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신부를 찾으라

땅에서 하늘들로 출발

Hernhut 2023. 4. 13. 00:22

 

 

 

아브라함의 종 그의 일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신부를 찾아 그녀를 준비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일은 준비된 신부를 메소포타미아에서 데려와 기다리는 신랑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가는 무렵에 신랑은 자신의 집과 신부의 집 사이에 특정 장소에서 종이 찾고 준비시켜 데려오고 있는 신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오늘날 분배의 시대에서도 이 땅 위에서 성령님이 신부를 찾고 준비시키는 사역은 계속 진행 중이다. 이어 분배의 시대가 끝나는 시점에는 결정적인 일이 있을 것이다. 성령님은 이 땅 위에서 준비된 신부를 데리고 가서 기다리고 있는 신랑에게 선물로 드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 교회 시대가 끝나는 날 신랑은 아버지의 집과 신부의 집 사이의 특정 장소에서 성령님이 찾고 준비시키고 데려올 신부를 기다리게 된다. 예표에서 이삭의 신부는 이 시점에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있었고, 메소포타미아를 떠날 때 낙타를 타고 출발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성령님이 오늘날 실제에서 이 땅에서 신부를 찾아 그녀를 준비시킨 뒤에 교회 시대 끝에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일이 있다. 성령님은 준비된 신부를 땅에서 데려가서 기다리는 신랑에게 선물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신랑은 자신의 아버지 집과 신부의 집 사이에 특정 장소에서 성령님이 찾고 준비시키고 데려온 신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다. 예표에서 이삭의 신부는 그때 동행하는 다른 소녀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들은 메소포타미아를 떠나면서 낙타를 타고 이동했다. 예표에서는 이 순간에 낙타의 수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종이 메소포타미아로 가져온 10마리 낙타만이 해당될 수밖에 없다(창세기 24:10). 성경에서 ‘10’은 순서적 완성의 수다. 이때 ‘10마리의 낙타를 타고 출발하는 사람들은 이삭을 만나러 가는 일에 대한 순서적 완성을 보여준다. , 리브가뿐만 아니라 ‘10’이라는 수의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출발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이 찾고 준비시키고 데려온 신부는 오직 한 사람만 이삭에게 제시된다. 예수님의 실제에서도 분배의 시대 끝에 신부가 옮겨질 때, 신부는 혼자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명백하게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갈 것이라고 말한다.

 

예표에서처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함께 나갈 것이다. 그러나 예표와 같이, 모든 사람이 먼저 찾고 준비되고 옮겨진 신부로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그날에 리브가의 예표에 부합하는 사람만이 신부가 될 것이다. 리브가와 다른 여인들이 탄 낙타들이 이삭에게 다가올 때, 리브가는 이삭을 만나기 위해 자신을 단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수건을 잡아자신을 덮는다(창세기 24:65b).

 

그러나 예표에서는 리브가와 함께 한 여인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예표에서 리브가가 수행한 이 행위는 실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미래의 날에 신부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리브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올바르게 단장하여 신랑과 신부와 관련된 활동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성경은 다가오는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앞에 나타날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말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옷을 입고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벗은 상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요한계시록 3:18). 또한, 마태복음 22:11-13에서 밝힌 것과 같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앞에 벗은 채로 나타나는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로 신부는 미리 준비하여 신랑을 만날 준비를 마치고, 그날에 꾸며진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련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마포 옷성도의 의로움으로 언급된다(요한계시록 19:7, 8). 헬라어 원문에서는 의로움이 복수로 쓰여 있어서, ‘성도들의 의로운 행동이라고도 번역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때, 그영은 예비된 신부만을 옮겨 기다리는 신랑 앞에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새사람 전체를 옮기실 것다. 성경은 종종 휴거로 불리는 것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며, 이는 오늘날 교회 시대에 그영이 그분의 일을 끝내시고 한 후 곧바로 일어날 것입니다. 예표에서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에서도 모든 예표를 정확히 따르기 때문에 정확히 같은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성경 연구자들은, 휴거 때 신부만이 옮겨지고,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은 일부 또는 전체가 7년 환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는 이들과 신실하지 않은 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완전한 새사람이라는 오늘날 교회 시대의 구원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동시에 하늘로 옮겨져 심판을 받을 것을 나타내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게 된다. 성경은 분명히 모든 그리스도인이 나타나야 할 것이며, 이 나타남은 의로운 보상이 될 것과 관련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그가 선과 악을 따라 그 몸이 행한 대로 받을 것임을 말하며(누가복음 19:15-26; 고린도전서 3:12-15; 고린도후서 5:9-11; 히브리서 2:1-3), 특별한 선택을 받은 몇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때때로 모든 사람을 포함한 휴거와 관련된 잘못된 해석은 모든 예표를 함께 보지 않거나, 다른 예표와 비교하지 않거나, 예표와 실제를 함께 이해하고 연구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에녹을 제외한 다른 예표와 실제를 무시하고 창세기 5장의 에녹만 강조하는 경우 그 연구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된다. 또한, 휴거와 무관한 구절들을 휴거와 연결하려는 시도에서도 잘못된 해석이 발생할 수 있다(누가복음 21:34-36; 데살로니가전서 1:10; 5:9; 디도서 2:13; 요한계시록 3:10). 결론적으로 성경은 성경의 빛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의 한 부분은 그 부분의 맥락과 관련된 성경의 빛으로 해석되어야 하며(고린도전서 2:9-13; 베드로후서),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해석이 될 수 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에 담아 놓은 대로 완전한 모습을 제시한다. 어떤 주제에 관한 모든 예표는 함께 보며, 실제에서도 함께 읽어야 한다. 또한, 성경은 맥락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하며, 휴거와 관련이 없는 구절이 휴거와 관련이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예표로 말하자면, 에녹은 노아 홍수 전에 옮겨졌고, 초원의 도시들이 멸망되기 전에 롯과 그의 가족도 동일하게 옮겨졌으며, 이것도 예표적으로 휴거의 의미가 있다. 믿음으로 산 에녹과 다르게 롯은 정반대의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에녹과 롯 모두 멸망 이전에 옮겨졌기에, 이러한 면에서 둘 다 함께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창세기 24장에서 모든 사람이 이삭을 만나기 위해 나아간 것은 이러한 세 가지 예표를 함께 보면 올바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예표를 함께 본 경우 하나씩 분리하여 본 것보다 더 완전한 그림이 나타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공한 그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특별한 방식에 따라 이 말씀 그림을 형성하는 재료를 제공하여, 그분의 백성들에게 휴거와 그 이후의 사건에 대해 알게 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 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두 가지 이유를 주장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예표를 함께 보지 않거나, 완전한 그림을 보지 못하거나, 또는 하나님이 세우신 틀 안에서 성경을 보지 않고, 예표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이러한 구약성경 언급의 예표를 다루는 두 개의 중심적인 장소가 있으며, 예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사실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예표 속에 세웠다면,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는 대상에 관한 모든 예표에서 정해진 것과 정확한 패턴을 따라야 한다. 성경의 이 두 개의 중심 부분인 데살로니가전서 4:13-5:9와 요한계시록 1:1-4:11은 둘 다 휴거과 그 이후의 일들을 광범위하게 다룬다. 그런데 휴거나 이러한 후속 일들을 다루는 다른 성경들이 있지만, 데살로니가전서 4:13-5:9; 요한계시록 1:1-4:11에서 볼 수 있는 넓은 의미가 아니다(고린도전서 3:11-15; 15:51-57). 따라서 모든 문제를 성경과 성경을 비교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것과 정확히 같은 완전한 그림을 볼 수 있다. 구약성경의 모든 예표는 신약성경에서 성경적 관점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개인들은 종종 휴거에 대한 특정한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 휴거과 관련 없는 성경을 사용한다(누가복음 21:34-36; 데살로니가전서 1:10; 5:9; 디도서 2:13; 요한계시록 3:10). 그러나 각 구절은 휴거가 아닌 것이 그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음이 명확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데살로니가전서서 4:13-5:9)

 

 

데살로니가전서 4:16, 17에서 주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땅까지 완전히 내려오지는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의 어느 곳까지 내려오신 후 외치신다.’ 이는 문자적으로 명령을 하신 것이다. 천사장 즉 천상의 존재가 목소리가 울리고, 나팔이 울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전 세대가 모두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 그분은 부활이시요 생명이시니죽은 자들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명령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요한복음 5:28, 29; 11:25, 43). 그 후, 살아있는 신자들 - 세대의 끝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 - 이 부활한 신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1) 이때 있을 그영의 사역

 

 

이것은 창세기 24장의 예표에 따라 성령이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들과 그 시점에 살아있는 사람들 모든 그리스도인을 이 땅에서 옮겨지는 시간이다. 그러나 휴거 시점에서 성령의 일은 성령이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을 이 땅에서 옮기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성령은 호흡을 통해 신체적이든 영적이든 생명을 부여한다. 이 문제에 대한 원칙은 창세기의 처음 두 장에서 세워졌다. 그리고 사람에게 생명이 부여되는 것과 관련하여 성령의 연결에 어떠한 변화도 발생할 수 없다. 이것이 성령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다(로마서서 8:11).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했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중에서 일어날 때 성경적 원칙을 준수하기 위해 이 역할에서 성령이 움직여야 했다. 그 후, 이 시점에서 성령의 일 외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셔야 했다(요한복음 2:18-22). 왜냐하면, 다시 말하지만, 그분은 부활이시오 생명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나타나라는 명령을 내리실 때, 창세기 처음 두 장에서 세워진 원칙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이와 같은 역할로서 그리스도의 명령과 함께 움직일 것이다. 성령은 명령을 받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다.

 

성령은 명령이 적용되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에게 과거 나사로와 같은 부활시켰던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마태복음 27:52, 53; 누가복음 8:55; 요한복음 11:43, 44; 히브리서 11:35; 야고보서 2:26). 그리고 아들과 성령이 이러한 계시된 방식으로 모두 움직일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꼭 나타나야 한다. 왜냐하면 부활과 생명이신이 명령을 내린 것이고, 생명을 불어넣는 이 역할을 하는 이 역시 그분이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성령의 움직임을 통해 부활한 믿는 자와 그 시기에 살아있는 믿는 자 모두가 변화할 문제가 있다(고린도전서 15:51-58).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그들의 몸은 변화될 것이며, 살아있는 믿는 자들도 변화될 것이다. 죽은 자들은 그들의 부활 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분이 가진 것과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이며, 살아있는 믿는 자들의 몸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믿는 자와 함께 천연적(혼적)몸이 아닌 영적몸으로 이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고린도전서 15:44-50).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기 전 천연적(혼적)몸을 가졌지만, 제 삼일에 부활할 때 영적인몸을 가지셨다. 여기서 영적인몸은 앞서 말한 것과 고린도전서 15:44-50에서 다룬 것과 같이 비현실적인, 감각이 없는 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갈보리에서의 죽음 이전에는 자연적 (혼적)’인 몸을 가졌지만, 그분은 제삼일 부활할 때 영적인몸으로 다시 일어나셨다. 고린도전서 15:44-50에서 다루는 바와 같이, ‘영적인몸은 어떠한 유령 같고, 파악할 수 없는 비물질적인 몸이 아니다. 이 몸은 살아있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가지게 될 것과 동일한 살과 뼈의 몸이다. 그러나, 이 몸은 다른 유형의 생명 주는, 살아 숨 쉬는 원리를 가진 몸이다. ‘천연적(혼적)’인 몸에서는 생명 주는, 살아 숨 쉬는 원리가 핏속에 있지만(레위기 17:11), ‘영적인몸에서는 생명 주는, 살아 숨 쉬는 원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다(로마서 8:11).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부활 몸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몸이었다. 십자가에 걸려 있던 몸과 무덤에 놓인 몸이었다(스가랴 12:10; 13:6; 마태복음 28:1-10; 누가복음 24:39; 요한복음 20:1-29).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자연을 초월한 능력을 갖춘 몸을 가지고 계신다(누가복음 24:31, 36; 사도행전 9:3-5). 그분은 그분의 혼을 죽음에 부으셨다(이사야 53:12). 생명과 피를 죽음에 넘기셨다. 생명, 즉 혼은 피에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분의 피는 하늘에 속한 성소의 자비 보좌 위에 있다(히브리서 9:11, 12; 10:19, 20; 요한일서 1:6-2:2).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는 영적이라기보다는 천연적(혼적)’인 몸을 가지고 계신다. 다른 생명을 주는 원리가 있는 몸이다. 그리스도는 영광으로 둘러싸인 몸으로 부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종 영광스러운 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분은 부활 후 40일간의 사역 중에도 그러한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몸이 영광으로 둘러싸인 것은 아마도 그분이 영광 속으로 받아들여졌을 때일어났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영광으로 둘러싸인 몸으로 부활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당시와 같은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영광으로 둘러싸이게 될 때는 심판 자리에서 결정과 판단이 이루어진 후에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의 옮겨짐(모든 그리스도인, 죽은 사람들[부활]과 살아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신부 찾기가 성공적으로 완료된 후, 이 시대의 끝에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과 이 명령과 관련된 성령의 일은 순간에 일어날 것이며,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을 것이다(고린도전서 15:52). ‘순간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원문에서 아토모스atomos. 이 단어에서 영어 단어 아톰atom’이 유래됐다. 이 단어는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을 가리키는 단어다. 더 짧게 줄일 수 없는 시간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이 마이크로초-1초의 백만분의 1-와 비슷한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님의 명령과 이 명령과 관련된 성령의 모든 일은 매우 빠르게 일어날 것이다. 이 시간은 오늘날 컴퓨터가 1초에 수행하는 백만분의 하나를 수행하는 것보다 짧은 시간이다. 성경은 단순히 가능한 가장 작은 시간을 보여주는 단어 아토모스atomos를 사용한다. 그리고 이 짧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의 빠름으로 설명되어, 유한한 인간이 전체적인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인들(부활한 죽은 사람들과 살아서 믿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시간의 경과도 인식하지 못하고 갑자기 하늘에서 주님 앞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있다가, 그다음에는 갑자기 하늘에 있을 것이다. 시간의 경과는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빠르다. 그러나 신부는 심판석 주변의 사건 이후까지 아들에게 알려지고 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신부가 그리스도인 전체 몸에서 분리되어 보이고, 고운 베옷을 입고,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와 함께 일을 완료한 것처럼 그리스도 앞에 나타날 것이다. 예표에서, 이삭은 남쪽 나라에서 그의 신부를 기다리고 있다(창세기 24:62). 이삭은 아버지가 살던 지역 남쪽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이삭과 그의 신부 사이의 만남이 일어났다. 그리스도가 그의 신부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의 왕좌는 북쪽에 있다(시편 75:6, 7; 이사야 14:13, 14).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후 남쪽 나라에 계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남쪽 지역, 아버지의 왕좌가 있던 곳에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예표에서처럼, 성령은 리브가와 그녀의 여자들이 이삭을 만나러 간 것처럼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하는 사람을 인도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러 갈 때, 그들은 한 방향으로만 올라갈 것이다. 그들은 북쪽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의 왕국의 남쪽 지역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다. 창세기 24장에서 이 예표의 이 부분은 리브가가 이삭을 본 시점부터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될 때까지의 일련의 사건만 말하고 있다(창세기 24:64-67). 심판석 주변의 사건들, 다른 수많은 것들(예표에서 다루지 않은 것들)은 다른 예표들과 비교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 관한 모든 것들과 비교함으로써 이해해야 한다.

 

 

2) 한새사람

 

 

지난 시대의 끝 무렵,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중단하고, 이스라엘을 제쳐두고, 완전히 새로운 민족을 창조하셨다. 이 새로운 민족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다. 이 새로운 민족은 완전히 새로운 민족이다. 오히려, 이 새로운 민족은 믿는 유대인과 믿는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고린도후서 5:17). 그리고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새로운 창조물들은 하나의 새로운 사람이다(에베소서 2:11-15). 교회 시대에, 하나님은 이 새로운 사람과는 거래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람은 민족으로 언급되기도 하는데(마태복음 21:43; 베드로전서 2:9, 10) 성경이 설명하는 그대로다. 이 민족은 모든 다른 국가들과 완전히 분리된 민족이다. 이스라엘이나 이방 민족들과 분리된 완전히 새로운 민족이다(갈라디아서 3:26-29). 하나님은 오직 이 새로운 사람과 거래할 전체 시대를 설정해 두셨다.

 

이전의 측면에서, 구원받은 유대인과 구원받은 이방인 사이에 차이를 두는 것은 교회에서 절대 없다.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새로운 창조물이며, 이 새사람의 일부로서, 이 새사람을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할 수 없다(갈라디아서 3:26-29; 에베소서 2:11-15; 3:1-6).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경과 완전히 반대로, 두 그룹 모두(구원받은 유대인들과 구원받은 이방인들)에서 일부 개인들이 두 그룹 사이에 차이를 만들려고 한다. 예를 들어, ‘메시아니즘(메시아닉) 유대인이나 완성된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구원받은 유대인들의 모임이 있다. 둘 다 잘못된 명칭이다. 그들은 구원받은 이방인들과 구별하려고 한다. 그리고 구원받은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룹들이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의심하며,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따로 모여서 메시아니즘 집회라고 불리는 곳에서 만나도록 강요한다. 이 모든 무리 - 구원받은 유대인들에 의한 것이든 구원받은 이방인들에 의한 것이든 - 는 그리스도에 의해 허물어진 중간 벽을 세우려는 헛된 시도일 뿐이다(에베소서 2:14). 게다가, 교회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가 야곱의 옛 창조(이사야 43:1, 7; 고린도후서 5:17)로 돌아가서 이 옛 창조의 것들을 새로운 것으로 가져오려는 것(마태복음 9:16, 17)은 절대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교회 시대를 위해 따로 떼어 놓으며, 오늘날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새사람과 거래하시지 않는다. 이 새사람이 따로 떼어진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이 민족와 관련된 것들을 한새사람과 관련된 것들로 가져오는 것(법률, 형식, 의식 등)은 완전히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두 창조 사이에 세운 구별을 무너지게 하며 이미 존재하는 혼란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기 위해 세상에 계신다. 이 찾음은 한새사람을 구성하는 사람 중에서 수행하고 계신다. 그리고 성령이 이 일을 완료하면, 이 새사람은 옮겨질 것이며, 이 새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관련하여 이 새사람이 다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재개할 것이다. 7년간 미완성된 기간, 다니엘의 미완성된 70주와 인자의 날이 모두 완성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새 민족,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새사람인 교회와의 거래는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시대에 이스라엘과 거래하거나 거래를 재개하면, 교회와 거래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시대적인 인간과의 거래를 제시하는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 이스라엘은 따로 떼어졌고, 하나님이 오늘날 새 민족과 거래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늘날 이 새 민족과의 거래를 완료한 후, 그분은 이 민족을 옮기시고, 이스라엘과의 시대적인 거래를 완료할 것이다. 전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다. ‘그리스도 안에서모든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한새사람은 시대의 끝에 옮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두 민족(하나의 새로운 사람과 이스라엘) 모두와 관련된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민족(한새사람)과 완전히 거래할 것이며, 하늘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다른 민족(이스라엘)과 지상에서, 완전히 거래할 것이다. 한새사람은 하늘에 속한 부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땅에 속한 부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각 이 부름을 받게 된 장소에서 하나님이 각각 완전히 거래하는 것이 당연하다. 앞서 언급한 것은 구약 예표와 신약 실제에서 볼 수 있는 명확한 가르침이다. 성경적인 구별은 이스라엘과 교회 모두에서 볼 수 있다.

 

 

3) 주의 날에

 

 

만약 그리스도 안에서한새사람(전시대에 살았던 충성스러운 그리고 충성스럽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이 시대가 끝날 때 옮겨지지 않았다면(데살로니가전서 4:13-18), 바로 다음 구절에 기록된 것을 바울이 쓸 수 없었을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5:1-9). 이 구절들은 믿음직한 그리고 충성스럽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모두가 함께 사라져서 주의 날에 같은 시간과 장소에 있게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인자의 날은 6,000년 동안 이 땅에 살던 사람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사탄의 통제 아래로 일어난 일들이 허용되었을 때, 사람이 사탄의 왕국에서 자신의 방식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때다.

 

반면에, 주의 날은 7,000년 동안 그의 왕국에서 주님이 일을 처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주의 날은 인자의 날과 동시에 진행되지만(죄인인 인간이 사탄의 통치와 지배와 관련된 이 땅에서의 일을 포함하지 않음), 인자의 날이 끝나면 주의 날이 이 땅의 일을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어지는 1,000년 동안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 상속자들은 사탄과 그의 천사들 대신 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음 이후 주의 날을 보았습니다(요한복음 8:56). 이것은 이 땅에서 인자의 날이 존재했던 중간인 거의 4,000년 전이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죽음 이후 더는 이 땅에서 인자의 날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주의 날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 시대에 죽었거나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옮겨질 때(예언적인 사건), 정확히 같은 일이 일어난다. 휴거 될 때 예언적인 사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확실한 용어로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자의 날에서 옮겨져 주의 날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인자의 날은 이 땅 위에서 계속 이어진다.

 

이 땅에서 옮겨진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에 있게 될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5:1-4). 그러나 인자의 날은 이 땅에서 최소 7년 이상 지속할 것이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1 이후에는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과 충성스럽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모두가 함께 주의 날에서 볼 수 있다.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체험하고 충성스럽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갑작스러운 멸망’, ‘분노를 체험할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5:3, 9). 인자의 날이 이 땅에서 끝나는 시점인 환난기 끝, 다니엘의 칠십주의 끝에서만 주의 날이 인자의 날을 대체할 수 있다. 그때, 인자의 날은 이 땅에서 끝나고 주의 날이 이 땅에서 시작된다. 이 변화는 주님이 그분의 왕국에서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주의 날로 언급한 시간 범위로 가져오면서 일어난다.

무려 인자의 날이 끝난 후에야 주의 날이 이 땅 위에서 시작된다. 이는 휴거가 일어난 후에야 가능하다. 이 성경 구절은 휴거 이후에 인자의 날에서 옮겨진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날에서 볼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 날의 일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을 가져올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4). 이 구절은 휴거 이후에 준비된 그리스도인과 준비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데살로니가전서 4:13-18). 준비된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는 성령의 움직임 중에 이미 그들의 삶에서 성령의 일을 허용한 사람들로서 이제 그들의 혼의 구원을 깨닫게 된다. 준비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분노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는 성령의 움직임 중에 이미 그들의 삶에서 성령의 일을 허용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이제 그들의 혼의 상실을 깨닫게 된다(데살로니가전서 5:6-9).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숙한 신앙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려면 히브리서 12:5-8을 읽어야 한다. 성경은 주의 날이 이 땅 위에서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 명확하다. 주의 날은 그리스도가 이 땅 위로 돌아오는 시기에 일어나는 심판과 함께 이 땅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돌아오기 이전 휴거 기간 중 어느 시점에서든 시작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이 땅이 존재하는 한 주의 날은 계속된다. 메시아 시대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이 존재하게 되는 때는 하나님의 날이라고 불리며 하나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이 될 것이다(요엘 2:27-32; 3:9-16; 말라기 4:5, 6; 고린도전서 15:24-28; 데살로니가후서 2:2, 3; 베드로후서 3:10-13).

 

 

일곱 교회(요한계시록 1:1-4:11)

 

 

요한계시록 1-4장은 데살로니가전서 4-5장과 완전히 동일한 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여준다. 이 성경 구절은 요한이 인자의 시대에서 옮겨져 주의 날에 있게 되고, 그리스도의 임재로 일곱 교회가 나타나는 완전한 교회를 본 것을 다룬다(요한계시록 1:10-20).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제사장이 아닌 심판자를 묘사한다(요한계시록 1:13-16). 허리에 띠는 띠 대신 가슴에 띤 띠가 보인다(요한계시록 15:6, 7). 대제사장이 띠는 허리에는 띠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설명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 즉 ’, ‘구리’, ‘등은 대제사장으로서의 활동보다는 심판자의 활동을 나타낸다. 이때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서 그분의 대제사장적 사역을 완료했을 것이다. 교회 시대 동안 이 땅에서 사람들이 사는 동안 오직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수행되는 사역, 그리고 시대가 끝나면 성소에서 나와서, 휴거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 이후, 그리스도는 성소에서 이전에 그를 섬겼던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이 심판은 인자의 시대가 아닌 주의 날에 집행된다. 요한이 이 천상의 장면을 보기 위해서는 인자의 시대에서 옮겨져 주의 날에 있어야 했으며, 시간적으로 앞당겨져야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른 시대로 옮기는 것은 성경에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은 이전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간을 앞당겨 이동했다(에스겔 8:1-18; 37:1-28). 주의 날로 간 요한은 그가 본 것을 정확히 기록한다. 요한은 일곱 교회를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보았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있었으며, 심지어 라오디게아의 세속적이고 육신적이고 미온한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요한계시록 1:11-13, 20). ‘일곱은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다. 이 숫자는 그것이 보여지는 것의 완전함을 보여준다. ‘교회가 관찰되고 있으며,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는 1장에서 주의 날에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볼 수 있다. 1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 나타난다. 이 장면은 오직 하나의 것만을 묘사할 수 있다. 이 장면은 완전한 교회 즉 전체 그리스도인들이 한새사람으로서 완전하게 -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로 심판하려고 주의 날에 나타나는 것만을 묘사할 수 있다. 예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동시에 옮겨지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실제는 예표와 정확히 같은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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