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신부를 찾으라

아내와 함께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으셨다.

Hernhut 2023. 4. 19. 20:05

 

 

 

그리고 그 종이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을 이삭에게 고했다. 이에 이삭이 리브가를 자기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데려가, 그녀를 맞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이삭이 리브가를 사랑했으며, 자기 어머니가 죽은 후에, 이삭이 위로를 받았다. 그 뒤에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녀의 이름은 그두라였다.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다.” (창세기 24:66-25:2).

 

창세기 24장 끝에서 아브라함의 종은 그가 이삭을 위해 찾은 신부 리브가를 메소포타미아에서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이때 남쪽 지방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만남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황혼들판에서 일어났다(창세기 24:62-65). 이삭은 리브가의 집과 아버지의 집 사이에 있는 곳에서 리브가를 만났다. 그런 다음 이삭은 리브가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 어머니의 천막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막 안에서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에 의해 예표 된 다른 것들은 모형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장소와 시간은 들판해 질 녘이라는 단어의 사용으로 볼 수 있다. ‘들판은 성경에 나오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마태복음 13:38). 그리고 해 질 녘은 하루의 끝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해 질 녘"을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저녁이 다가오는 때가 될 것이다. 그날이 끝나가고 있었고, 원형의 생각은 경륜의 시대의 끝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 사이의 만남이 땅이나 아버지의 집에서가 아니라 공중에서일어날 것이지만(데살로니가전서 4:17),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집보다 이 세상(들판)과 더 밀접하게 연관될 것이다. 그리고 이 만남은 교회 시대가 끝난 후 저녁이 다가오는 시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심판대의 심판에 이어 아들은 신부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 어머니의 장막 안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 장막 안에서 그녀는 그분의 아내가 될 것이다.

 

 

사라의 장막

 

 

예표에서 이삭의 어머니는 이전에 죽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였다. 그리고 창세기 21-25장의 전체 예표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을 예표하는 분의 아내,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따라서 실제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내인 이스라엘로만 볼 수 있으며, 아버지께서는 오늘날 교회 시대 내내 그들을 따로 떼어 놓고 죽은 것으로 여기신다(호세아 5:13-6:2; 요나 1:17-2:10; 요한복음 11:3-7, 25, 43, 44). 그리스도인들이 땅에서 옮겨진 후에, 신부는 심판대의 심판을 통해 알려질 것이다. 그런 다음 아들은 신부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 이스라엘의 장막 안으로 데려갈 것이며, 그곳에서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창세기 24장에서 이삭이 리브가를 어머니의 장막으로 데려가는 것(창세기 24:67)에서 볼 수 있고, 룻기 3-4장에서 보아스가 성문에서 상속구속하는 동안 룻이 나오미와 함께 남아 있었고(룻기 3:18-4:10), 그리고 같은 시기에 구속 즉 신부가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는 결과를 초래할 상속을 통해 요한계시록의 실제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완성하신다(역대상 6:1-19:19). 같은 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동안에도 마태복음 13장에서 주신 비유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처음 네 가지 비유를 주시는 동안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마태복음 13:1, 36])밖에 계셨지만, 마지막 세 가지 비유를 주시기 전에 에 다시 들어가셨다. 이스라엘은 상속구속이 완료되기 전에 반드시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야 한다. 왜냐하면, 결혼은 오직 한 장소, 즉 이스라엘의 장막에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두 가지 중심 예표가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며,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실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막에서 그토록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예표와 비유로 세우셨고, 실제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도록 하셨는가?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영적인 축복이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이러한 본질의 이스라엘과 연결이 필요하다. 이 연합(그리스도와 그의 아내)은 왕이 그의 배우자 여왕과 함께 열방을 다스릴 때 온 인류에게 영적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다(창세기 22:17, 18; 시편 2:6-9; 요한계시록 2:26, 27).

 

이러한 방식에 따라 볼 수 있는 영적 축복은 성경 창세기 9장에서 처음 소개된다. 노아의 세 아들과 그들의 후손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으며, 셈은 하나님을 존재한다고 선언된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영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함, 야벳,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셈의 장막에 거해야 했을 것이다. , 셈에게로 가서 그의 집에서만 나오는 것을 취하라(창세기 9:24-27). 이것이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11:10-26)이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어 땅의 나라들이 축복을 받을 통로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창세기 12:1-3). 그는 하나님을 가진 혈통, 즉 영적인 축복이 있는 혈통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셈과 관련된 이전의 기본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기초는 창세기 9장에 세워졌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 창세기 24장에서 신부를 찾든 문제는 정확히 동일합니다. 요컨대, 영적 축복이 관련될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한 셈과 그의 혈통과의 연결, 즉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의 장막 또는 집과 연결이 돼야 한다. 따라서 결혼은 이스라엘의 장막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일어날 수 없으며 모든 인류에게 영적 축복을 가져다준다(아가서 1,4; 3:4).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유일한 민족이었다(시편 33:12; 72:18). 열방의 신들 즉 모든 이방 나라들은 우상을 믿는다. 직역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즉 열방의 신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다(96:5). 이 점에서 영적 축복이 존재하려면 하나님과 한 나라를 통해 와야 한다. 축복은 이스라엘을 통해 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영적 축복과 관련하여 인류를 대하겠다고 선언한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방식이다. 그렇지 않다면 영적인 축복이 일어날 수 없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와 신부의 결혼은 이스라엘의 장막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혼은 영적 축복과 하나님이 설계하신 연결을 가질 수 없다.

 

룻기 3장과 4장의 예표와 요한계시록 6-19장의 실제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결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기간과 그 직후에 이루어진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일곱 봉인되었던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실 때 상속을 구속하시는 과정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요한계시록 5:1-14). 그리고 예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과정을 통해 상속이 구속될 뿐만 아니라 신부도 어린 양의 아내가 될 것이다. 이것은 계시록 6-19장까지 읽는 동안 직면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가 19장의 끝에 이르렀을 때, 일곱 봉인 두루마리에 기록된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속이 구속될 것이며 신부는 이제 어린 양의 아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 같은 시기에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완료하실 것이다. 상속 구속하는 데 사용되는 심판 과정을 통해, 인자의 날이 끝난 직후에 지상 민족들의 군대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의 전쟁으로 모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 때,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다니엘서에 나타난 바벨론 왕국의 최종 형태로 존재하는 이방 세계 강국은 완전히 멸망될 것이다(다니엘 2:34, 35, 44, 45; 7:7-28; 8:9-27; 11:21-45). 요한계시록 19장 후반부에 바로 그 점을 볼 수 있다.

 

 

혼인 잔치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 결과 이스라엘의 장막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부와 결혼하는 결과를 가져옴은 어린 양의 결혼 축제로 상속 구속을 완성할 이방인 세계 권세의 멸망이 끝나기 전에, 하늘에서 계시 되고 결론적인 사건이 있다(요한계시록 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리자. 왜냐하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이르렀고, 어린양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깨끗하고 흰, 고운 아마포 옷을 차려입는 것이 그녀에게 허락되었다. 왜냐하면, 그 고운 아마포가 성도들의 의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한다.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만찬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복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참된 말씀들이다.’”

 

계시록 19:7-9의 일들은 곧 일어날 결혼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 구절들은 결혼 직전의 축제와 관련이 있다. 신부는 이전에 심판대의 심판들을 통해 계시 되었을 것이며(요한계시록 1:1-3:22), 이러한 축제는 그리스도께서 상속 구속을 완료하고 구속받은 영역을 장악하기 위해 재림하시기 직전에 일어난다(요한계시록 19:11-21). 이러한 결혼 축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다루어진다(마태복음 22:8-14; 25:1-13). 그러나 이 구절들에는 결혼 자체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다. 오히려 이 구절들은 결혼 이전의 축제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강조점은 이러한 축제에 있다.

 

마태복음 22, 25장과 요한계시록은 실제로 결혼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6-19장까지는 이전에 심판석에서 계시 된 신부와 그리스도의 결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역대상 1:1-3:24).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상속을 구속하신 실제 결혼 자체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고 다루어진다.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기술될 사건의 정확히 동일한 연대계에 따라, 결혼은 룻기에서 성경적 예표로 다뤄진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3장에 계시 된 신부가 어떻게 어린양의 아내가 되는지를 이해하려면 룻기 3, 4장으로 가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이전의 모든 성경의 관석이다. 그리고 개인은 요한계시록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할 수 없으며 이 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어떤 모습에 도달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곳에서 시작해야 하며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본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이러한 예표의 지식을 가진 개인이 요한계시록 6-19장에 이르렀을 때, 그는 비록 그것이 책의 이 부분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상속 즉, 이전에 계시 된 신부와 그리스도의 결혼으로 일어날 일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이해는 요한계시록이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서 도출될 것이다. 구약의 기본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 즉 요한계시록 6-19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상속을 구속하신 결과로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이 장들에서 그리스도의 신부와의 결혼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상속이 구속될 때 일어나는 결혼은 다른 성경 계시에서 이미 다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알 것이다. 그는 예표를 실제와 비교하고 모든 견제와 균형을 실행하고 이와 관련하여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문제를 다시 읽는 것이 불필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앞의 예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통치를 포함하여 그분이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에 관한 요한계시록에 제공된 간결한 정보다(요한계시록 19:11-20:6). 성경 전체가 이 시대를 향하여 움직이고 예상하지만, 오직 17개의 구절만이 마지막 성경의 이 부분에서 이 문제 전체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이후의 일에 대해 더는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모든 것은 이미 이전 성경에서 다루어졌다. 이제 이 결론에서 문제는 매우 간결하고, 간단하게 다룰 수 있다. 기록된 것 이외의 것은 불필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구약성경 예표에 대한 배경이 부족해서 사람의 성경 해석 체계는 일반적으로 마태복음 22:8-14의 결혼 잔치에 대한 성경의 지침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마태복음 25:1-13; 요한계시록 19:7-9). 그리고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인들은 종종 성경 해석에서 혼란을 일으키며, 심지어 이러한 결혼 축제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원한 진리를 읽으려고 시도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성경과 성경을 비교함으로써 건전한 해석은 결과적으로 바람에 던져 버린다.

 

사람의 성경 해석 체계로, 혼인 예복은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의로 선언되고, 결혼 예복을 소유함으로써 축제에 들어가는 것은 영원한 구원과 관련이 있으며, 결혼 예복이 없음으로써 축제에서 제외되는 것은 영원한 저주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생각과 추측이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결혼 축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실, 혼란을 조장하는 것 외에도, 그들은 이러한 가르침이 구절이 구절과 완전히 이질적인 것을 언급하도록 시도함으로써 실제로 진리를 없애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구원받은 자만이 이 구절들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두 다른 무리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 어린양의 아내를 구성하는 자들

2) 어린양의 아내가 되지 못한 자들

 

전자는 결혼 축제의 연회장에 참여하도록 초대된다. 그러나 후자는 초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후자의 무리는 이러한 축제가 일어날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2:8-14에서, 이 두 무리의 개인들은 결혼 잔치와 관련된 비유로 다루어진다. ‘손님 직역하면 기대는 자들(신부)’이 있고, 신부로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자들 곧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나타나는 사람은 연회장 밖의 어두운 곳에 던져질 것이다.

 

마태복음 25:1-13에서, 이 동일한 두 무리는 결혼 잔치와 관련된 또 다른 비유에서 지혜로운 처녀 다섯과 미련한 처녀 다섯으로서 다루어진다. 자신을 적절하게 준비한 사람들, 즉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결혼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자들, 즉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하였다. 그들은 축제로 이어지는 문밖의 장소에 남겨졌고 문은 닫혔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비유 즉 달란트의 비유는 열 처녀의 비유를 설명하고 부가적인 빛을 비추기 위해 주어졌다. 이 비유는 그대로를 의미하는 헬라어 호스퍼 가르Hosper gar로 시작된다. 이 연결 부사는 곧 뒤따를 비유가 앞의 비유와 같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비유는 신실하지 못한 종이 바깥 어둠 속으로 던져지는 것으로 끝난다(마태복음 25:30). 감람산에서 선포된 이 메시지에서 달란트의 비유가 사용된 명백한 방식은 성경 전체에서 모든 비유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비유라는 단어는 헬라어 파라볼레parabole의 영어식 형태다. 이것은 나란히 던지다를 의미하는 복합어다. 파라para, ‘나란히와 볼레bole, ‘던지다를 합성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사용되는 방식인 비유는 그 자체의 정의에 따라 이전 진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추가적인 빛을 제공하기 위해 이전 진리와 나란히 놓인 하나의 진리다. 감람산에서 선포된 메시지(마태복음 24:40-25:30)에 나오는 네 가지 연속적인 비유는 이 점에서 함께 볼 수 있다. 첫 번째 비유가 선포된다(마태복음 24:40-44). 그런 다음 이어지는 각 비유는 앞에 나오는 비유 또는 비유에 대한 추가 조명을 제공하고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제공되었다(마태복음 24:45-51; 25:1-13; 25:14-30).

따라서 달란트에 대한 설명적 비유에서 앞의 비유인 열 처녀의 비유에서 혼인 잔치의 문밖의 장소는 마태복음 22:8-14의 결혼 잔치 밖의 장소와 정확히 같다. 바깥의 어둠이나 연회장 밖의 어두운 안뜰이 있다. 또 앞의 비유(마태복음 24:45-51)에서, 그것은 따로 떼어져 있고 위선자들이 깨닫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는 맨 앞의 비유[(마태복음 24:40-44)에서, 그것은 함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비유들을 비교해 보면, 당면한 문제는 신부가 연회장에 들어가 결혼 잔치로 시작하여 결혼하고, 그분의 왕국에서 구속된 영역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그분과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결론인 19:7-9에서는 신부만 다룬다. 이러한 연회장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책의 이 시점에서 마태복음 22, 25장에서와같이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의 문제는 룻기에 있는 그대로 제시되어 있다. 룻기의 예표에서는 룻기만 이 책의 이 시점에서 다루어진다. 오르바는 그녀가 돌아섰을 때 1장의 첫 번째 부분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문제는 요한계시록의 실제에서도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재림

 

 

혼인 잔치가 끝나면 하늘이 열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백마를 타고 나오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의 위력 있는 천사들과 함께" 땅으로 돌아가셔서, 사탄과 그의 천사들을 전복시키는 일과 함께 사탄 아래 이방인 세계 강국을 전복시키는 일을 완수하실 것이다. 인자의 날이 끝나고 주의 날이 시작될 것이다(요엘 3:9-17; 데살로니가후서 1:7; 요한계시록 19:11-21). 그런 다음 요한계시록 5장에 있는 두루마리의 일곱 인으로 심판이 완료됨으로써 결혼이 이루어짐에 따라 그리스도와 그의 아내가 왕좌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이 있는데, 요한계시록 19:11-21에서 하늘이 열리는 시간 이전과 이후에 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소개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헬라어, 아포칼룹시스Apokalupsis, '계시', '공개', '나타나심')"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이 "구름과 함께" 오시는 그날에 절정에 달할 것이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니

(요한계시록 1:1-7)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계있는 책이며,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전반적인 주제를 사람이 일반적으로 이 문제를 보는 경향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사람은 보통 그리스도의 재림을 한 시점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스가랴 14:4; 요한계시록 1:7; 19:11-21). 그러나 성경은 이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루고 있다. 요한계시록 전체는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19:11-21는 단순히 문제의 정점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분의 재림은 하늘이 열리고 그분이 백마를 타고 나오시는 것으로 묘사되기 적어도 7년 전에 일어난 사건들로 시작된다. 이 책의 사건들은 교회 시대가 끝날 때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옮겨지는 것으로 시작하고, 심판대의 심판이 뒤따른다(요한계시록 1:1-4:11). 그런 다음 이 책은 그리스도의 상속구속(요한계시록 5:1-19:21), 하나님께서 인자의 날에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일을 마치시고(요한계시록 6:1-19:21), 이 시대의 끝 무렵에 결혼 잔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계속된다(요한계시록 19:1-11 ). 그래야만 하늘이 열리고 그리스도께서 재림 할 때 이방인 세계 권력의 전복과 멸망을 통해 상속구속을 완료하시는 정점에 도달한다 (요한계시록 19:12:21).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7:30, 31에서 환난 중에 일어난 사건(누가복음 17:31; 마태복음 24:15-22)은 환난 끝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으로 돌아오시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누가복음 17:30). 이것이 또한 부활과 심판이 "그의 나타나심과 그의 나라"(고린도전서 15,23; 디모데후서 4:1)는 비록 시간에 의해 분리되어 있지만 이 두 가지 단수적 의미, 즉 그분의 나타나심이나 그분의 왕국에서 다루어진다. "그분의 나타나심"은 요한계시록의 열아홉 장에 나오는 시간 전체를 포함하며, 20장까지 이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이스라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을 다루셨던 방식과 비슷한 방식으로 유대 민족을 다루시기 최소 7년 전에 다루어진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산 자와 함께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을 둘러싼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나타나심"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분이 지상으로 돌아오셔서 왕국으로 인도하기 직전이나 직후에 일어난 수많은 다른 사건들도 이 말씀에 포함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나타나심과 그의 왕국"이라는 두 가지 영역만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에서 시작하는 모든 것은 한 영역 또는 다른 영역에 맞아야 한다. 따라서 성경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재림은 단 하나뿐이다. 환난 전에 그분의 교회가 돌아오는 것(때로는 교회를 위한 "은밀한 귀환"이라고 잘못 언급됨)과 환난 후에 또 다른 귀환(그분이 세상에 공개적으로 가시적으로 나타나실 곳)은 없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성령께서 신부를 옮기시고 그리스도께서 공중에서 신부를 만나시는 것은 성경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재림과 관련된 사건이다.

 

보라, 그는 구름을 타고 오시나니...”

 

계시록이 시작되는 방식은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특히 휴거의 시기와 관련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잘못한 곳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을 보았고 그 문제를 환난의 끝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사건으로 보았다. 그런 다음 교회의 옮겨짐이 그분의 재림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사건임을 보았을 때, 그들은 교회가 환난을 겪고 그리스도께서 환난 끝에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옮겨지는 것을 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자체와 관련하여, 교회가 환난 전후에 옮겨지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성격의 시간 요소는 그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는데, 왜냐하면 어느 때이든 옮겨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둘러싼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할당하신 시간의 범위 내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성격의 특정 사건의 타이밍을 찾기 위해 다른 곳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 시대 말에 그리스도인들의 제거를 둘러싼 주제와 관련된 예표와 실제를 모두 살펴보면 종종 "휴거"라고 불리는 시기가 명확하게 확인될 수 있다. 예표(창세기 5-8, 18, 19, 24; 룻기 3:1-4:22)과 실제(요한계시록 1:1-19:21)에서 환난 전에 일어난 두 가지 일을 분명히 보여준다.

 

1)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옮겨짐

2) 심판석에서 심판이 일어나고 완료됨

 

더 나아가, 동일한 예표와 실제는 선택된 무리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시기에 옮겨질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통과하기 위해 남겨질 것이라는 말은 위험한 주장이다. 오로지 성경적 관점에서만,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의 일부 또는 전부를 겪을 것이라는 가르침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4장에서 상속을 구속하고 룻을 아내로 취하기 전에 3장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준비된 신부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나타났다. 그제서야 보아스는 상속을 되찾고 룻을 아내로 취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표와 정확히 동일한 일련의 일들이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상속을 구속하시고 신부를 아내로 취하시기 전에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준비된 신부가 그리스도의 타작마당인 그분의 심판대에 나타날 것이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가 상속을 구속하고 그 과정에서 신부를 아내로 삼을 것이다. 다니엘의 칠십 이레인 환난 동안과 그 직후에 일어날 것이다. 그런 다음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 모두가 이 시간에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분이 상속을 구속하시는 때(환난 이전) 이전에 심판대의 모든 기독교인이 그분의 임재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표와 정확히 같은 것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앞에 나와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환난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 교회 시대의 마지막 7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완료하시는 때이다. 심판대의 사건은 환난 이전에 일어난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심판석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로마서 14:10b).

 

일부 헬라어 사본과 영어 번역판에 로마서 14:10하나님의 심판대가 있다는 사실은 이 심판대의 자리를 식별하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한복음 5:22), 아들의 심판대를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부르든 하나님의 심판대라고 부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여전히 같은 심판대이며, 같은 분이 심판한다. 예표와 실제를 비교해 보면(룻기 3, 4; 요한계시록 1-19), 분명한 가르침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땅에서 옮겨져 환난 전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날 것이며, 상속이 구속되고 결혼이 일어나기 전에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이 있으며, 요한계시록 19:11-22에서 하늘이 열릴 때 정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세오경과 예언서에 규정된 것을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고(누가복음 24:25-27; 요한복음 5:45-47), 확립된 기초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면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 제시하신 기초를 무시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말씀을 이해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메시아시대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그가 부리는 천사들과 함께 이방인 세계 권세를 완전히 멸하시기 위해 재림하신 후,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수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요한계시록 1장에서 교회가 옮겨진 것부터 요한계시록 20장의 메시아 왕국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주요 범주,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왕국에 속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문제를 제시하는 방식이며, 사람도 그 문제를 보아야 하는 방식이다. 창세기 24장과 25장의 예표에서, 아들이 어머니의 장막 안에서 리브가와 결혼한 후,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취했다. 아브라함은 그두라와 결혼하여 여섯 아들을 낳았다(창세기 24:67-25:2). 그두라는 사라가 불임이었던 영역에서 매우 유익했다.

 

실제에서, 아들이 이스라엘의 장막 안에서 신부와 결혼할 때, 아버지는 이전에 이혼 증서를 쓴 상태였다(예레미야 3:8-14; 호세아 2:1-23). 둘 다 결혼 예식 그 자체와는 별개로 일어났다. 아들의 결혼과 같은 이 재혼은 상속 구속과 관련하여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회복된 이스라엘은 잎이 있으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로 상징되는 과거의 이스라엘과 달리 매우 풍성한 열매를 얻을 것이다(마태복음 21:18, 19). 물론 시온주의 운동 아래 남은 자들이 그 땅으로 회복되는 것은 물론 창세기 25:1, 2의 예표나 그 주제와 관련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말하는 회복이 아니다(신명기 30:1-3; 에스겔 20:34-37; 36:24-28; 37:1-28; 마태복음 24:30, 31). 오늘날의 회복은 불신앙 속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되는 것으로, 이 교회 시대에 그 나라가 회개하기 전에 일어났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복은 온 나라가 오늘날 교회 시대 이후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70주 예언이 성취된 후에 일어날 회개에 따라 믿음으로 돌아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경륜의 시대 내내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사하시는 동안 나라가 돌아올 수 없다. 민수기 35장의 도피성의 예표를 보면 살인자인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이 소유한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대제사장 사역을 마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남은 자들이 오늘날 그 땅으로 돌아오는 것에 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민수기 35장에 예표된 살인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오늘날 경륜의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직분을 행사하시는 동안 돌아오려고 시도하는 것은 예표에 따라 돌아온 민족의 일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죽음과 멸망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정확히 일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은 때가 되기 전에,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오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환난의 한가운데서, 유대 민족은 중동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나라를 구성하는 남은 자들은 그때에 뿌리째 뽑힐 것이며, 주변 이방 나라들로 탈출하지 못한 자들은 이방 세계 전역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릴 것이며, 전 세계 유대 민족은 사형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출애굽기 1:8-22; 다니엘 3:19, 20; 요엘 3:6-8; 요한계시록 12:6, 14). 그리고 예루살렘은 이 기간에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을 것이다(누가복음 21:20-24; 요한계시록 11:2). 하나님은 그 땅에 있는 동안 회개와 관련하여 유대 민족을 다루지 않으실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열방 가운데서 쫓아내셔서 이방인의 박해를 통해 그들의 땅에서 분리된 상태에서 회개를 이루셨으며, 열방 가운데서 이 점에서 그들을 다루겠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예표로 다루신 부분에 주목하라. 배에서 바다로 던져진 것처럼 이스라엘 땅을 흩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요나가 배에서 옮겨져 바다에 던져진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도록 그를 다루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민족 거래와 관련하여 정확히 동일한 것이 사실이어야 한다. 그들은 요나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만 거래될 수 있다. 예표에서 설정되었으며, 실제의 사건은 예표의 사건과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요나가 바다에 있을 때 회개하고 이틀 만에 바다에서 구출된 것처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호세아 5:13-6:2; 요나 1:17; 2:1-10). 사실, 하나님의 세 맏아들(그리스도, 이스라엘, 입양 후 교회)는 모두 사흘 만에 일으킴을 받아 그분 앞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초림 때 회개와 관련하여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셨다는 사실은 유대 민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땅에 있는 동안 회개와 관련하여 다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실 때 그 땅에 있던 사람들은 이방인(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늘날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의 통치 아래 있는 나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은 뿌리 뽑히고 이방 국가들 사이에서 다시 쫓겨나야 하며, 다시 한번 이방인의 통치 아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와 조건에서 회개와 관련하여 그들을 다루실 것이다.

 

앞의 관점에서, 인간의 시대 내내 중동 평화를 이루려는 인간의 헛된 시도는 완전히 실패한 방식으로 한 가지 방법으로 끝날 수 있으며, 어떤 변화도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 뿌리는 역사에서 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사람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더라도 그것을 다룰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현 상태를 초래하여 현존하는 중동 상황을 초래하신 분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오직 그 민족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현재 병을 가져오신 분만이 치유하실 수 있다(레위기 26:14-46; 신명기 28:15-68; 이사야 1:1-26). 다른 사람들은 시도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할 것이다. 찢긴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호세아 5:13-6:2). 평화는 오직 인자의 날이 끝날 때야 의의 해그 날개에 병 고침과 함께’(말라기 4:2) 떠오를 때만 올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재혼에서 볼 수 있는 일들인데, 그것은 아들이 신부를 아내로 취하여 이스라엘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일어날 수 없다.

 

또한,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둘러싼 아랍 국가들의 아버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이 재혼한 후에야 죽었다는 예표에 주목하라(말라기 4:1, 2, 17). 이 점과 관련하여, 중동의 평화는 다가오는 메시아 시대, 즉 창세기 16:12에 묘사된 사람이 그 장면에서 사라질 때까지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천년 왕국이 시작될 때 상태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아버지께서는 회복된 아내를 갖게 되실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 온 땅의 왕이 될 아들은 아내를 얻게 될 것이며, 태초에 사람이 창조된 이유와 완전히 일치하게 그리고 하나님이 태초에 함께 통치하는 남자와 여자에 대하여 세우신 것과 완전히 일치하게 통치하고 통치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이 헛되이 시행하려고 시도하는 중동 평화는 왕이 그의 배우자 여왕과 함께 1,000년 동안 땅을 통치하는 그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컨퍼런스 > 신부를 찾으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속, 혼인(상속구속)  (1) 2023.04.14
땅에서 하늘들로 출발  (0) 2023.04.13
신부를 찾았다.  (0) 2023.04.12
리브가의 반응  (0) 2023.04.11
한새사람으로 초대됨  (0) 2023.04.09