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통제

누가 당신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가?

Hernhut 2023. 10. 9. 17:26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특성을 발전시키시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 장성을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인 특성이다. 성령의 열매의 특징 중 하나다. 그러나 사랑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연구하면 그것이 여러 성령의 열매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령의 열매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이점은 무엇인가? 차이점은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가지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아홉 겹이라는 것이다. 이 아홉 겹의 그영의 열매는 진정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의 묘사이며, 다른 차원과 구별하여 한 차원을 강조하는 것은 실수다.

성도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의 아홉 가지 특징 중 첫 번째 특징인 사랑에 대해 너무 많이 듣지만, 마지막 특징인 절제’(자기 통제)는 그렇게 무시된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위험은 사랑이 성경에 묘사되고 그리스도의 생애로 특징 지어지는 사랑의 종류를 나타내기보다는 감상으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2, 23에 주어진 성령의 열매의 아홉 가지 특징에 더하여, 성경은 또한 고린도전서 12:8-10에 주어진 모든 성도가 이용할 수 있는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를 계시한다. 그러나 자제력의 영적 은총이 없다면, 이 선물들은 효과가 없거나, 오용되거나,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의 특징, 특히 처음 여덟 가지, 즉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온유, 양선, 믿음, 온유에 대해 자주 들었지만, 성령의 열매의 마지막 특징인 절제에 관한 메시지를 언제 들었는가?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많이 배우고 이 소홀히 한 은혜를 배양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나는 자기 훈련의 영적 은혜를 나타내고 있는가?’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문제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신착란 상태에서 춤을 추는 한 형태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으며, 그 몸의 구성원들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통제되지 않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어떤 저술가가 말했다. 매일 밤 교회 모임 게시판이나 수첩에 나열된 주간 활동을 보면 우리가 바쁜 성도임을 알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질문은 우리는 주님의 일에 너무 바빠서 주님을 위해 일을 거의 또는 전혀 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바쁨을 효과적인 봉사와 동일시했는가?’라는 것이다. 움직임은 많지만, 추진력은 적고, 활동은 많지만, 행동은 적고, 프로그램은 많지만, 진전은 거의 없다. 나는 항상 바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하고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자아가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만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은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 진정한 절제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통제력 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정을 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1:9-11에서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분별력[개인적 지식과 지각]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선악]을 분별하며 [가치 있는 것을 귀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순결하며 걸려 넘어질 틈을 주지 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제력이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참된 지식과 영적 분별력과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훌륭하지 않은 것들을 승인하고 그리스도의 날에 비난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순전한 의지력으로 우리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님께서 우리의 자기 생명을 통제하실 수 있도록 자아에 대하여 죽어야한다고 가르친다.

실화에 따르면 TWA Flight 841에 탑승한 승객과 승무원은 식사를 마치고 뉴욕에서 미니애폴리스로 가는 마지막 비행을 위해 다시 자리를 잡았고 보잉 727은 자동 조종 장치를 켜고 모든 것이 일상적이고 매끄럽고 완벽하게 통제되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갔다. 갑자기 39,000피트 상공에서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고 아래쪽으로 내리꽂기 시작했다. 비행기 내부 비품이 산산조각이 났고 승객들은 당황해 엉키기 시작했다. 또한, 물체가 공중을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비행기가 1분도 채 되지 않아 24,000피트 상공으로 추락하자 조종사는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그는 랜딩 기어를 낮추었고 비행기가 수평을 유지하게 했다. 땅에 처박혀 부서지기 약 2초 전에! 디트로이트 메트로폴리탄 공항에 손상된 비행기가 안전하게 착륙한 후 관계자들은 비행기가 36도 회전에서 회복된 것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설계하신 정교한 기계가 통제 불능 상태로 속도를 내고, 거의 큰 재앙을 일으키고,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뻔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들이 회복하는 데는 기적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재난을 향해 맹목적으로 통제 불능 상태로 달리고 있는 수억만 명의 생명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삶이 그 중 하나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통제 불능인가?’ ‘우리는 누구의 통제하에 있는가?’

 

우리의 반응은 누가 통제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누가 통제하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좋은 척도는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자발적인 반응이다. 우리가 거리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당신과 부딪쳤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당신은 아마도 당신의 성질이 타오르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반응할 것이고 당신은 (그가 너무 큰 사람이 아니라면) 화를 내며 그를 보도에서 밀어낼 것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육신으로 그가 우리에게 행한 것을 그에게 행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더 많은 것을 할 것이다.

 

-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동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때 - 그들은 우리를 통제한다!

 

누군가가 거칠고 심하게 말한 후 다른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상황에 부닥친 적이 있는가? 거칠고 쓰라린 말은 가혹하고 쓰라린 말을 낳는다! 행동은 반응을 통제하고 있다. 또는 누군가가 우리를 거짓으로 비난하고 천연적인일은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요점은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에 의해 통제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잠언 26:4어리석은 자에게 그 어리석은 대로 대답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도 그와 같이 되리라고 경고한다.

어떤 운전자가 우리를 몇 킬로미터를 뒤따라 오다가 우리 앞으로 급격히 끼어들어 거의 충돌을 일으킬 뻔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우리는 경적을 울리고, 주먹을 흔들고, 중얼거린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면, 이 낯선 사람의 무모한 운전이 우리를 통제했다. , 우리가 그의 행동에 반응했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했다.

 

누가 또는 무엇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가?

 

누가 당신의 가정생활을 통제합니까? 배우자의 태도, 기분, 행동이 우리의 반응을 좌우하는가? 배우자의 냉담함, 분노, 비난, 사려 깊지 못한 태도가 우리를 무례하고 사려 깊지 않게 만들도록 내버려 둔다면, 배우자는 우리를 통제한다. 일부 부모의 반응은 자녀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부모가 아이의 화난 말에 반응하고 화난 말과 목소리로 목소리를 높인다면, 그 부모는 아이에 의해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닌 사람은 자유롭지 않다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성경은 성도가 자신의 자아삶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성령님께서 성령의 열매의 특성인 절제를 그 안에 생성하시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자신의 반응을 지시하도록 허용한다면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하든, 우리는 성령으로 인해 영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12에서 성경적으로 허용되는 행위에 대해 말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자아의 주인과 어떤 것으로도 지배되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러나 영적 자기 훈련이란 무엇인가? 훈련이 거의 없고 방종이 많은 시대에 어떻게 완성될 수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통제하라또는 자신을 붙잡으라라는 표현을 듣는다. 그러나 자제, 자기 통제는 어떻게 달성되어야 하는가?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젊은이에게 가서 교육을 받으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절제는 방식이 아니다

 

우리 문화는 확실히 통제되지 않고 규율이 없는 시대, 즉 방종의 시대다. ‘기분 좋으면 해.’ ‘효과가 있다면 몇 번이고 반복해’. ‘마음대로 해’ ‘세상 뭐 있어.’ ‘이쯤이야이것이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모토다. 성경의 일곱 가지 죄가 받아들여지는 생활 방식이 된 것 같다.

한 칼럼니스트가 우리 문화를 개인의 쾌락을 무절제하게 추구하는 것이라고 묘사한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국가와 개인 차원에서 무제한적인 지출과 신용 남용은 우리를 재정적 혼란의 가장자리로 이끌었다.

교회는 규율 없는 생활의 역병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대식가처럼 습관적으로 배를 채우는 것은 연약한 성도들을 낳았다. 대중 매체, 특히 텔레비전은 많은 성도에게 영향을 미쳐 시간 낭비, 무뎌진 생각, 왜곡된 가치관을 초래했다. 감정은 착취되고 왜곡되어 행동 방식이 통제되지 않은 채 영역을 운영한다.

일간지를 보면 개인, 가정, 학교, 사회 전반에서 억제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기초가 무너질 때에 의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을 했다(시편 11:3).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훈련되지 않은 시대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북엔드처럼 서서 성령의 열매의 특성을 감싸는 것은 첫째는 사랑이고 마지막 특성은 절제. 진정한 의미에서, 절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왜냐하면 이 울부짖는 은총의 부재는 성령의 열매의 다른 은총들의 효과를 무효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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