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은 아름다워야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을 만들지 않으셨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품성의 어떤 특성들을 지칭하면서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어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인생에서 아름답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파라는 “단 하나의 실패가 있습니다. 즉, 자신이 아는 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모르덴은 “평범한 것, 일반적인 것에 만족할 때, 그 평범함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때, 하찮은 일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때”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성격 저하의 징후로 명명한다.
자기 통제는 모든 삶에서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다. 그것은 성격의 단일 요소가 아니라 다른 요소와 관련된 것이다. 자기 통제는 여러 요소를 모두 하나로 묶는다. 그리스도인의 고귀한 성품의 자질에 대한 성령의 열매 중 하나에서 바울은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선함, 신실함, 온유함을 명명하고 자기 통제로 끝난다. 자기 통제는 자제력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에 대한 왕권이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우리 자신이 앉아 있다. 우리의 자리는 왕좌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면, 우리의 본성에 제멋대로이고 우리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왕이 아니다. 우리 왕국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의 삶의 힘은 나뉜다. 강한 사람은 온 존재가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이다.
완벽한 자기 통제는 이상적인 삶이다. 우리는 활기찬 말 마차를 운전하는 사람과 같다. 그가 운전석에 앉아 있고 말들이 그에게 암묵적으로 복종하는 한, 줄에 가해지는 약간의 압력을 인정하면 그 말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동물들이 반항하고, 조금씩 움츠러들기 시작하고, 운전자의 자극에 순종하지 않고, 운전자의 안내에서 벗어나 돌진한다면, 그 운전자는 통제력을 잃은 것이다. 운전자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인생의 모든 고삐에 손을 얹을 때 자제력이 있다. 그는 자신의 기질, 말, 감정, 욕구를 완전히 지배할 때 왕이 된다. 그가 부상과 잘못으로 조용히 있을 수 있을 때, 꼼짝하지 않고,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을 때, 인내심을 갖고 유혹 가운데서 굴복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여전히 심한 도발을 받게 된다. .
모욕을 당할 때 사람은 격렬한 분노로 터져 나올 수 있으며, 분노의 격렬함 속에서 매우 ‘천둥의 아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 아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침묵을 지키고 뺨이 하얗게 된 채로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억제하고 원망하지 않고 마음에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현자(賢者)는 이렇게 말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강한 자보다 나으니라. 자기 영을 다스리는 자가 한 성을 차지하는 자보다 낫다.”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자신의 성질을 제어하거나, 자신의 말을 억제하거나, 자신의 혼을 침착하게 조용히 유지할 수 없다. 그런 삶에는 아름다운 것이 없다. 초조함, 불만, 걱정, 조급함보다 더 효과적으로 삶을 망치는 것은 없다. 모든 흥분, 모든 기질, 모든 분노, 모든 욕구와 열정(劣情)으로 만들어진 삶보다 더 불쌍한 것은 없다. 우리는 강하고, 왕 답고, 고귀하고, 평온하고, 평화로워져야 한다. 어떤 사람은 “알렉산더는 알렉산더 자신을 제외한 온 세상을 정복했다”고 말한다.
자기 통제는 강할 뿐 아니라 아름답기도 하다. 분노는 아름답지 않다. 다스리지 않는 기질은 사랑스럽지 않다. 분노는 악마다. 그러나 감정의 폭풍과 온갖 종류의 번뇌 속에서도 평온하고 강하고 동요하지 않는 영은 그 아름다움에 있어서 숭고하다. “화를 다스리고, 부드러움과 인내로 가라앉은 마음, 소망으로 선한 목소리를 내고, 친절로 밝은 얼굴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지극히 귀중한 소유물이다.”
성경은 자기 통제의 본들을 제시한다. 하나는 사울 왕의 기름 부음 이야기다.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받아들였다. “모든 백성이 소리쳐 이르되 왕 만세.”를 외쳤다. 그런 다음 그는 그의 집으로 갔고, 거기에 주님도 그와 함께 갔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기를 그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어떤 무가치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리요? 그들은 그분을 업신여기고 선물을 가져오지 않았다.” 사울은 이제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가해진 모욕에 분개했을 수도 있고,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제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무가치한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 그는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을 행할 때 모욕을 분개하고 보복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길은 전혀 말하지 않거나 분노를 돌리는 부드러운 대답을 하는 것이다. 적을 정복하는 방법은 그를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경멸을 무시하고 조용히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 불친절에 대한 친절을 갚는 것이 진정한 승리를 얻는 길이다. 비웃음과 욕설과 학대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끈질긴 인내와 온유함의 삶이다.
우리는 모든 고귀한 자질과 마찬가지로 자기 통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예를 가지고 있다. 그 예는 예수님이다. 혀는 신체의 모든 지체 중에서 통제하기 가장 어렵다. 아무도 그것을 길들일 수 없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혀를 완벽하게 다스렸다. 그분은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분은 절대 무심코 말하지 않았다. 적들에게 몹시 공격을 받았을 때, 그들이 그분의 말로 그분을 붙잡으려 할 때, 거짓 고발로 그분을 화나게 하려고 할 때, 그분은 침착을 유지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성급하고 더러운 말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그영을 통제하지 못하게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입술로 침묵을 지킬 수 있지만, 마음 속에서는 불이 뜨겁게 타오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도발 속에서도 그분의 마음에 사랑을 간직했다. 그분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주인이었다. 그분은 절대 화를 내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분이 욕을 당했을 때 그분은 욕하지 않았다. 그분이 미움을 받았을 때 그분은 계속 사랑했다. 그분의 손에 못이 박혔을 때, 그분의 상처에서 나온 피는 구속의 피가 되었다. 또한,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과 온갖 상처와 모욕 아래서도 침묵을 지킨 것은 예수님의 연약함이 아니었다. 그분이 자신을 보호하고 박해자들을 쳐부치기 위해 천사들의 군단을 소환하지 않으실 수 있었던 순간은 없었다. 그분은 저항할 수 있었을 때 자발적으로 잘못을 받아들였다. 그분은 적을 짓밟을 수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분은 불친절에 대해 친절을 갚으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에게 잘못에 대해 참을성 있게 인내하고, 화를 내며 비난하기보다는 침묵의 고통을 겪는 본을 보여 주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제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신다. 온유함은 팔복 중 하나다. 그것은 모욕과 그릇된 행위 아래서 억제된 무르익은 열매이다. ‘불의에 익숙해지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많은 것들을 견디면서도 참을성 있고 다정하게 유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불의를 견뎌내는 것은 용서에 대한 우리 주님의 측정에 포함된 ‘70X7’을 넘어서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확실히 주(主)는 자신의 삶에서 불의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분은 이 그릇된 국면에서도 침묵을 지켰고, 그분의 모범적 교훈을 우리에게 남기셨다.
자기 통제의 아름다움! 그것은 항상 아름답고, 그것의 부족은 항상 흠이다. 그 은혜로 우리를 사로잡은 사랑스러운 얼굴은 어떤 흥분 속에서 나쁜 성질이 터지면 즉시 매력과 끌림을 잃는다. 성난 얼굴은 삶을 훼손시킨다. 그것은 천사를 숨기고 악마를 드러낸다. 자기 통제는 평온함과 침착함을 준다. 그것은 큰 경우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경우에도 연습해야 한다. 하루에 백 번 그것은 우리를 약점과 혼란에서 구해 내고 우리를 강하고 조용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평화의 결과다. 만일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고요하고 평온하다면, 온 생애는 하늘의 보호 아래 있게 된다. 왕은 그의 왕좌에 있고 어디에도 잘못된 통치가 없다.
우리 삶에 그토록 큰 의미가 있는 이 자기 통제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우리가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그것 없이는 약하다.
‘자신보다 자신을 세울 수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불쌍한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단순한 결심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자기 통제를 주장하고 그것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단순한 선포만으로 자신을 왕좌에 앉힐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이겨야 하고 훈련으로 이겨야 하는 특성이다. 그것은 배워야 할 교훈이며, 배우는 데 여러 날이 걸리는 긴 교훈이다. 로웰은 말했다.
“아름다움과 진리와 여기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은 우리 밑부분에 익은 열매와 같지 않다. 우리는 수년간의 땀과 고통을 통해 높은 곳에 열리게 된다.”
우리는 교훈을 배우는 데 신성한 도움이 필요다. 그러나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의 몫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우리가 침착하고 자기 통제를 하려고 노력할 때, 그분은 우리 마음에 자신의 힘을 넣어 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강해지고 자제력을 얻게 될 것이다. 완성은 천천히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하늘의 완성에 도달하는 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우리는 그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든 학습과 체험의 합이다. 그것은 모든 영적 문화의 완전성이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닌 한 사람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으며, 약한 때에 왕권을 잃고 쫓겨날 수 있다. 모세가 자기 통제를 배우는 데는 40년이 걸렸지만, 그는 세상의 대학들에서 그것을 배우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의 스승이시고 그의 학교가 광야에 있을 때에 비로소 그는 그것을 마스터했다. 그러다가 슬퍼했고, 자기 통제를 소홀히 하는 순간에 그는 한순간 왕권을 잃고 무심코 몇 마디 말을 하다가 실패하고 일을 마치지 못했다.
자기 통제를 하는 것의 부족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생각해 보라! 한순간에 고삐를 떨어뜨리고 잘못된 결정이 내려지고, 유혹이 받아들여지고, 전투에서 패배하고, 화려한 삶이 파멸에 빠진다. 자지 통제의 은혜를 얻자.
'자기통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없어서는 안 될 그리스도 (0) | 2023.09.06 |
---|---|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 (0) | 2023.09.05 |
우리의 사명 찾기 (2) | 2023.09.03 |
쟁기질 (0) | 2023.09.02 |
그리스도인의 자기 통제 (0) | 2023.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