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통제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

Hernhut 2023. 9. 5. 16:28

 

우리 생활의 목적이 그 성격을 결정한다. 우리가 사는 기쁨은 우리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사람의 목표가 부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그의 삶의 지배적인 동기라면, 금에 대한 탐욕은 그의 열광적인 열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산다면, 이것이 그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그 소망은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영감을 줄 것이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것이 끝났을 때 무엇이 될 것인지, 우리가 세상에 어떤 인상을 남기고 있는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사는 것은 불충성과 우상 숭배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 중 하나에서 이 진리를 매우 강력하게 주장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우리의 모든 관계는 주님과 맺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께 온전히 순종해야 하며, 우리에게는 다른 주인이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 세속적인 일이라고 부르는 일이든, 종교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이든 그분의 일이다. 우리가 합당하게 생활하고 있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 , 생각, 감정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 관계를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 있든 죽든 우리가 사는 것은 주님께 달려 있다. 우리는 말할 때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 분명하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진실하다면 우리의 소망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영예롭게 하고, 그분의 승인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심판받을 때 대답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에 대하여 하나님께 회계 받게 되리라.”

 

가장 참된 삶은 하나님을 위해 가장 충만하고 깨지지 않고 사는 삶이다. 한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는 하나님께 노래합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의식적으로 그분께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그는 말에 매달리고 그에게 매료된 수많은 청중에게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그 앞에 있는 어떤 얼굴도 하나님의 얼굴 외에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듣는 귀가 아니라 하나님의 귀를 생각했다. 우리가 모두 이 놀라운 노래처럼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유일한 참된 이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사역을 해야 한다. 사업가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모든 사업을 해야 한다. 화가는 하나님을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 작가는 하나님을 위해 책을 써야 한다. 농부는 하나님을 위해 땅을 경작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아버지의 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분이 승인하시는 방식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여러 해 동안 목수 작업대에서 일한 목수였다.

 

우리는 그분이 아버지의 눈을 위해 모든 일을 하셨다고 확신한다. 그분은 능숙하게, 양심적으로, 아름답게 했다. 그분은 가게를 더 일찍 떠나기 위해 그것을 인색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우리가 진실로 나는 하나님을 위해 이 일을 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겠는가? 이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다. 바울이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시다라고 말했을 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것을 의미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흠뻑 빠져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었다. 그의 삶은 온전히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시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썼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먹고 마시는 것조차도 이 높은 이상에 포함된다. 탐식과 음주의 부절제의 죄는 정죄된다. 우리는 또한 위생적으로 먹어야 한다.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살지 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한 영광을 반영하고 신성한 영광을 위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산다라고 말했을 때 의미했던 것의 일부다.

 

모든 일에서 양심의 인도를 따르고, 항상 옳은 일을 행하면서도, 주님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나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전혀 갖지 않고, 우리가 말하거나 행동하는 일에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생각도 가질 수 없다. 교회 도덕을 우리의 삶의 규칙으로 받아들이고, 가장 작은 일에서도 그것을 따르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그를 사랑하지도 않을 수 있다. 가수가 나는 하나님께 노래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노래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직접 찬양과 사랑을 쏟아부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현실로 만든다면, 이런 식으로 사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놀라운 영감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위에 있는 사람들 밑에서 일하는 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들은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고, 불공평하게 대하며, 우리에게 불친절하고, 봉사를 강요하거나 명령을 집행하는 방식에서 압제적이다. 우리는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가혹함이나 불친절을 견뎌야 할 때 초조해하고 괴로워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 주인의 또 다른 주인을 의식하고 그가 우리가 실제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모든 것이 바뀐다. 그분은 결코 불공평하거나 부당하거나, 결코 가혹하거나 불친절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위해 기쁘게 일할 수 있으며, 우리 바로 위에 있는 인간 주인의 완고함이나 비인간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견뎌야 할 가혹함, 불의, 불친절을 감당할 수 있을지라도, 만일 그 자리에 머물면서 항상 그리스도의 눈과 사랑과 동정심을 바라보며 우리를 바라보고 그분을 위한 모든 가혹함을 견디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우리는 견뎌야 할 가혹함, 불의, 불친절을 견뎌야 할 것이다.

바울은 종들에게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주인에게 순종하라고 권고한다.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너희가 주께로부터 기업의 보상을 받을 줄을 앎이니 이는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니라.” 그것은 가장 힘겨운 봉사가 이런 식으로 행해질 때, 즉 인간 주인을 넘어서서 그리스도를 우리가 일하고 있는 진정한 주인으로 볼 때 쉽게 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고 있다. 우리는 그분을 섬기고 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우리의 신실함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죽음의 연관성에서 말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우리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니라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우리를 이상하게 여기고 놀라게 한다. 죽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방해한다. 그것은 인생의 다른 구절과 같다. 죽어가는 것은 삶의 한 단계 또는 체험일뿐이다. 우리는 죽을 때와 죽은 후에도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 말은 놀랍도록 빛나고 있다. 그들은 죽음의 신비에 밝은 빛을 던진다. 우리는 죽음으로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와 그분 사이의 관계는 깨지지 않았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봉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형태의 봉사에만 전달한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의 삶을 단절시키고, 방해하고,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킨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진실은 삶이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이전과 매우 똑같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었을 때 우리의 체험에서 크게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며, 이상하거나 특이한 것도 없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모두 하나이며, 동일한 지속적인 존재의 일부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러므로 죽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구약 성경은 그것을 모든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평화를 주는 목자와 함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으로 표현한다. 신약성경에서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면서 이 땅을 떠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비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순간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데려가 영원히 그와 함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애착을 방해받지 않고 주님을 위해 죽어야 하며, 그런 다음 하늘 생활에서 계속해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인생은 하늘에서 축복받은 활동과 함께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 성격이 다를지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영원을 통해 영원토록 존재한다. 그분은 단지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다. 종종 이것은 곤경에 처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우리는 당분간 그를 구제할 수 있지만, 그 기회가 지나면 그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아마도 그의 옛 문제로 돌아가고, 그와 우리의 관계는 끝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그것은 영원하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사랑과 삶 속으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결코 깨지지 않을 관계를 맺으신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그분께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분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불충실하고 멀리 방황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회개하고 그분께 다시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의 자리로 다시 받아주실 것이다. 결혼 언약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 이유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는 그러한 제한이 없다. 죽음은 우리를 그에게서 갈라놓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늘 생활에서 그분께 속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그분을 따라야 하며, 그 다음에는 오는 세상에서 영원히 그분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행한 것처럼 땅에서도 행하고, 하늘에 이르러서도 그분의 뜻을 계속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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