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신부를 찾으라

리브가의 반응

Hernhut 2023. 4. 11. 13:52

 

리브가의 반응 yes!

 

 

그리고 그들이 리브가를 불러,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겠느냐?’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자기들의 누이 리브가와 그녀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의 사람들을 보내며, 리브가를 축복하여,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우리의 누이다. 너는 수십억의 어머니가 되어라. 그리고 네 씨가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의 문을 소유하게 하라.’ 그리고 리브가가 일어나, 자기 소녀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자기 길로 갔다.”(창세기 24:58-61)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의 신부를 얻기 위해 메소포타미아로 그의 늙은 종을 보냈다. 그 종은 신부가 아브라함의 친족(가족)에서 찾아야 한다고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그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선물은 모두 그 노종의 소유였다(창세기 24:1-10). 아브라함의 노종은 낙타 열 마리를 몰고 그 낙타에 아브라함의 선물을 싣고 메소포타미아로 갔다는 것이다. 원문에 낙타의 숫자는 특히 노종의 소유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선물의 양과 관계가 있다(창세기 24:10). 숫자 10은 완전을 의미한다. 서수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 노종은 낙타를 보았고, 열 마리 골랐고, 수치적인 측면에서, ‘그의 주인의 모든 소유가 그의 손에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종은 우물가에서 예비 신부를 발견했다. 그는 자기가 찾는 사람이 리브가임을 종에게 알리는 일련의 일들을 통해, 자기 주인의 보물을 꺼내어 그녀에게 주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종은 마음을 열고, 언젠가는 이삭의 것이 될 아버지의 소유들을 리브가에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일이 있고 난 뒤에야 예비 신부는 이 남자와 함께 가겠느냐?’(창세기 24:58a)는 질문에 직면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보물은 한 가지 일과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종의 임무와 목적이 완성되는 것이 미래에 있을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종은 예비 신부를 찾는 데 한 가지 한 가지 방법만을 사용했다. 그 종은 예비 신부를 찾아내어, 자기의 여행 목적을 알게 한 다음에, 자기 주인이 가지고 있는 보물 꾸러미에서 어떤 보물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기 시작하였다. 그 종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주인과 주인의 아들에 대해 말했다. 그는 자기 주인의 보물 가운데서 어떤 보물을 가져다가, 리브가에게, 언젠가는 자기 주인의 것이, 아들의 것이 될 것을, 점차 계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들의 아내는 아들을 완성케 하고, 아들과 함께 유산을 상속할 것이다. 아들과 그의 아내는 하나의 완전한 사람으로서 미래에 이 모든 보물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것이다. 예표 안에 설정된 노종의 일은 아브라함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과 아브라함의 아내가 죽은 데 이어(창세기 22:1-24; 23:1-20) 아브라함의 재혼(창세기 25:34)에 앞서 아브라함의 집안사람들(창세기 24:3, 4, 9, 15) 사이에서 일어났다. 창세기 22장에서 일어난 일 즉 죽음,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의 장소에서 아들을 받은 것(창세기 24:4, 5; 히브리서 11:17-19)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아내들에 대해 말하는 이 세 장에 걸친 일들은 전체 문제를 원하는 목표에 이르게 하는 방식으로 발생했다. 아버지의 아내가 죽은 것은 아들의 희생과 관련된 것들에 이어 아들을 위한 아내와 관련된 문제들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게 했다(창세기 22:1-23:20).

그리고 그것은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이 장의 끝에서 아들의 결혼과 창세기 25장의 시작에서 아버지의 재혼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모든 것은 창세기 24장의 끝과 25장의 시작에서 본 것, 즉 그와 함께 아내가 상속받을 소유를 받게 되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전 아내와 달리 매우 결실이 많은 아내를 다시 소유한 아버지를 향해 나아간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24장에서 종이 신부를 찾는 것은 이전 장들의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되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이 사건들은 창세기 24장의 끝과 25장의 시작에서 절정의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그 종이 주인의 아들을 위한 신부를 찾기 위해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동안 그 목적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종은 신부를 구할 때까지 메소포타미아에 남아 있었다. 이것이 끝나면, 그는 신부를 아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신부와 함께 떠나게 되어, 그의 임무를 완전히 완수하게 되었다. 이것은 차례로 25장의 시작 부분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하여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끝낼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동안 종이 밝힌 모든 것은 앞에 놓인 목표와 관련이 있었다. 리브가의 가족은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리브가 역시 이런 것들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 종은 그들에게 이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그 종의 증언을 믿었다. 그것은 예표이고, 정확히 같은 것이 실제에서 보여야 한다. 창세기 22장의 실제에서 본 것, 즉 아들의 죽음과 부활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창세기 22장이 끝날 무렵에, 아들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밝혀진 다음에, 적의 문을 소유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하늘에 속한 씨앗과 땅에 속한 씨앗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창세기 23장은 아브라함의 아내가 사망하고, 24장에서는 아들을 위해 아내를 얻고, 25장에서는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맞이한다. 이건 무슨 일인가? 매우 간단합니다. 예표 전체가 어느 날 처음에 창조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을 다루고 있다. 구원은 이 목적을 위해 제공되었으며, 적의 문을 소유하는 것은 이 구원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전체 예표의 나머지는 이 목적에 도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한 도시의 성문은 그 도시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법적 문제가 거래되는 장소였다(룻기 4:1-12); 성문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특정 도시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양적 방식이며, 아브라함 자손의 궁극적 목적과 관련하여 하늘과 땅에 속한 영역 모두에서 땅을 다스리는 통제권이 될 것이다. 창세기 24:60에서 리브가의 가족이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종과 함께 가게 할 때 리브가에게 문을 소유하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창세기 22:17, 18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한 표현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즉 리브가의 씨를 축복하셨다.

그런데 왜 창세기 22장에 계시 된 것에 이어 23장부터 25장까지 아내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이 땅을 통치하도록 창조된 첫 번째 사람, 즉 첫 번째 아담과 관련하여 이전에 계시 된 내용 때문에 전체 예표에서 이 시점을 통해 이러한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사람은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 사람은 반드시 함께 통치할 아내가 있어야 한다. 남자는 왕으로, 아내는 여왕으로서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이런 점에서 점진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창세기 23-25장까지는 그 이전에 계시 된 것들을 이해하지 않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원리는 성경의 어느 지점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후의 계시는 이전 계시를 기반으로 한다. 신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신약성경의 계시 이전에 계시 된 것, 즉 구약에 계시 된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을 공부할 때 사람은 계속해서 모세와 선지자로 돌아가게 된다. 신약의 주석을 공부하거나 주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주석이 관련된 것을 이해해야 한다.

남자가 통치하려면 완전한 존재로서 통치해야 하며, 여자와의 결합,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해서만 남자는 이 점에서 완전한 존재로 간주된다. 이 그림은 하와가 아담의 몸 일부로 형성된 후 아담에게 조력자로서 다시 주어지는 것에서 건축되었다. 아담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하와는 아담의 존재 자체의 일부로서 아담을 완전하게 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다시 주어짐으로써 그를 완전한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창세기 2:21-2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26-28). 남자는 완전한 존재로서만 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자가 그와 함께 아내이면서 여왕으로 통치해야 했다. 이 두 장에 기록된 이 모든 문제는 성경의 나중 시점에 변경될 수 없다. 인간 영역에서 왕권을 행사하는 것은 반드시 남편과 아내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남자나 여자 어느 사람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 그들은 반드시 남자가 머리 직분을 차지하면서 하나의 완전한 사람으로서 함께 통치해야 한다. 이것이 창세기 22장에 언급된 내용에 이어 세 장에서 아내가 최전선을 차지하는 이유다. 창세기 22장의 앞부분에는 구원 방법이, 뒷부분에는 구원의 목적이 나와 있다. 그리고 이 목적은 그다음 장의 결론, 즉 이 세 장에 나오는 아내에 관해 언급된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구약의 신정정치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왕국에서 홀로 통치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분은 자신과 함께 통치할 아내가 있어야 했다. 아내가 없었다면 그분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분 자신이 세우신 것을 위반했을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그분은 혼자 통치할 수 없다. 창세기 1, 2장에 기록된 원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약 신정정치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남편과 아내 관계였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그분은 반드시 함께 통치할 아내가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오늘날의 결혼 관계에서 볼 수 있으며, 이는 에베소서 5:22-32뿐만 아니라 전체 결혼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 에베소서 5장은 창세기 1, 2장에 계시 된 것과 분리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아내는 남편을 완성한다. 남편은 왕으로서, 아내는 배우자 왕비로서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서 함께 가정을 다스린다. 남편은 머리 직분을 행사하지만, 아내는 남편과 공동상속인으로서 통치한다. 남편에게 속한 것은 아내에게 속한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이러한 방식으로 함께 집을 다스리며, 언젠가 그리스도와 함께 행사할 수 있는 동일한 관계를 내다보며 그분의 집을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로서 통치한다. 그리고 이사야 2:1-4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온 땅을 다스리는 통치권과 관련이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창세기 24장의 끝과 25장의 시작 부분에 있는 사건, 즉 아들이 아내를 취하고 하나님이 아내를 정당한 위치로 회복시키는 사건으로 예언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과 별개로 미래의 신정 체제는 있을 수 없다. 창세기 24장 끝과 25장 시작에 나오는 사건들은 하늘과 땅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원수의 문을 소유하는 메시아 시대에 존재할 사건을 예언한다. 이것은 창세기 21(이삭의 탄생)에서 시작되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절정의 지점이다.

 

 

난 갈 것이다

 

 

창세기 22-24장까지, 신약교회 시대에 성령님의 완전한 사역과 관련하여 개인의 삶에서 점진적으로 수행되는 여섯 가지 단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완전한 성령님의 사역은 영이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그 순간부터 신부가 혼례복을 곱게 차려입고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는 순간까지 구원과 건지심의 전체적인 파노라마를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님의 사역이다. 성령님의 사역은 6가지로 나눌 수 있다.

a.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과 이것이 계시 된 이유(창세기 22:1-24).

b. 성령님께서 개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신 후 시작되는 성령님의 역사(창세기 24:1-67).

c. 그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인을 당면한 문제에 직면 할 수 있는 지점으로 인도함(창세기 24:58a).

d. 개인이 당면한 문제에 응답하는 것(창세기 24:58b).

e. 당면한 문제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계속되는 성령님의 역사(창세기 24:61).

f. 성령님께서 그분의 일을 완성하시고, 신부와 함께 돌아오고, 신부를 아들에게 선물(24:62-67).

 

 

1) 성령님의 사역 시작

 

 

한 개인이 죽음과 소외된 상태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모든 일의 시작점이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이 부여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한복음 4:2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영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다스리시며, 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인간이 영적으로 살아나야 한다. 성령님은 갈보리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그래야만 허물과 죄로 죽은사람이 영적인 생명을 소유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영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다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다스리실까?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항상 같은 방식이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삶이나 출애굽기 12장의 장자의 죽음과 같이,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이 세상에서 벗어난 다른 땅에서 유업을 받도록 인간을 다스리시며, 이는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와 완전히 일치한다(창세기 12:1-3; 15:5-21; 출애굽기 12:29, 40, 41; 15:17, 18; 19:5, 6; 신명기 6:23). 창세기 22장에서도 정확히 같은 내용이 등장하며, 24장 끝과 25장 초반에 결과가 있다. 22장에서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부분 바로 다음에 주의 천사가 두 번째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창세기 22:15). 첫 번째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문제와 관련이 있었고(창세기 22:1-14), 두 번째는 구원의 목적과 관련이 있었다(창세기 22:16-18). 그리고 이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표현하듯이 세상에서 구원받아 하늘의 왕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목적은 왕권과 이 땅(메시아 시대에 이뤄지고, 땅의 통치권을 행사할 사람)과 관련이 있으며, 메시아 시대 이후, 사람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왕권과 우주 전체(땅을 넘어 우주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사람, 그리고 이후 영원한 시대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뤄질 우주)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이전에 생명이 없던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성령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구원을 받았으며, 궁극적으로 사람은 태초에 창조된 위치로 되돌리기 위해 구원받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머지 말씀의 기초 또는 골격을 세우신 성경의 첫 구절부터 시작하여 성경의 어느 지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창세기 1:1-2:3).

그리고 이후의 모든 성경은 단순히 창세기 1:1-2:3절에서 계시 된 것에 대한 주석이다. 이후의 모든 성경은 골격을 덮는 힘줄, , 피부를 형성한다(에스겔 37:1-10).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과 목적에 대해 밝힌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창세기 1:1-2:3장의 골격 구조 내에서, 일곱 구조가 보이고, 이 일곱 구조 내의 만물들은 6일에 걸쳐 안식일인 7일째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것은 후속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게 하는 전진 된 패턴이다. 하나님이 이전에 파괴된 창조물을 복구하는 데 6일이 걸렸고, 하나님이 파괴된 창조물을 복구하는 방법에 관한 불변의 패턴을 확립했기 때문에, 그분은 오늘날 6일 즉 6,000년에 두 개의 파괴된 창조물(인간과 물질적 창조물 모두)을 복구하는 데 6일이 걸리고 있다(베드로후서 3:8). 그리고 하나님이 회복하실 때 안식일을 쉬었듯이, 그분은 안식일(1,000, 메시아 시대 아담으로부터 7천 년,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다리는 안식일)을 회복의 시대에서 쉬실 것입니다(히브리서 4:1-9).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말하는 창세기 22장은 창세기 1:1-2:3에서 인간의 구원에 관해 앞서 밝힌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분이 발견하신 것이다.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둘러싼 계시(창세기 22:1-14) 직후 하나님이 두 번째로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그의 천상의 씨앗과 지상의 씨앗이 언젠가는 적의 문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세기 22:15-18). 그러고 나서 아내들에 관해 소개한 뒤의 세 장은 추가적인 세부사항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22장이 끝날 무렵에 언급된 문제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그분의 자손과 비교하여 이뤄질 때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을 받았고, 하늘의 왕국은 이제 그분의 영원한 집이 되었다는 교파들의 널리 퍼진 생각은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러한 교리의 가르침은 성경적 진리의 부패와 다름없이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성경 연구에서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이 잘못된 생각이 그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게 되면, 그들이 문제의 진실을 보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현혹되면, 교회 시대의 분배 과정에서 그들이 성령님의 본질적 사역을 보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2천 년에 걸쳐 잎사귀의 작용으로 인한 결과로서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 거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들이다.

 

 

2) 성령님의 계속되는 사역

 

 

창세기 22-24장까지 볼 수 있듯이, 오늘날 교회의 분배 기간 개인의 삶에서 성령님의 일에서 뚜렷하게 전진 된 여섯 단계 중 두 번째 단계는 구원받은 사람 중 성령님의 일, 즉 교회의 분배에 특유의 일이다. 이것은 거듭난 후(창세기 22:1-24),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진 후(창세기 23:1-20),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바로 이전(창세기 25:1-34), 하나님의 다른 민족(새로운 민족, 교회) 사이에서 행해지는 일이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즉 영적 생명을 가지고 오셔서,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언젠가 적의 문을 소유할 아브라함의 씨앗을 둘러싼 모든 다양한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세상에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의 종이 자신 사명의 목적을 밝힌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것들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언젠가는 아들의 것이 될 아버지의 것에서 특정한 것들을 가져다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고 계신다. 아버지의 이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계시 된 말씀에서 볼 수 있다(고린도전서 2:9-13). 그리고 성령님은 과거 시간에 사람들을 펜으로 옮기신 이 말씀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인도하신다. 그분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밝히신다. 그리고 이러한 다가올 일은 아버지가 성령님께서 주의를 환기하시는 그날,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실 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실 것이다(창세기 25:5; 요한복음 16:12-15). 그리고 성령님이 이러한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드러내는 것은 창세기 22-24장까지 전반적인 예표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삶에서 성령님이 수행하는 다섯 가지 전진 된 단계 중 세 번째 단계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진보된 단계에서 성령님의 일은 그리스도인을 세 번째 단계로 이끌기 위한 것으로, 여기서 그분은 창세기 24:58a에서 성령님과 함께 갈지 안 갈지 선택해야 한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중간 위치가 없다(누가복음 11:23). 여기서 리브가는 어떤 것을 선택할지를 완전히 인식하고 있다. 이 예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이런 선택의 문제를 완전히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표와 정확히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이 시점에서 문제를 바로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리브가가 대답하는 것처럼 예표와 동일하게 그리스도인도 응답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부정적인 반응이 가능했더라도 긍정적인 반응만 보이는 예표처럼, 성령님의 사역은 개인의 삶에서 계속될 수 있다. 성령님이 이끄는 방식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리더십, 즉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신부를 얻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룻기의 전체적인 예표에 주목해야 한다. 모압 세상에서 출발해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오직 룻만이 나오미와 함께 가기로 했다. 오르바는 돌아섰다. 오르바는 나오미 가족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마지막까지 옛 가족과 모압에 남기로 했기 때문에 예표에서 오르바를 다시 볼 수 없다. 보아스가 그들의 증손자 다윗을 통해 본 왕권과 함께 상속구속과 관련하여 궁극적으로 그의 아내로 삼은 사람은 룻이었다.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라오디게아 시대인 오늘날 경륜의 시대에 감히 성령님의 진리에 관심을 두는 그리스도인은 반듯이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손에서 조롱과 배척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결국 그들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디모데후서 1:15; 4:10, 11, 14-16).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돌아섰을 때 누가 바울과 함께 섰을 뿐만 아니라 모든 악한 일에서그를 구원할 것인지에 주목해야 한다(디모데후서 4:17, 18).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교회 시대에서 바울이 설정한 패턴을 따르는 분배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될 것이다(디모데전서 1:15, 16; 요한계시록 3:18-20).

 

 

3) 그영의 계속되는 사역

 

 

성령의 일 그 자체는 오늘날 교회 시대에 완전히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이 땅에서 옮기신 후, 이전의 교회 시대에 성령님의 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에 기초하여 심판석에서 판결과 결정이 내려진 후, 산출된 신부가 그 연회장에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에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분배가 끝날 때가 온다. 창세기 22장 후반에 계시 된 구원의 목적이 마침내 이뤄지는 날이 될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그리스도인에게는 영광의 날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에게 결코 실제가 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깊은 후회가 뒤따를 것이다. 그들은 신부가 되는 자리에 있지 못하고, 따라서 아담 창조 이후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그 미래의 시간 동안 왕 중의 왕, 그리고 주 중의 주와 함께 공동 상속자로서 통치할 수 없다.

 

 

그분의 길

 

 

창세기 24장에서 노종의 길을 통해 예표로 본 성령님의 길은 죽음과 부활 이후에 시작된다. ‘죽음에서 삶으로라는 구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회복하지만, 그영이 생명이 없는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때 존재하는 육체의 사람은 반드시 죽음 아래 남아있어야 한다. 성령의 이 일은 육체적인 사람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는다. 그분은 손으로 만지지 않고, 변하지 않고, 그가 항상 존재했던 같은 장소(죽음 아래)에 계신다. 하나님은 타락한 창조물의 회복을 위한 그의 초기 사역인, 창세기 1:2-5의 어둠을 없애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어둠과 함께 빛을 창조하셨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났고, 어둠에 완전히 낯선 어떤 것이 있었다(요한복음 1:5; 고린도후서 4:6). 육체를 가진 사람은 오늘날 교회 시대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성령님의 목적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의 아내로 구성되고 상속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과 공동 상속자로서 발견된다. 이것은 영의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상속받을 수 없었다. 여종과 그녀의 아들은 쫓겨나기로 되어 있었다(창세기 17:18, 19; 21:9-12). 예표에서 홍해를 건너는 것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행군하는 모세 휘하의 이스라엘 자손과 가장 먼저 마주한 이유다. ‘바다는 죽음의 장소다. 맏아들은 방금 죽었고, 이제 그는 묻혀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들은 죽음의 장소로 내려가야 했다. 그리고, 예표에서 가르쳐진 것은 여기가 옛사람이 머물 곳이다. 그 사람은 이제 그영의 초기 사역과 관계가 있는 영적인 삶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영의 이 사역으로 죽게 된 옛사람은 그의 행위와 함께 잠겨야 한다. 옛사람은 죽은 것으로 간주되고, 새사람만 홍해를 통과해 홍해 물속에서 나오는 것이다(로마서 6:4-12).

성령님의 이끄심은 홍해의 동쪽 둑에서부터 시나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영을 가진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만이 유일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만이 홀로 죽음의 장소를 지나 다른 땅에서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부활을 상상하면서 이집트에서 나왔다. 육의 사람은 민족 앞에 놓인 땅에서 아무런 유산도 받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의 이끔으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누구에게나 이 사실이 잘 알려져야 했다. 다시,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상속받을 수 없었다(갈라디아서 4:19-31). 성령님의 초기 사역 이후, 문제들은 즉시 이 사역의 이유, 즉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련된 문제들, 영생에 관한 문제들로 향한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맏아들이 죽고 홍해를 건너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신정국가 내의 다른 땅에서 유산을 받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모세의 홍해 건넘은 오직 예수님이 니고데모의 요한복음 3:3-6에 대한 응답에서 암시한 것이다. 요한복음 3:5은 요한복음 3:3에 대한 추가 설명이고 요한복음 3:6은 요한복음 3:4 대한 추가 설명이다. 이 구절의 계시를 되돌아보면서 영생이 아니라 왕국을 보고 들어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요한복음 3:2). 요한복음 3:5에서 물은 옛사람이 죽는 곳이요, 성령님은 새사람과 함께 다른 땅을 향해 나아감에 따라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 한 방식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가지신 사람으로 오셨을 때 왕국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왕국을 다른 장소에서 밝히는 것이다. 물리적이고, 외적인 침례 행위 자체에는 권능이 없다. 마찬가지로 모세 아래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다를 건넜을 때도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성한 능력이 필요했으며, 마찬가지로 오늘날 침례의 효력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이룬 일과 성령님의 오늘날 사역이 필요하다. 그 침례라는 행위 자체에 권능은 없다. 그 권능은 예표에서 홍해를 통과하는 것을 영적 진리이고, 실제에서는 침례를 상징으로 실행하게 되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오직 영의 사람과 관련이 있으므로 창세기 24장의 예표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되어 그와 함께 상속받는 한 가지 목표를 세우고 그 노종을 따르기로 하자, 그녀는 그 노종의 길로 갔다. 리브가가 일어나서, 낙타에 올라타고, 언젠가는 아들의 것이 될 아버지의 것을 싣고, 노종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노종의 방식은 그들이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동안의 노종의 지도력과 관련이 있었다(창세기 24:61). 여행의 방향은 특이했다. 노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들은 또 다른 땅을 향해 여행했고, 그 여행이 리브가가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특이했다. 그녀는 낙타를 타고 아버지의 모든 물건을 운반했다. 언젠가는 그 아버지의 물건들은 아들의 것이 될 것들이었다. 노종이 그의 길을 가려고 할 때 리브가가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한 것이 특이했다. 창세기 24장의 이 부분에서 설명된 것처럼, 이 문제는 너무 명확해서 실제에서는 주의를 환기할 필요조차 없다. 죽음과 부활로 시작하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성경적 설명은 바울이 그와 관련된 죽음이 그리스도와 관련된 죽음을 따를 수 있는 이유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으로 교제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알기 원했다(빌립보서 3:10). 바울이 자신의 목표로 삼은 더 나은 부활인 하늘에 속한 부활을 이루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높은 부르심의 상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바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가진 목표이기도 하다 (빌립보서 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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