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신부를 찾으라

한새사람으로 초대됨

Hernhut 2023. 4. 9. 17:19

함께 걷는 여행

 

 

창세기 24:58에서 리브가가 받은 질문이 있었다.

 

저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이 질문에 리브가는 반응하고 대답했다.

 

, 따라가겠어요.”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라도 직면하고, 맞닥뜨리게 되는 아주 중요한 질문과 대답이다. 이 질문과 대답은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이유와 관계가 있다. 한 사람이 계시 된 목적을 위해 구원을 받았고, 이 구절의 질문과 대답이 구원받는 기본적인 단계다.

 

 

그영의 사역

 

 

성령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으시려고 세상 아니 교회에 계신다. 이것은 창세기 24장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장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영원한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구원은 창세기 22장에서 볼 수 있다. 이 장은 오히려 구원의 목적에 관한 것이요, 오늘날 교회 시대에 말씀하신 내용이요, 뼈대이며,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장면으로 이스라엘이 오늘날 따로 떼어지는 것에서(23),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그림(25)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1) 예표에서 그영의 사역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의 신부를 얻기 위해 메소포타미아로 노종을 보냈다. 그전에 아브라함은 노종에게 맹세하게 했다. 아들의 신부를 나의 친족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야 한다는 맹세였다(창세기 24:3, 4, 9).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식력에 따라 그의 하인에게 맹세하게 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아브라함 가족에게서 오는 신부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노종은 낙타 열 마리를 몰고 메소포타미아로 몇 날을 걸어갔다. 이것은 주인의 모든 재산이 그의 손에 있다라는 뜻으로, 순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였다. 그리고 이 재산은 아버지의 것이고, 언젠가는 아들의 것이 될 것이다. 한 면에서, 이삭은 이미 이러한 재산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창세기 24:36).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의 신부를 얻고, 아들이 결혼하고, 아버지가 재혼할 때까지 실제로 이 재산들을 아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창세기 25:5). 그 노종에게 주인의 모든 재산이 맡겨졌다. 그 노종은 이 재산들을 메소포타미아로 가지고 가서 예비 신부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예비 신부에게 그녀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만약 그녀가 받아들인다면 이삭의 아내가 된 신부는 이삭과 함께 상속받게 되었다. 이삭의 것이 그녀의 것이 될 것이다. 신부는 이삭을 완전케 하고, 그들은 한 몸이 될 것이며, 그들은 하나의 완전한 사람으로 함께 상속받을 것이다(창세기 2:21-24).

 

2) 실제에서 그영의 사역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종은 그영을 의미한다. 이 그영은 오늘날, 이 땅, 아니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이 신부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찾고 계신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당에만 가면 다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줄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영께서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고 계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진 시기인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한새사람으로 구성된 사람 중에서 신부를 찾고 계신다(창세기 23:1, 2; 25:1-4). 그리고 그영은 아브라함의 노종이 했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여 예비 신부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버지의 모든 은사를 그분의 소유로 가지고 계신다. 한 면에서, 예표와 같이, 그리스도는 이미 주인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마태복음 2:2; 28:18; 요한복음 18:33-37; 19:19). 이것은 왕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이미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왕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아들의 신부를 얻고, 아들이 결혼하고, 아버지가 그의 아내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까지 아버지는 실제로 이 재산을 아들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다니엘 7:12-14; 요한계시록 19:7-21). 그리스도는 왕권을 쥐기를 기다리다가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야 그는 모든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 이 모든 일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는 그분의 사역이 끝나갈 무렵,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가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강하게 하시는 분, 곧 진리인 그영이 올 때, 그영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영이 스스로 말하지 않게 하겠고, 내가 그영이 듣게 하는 모든 것을, 내가 그영이 말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영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다. 내가 그영이 나를 영화롭게 하게 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그영이 내 것을 받게 하여, 너희에게 보여주게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영이 내 것을 받게 하여 너희에게 보여주게 하겠다.’라고 말했다.”(요한복음 16:12-15)

 

그영은 오늘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신부를 찾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지난 시간 동안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받아들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씀에서 앞으로 올 것에 대한 모든 진리을 밝히면서 신부를 찾는 것을 수행하신다. 그영은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것을 밝히고 계신다. 그분은 예비 신부에게 그녀의 것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 곧 재산을 보여주신다. 신부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으며, 그와 공동 상속자로서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소유는 모두 신부의 것이 될 것이다. 창세기 2장에 있는 결혼 관계에서 보듯이 신부는 그리스도를 완성할 것이다(히브리서 2:10). 그들은 한 육체가 될 것이고, 완전한 사람으로 함께 상속받게 될 것이다(창세기 2:21-24; 5:22-32)

 

 

구원, 목적, 경륜들

 

 

창세기 24장에 있는 계시는 종종 영원한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다. 이게 오늘날 일반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교리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널리 퍼져 있는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오늘날 성경의 해석과 이해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원문과 다르게 파생되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24장이 영원한 구원을 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은혜의 구원을 손상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창세기 24장을 영원한 구원으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 전체를 오도하게 하는 것이다.

이 장에 나오는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닌 교회를 대하실 때 행해지는 뚜렷이 다른 그영의 일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특별한 그영의 일을 은혜에 의한 구원에 적용함으로써, 개인들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에 미치는 그영의 일이 오늘날 교회 시대와 과거 이스라엘에 미치는 것이 다르다고 오도할 수 있다. 그들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사람에 대한 그분의 사사로운 거래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고 오도할 수 있다. 이는 진리와 무관하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으로통과하는 방식과 그 일이 일어나는 근거는 제도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온 시대에 걸쳐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받는다. 주님은 그영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구원하시고, 그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흘리는 것을 기초로 하여 구원하신다. 이는 인류가 시작될 때 하나님이 한 동물을 죽이고 아담과 하와에게 동물의 가죽을 입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원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의 변함없는 것 중 하나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으로지나가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성경을 통해 어느 때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창세기 첫 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똑같다. 변화할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사로운 거래뿐이다. 그리고 인간과 이러한 사사로운 거래는 오직 구원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따라서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분배라는 단어는 관리와 관련된 복합어인 헬라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유래했다. 어원이 같은 단어는 오이코노모스oikonomos’인데, 오이코스oikos()와 네모nemo(관리하다)라는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합성어다. 그러므로 오이코노모스oikonomia’는 집 관리와 관련이 있다. , 중심적인 가장이 책임지고, 다른 사람들은 가장 밑에서 집의 사무를 맡는 것이다. 그리고 분배를 뜻하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같은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분배는 주님이 자신의 집을 책임지게 한 관리인을 통해 주님의 집을 관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과거 시대에서 이 집은 이스라엘이요, 오늘날은 교회다. 그리고 장차 주의 날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개종하고, 회복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영이 신부를 찾는 것을 완성하신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교회와 거래하시며, 이스라엘과 교회를 통해 이방 민족들과 거래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표현은 당면한 문제, 즉 이스라엘에 하늘에 속한 나라를 제안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마태복음 10:6; 15:24). 그것은 왕국과 관련된 구원의 문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잃어버린 존재로 여겨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집안 관리자로서 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오직 한 가지 방법, 죽음에서 생명으로지나가도록 하신다. 각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영적 가치를 평가하시기 전에 영적 생명 안에 살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거듭나는 이유 역시 구원의 수단 그 자체로서 인자의 날 내내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 이유는 창세기 1-3장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성경 전체에 걸쳐 완전히 일정하게 남아있다. 이 세 장은 인간의 창조, 타락, 구원을 계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려고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사탄이 창조 사역에 침입했고, 그의 침입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좌절시키려고, 인간을 타락하게 하고 몰락하게 했다. 그리고 인간의 회복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목적을 완성할 수 있는 위치로 다시 데려오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인간 구원의 목적은 실제와 관계되는 창조물의 목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중심 목적의 다른 면들은 하나님의 인간과의 불필요한 거래로 나중에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교회와 관련이 있기도 하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부르심이 항상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에서 땅에 속한 부르심과 관련해 유대인들과 거래하셨다. 그리고 이 하늘에 속한 부르심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맨 앞에 선포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것은 꽤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실 때 이스라엘에서 빼앗은 하늘에 속한 부르심으로만 거래하신다(마태복음 21:33-43; 히브리서 3:1). 이런 점에서 인간 구원의 목적은 구원 그 자체보다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과 목적 안에서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뀔 때라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았고, 그분의 구원은 항상 실재적 관점으로 구원하신다. 둘 다 인자의 날에 일정하게 유지된다. 유일하게 바뀌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거래하시는 경륜의 시대와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다른 측면과 관련이 있다.

 

1) 과거 시대의 이스라엘

 

과거 시대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불려 나와서, 왕권과 관련하여, 땅에 속한 부르심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도망쳐 나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한 땅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맏아들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출애굽기 4:22, 23), 민족은 이 땅 안에서 맏아들의 권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맏아들의 권리는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맏아들은 집안에서 다스리는 자가 되고, 집안의 제사장이 되며, 아버지의 모든 재산의 두 배를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 아래에서 맏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실 때 이스라엘에 준비하신 것입니다. 맏아들의 권리들은 이스라엘과 민족적 지역에 관련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집은 더 넓은 범위에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국 안에 있는 지방인 이 땅이 될 것이다. 온 땅을 채우는 그리스도의 왕국, 주의 산은 땅의 모든 나라 위에 세워지고, 산꼭대기에 세워질 것이며, 모든 속국과 낮은 땅 위에 세워진 민족들은 언덕 위에 세워진 민족을 높이 올려 볼 것이다.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흘러갈 것이다(이사야 2:2; 다니엘 2:34, 35, 44, 45). 그런 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맏아들의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마태복음 10:6; 23:38). 주님은 이스라엘, 집안의 종들로 구성된 그분의 집을 통해 그분의 집, 그분의 땅을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의 맏아들로서의 이스라엘은 온 집안에 분배될 것이며, 맏아들의 모든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왕의 직분과 제사장의 직분을 모두 행사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모든 이방 민족들을 통치할 뿐만 아니라 이 민족들도 이스라엘을 통해 축복받을 것이다(창세기 12:1-3; 22:17, 18; 출애굽기 19:5, 6; 민수기 23:9; 신명기 7:1-24; 28:1-31). 그러면 아버지의 모든 것 가운데서 두 배의 몫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오직 왕국의 하늘과 땅의 영역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왕국의 이 두 영역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으며,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창세기 14:17-24; 22:17, 18; 마태복음 8:11, 12; 히브리서 11:8-16). 왕국의 땅에 속한 영역은 하늘에 속한 영역을 둘러싼 문제들이 항상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의 대부분을 통하여 맨 앞자리에 남아있었다. 그 후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셨을 때 왕국의 하늘에 속한 영역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왕국의 땅에 속한 영역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확장되었다. 그러나, 최종 분석에 의하면, 불신과 불복종을 통해, 유대인들은 그들의 높은 하늘에 속한 부르심을 모욕한 것이 됐다. 그리고 모세 아래에서 가데스-바네아에서 일어난 민족의 활약을 보느냐,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에서 시작되는 후대의 활동을 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는 항상 같았다. 모세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생활은 책임 있는 세대 전체가 광야에서 전멸되는 결과를 낳았고, 궁극적으로 불신과 불복종으로 계속되는 세대의 활동은 결국, 신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민족이 땅에서 뿌리째 뽑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사이에 흩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 왕국의 하늘에 속한 영역이 이스라엘까지 확장되었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불신과 불복종과 관련된 회개를 요구받았고, 이것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민족이 회개를 거부했기 때문에, 왕국의 하늘에 속한 영역도 거부되었다. 하늘에 속한 영역을 상속받는 것은 회개와 불가분의 관계였다(마태복음 3:1, 2; 4:17). 그리고 이 거절은 이스라엘에 제안하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불순종하고, 땅에 속한 영역의 왕국으로 그들을 부르신 높은 소명을 창녀로 삼았다. 그리고 그 왕국은 메시아가 나타나기 약 육백 년 전에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았다. 그러고 나서, 메시아가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다가왔다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나타났을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들은 회개를 집요하게 거부했고, 그녀에게서 하늘에 속한 영역의 왕국은 무너졌다. 이것은 불신, 불복종, 회개 거부로 인해 유대인들의 높은 소명에 대한 매춘의 총체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교도 이방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진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왕 유대인의 왕 나사렛의 예수의 십자가형을 요구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절정에 이르게 했다(마태복음 2:2; 요한복음 18:31-37; 19:14, 15). 이스라엘이 창세기 23장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22장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것은 민족의 메시아가 죽고, 부활하고 난 후 이어서 이스라엘이 죽음의 장소에서 보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냐고 묻는 것일 것이다. 이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후 삼 일째 되는 날에 이삭이 일어난 후 이스라엘이 죽음의 장소에서 발견할 것을 예표한다.

 

2) 교회, 현시대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놓고,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에게서 그분의 이름을 위해 한 사람을 취하려고 눈을 돌리셨다(사도행전 15:14). 하나님이 완전히 새로운 집안에 속해 있는 종의 무리를 다스리는 새로운 분배가 뒤따랐다. 그리고 왕국에 관한 생각은 과거의 분배로부터 현재의 분배로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인간은 똑같은 목적을 위해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조성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럴 수 없다. 인간은 왕권을 목적으로 창조되었고, 인간의 타락은 이러한 목적 때문에 비롯되었다. 오늘날 통치자 사탄은 자신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의 타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에 대한 구원은 이러한 목적과 관련이 있다. 구원의 수단과 목적은 성경의 맨 처음에 설정된 것이며 이것은 결코, 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분배 사역으로 이스라엘을 대하실 때, 구원의 목적과 방법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분배 사역으로 교회와 거래할 때에도 구원의 방법과 목적은 계속하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복종이나 불복종을 둘러싼 긍정적인 약속이나 부정적인 결과도 분배와 관계없이 동일하다는 것에 주목하라. 어느 쪽이든 긍정적인 약속은 모든 이방 민족에 대해 고양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보인다(신명기 7:1-24; 마태복음 25:14-23; 누가복음 19:12-19; 요한계시록 2:26, 27). 그러나 두 가지 분배의 부정적인 결과는 반대로 나타난다(민수기 14:1-45; 마태복음 25:24-30; 누가복음 19:20-27; 히브리서 3:18-4:1). 하나님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리고 과거의 신권정치나 미래의 신권정치와 관련된 것이든 인간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반응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레위기 26:1-39; 신명기 28:1-67; 히브리서 10:23-11:16). 하나님은 과거 신정정치로 다스리실 때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거하셨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미래의 신정정치로 다스리실 때 그분의 백성 사이에 거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 신정정치로 다스리실 때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거하셨고, 왕권을 가지고 가장 웅장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미래의 신정정치로 다스리실 그분의 백성 사이에 거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이집트에서 불려 나온 것은 인간 창조의 목적으로 사탄이 인간 안으로 가져온 유혹이 인간이 타락하게 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가져오는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고, 이것은 왕권을 둘러싼 목적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있는 한새사람의 존재를 둘러싼 목적에서 다를 수 없다. 이 한새사람은 모세의 시대에 이집트에서 한 민족이 태어났듯이 존재하기 시작했고,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불려 나온 것처럼 오늘날 목적을 위해 세상 밖으로 불려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성경의 역사와 예언에 비추어 볼 때 자명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밝혀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한새사람은 왕의 지위를 행사하기 위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 제사장, 그리고 아버지의 선물의 두 배의 몫인 맏아들 권리의 완전한 스펙트럼까지도 반드시 시야에 들어와야 한다.

양자 된 교회는 하나님 맏아들의 위치에 놓일 것이다(히브리서 12:23). 그리고 이 맏아들 위치를 차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위치의 모든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 관한 한, 교회 시대 후 심판석에서 이러한 맏아들의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 상속을 구속받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을 위한 민족을 위해 교회 시대 동안 몰수되는 것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 2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님께서 그분의 신부를 찾는 교회 시대에 일어날 것이다. 이때 많은 사람이 선택되고, 양자가 되지만 이미 권리를 상실한 자들은 양자에 포함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두 민족적 맏아들인 이미 입양된 이스라엘과 아직 입양되지 않은 교회는 언젠가 맏아들의 권리를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민족의 회개와 수용에 따라, 다시 이 땅에 있는 구원받은 민족, 왕권과 제사장권을 행사하는 민족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신정통치 내에서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것이며, 민족들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비록 하늘에서 통치할 권리를 잃었지만,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으로 아들의 권리의 이중 부분을 얻게 될 것이다.

a. 하늘에서 통치할 자격이 있는 구약성경 성도들을 통해 그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마태복음 8:11, 12; 히브리서 11:8-16, 32-40). 또한, 복음서와 사도행전 시대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아들의 권리를 얻었다.

b. 아브라함의 씨앗인 개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통해, 유대인의 줄기에 접목되었다(로마서 11:13-21; 갈라디아서 3:29). 아들의 권리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입양돼 또 다른 국민적 맏아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아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제사장들의 왕국으로서 통치를 통해 맏아들의 권리를 행사할 것입니다. 이들은 맏아들의 이중 부분을 얻을 것이다. 이 맏아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실 모든 것, 즉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을 아버지와 함께 물려받아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통치할 것이다(창세기 24:36; 25:5; 요한복음 16:15; 로마서 8:16-23; 빌립보서 3:10-14; 히브리서 3:1; 요한계시록 1:6; 5:10).

 

이 사람과 같이 가겠느냐?”

 

너는 이 사람과 함께 갈 것이냐?’라는 질문은 오늘날 교회 시대에 이 땅에 계신 성령님의 일을 둘러싼 모든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님의 일은 그 개인에게 이 질문에 직면하시고, 각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면 그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그 시점부터 성령님이 그의 삶에서 어떤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어떤 직접적인 것에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영의 목표는 그리스도인을 언젠가 신부로서 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대답은 신부에 대한 그분의 탐색과 관련된 그영의 지속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억제하게 할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5:19; 에베소서 4:30). 그러나 긍정적인 반응은 그영이 개인의 삶에서 적절한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며, 그 개인이 앞에 놓은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가서, 나홀 성으로 갔다. ‘저녁이 될 때 도시에 가까워졌고, 그는 우물가로 가서 낙타들을 우물가에 앉게 했다. 그리고 그 종은 주님께 그의 여행이 셀 수도 없을 만큼 특별한 환경들을 통해 성공하도록 기도했다(창세기 24:10-14). 그 도시의 여인들이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올 때였다. 그 종이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는 이미 다른 여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나왔다. 종은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처녀로서 보기에 매우 아름다웠다라고 말했다. 그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온 뒤에, 그는 그녀의 주전자에 물을 마실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종이 요청을 하는 것 외에도, 그 종이 주께 기도할 때에 요구했던 모든 일을, 완전히 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녀는 종이 마실 물을 건네고 나서 그의 낙타들에게도 마실 물을 주었다(창세기 24:15-21).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가 불과 몇 분 전에 주님께 요청한 일을 이행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만물을 다스리셔서 그 종을 하루의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우물로 그녀를 인도하셨다. 이때 리브가는 그 성읍의 다른 여인들과 함께 보통 우물에 물을 길어 왔다. 주님은 종과 리브가가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주님은 종의 사명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체계적인 방법으로 일을 계속 펼쳐 나가셨다.

모세와 그의 신부의 첫 만남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난다. 모세는 쫓겨 다닐 때와 유대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을 때 사이에 우물가에서 그의 신부를 만났다. 이것은 또 다른 기준 안에서, 모세가 예수님을 예표로 나타내는데, 이방인 신부를 데려간 창세기 25장의 사건 사이의 시간에 해당한다(출애굽기 2:15-21). ‘은 성경에서 그영과 말씀을 모두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요한복음 2:7-10; 4:14; 7:37-39; 에베소서 5:26).

리브가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을 통해 본 상징성, 종과 리브가가 하는 행동은 영적인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 24장은 오늘날 세상에서 그영의 사역에 대한 진정한 본질과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종은 이 장에서 신부를 찾아 헤맨다. 성경의 이 시점에서 그 문제는 변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종은 반드시 신부를 찾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에게 성령님의 사역이 신약에 나타나듯이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구약, 특히 창세기 24장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이해해야 한다. 문자적으로, 아브라함의 종은 뒤로 물러서서 리브가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그와 그의 낙타들을 위해 물을 길어 준 후에야, 주께서 그의 기도대로 그의 여행에 성공하도록 해 주셨음을 보고, 그는 행동을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주인의 물건 중에서 몇 가지 엄선된 것들을 가지고 나와, 낙타들과 보석들을 리브가에게 주었다(창세기 24:15-22).

종은 처음에는 이 보석들과 물품들 일부분만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주인의 아들을 위한 신부를 구하기 위해 그의 여행의 목적을 알게 된 후, 그는 더 많은 보물을 가져오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리브가에게도 주었다(창세기 24:33-53). 그제야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 수 있는 사람 리브가는 그 종의 제안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됐고, 그 뒤의 비전을 완전히 알게 되었고, 그녀는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창세기 24:58a)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질문과 관련된 어떠한 강요도 없었다. 그녀가 보게 된 비전이 충분히 드러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종이 알려 준 것과 그녀에게 보여준 것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그녀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리브가의 대답은 아브라함과의 가족 관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이런 가족 관계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리브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녀의 가족 관계는 완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리브가의 반응은 이 남자와 함께 가겠다.’라는 그녀의 의지와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와 함께 가는 것은 언젠가 그녀가 그 남자를 통해 드러난 모든 것들을 깨닫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리브가의 긍정적인 반응은 나는 갈 것이다.’(창세기 24:58b)라는 대답은 매우 단순한 말이다. 리브가는 그녀의 대답에 따라 언젠가 이삭의 아내가 되어 이삭과 함께 상속받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의 일은 그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앞으로 벌어질 문제들과 함께 그녀의 삶에서 계속될 것이다.

부정적인 반응으로 리브가의 삶에서 이러한 것들이 실현되지 않는 결과를 낳았으리라는 것에 주목하라.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가족의 일원이었어도, 그 종이 그녀에게 제안하지 않고 계속해서 찾는 일을 계속할 수는 있다. 그럴 때 그녀는 언젠가 이삭의 아내가 되어 그와 함께 상속받을 수는 없었다.

예표에서 계시 된 것으로 보면 오늘날 예수님의 신부를 찾으시는 세상에 계신 그영의 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여야 한다.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종의 일이 그영의 일을 예표하고 있다. 그리고 예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실제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은 이 목적을 위해 따로 마련된 교회 시대에 그분의 찾는 일을 수행하고 있으며, 예표과 마찬가지로 가족 구성원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분의 신부를 찾는 일을 수행하고 계신다.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 생명을 호흡하는 성령님을 통해 구원에 이어, 성령님은 개인의 삶에서 그 사람을 기본적인 이해인 그노시스gnosis에서 성숙한 이해인 에피그노시스epignosis로 인도하도록 설계된 일을 시작한다. 이 일은 우물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물에서 그림을 깊이 그릴 수 있는 위치로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성령님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모든 진리 속으로이끌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신다. 예표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오늘날 창세기 24장에서 본 다양한 면의 더 작은 부분과 더 단순한 부분에 관심 두게 한다. 기본적인 것들은 사람이 처음에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진행되고 사람들이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면, 점점 더 많이 성경을 펴서 언젠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실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 그리고, 예표와 완전히 같은 선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최소한 어떤 예표의 이해를 얻은 후에야 이 사람과 함께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그 사람은 비록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지만 비교적 간단한 질문을 받고, 그는 전체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에 이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에 대한 그 사람들의 대답은 가족 관계, 즉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주목하라. 그러나 언젠가 그가 아들의 아내가 되어 공동상속자로 상속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할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그리고 그들이 리브가를 불러,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가겠습니다.’”(창세기 24:58)

 

창세기 24:58에서 리브가가 받은 질문이 있었다.

 

저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이 질문에 리브가는 반응하고 대답했다.

 

, 따라가겠어요.”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라도 직면하고, 맞닥뜨리게 되는 아주 중요한 질문과 대답이다. 이 질문과 대답은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이유와 관계가 있다. 한 사람이 계시 된 목적을 위해 구원을 받았고, 이 구절의 질문과 대답이 구원받는 기본적인 단계다.

 

 

그영의 사역

 

 

성령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으시려고 세상 아니 교회에 계신다. 이것은 창세기 24장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장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영원한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구원은 창세기 22장에서 볼 수 있다. 이 장은 오히려 구원의 목적에 관한 것이요, 오늘날 교회 시대에 말씀하신 내용이요, 뼈대이며,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장면으로 이스라엘이 오늘날 따로 떼어지는 것에서(23),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그림(25)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1) 예표에서 그영의 사역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의 신부를 얻기 위해 메소포타미아로 노종을 보냈다. 그전에 아브라함은 노종에게 맹세하게 했다. 아들의 신부를 나의 친족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야 한다는 맹세였다(창세기 24:3, 4, 9).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식력에 따라 그의 하인에게 맹세하게 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아브라함 가족에게서 오는 신부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노종은 낙타 열 마리를 몰고 메소포타미아로 몇 날을 걸어갔다. 이것은 주인의 모든 재산이 그의 손에 있다라는 뜻으로, 순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였다. 그리고 이 재산은 아버지의 것이고, 언젠가는 아들의 것이 될 것이다. 한 면에서, 이삭은 이미 이러한 재산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창세기 24:36).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의 신부를 얻고, 아들이 결혼하고, 아버지가 재혼할 때까지 실제로 이 재산들을 아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창세기 25:5). 그 노종에게 주인의 모든 재산이 맡겨졌다. 그 노종은 이 재산들을 메소포타미아로 가지고 가서 예비 신부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예비 신부에게 그녀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만약 그녀가 받아들인다면 이삭의 아내가 된 신부는 이삭과 함께 상속받게 되었다. 이삭의 것이 그녀의 것이 될 것이다. 신부는 이삭을 완전케 하고, 그들은 한 몸이 될 것이며, 그들은 하나의 완전한 사람으로 함께 상속받을 것이다(창세기 2:21-24).

 

2) 실제에서 그영의 사역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종은 그영을 의미한다. 이 그영은 오늘날, 이 땅, 아니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이 신부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찾고 계신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당에만 가면 다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줄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영께서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고 계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진 시기인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한새사람으로 구성된 사람 중에서 신부를 찾고 계신다(창세기 23:1, 2; 25:1-4). 그리고 그영은 아브라함의 노종이 했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여 예비 신부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버지의 모든 은사를 그분의 소유로 가지고 계신다. 한 면에서, 예표와 같이, 그리스도는 이미 주인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마태복음 2:2; 28:18; 요한복음 18:33-37; 19:19). 이것은 왕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이미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왕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아들의 신부를 얻고, 아들이 결혼하고, 아버지가 그의 아내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까지 아버지는 실제로 이 재산을 아들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다니엘 7:12-14; 요한계시록 19:7-21). 그리스도는 왕권을 쥐기를 기다리다가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야 그는 모든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 이 모든 일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는 그분의 사역이 끝나갈 무렵,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가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강하게 하시는 분, 곧 진리인 그영이 올 때, 그영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영이 스스로 말하지 않게 하겠고, 내가 그영이 듣게 하는 모든 것을, 내가 그영이 말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영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다. 내가 그영이 나를 영화롭게 하게 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그영이 내 것을 받게 하여, 너희에게 보여주게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영이 내 것을 받게 하여 너희에게 보여주게 하겠다.’라고 말했다.”(요한복음 16:12-15)

 

그영은 오늘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신부를 찾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지난 시간 동안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받아들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씀에서 앞으로 올 것에 대한 모든 진리을 밝히면서 신부를 찾는 것을 수행하신다. 그영은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것을 밝히고 계신다. 그분은 예비 신부에게 그녀의 것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 곧 재산을 보여주신다. 신부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으며, 그와 공동 상속자로서 상속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소유는 모두 신부의 것이 될 것이다. 창세기 2장에 있는 결혼 관계에서 보듯이 신부는 그리스도를 완성할 것이다(히브리서 2:10). 그들은 한 육체가 될 것이고, 완전한 사람으로 함께 상속받게 될 것이다(창세기 2:21-24; 5:22-32)

 

 

구원, 목적, 경륜들

 

 

창세기 24장에 있는 계시는 종종 영원한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다. 이게 오늘날 일반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교리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널리 퍼져 있는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오늘날 성경의 해석과 이해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원문과 다르게 파생되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24장이 영원한 구원을 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은혜의 구원을 손상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창세기 24장을 영원한 구원으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 전체를 오도하게 하는 것이다.

이 장에 나오는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닌 교회를 대하실 때 행해지는 뚜렷이 다른 그영의 일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특별한 그영의 일을 은혜에 의한 구원에 적용함으로써, 개인들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에 미치는 그영의 일이 오늘날 교회 시대와 과거 이스라엘에 미치는 것이 다르다고 오도할 수 있다. 그들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사람에 대한 그분의 사사로운 거래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고 오도할 수 있다. 이는 진리와 무관하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으로통과하는 방식과 그 일이 일어나는 근거는 제도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온 시대에 걸쳐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받는다. 주님은 그영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구원하시고, 그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흘리는 것을 기초로 하여 구원하신다. 이는 인류가 시작될 때 하나님이 한 동물을 죽이고 아담과 하와에게 동물의 가죽을 입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원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의 변함없는 것 중 하나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으로지나가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성경을 통해 어느 때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창세기 첫 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똑같다. 변화할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사로운 거래뿐이다. 그리고 인간과 이러한 사사로운 거래는 오직 구원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따라서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분배라는 단어는 관리와 관련된 복합어인 헬라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유래했다. 어원이 같은 단어는 오이코노모스oikonomos’인데, 오이코스oikos()와 네모nemo(관리하다)라는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합성어다. 그러므로 오이코노모스oikonomia’는 집 관리와 관련이 있다. , 중심적인 가장이 책임지고, 다른 사람들은 가장 밑에서 집의 사무를 맡는 것이다. 그리고 분배를 뜻하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같은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분배는 주님이 자신의 집을 책임지게 한 관리인을 통해 주님의 집을 관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과거 시대에서 이 집은 이스라엘이요, 오늘날은 교회다. 그리고 장차 주의 날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개종하고, 회복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영이 신부를 찾는 것을 완성하신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교회와 거래하시며, 이스라엘과 교회를 통해 이방 민족들과 거래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표현은 당면한 문제, 즉 이스라엘에 하늘에 속한 나라를 제안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마태복음 10:6; 15:24). 그것은 왕국과 관련된 구원의 문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잃어버린 존재로 여겨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집안 관리자로서 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오직 한 가지 방법, 죽음에서 생명으로지나가도록 하신다. 각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영적 가치를 평가하시기 전에 영적 생명 안에 살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거듭나는 이유 역시 구원의 수단 그 자체로서 인자의 날 내내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 이유는 창세기 1-3장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성경 전체에 걸쳐 완전히 일정하게 남아있다. 이 세 장은 인간의 창조, 타락, 구원을 계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려고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사탄이 창조 사역에 침입했고, 그의 침입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좌절시키려고, 인간을 타락하게 하고 몰락하게 했다. 그리고 인간의 회복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목적을 완성할 수 있는 위치로 다시 데려오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인간 구원의 목적은 실제와 관계되는 창조물의 목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중심 목적의 다른 면들은 하나님의 인간과의 불필요한 거래로 나중에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교회와 관련이 있기도 하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부르심이 항상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에서 땅에 속한 부르심과 관련해 유대인들과 거래하셨다. 그리고 이 하늘에 속한 부르심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맨 앞에 선포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것은 꽤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실 때 이스라엘에서 빼앗은 하늘에 속한 부르심으로만 거래하신다(마태복음 21:33-43; 히브리서 3:1). 이런 점에서 인간 구원의 목적은 구원 그 자체보다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과 목적 안에서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뀔 때라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았고, 그분의 구원은 항상 실재적 관점으로 구원하신다. 둘 다 인자의 날에 일정하게 유지된다. 유일하게 바뀌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거래하시는 경륜의 시대와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다른 측면과 관련이 있다.

 

1) 과거 시대의 이스라엘

 

과거 시대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불려 나와서, 왕권과 관련하여, 땅에 속한 부르심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도망쳐 나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한 땅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맏아들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출애굽기 4:22, 23), 민족은 이 땅 안에서 맏아들의 권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맏아들의 권리는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맏아들은 집안에서 다스리는 자가 되고, 집안의 제사장이 되며, 아버지의 모든 재산의 두 배를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 아래에서 맏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실 때 이스라엘에 준비하신 것입니다. 맏아들의 권리들은 이스라엘과 민족적 지역에 관련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집은 더 넓은 범위에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국 안에 있는 지방인 이 땅이 될 것이다. 온 땅을 채우는 그리스도의 왕국, 주의 산은 땅의 모든 나라 위에 세워지고, 산꼭대기에 세워질 것이며, 모든 속국과 낮은 땅 위에 세워진 민족들은 언덕 위에 세워진 민족을 높이 올려 볼 것이다.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흘러갈 것이다(이사야 2:2; 다니엘 2:34, 35, 44, 45). 그런 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맏아들의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마태복음 10:6; 23:38). 주님은 이스라엘, 집안의 종들로 구성된 그분의 집을 통해 그분의 집, 그분의 땅을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의 맏아들로서의 이스라엘은 온 집안에 분배될 것이며, 맏아들의 모든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왕의 직분과 제사장의 직분을 모두 행사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모든 이방 민족들을 통치할 뿐만 아니라 이 민족들도 이스라엘을 통해 축복받을 것이다(창세기 12:1-3; 22:17, 18; 출애굽기 19:5, 6; 민수기 23:9; 신명기 7:1-24; 28:1-31). 그러면 아버지의 모든 것 가운데서 두 배의 몫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오직 왕국의 하늘과 땅의 영역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왕국의 이 두 영역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으며,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창세기 14:17-24; 22:17, 18; 마태복음 8:11, 12; 히브리서 11:8-16). 왕국의 땅에 속한 영역은 하늘에 속한 영역을 둘러싼 문제들이 항상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의 대부분을 통하여 맨 앞자리에 남아있었다. 그 후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셨을 때 왕국의 하늘에 속한 영역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왕국의 땅에 속한 영역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확장되었다. 그러나, 최종 분석에 의하면, 불신과 불복종을 통해, 유대인들은 그들의 높은 하늘에 속한 부르심을 모욕한 것이 됐다. 그리고 모세 아래에서 가데스-바네아에서 일어난 민족의 활약을 보느냐,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에서 시작되는 후대의 활동을 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는 항상 같았다. 모세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생활은 책임 있는 세대 전체가 광야에서 전멸되는 결과를 낳았고, 궁극적으로 불신과 불복종으로 계속되는 세대의 활동은 결국, 신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민족이 땅에서 뿌리째 뽑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사이에 흩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 왕국의 하늘에 속한 영역이 이스라엘까지 확장되었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불신과 불복종과 관련된 회개를 요구받았고, 이것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민족이 회개를 거부했기 때문에, 왕국의 하늘에 속한 영역도 거부되었다. 하늘에 속한 영역을 상속받는 것은 회개와 불가분의 관계였다(마태복음 3:1, 2; 4:17). 그리고 이 거절은 이스라엘에 제안하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불순종하고, 땅에 속한 영역의 왕국으로 그들을 부르신 높은 소명을 창녀로 삼았다. 그리고 그 왕국은 메시아가 나타나기 약 육백 년 전에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았다. 그러고 나서, 메시아가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다가왔다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나타났을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들은 회개를 집요하게 거부했고, 그녀에게서 하늘에 속한 영역의 왕국은 무너졌다. 이것은 불신, 불복종, 회개 거부로 인해 유대인들의 높은 소명에 대한 매춘의 총체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교도 이방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진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왕 유대인의 왕 나사렛의 예수의 십자가형을 요구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절정에 이르게 했다(마태복음 2:2; 요한복음 18:31-37; 19:14, 15). 이스라엘이 창세기 23장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22장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것은 민족의 메시아가 죽고, 부활하고 난 후 이어서 이스라엘이 죽음의 장소에서 보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냐고 묻는 것일 것이다. 이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후 삼 일째 되는 날에 이삭이 일어난 후 이스라엘이 죽음의 장소에서 발견할 것을 예표한다.

 

2) 교회, 현시대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놓고,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에게서 그분의 이름을 위해 한 사람을 취하려고 눈을 돌리셨다(사도행전 15:14). 하나님이 완전히 새로운 집안에 속해 있는 종의 무리를 다스리는 새로운 분배가 뒤따랐다. 그리고 왕국에 관한 생각은 과거의 분배로부터 현재의 분배로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인간은 똑같은 목적을 위해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조성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럴 수 없다. 인간은 왕권을 목적으로 창조되었고, 인간의 타락은 이러한 목적 때문에 비롯되었다. 오늘날 통치자 사탄은 자신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의 타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에 대한 구원은 이러한 목적과 관련이 있다. 구원의 수단과 목적은 성경의 맨 처음에 설정된 것이며 이것은 결코, 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분배 사역으로 이스라엘을 대하실 때, 구원의 목적과 방법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분배 사역으로 교회와 거래할 때에도 구원의 방법과 목적은 계속하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복종이나 불복종을 둘러싼 긍정적인 약속이나 부정적인 결과도 분배와 관계없이 동일하다는 것에 주목하라. 어느 쪽이든 긍정적인 약속은 모든 이방 민족에 대해 고양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보인다(신명기 7:1-24; 마태복음 25:14-23; 누가복음 19:12-19; 요한계시록 2:26, 27). 그러나 두 가지 분배의 부정적인 결과는 반대로 나타난다(민수기 14:1-45; 마태복음 25:24-30; 누가복음 19:20-27; 히브리서 3:18-4:1). 하나님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리고 과거의 신권정치나 미래의 신권정치와 관련된 것이든 인간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반응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레위기 26:1-39; 신명기 28:1-67; 히브리서 10:23-11:16). 하나님은 과거 신정정치로 다스리실 때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거하셨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미래의 신정정치로 다스리실 때 그분의 백성 사이에 거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 신정정치로 다스리실 때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거하셨고, 왕권을 가지고 가장 웅장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미래의 신정정치로 다스리실 그분의 백성 사이에 거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이집트에서 불려 나온 것은 인간 창조의 목적으로 사탄이 인간 안으로 가져온 유혹이 인간이 타락하게 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가져오는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고, 이것은 왕권을 둘러싼 목적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있는 한새사람의 존재를 둘러싼 목적에서 다를 수 없다. 이 한새사람은 모세의 시대에 이집트에서 한 민족이 태어났듯이 존재하기 시작했고,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불려 나온 것처럼 오늘날 목적을 위해 세상 밖으로 불려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성경의 역사와 예언에 비추어 볼 때 자명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밝혀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한새사람은 왕의 지위를 행사하기 위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 제사장, 그리고 아버지의 선물의 두 배의 몫인 맏아들 권리의 완전한 스펙트럼까지도 반드시 시야에 들어와야 한다.

양자 된 교회는 하나님 맏아들의 위치에 놓일 것이다(히브리서 12:23). 그리고 이 맏아들 위치를 차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위치의 모든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 관한 한, 교회 시대 후 심판석에서 이러한 맏아들의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 상속을 구속받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을 위한 민족을 위해 교회 시대 동안 몰수되는 것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 2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님께서 그분의 신부를 찾는 교회 시대에 일어날 것이다. 이때 많은 사람이 선택되고, 양자가 되지만 이미 권리를 상실한 자들은 양자에 포함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두 민족적 맏아들인 이미 입양된 이스라엘과 아직 입양되지 않은 교회는 언젠가 맏아들의 권리를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민족의 회개와 수용에 따라, 다시 이 땅에 있는 구원받은 민족, 왕권과 제사장권을 행사하는 민족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신정통치 내에서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것이며, 민족들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비록 하늘에서 통치할 권리를 잃었지만,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으로 아들의 권리의 이중 부분을 얻게 될 것이다.

a. 하늘에서 통치할 자격이 있는 구약성경 성도들을 통해 그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마태복음 8:11, 12; 히브리서 11:8-16, 32-40). 또한, 복음서와 사도행전 시대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아들의 권리를 얻었다.

b. 아브라함의 씨앗인 개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통해, 유대인의 줄기에 접목되었다(로마서 11:13-21; 갈라디아서 3:29). 아들의 권리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입양돼 또 다른 국민적 맏아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아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제사장들의 왕국으로서 통치를 통해 맏아들의 권리를 행사할 것입니다. 이들은 맏아들의 이중 부분을 얻을 것이다. 이 맏아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실 모든 것, 즉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을 아버지와 함께 물려받아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통치할 것이다(창세기 24:36; 25:5; 요한복음 16:15; 로마서 8:16-23; 빌립보서 3:10-14; 히브리서 3:1; 요한계시록 1:6; 5:10).

 

이 사람과 같이 가겠느냐?”

 

너는 이 사람과 함께 갈 것이냐?’라는 질문은 오늘날 교회 시대에 이 땅에 계신 성령님의 일을 둘러싼 모든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님의 일은 그 개인에게 이 질문에 직면하시고, 각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면 그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그 시점부터 성령님이 그의 삶에서 어떤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어떤 직접적인 것에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영의 목표는 그리스도인을 언젠가 신부로서 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대답은 신부에 대한 그분의 탐색과 관련된 그영의 지속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억제하게 할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5:19; 에베소서 4:30). 그러나 긍정적인 반응은 그영이 개인의 삶에서 적절한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며, 그 개인이 앞에 놓은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가서, 나홀 성으로 갔다. ‘저녁이 될 때 도시에 가까워졌고, 그는 우물가로 가서 낙타들을 우물가에 앉게 했다. 그리고 그 종은 주님께 그의 여행이 셀 수도 없을 만큼 특별한 환경들을 통해 성공하도록 기도했다(창세기 24:10-14). 그 도시의 여인들이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올 때였다. 그 종이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는 이미 다른 여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나왔다. 종은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처녀로서 보기에 매우 아름다웠다라고 말했다. 그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온 뒤에, 그는 그녀의 주전자에 물을 마실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종이 요청을 하는 것 외에도, 그 종이 주께 기도할 때에 요구했던 모든 일을, 완전히 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녀는 종이 마실 물을 건네고 나서 그의 낙타들에게도 마실 물을 주었다(창세기 24:15-21).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가 불과 몇 분 전에 주님께 요청한 일을 이행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만물을 다스리셔서 그 종을 하루의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우물로 그녀를 인도하셨다. 이때 리브가는 그 성읍의 다른 여인들과 함께 보통 우물에 물을 길어 왔다. 주님은 종과 리브가가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주님은 종의 사명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체계적인 방법으로 일을 계속 펼쳐 나가셨다.

모세와 그의 신부의 첫 만남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난다. 모세는 쫓겨 다닐 때와 유대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을 때 사이에 우물가에서 그의 신부를 만났다. 이것은 또 다른 기준 안에서, 모세가 예수님을 예표로 나타내는데, 이방인 신부를 데려간 창세기 25장의 사건 사이의 시간에 해당한다(출애굽기 2:15-21). ‘은 성경에서 그영과 말씀을 모두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요한복음 2:7-10; 4:14; 7:37-39; 에베소서 5:26).

리브가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을 통해 본 상징성, 종과 리브가가 하는 행동은 영적인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 24장은 오늘날 세상에서 그영의 사역에 대한 진정한 본질과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종은 이 장에서 신부를 찾아 헤맨다. 성경의 이 시점에서 그 문제는 변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종은 반드시 신부를 찾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에게 성령님의 사역이 신약에 나타나듯이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구약, 특히 창세기 24장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이해해야 한다. 문자적으로, 아브라함의 종은 뒤로 물러서서 리브가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그와 그의 낙타들을 위해 물을 길어 준 후에야, 주께서 그의 기도대로 그의 여행에 성공하도록 해 주셨음을 보고, 그는 행동을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주인의 물건 중에서 몇 가지 엄선된 것들을 가지고 나와, 낙타들과 보석들을 리브가에게 주었다(창세기 24:15-22).

종은 처음에는 이 보석들과 물품들 일부분만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주인의 아들을 위한 신부를 구하기 위해 그의 여행의 목적을 알게 된 후, 그는 더 많은 보물을 가져오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리브가에게도 주었다(창세기 24:33-53). 그제야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 수 있는 사람 리브가는 그 종의 제안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됐고, 그 뒤의 비전을 완전히 알게 되었고, 그녀는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창세기 24:58a)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질문과 관련된 어떠한 강요도 없었다. 그녀가 보게 된 비전이 충분히 드러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종이 알려 준 것과 그녀에게 보여준 것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그녀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리브가의 대답은 아브라함과의 가족 관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이런 가족 관계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리브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녀의 가족 관계는 완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리브가의 반응은 이 남자와 함께 가겠다.’라는 그녀의 의지와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와 함께 가는 것은 언젠가 그녀가 그 남자를 통해 드러난 모든 것들을 깨닫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리브가의 긍정적인 반응은 나는 갈 것이다.’(창세기 24:58b)라는 대답은 매우 단순한 말이다. 리브가는 그녀의 대답에 따라 언젠가 이삭의 아내가 되어 이삭과 함께 상속받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의 일은 그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앞으로 벌어질 문제들과 함께 그녀의 삶에서 계속될 것이다.

부정적인 반응으로 리브가의 삶에서 이러한 것들이 실현되지 않는 결과를 낳았으리라는 것에 주목하라.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가족의 일원이었어도, 그 종이 그녀에게 제안하지 않고 계속해서 찾는 일을 계속할 수는 있다. 그럴 때 그녀는 언젠가 이삭의 아내가 되어 그와 함께 상속받을 수는 없었다.

예표에서 계시 된 것으로 보면 오늘날 예수님의 신부를 찾으시는 세상에 계신 그영의 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여야 한다.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종의 일이 그영의 일을 예표하고 있다. 그리고 예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실제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은 이 목적을 위해 따로 마련된 교회 시대에 그분의 찾는 일을 수행하고 있으며, 예표과 마찬가지로 가족 구성원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분의 신부를 찾는 일을 수행하고 계신다.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 생명을 호흡하는 성령님을 통해 구원에 이어, 성령님은 개인의 삶에서 그 사람을 기본적인 이해인 그노시스gnosis에서 성숙한 이해인 에피그노시스epignosis로 인도하도록 설계된 일을 시작한다. 이 일은 우물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물에서 그림을 깊이 그릴 수 있는 위치로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성령님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모든 진리 속으로이끌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신다. 예표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오늘날 창세기 24장에서 본 다양한 면의 더 작은 부분과 더 단순한 부분에 관심 두게 한다. 기본적인 것들은 사람이 처음에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진행되고 사람들이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면, 점점 더 많이 성경을 펴서 언젠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실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 그리고, 예표와 완전히 같은 선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최소한 어떤 예표의 이해를 얻은 후에야 이 사람과 함께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그 사람은 비록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지만 비교적 간단한 질문을 받고, 그는 전체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에 이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에 대한 그 사람들의 대답은 가족 관계, 즉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주목하라. 그러나 언젠가 그가 아들의 아내가 되어 공동상속자로 상속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할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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