고, 치유하고, 돕고, 위로했는지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읽었으며, 때때로 우리는 그 당시에 살면서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유대와 갈릴리에 계셨던 것처럼 우리 공동체에도 실제로 현존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손길, 그분의 응원, 그분의 임재를 마치 그분이 우리 집에 사는 것처럼 볼 수 있다.

 

()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의 우정에 대해 읽어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그분은 이제껏 살았던 사람 중 가장 친절한 사람이었다. 최근의 한 저술가가 말하기를, “사람의 아들(인자)은 태어날 때부터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부축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권한을 받았다. . . . , 목자가 없는 양처럼 괴로워하고 흩어진 군중에 대한 그분의 동정심, 버림받은 자, 억압받는 자, 피곤한 자에 대한 자애, 어린이의 순진함에 대한 애정, 우리 종족 역사상 가장 부드럽고 감미로운 에피소드 중 하나이며, 그분의 인간적인 얼굴을 볼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을 누린 사람들과 그 이후의 시대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다.”라고 했다. 그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고, 실제로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시다면, 그분은 그 당시 그분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은 친구이시다. 그분은 갈릴리에서 하셨던 것처럼 지금 사람들 가운데로 가신다. 그분은 베다니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슬픔의 집에서도 동일하시다

 

그분에게는 개인적인 우정이 있었다. 처음에 시몬으로 온 베드로는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해 보라. 그는 결점이 많고, 규율이 없고, 배우지 못하고, 성급한 사람이었다. 고기잡이 배를 탄 이 사람은 새로운 주()의 훈련을 받게 되었고, 위대한 사도에게 영향을 미쳤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우정이 지금 그러한 사람과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중 가장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그리스도의 우정이 요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보라. 요한은 그분과 교제하는 동안 그토록 보기 드문 부드러움으로 성장했고, 그의 품성은 남자다운 아름다움과 큰 풍요로움과 힘으로 무르익었다. 오늘날 우리의 친구를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섬기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분의 우정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영향력에 의해 변화된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볼 수 있다.

 

부활은 죽음에서 일어나신 그리스도께서 놀라운 권능으로 행하신 일을 보여준다. 부활은 모든 곳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새로운 열망, 새로운 삶의 고양, 새로운 소망의 계시를 남긴다. 부활은 죽음을 정복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전 세계에 위로의 물결을 보내는 것이다. 부활은 잠자는 죽은 자들 위의 보주(寶珠 레갈리아), 영광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신성한 안식처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부활은 더 많은 일을 한다. 그것은 손을 뻗어 모든 슬픔에 빛을 퍼뜨린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승리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패배를 겪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 모든 슬픔, 고통, 시련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한 알의 밀은 살기 위해 죽을 뿐이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대한 교훈이다. 부활은 매일 교훈이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무덤으로 다가가고 있으며, 그 무덤에서 우리는 어떤 좋은 소망과 기쁨을 내려놓지만, 그로부터 버려진 것이 생명과 아름다움의 새로움으로 다시 솟아난다. 극기에 대한 모든 외침은 너무나 중대한 것이다. 힘들고 값비싼 의무에 대한 모든 부름은 우리가 땅에 묻어 버리는 씨앗이지만, 그 씨앗은 풍성하고 화려한 것으로 자랄 것입니다.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당신은 사치를 포기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조금의 편안한 생활은 조용히 지하에 묻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다. 하루나 이틀 동안 우리의 육체적 삶을 더 쉽게 만들어 줄 작은 방종은 매장에서 이상한 변화를 겪고, 우리의 혼을 영원히 축복하고 풍요롭게 하는 영적 특성을 낳는다.

 

이것이 부활의 더 넓은 진리다. 최고와 최고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장미 잎은 향기를 얻기 위해 부셔져야 한다. 사랑은 아름다움의 완전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고통을 겪어야 한다. 황금 곡식은 그 무덤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솟아날 수 있도록 봉사나 희생 제물로 묻혀야 한다. 이 모든 놀라운 진리의 비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분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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